영혼의 세계

(方丈 大衆法語 1981년 음 10월 30일)

지난 수천 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과 시비가 되면서도 완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로 영혼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종교가는 영혼이 꼭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 어느 경론을 막론하고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생전에 지은 바 업(業)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윤회는 우리 불교의 핵심적인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윤회란 것은 확실히 성립되는 것인가? 근래 세계적인 대학자들은 윤회를 한다는 영혼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행동을 잘하게 하려고 교육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근래 과학이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과학도 자꾸 발달함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점차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 열릴 수 있는가?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내려야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 또 신앙생활하는 데에나 불교 포교를 하는 데에, 그리고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 근본적인 토대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세계적으로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이 높고 객관성을 띠고 있는 연구방법으로 전생기억(前生記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두서너 살 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들이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를 해보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생기억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터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애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난 후 일 년 반쯤 되는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우리 집에 가겠다.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네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스루무스’야. 아비스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 테야.”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말했습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50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리고는 아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의 일하는 인부들과 싸움이 일어나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구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 그 후 내가 당신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데,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쟁의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 못 하게 하면 웁니다.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습니다. 이 어린애가 가더니 제일 큰 조각으로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 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생에 살던 곳은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간혹 이 동네에 오는 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웬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뛰어나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하지? 내가 또 네 할례(割禮)도 해주지 않더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터키는 회교국으로서 회교 교리상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재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스루무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우는 아이를 달래려면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입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 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지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한 전생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웬 어린애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둥그렇게 되어 쳐다보았습니다. 어린애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애가 중년의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다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생 남편인 ‘아비스스루무스’인데 저 건너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

하면서 흡사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하는데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 검토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에서도 다수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 준 것이 있었는데 ‘아비스스루무스’가 죽어 버린 후 그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 돈 빌려 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느 날 돈 얼마를 빌려 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왜 그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 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습니다. 안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아비스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틀림없이 환하게 말하는데, 이것을 누가 어린애에게 말해 줄 것이며 또 어린애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이스마일’은 ‘아비스스루무스’의 재생이라는 데에 확정을 짓고 보고서를 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이스마일’의 예와 같은 전생기억의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 한두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몇 해 전 스리랑카에서의 일입니다. 태어난 지 37개월된 쌍둥이가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단이 아이를 전생에 살았다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근처의 주민들을 수백 명 모으고 그 가운데에 그 아이의 전생의 부모형제를 섞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더러 전생의 부모형제를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이 사람은 아버지, 이 사람은 어머니, 이 사람은 누나, 이 사람은 형님……” 하면서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전생기억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세 살 되는 어느 아이는 전생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다이빙선수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도 다이빙할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전에 많이 했는데요.”

이리하여 세 살 되는 어린애를 높은 다이빙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린애는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툴지 않게 서슴없이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보면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生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한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을 보여도 모두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하는데 나면서부터 다 아는 것입니다. 이 생이지지가 바로 전생기억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이 없어지지 않고 금생에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가보는 곳인데도 낯이 설지 않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생기억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우매하여 전생기억이 캄캄하지만 조금 희미한 사람도 있고 분명한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전생기억이 분명하여 증거가 될 만한 사람을 전문으로 조사 연구하는 학자와 단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가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 있는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입니다. 그는 세계 도처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른이 있어 연락해 주면 학자들을 보내어 갖가지로 조사 확인하여 그것이 확실한가를 알아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에 600여 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20여 명에 대한 사례를 뽑아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윤회를 암시하는 스무 가지 사례(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라는 책입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는 가장 확신이 있고 그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으로 세계 각국에서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수년이 지난 1975년까지는 1,300여 명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수십 명도 상당한 숫자인데 1,300명이라는 자료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생기억 이외의 차시환생(借屍還生)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고 내 몸뚱이는 아주 죽어 버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즉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1916년 2월 26일자 중국 신주일보(神州日報)에 보도된 사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崔天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32살이 되는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장사지낼 준비를 다 마친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기척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 보니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다.”

하며 그 부모, 부인, 자식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식구들을 하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집안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도 퍽 답답한 것 같았습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을 아주 잘 씁니다. 유식하다 이 말입니다. 본래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인데.

그 글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중국사람이 아니고 안남(인도지나)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글은 한자를 쓰지만 말은 다릅니다.

“나는 안남 어느 곳에 사는 유건중(劉建中)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어서 치료하기 위해 땀을 낸다고 어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어 씌워 땀을 내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 이렇게 와 있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어 버리고 안남사람의 혼만 산동으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입니다. 전생이란 것이 반드시 몸뚱이가 죽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만이 아니고 죽은 육신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데 영혼만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시환생이라고 합니다. 남의 육체를 빌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후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을 가르쳐서 중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전생에 살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로 정신감정을 해보고 치료도 하고 하였습니다만,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그가 말한 안남에 사람을 보내어 조회를 해보았습니다. 과연 유건중이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가 말한 전생의 일이 모두 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깨어났으니 안남 유건중의 혼이 최천선의 몸을 빌려 환생했다는 것이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참 희귀한 일이라고 하여 정부에서 이 사람에게 내내 연금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사자가 전생기억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입니다만, 또 심리학에서 전생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사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 수 있는 그 방법이 연구된 것인데, ‘연령역행(年齡力行)’이라는 것입니다. 최면을 걸어서 최면 상태에서 사람의 연령을 자꾸자꾸 후퇴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즉 스무 살 되는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 살로 만듭니다. 그러면 열 살 먹은 사람이 되어 그때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또 네 살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네 살 때의 노래를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살로 만들어 놓으면 울기만 합니다. 말도 못 하고. 이런 것을 연령역행(Age Regression)이라고 하는 것인데 심리학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는데 아무래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연령역행을 시켜서 그 원인을 조사해 봅니다. 그러면 10년이나 20년 전의 옛날에 그 원인 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간첩이 잡혔을 때에도 이용합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부인할 때 최면술을 사용하여 연령역행을 시킵니다. 그러면 이전에 간첩교육 받던 것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물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생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연령역행을 하여 한 살로 만들어 둡니다. 그러면 40∼50세 되는 사람도 손발을 바둥거리고 빽빽 울면서 어린애 몸짓만 할 뿐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묻느냐 하면,

“네가 태어나기 1년 전, 2년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해인사 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연령역행을 시켜 한 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태어나기 3년 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바뀌어져서 전라도 어느 곳의 누구라든지, 일본 어느 곳 사람이라든지,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학에서 전생회귀(前生回歸)라고 합니다. 전생으로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한 생뿐만이 아니고 이생, 삼생…… 여러 수십 생까지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 상태입니다. 의식 상태 안에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속에 무의식 상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그런 상태입니다.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잠재의식은 어지간히 연구하여 발표하였지만 무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영국의 캐논(Sir Alexander Cannon) 박사입니다. 그는 원래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가장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 등 5개국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전생 조사에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영혼도 있을 수 없고 윤회도 없다고 철두철미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자꾸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연령역행하여 열 살, 한 살, 출생 이전으로 역행시키면 전생, 삼생, 십생……, 저 로마시대까지로 역행되어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른 사실의 기록과 조사해 보면 모두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1,382명에 대한 전생 자료를 수집하여 {인간의 잠재력(The Power Withi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1952년).

이 캐논보고서에 의하면 병이 들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데 전생회귀를 통해서 조사를 해보면 그런 병들이 전생에서 넘어온 것으로, 그 전생의 발병원인에 의거해서 치료하니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으로 거기에 보면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큰 강 옆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상선의 상인들에게 죄를 지어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금생에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이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을 무서워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전생에 중국의 장군인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 보면 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캐논보고의 사례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임(Time)}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잡지에서 자신 있게 보도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 치료에 있어서도 전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의심을 갖는다면 불교를 안 믿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가? 내가 마음대로 원하기만 하면 김씨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보고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얘기하는 인과법칙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인과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전생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악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비교해 보면, 전생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지금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볼 것입니다.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는 인과(因果)를 인도말인 카르마(Karma:業)라고 하여 이제는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습니다. 인과문제에 대해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도 많이 나와 있는데, 그를 ‘기적인’이라고 부르는데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기적을 행사하느냐 하면,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주소 성명만 가르쳐 주면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병을 모두 진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서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하는데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려 3만 명 이상이나 치료를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봅니다. 그의 답을 듣고서 바로 뉴욕에 전화를 해보면 그의 말이 그대로 맞습니다.

케이시가 병을 진찰해 보면 그 원인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과는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병 치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에서는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前生透視)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한 전생과 금생과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간에도 그 사이가 무척 나쁩니다. 그 전생을 알아보니 서로가 원한이 맺힌 사이입니다.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아버지와 딸 관계이거나 혹은 어머니와 아들 관계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은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숙명통(宿命通:전생의 일을 훤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쟁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야망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 작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봐야 하고 남이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를 한다, 인과가 있다는 것이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라든지 케이시라든지 하는 과학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3천여 년 전에 모두 말씀하셨는데 현대과학이 이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불교 믿는 사람은 부처님 말씀 중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이해가 부족한 줄을 알고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반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며, 알고 또 바르게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심(信心)이 성지(聖地)다

어떤 것이 부처인고

금사탄 여울가의 마씨 부인이로다.

如何是佛

金沙灘頭馬郎婦

이것은 임제종의 3세인 풍혈스님의 법문입니다. 어떤 스님이 풍혈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금사탄 개울가의 마씨 부인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는 곳(낙처), 즉 근본 뜻은 각자가 공부를 하여서 확철히 깨쳐서 참으로 자성을 밝혀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할 뿐이고, 단지 ‘금사탄두마랑부’라는 말의 출처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섬서, 지금은 중국 섬서성에 ‘금사탄’이라는 유명한 강이 있습니다. 당나라 정원(貞元) 때,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천하일색의 여자가 이 강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돈 있는 사람, 벼슬 높은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청혼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내 몸은 하나인데 청혼하는 이가 여러 사람이니 내 조건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

그리고는 {법화경} 보문품을 외우는 사람에게 시집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튿날 보니 20명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스무 명이 다 외우고 달려왔습니다. 이번에는 {금강경}을 외워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보니 또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법화경}을 다 외워 오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좀 많은데도 그래도 이 처녀에게 장가들 욕심으로 죽자하고 외웠습니다. 마씨집 아들 즉 마랑(馬郞)이 사흘 만에 다 외우고 달려왔습니다.

“참 빨리 외우셨습니다. 한번 외워 보십시오.”

줄줄줄 다 외우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천하에 좋은 낭군을 찾아다니는 터인데 당신같이 좋은 낭군을 만났으니 이젠 한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시집가겠습니다.”

이렇게 결정되어 혼인날을 받고 성례(成禮)를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부가 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축하객들이 채 헤어지기도 전인데 신부가 아이구 배야, 아이구 머리야! 하더니 갑자기 데굴데굴 구르다가 덜컥 죽어 버렸습니다.

마랑은 이 처녀에게 장가가기 위해 밤잠도 안 자고 외우고 또 외웠는데 신부가 죽어 버리다니. 그런데 금방 죽은 여인의 시체가 썩어서 그 당장 진물이 줄줄 흐르는 것입니다. 천하일색, 그 아름답던 사람이 그 당장에 죽더니 금방 오물이 흘러내리니 참으로 흉합니다. 아무리 만승천자(萬乘天子)가 좋다 해도 죽어서 썩으면 그만이듯이, 아무리 미인이지만 죽어서 썩으니 그만입니다. 부랴부랴 관을 짜서 산에 묻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죽기 전의 그 처녀가 마씨집 아들의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자신이 박복하다고 한탄하며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때 웬 스님 한 분이 마씨집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일전에 이곳에서 처녀 한 사람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 묘소가 어디 있습니까?”

묘소를 안내하니 스님이 갖고 있던 석장으로 묘를 탁 치니 묘가 둘로 갈라지면서 그 속에는 누런 황금뼈가 소복하게 쌓여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죽은 사람인데 석장(錫杖)으로 추켜드니 금쇄골(金鎖骨)입니다. 뼈 마디마디가 고리가 되어서 머리부분을 드니 발 뒤끝까지 끌려 올라왔습니다. 그때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처녀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야. 이곳 섬서성 사람들이 하도 신심이 없어서 너희들을 제도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이 처녀 몸을 나투어 온 것이야. 이 금쇄줄을 봐!”

{법화경}을 사흘 만에 다 외운 영리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구나!”

“이렇게 관세음보살이 좋은 법문을 해주었으니 너희들은 불교를 부지런히 믿으라!”

이렇게 말하고 그 스님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금사탄두마랑부’, 금사탄 개울가의 마씨부인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서만이 아니고 불교를 좀 아는 분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관세음보살이 화현(化現)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관세음보살이 세인(世人)에게 나타난 사례는 아주 흔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보타락가산( 陀洛迦山)입니다.

‘보타’란 인도말로 ‘희다’는 뜻이고, ‘낙가’는 꽃이란 말입니다. ‘흰 꽃’이란 뜻입니다. 관음도량(觀音道場)은 백화도량(白華道場)입니다. 보타락가산에 조음동(潮音洞)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못 가보았지만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누구든지 정성껏 기도하면 수시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성지(聖地)와 명소가 많지만 돈이 많이 생기는 곳은 보타락가산입니다. 온 천하 신도들이 관세음보살 친견하려고 많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향을 꽂고 정성껏 기도를 하면 여러 수백 수천 명이 모여 있는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혹 법문도 하고 여러 동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신심이 솟아나서 신도들이 돈을 막 쏟아 놓고 갑니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보타락가산 절 한 곳에만도 대중스님이 4천여 명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이 자꾸 와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에는 돈을 쏟아 놓고 갑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되는 것은 사신공양(捨身供養)입니다. 관세음보살 친견에 너무 감격하여 “이 몸을 관세음보살께 바치겠다”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몸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신공양을 못하도록,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주변에는 이리저리 막아서 사람이 죽지 못하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그래도 흔히 사신공양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타락가산의 관세음 현신(現身)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금사탄두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금사탄두마랑부라는 이 이야기는 보통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고 선종의 가장 큰 종파인 임제종의 제3세 적손(嫡孫)인 풍혈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풍혈스님이 말씀하신 그 내용, 법문의 근본 뜻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확철히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으로, 그것은 공부해야 되는 것이며, 그 연유가 어찌 된 것인가를 나는 말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선가에서 유명하며 기적적인 법문이 있습니다.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유명한 {벽암록(碧巖錄)} 100칙(百則)에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수보살이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무착 문희(無着文喜)선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오대산에 갔다가 금강굴(金剛窟) 앞에서 웬 영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영감을 따라가니 아주 좋은 절이 있어서 그 절에 들어가 영감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영감이 물었습니다.

“남방 불법은 어떻게 행합니까?[南方佛法 如何住持]”

“말세 중생이 계행이나 지키고 중노릇합니다[末法比兵 小奉戒律].”

“절에는 몇 사람이나 모였는고?[多少衆]”

“3백 혹은 5백 명 모여 삽니다[或三百 或五百].”

무착스님도 한마디 묻고 싶었습니다.

“여기는 불법이 어떠합니까?[此間如何住持]”

“범인과 성인이 같이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살지[凡聖同居 龍蛇混雜].”

“그럼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多少衆]”

“앞으로 3, 3, 뒤로도 3, 3이지[前三三 後三三].”

‘용과 뱀이 섞여 살고 범인과 성인과 같이 산다’는 말은 보통으로 들으면 그저 그런 것 같지만 그 뜻이 깊은 곳에 있습니다. 겉말만 따라 가다가는 큰일납니다. 무착선사도 그 말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노인과 작별했습니다. 한참 나오다가 돌아보니 절은 무슨 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것에 대해 게송(偈頌)을 읊은 것이 있습니다.

시방세계 두루 성스러운 절

눈에 가득히 문수와 말을 나누나

당시는 무슨 뜻을 열었는지 모르고

머리를 돌리니 다만 푸른 산 바위 뿐이더라.

廓周沙界聖伽藍

滿目文殊接話談

言下不知開何印

廻頭只見翠山巖

그 후에 또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법문을 들은 것이 있습니다. 불교 선문에서 흔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잠깐 동안 고요히 앉으면

강가 모래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도다.

보배탑은 끝내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는도다.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境碎微塵

一念淨心成正覺

이 게송을 아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 출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착 문희선사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 문수보살이 ‘직접’ 문희스님에게 설한 법문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 뿐 아니고 문수보살같은 그런 대보살들도 32응신 만이 아니라 3백, 3천, 몇 백천억 화신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하여 대해탈부사의경계를 얻을 것 같으면 문수보살도 될 수 있고 관세음보살도 될 수 있고 보현보살도 될 수 있으며, 32응신이 아니고 백천 화신을 나타내어 자유자재하게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을 보면 가장 유명한 성지가 중국의 오대산인데, 그곳에 가서 실제로 친견한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나타나는가 하면, 노인으로 또는 동자(童子)가 되어 나타나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로 몸을 나투어 비유로써 중생을 교화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심이 있고 오대산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면 문수보살을 직접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대산에 가야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낙가산에 가야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내가 실제 죽는 것 아니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槃

而實不滅道

常住此說法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 항상 여기 계시면서 설법하시는 것입니다. ‘여기’란 시방세계(十方世界), 처처(處處)가 여기입니다. 꼭 영축산만 여기가 아닙니다. 보타산이 어느 곳이냐? 사람 사람의 신심이 보타산입니다. 철저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어디든지 나타납니다.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곳이 보타산입니다. 문수보살 나타나는 곳이 오대산입니다. 오대산이 따로 없고 보타산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마다 신심에 있습니다.

신심(信心)! 신심으로 공부도 기도도 하면, 누구든지 살아서 관음도 문수도 볼 수 있으며 산 부처님도 볼 수 있습니다. 신심으로 공부하고 기도할 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생불멸과 중도

불생불멸과 중도

일체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나타나는도다.

一切法不生 一切法不滅

若能如是解 諸佛常現前

이것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불교의 골수입니다. 결국 팔만대장경이 그렇게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축소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생불멸이 불교의 근본원리이고, 부처님은 뭘 깨쳤느냐 하면 불생불멸을 깨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팔만대장경이 다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 만물 전체가 생자필멸(生者必滅)입니다. 난 자는 반드시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생자는 필멸인데 어째서 모든 것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하셨는가? 그것은 빨간 거짓말이 아닌가? 당연히 그런 질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든지 났다고 하면 다 죽는 판입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은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이라고 하신 것인지, 이것을 분명히 제시해야 안 되느냐 말입니다. 그것도 당연합니다. 이것을 참으로 바로 알려면 도를 확철히 깨쳐서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멸하지도 않는 이 도리를 바로 알면 그때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불교에서는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무나니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니라.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법’이란 불생불멸의 법을 말합니다. 천삼라 지만상(天森羅 地萬象) 전체가 다 불생불멸의 위치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 이대로가 상주불멸입니다. 세간의 모습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고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우주 전체가 불멸입니다. 이것은 모든 만법의 참모습으로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또 화엄경에서는 그것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한없이 한없이 연기할 뿐 그 본모습은 모두 다 불생불멸이며 동시에 이 전체가 다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변만화한다 해도 상주불멸 그대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알면 불교를 바로 아는 동시에 모든 불교 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이것을 바로 모를 것 같으면 불교는 영영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모두 다 산중에 들어와서 눈감고 앉아 참선을 하든지 도(道)를 닦아 결국에는 깨쳐야지 안 깨치고는 모를 형편이니 이것도 또 문제 아니냐,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설사 도를 깨치기 전에는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알지 못하더라도 요새는 과학만능시대이니 이것을 과학적으로 좀 근사하게 풀이를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하고, 과학적으로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고로 여러 가지 철학도, 종교도 많지만 불생불멸에 대해서 불교와 같이 이토록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불교의 전용이요, 특권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 자꾸 발달되어서 요새는 불교의 불생불멸에 대한 특권을 과학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어째서 빼앗기게 되었는가?

과학 중에서도 가장 첨단과학인 원자물리학(原子物理學)에서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데 성공해 버린 것입니다. 말이 좀 어렵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론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아인쉬타인(A. Einstein)입니다. 아인쉬타인이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等價原理)라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이 자연계는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고전물리학에서는 에너지와 질량을 두 가지로 각각 분리해 놓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등가원리에서는 결국 에너지가, 곧 질량이고 질량이 곧 에너지이다. 서로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에너지는 에너지 보존법칙, 질량은 질량불변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현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요새는 에너지와 질량을 분리하지 않고 에너지 보존법칙 하나면 가지고 설명을 하며 또 하나 밖에 없습니다. 즉 질량이란 것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素粒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입니다. 유형인 질량과 무형인 에너지가 어떻게 서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상도 못해보았던 일입니다.

50여 년 전 아인쉬타인이 등가원리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가 별개가 아니고 같은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하였을 때 세계의 학자들은 모두 다 그를 몽상가니 미친 사람이니 하였습니다. 그런 이론, 즉 에너지와 질량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는가 하고.

그래도 아인쉬타인이라는 사람이 미친 사람이 아니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학자들이 수십년 동안 연구하고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성공의 첫 응용단계가 원자탄 수소탄입니다. 질량을 전환시키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하는데 핵을 분열시켜보면 거기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때 발생되는 에너지, 그것이 천하가 다 아는 원자탄인 것입니다. 이것은 핵이 분열하는 경우이고, 핵이 융합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수소를 융합시키면 헬륨이 되면서 거기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수소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그전에는 에너지와 질량을 완전히 분리하여 별개의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만 과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질량이 에너지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자탄이 되고 수소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실험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인 앤더슨(C. D. Anderso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에너지를 질량으로 또 질량을 에너지로 전환하는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광범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세그레(Emilio Segre)라는, 이탈리아의 학자로서 뭇솔리니에 쫓겨서 미국에 가서 산, 유명한 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방법으로 실험한 결과 여러 형태의 각종 에너지가 전체적으로 질량으로 전환되고, 또 각종 질량이 전체적으로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이것이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 아주 알기 쉽습니다. 물은 에너지에 비유하고 얼음은 질량에 비유합니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면 물이 없어졌습니까? 물이 얼어서 얼음으로 나타났을 뿐 물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얼음이 없어졌습니까? 얼음이 물로 나타났을 뿐 얼음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물이 얼음으로 나타났다 얼음이 물로 나타났다 할 뿐이고, 그 내용을 보면 얼음이 즉 물이고, 물이 즉 얼음입니다.

에너지 질량 관계도 이와 꼭 같습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나타나고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날 뿐, 질량과 에너지가 따로 없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상대성이론에서 제창되었지만 양자론(量子論)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물과 얼음이 서로서로 다르게 나타날 때에 물이 없어지고(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生)이 아닙니다. 물 그대로 전체가 얼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이 없어진 것 아니고(不滅), 얼음이 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不生), 모양만이 바뀌어서 물이 얼음으로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불생불멸(不生不滅) 그대로입니다.

이와 꼭 같습니다.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나타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전환의 전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가 서로 전환되어서 조금도 증감이 없습니다. 즉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불생불멸이니 의당 부증불감 아니겠습니까.

동양사상을 잘 아는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 질량 관계가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 그대로라고 아주 공공연히 말합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불교 용어를 잘 모르니까 이런 표현을 그대로는 못해도 그 내용에서는 꼭 같이 에너지 질량 관계가 보존(保存)된다고 합니다. 보존된다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법의 세계, 즉 법계(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주(住)해 있어서 없어지지 않는 세계, 상주법계(常住法界)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에너지 질량의 등가원리에서 보면 우주는 영원토록 이대로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상주법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불생불멸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는 어떻게 되는가, 자연계 즉 우주법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봐서 에너지와 질량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여서 아무리 전환을 하여도 증감이 없으며 불생불멸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주는 이대로가 불교에서 말하는 상주불멸이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인쉬타인의 등가원리가 없었으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거짓말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3000년 전에 진리를 끼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혜안(慧眼)으로 우주 자체를 환히 들여다 본 그런 어른입니다. 그래서 일체 만법 전체가 그대로 불생불멸이라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런 정신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3000여 년 동안을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연구와 실험을 거듭한 결과, 이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이 둘이 아니고, 질량이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질량인 동시에 서로 전환하면서 증감이 없으므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어버렸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원자물리학이 설사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런 것이지 부처님이 본시 거짓말 할 그런 어른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요새 그냥 불교원리를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서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내가 한 가지 예로써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의 원리를 상대성이론, 등가원리에서 입증하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것은 허황한 것이 아니고, 거짓말이 아니고 과학적으로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불교란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을 들어보자면 너무 높고, 너무 깊고, 너무 넓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는 거짓말 같고 허황하여 꼭 무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설명한 바와 같이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 이것이 상대성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 원자물리학에서 과학적으로 완전히 증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교원리가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이처럼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불교이론을 모두 증명해 준다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불교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고 또 현대물리학이 불교에 자꾸 접근해 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반야심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유형과 무형이 서로 통하겠습니까? 어떻게 허공이 바위가 되고 바위가 허공이 된다는 말인가 하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것도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이고, 허공이 바위입니다.

어떤 물체, 예를 들어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자꾸 나누어가 보면 분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분자는 또 원자들이 모여 생긴 것이고, 원자는 또 소립자들이 모여서 생긴 것입니다. 바위가 커다랗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분자-원자-입자-소립자, 결국 소립자 뭉치입니다. 그럼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충동해서 문들 입자가 없어졌다가 문득 나타났다가 합니다. 인공으로도 충돌현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입자의 세계에서 자연적으로 자꾸 자가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입자가 안 타날 때는 색(色)이고, 입자가 소멸할 때는 공(空)입니다. 이리하여 입자가 유형에서 무형으로, 무형에서 유형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말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희 ‘4차원 세계’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상대성이론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것을 수학적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 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오늘, 해인사에서…’ 할 때에 ‘오늘’이라는 시간과 ‘해인사’라는 공간 속에서 이렇게 법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과 시간은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인데, 그런 분리와 대립이 소멸하고 서로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兩邊)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없이 통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공(時空) 융합의 세계로서 민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든지 ‘불생불멸’이라든지 ‘무애법계’니 하는 이런 이론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녹야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무슨 말씀을 맨 처음에 하셨는가 하면 ‘내가 중도를 바로 깨쳤다’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보통 보면 선(善)과 악(惡)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서로 통합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아까 말한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중도법문이라는 것은 일체만물, 일체만법이 서로서로 융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전부 융화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질량과 에너지가 융화되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 는 중간이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때 에너지는 멸하고 질량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생이 즉 멸인 것입니다. 질량이 생겼다(生)는 것은 에너지가 멸했다(滅)는 것이고, 에너지가 멸했다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멸이 완전히 서로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본다면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다. 그런데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관념론인가? 관념론은커녕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완전히 입증되는 것이다. 즉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등가원리’가 그것을 분명히 입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한다면 이보다 더 과학적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중도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대립 중에서도 철학적으로 볼 것 같으면 유무(有無)가 제일 큰 대립입니다. ‘있다’ ‘없다’하는 것, 중도라고 하는 것은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다(非有非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는 식입니다(亦有亦無).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3차원의 상대적 유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통합하는 유무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無合故名爲中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有卽是無 無卽是有).

그런데 이것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저 멀리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의 구름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자물리학에서 실지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원리가 실험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고 만져볼 수 있는 그런 원리다, 이 말입니다.

이런 좋은 법(法)이지만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흔히 중도를 변증법과 같이 말하는데,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 즉 모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 없는 것이 즉 있는 것, 시(是)가 즉 비(非), 비가 즉 시가 되어 모든 시비, 모든 투쟁, 모든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모순과 대립을 떠날 것 같으면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絶對世界)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말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 세간(世間)이라는 것은 전부가 자꾸 났다가 없어지고, 났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이지만 그 실상(實相) 즉 참모습은 상주불멸,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의 원리는 어디서 꾸어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전체 이대로가 본래로 불생불멸입니다.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바로 깨치고 이대로만 알아서 나갈 것 같으면 천당도 극락도 필요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사바세계 그대로가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딴 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절대의 세계를 놔두고 ‘염불하여 극락간다’ ‘예수믿어 천당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있습니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경계선은 어디 있느냐 하면 눈을 뜨면 불생불멸 절대의 세계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생멸의 세계, 상대의 세계이어서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 이것입니다.

‘우리 다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