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스님─그림의 떡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구나

그림의 떡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구나!

-혜암스님-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성취가 없자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돌아다니다 깨친 분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향엄스님은 중국 스님으로서 박학다식하여

그의 글을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이어서 남을 업신여기고

자신의 지식을 겨루어 보려고 동서남북을 휩쓸고 다녔습니다.

그런 향엄스님이 위산스님이라는 도인을 찾아갔습니다.

위산스님은 어느 날 그 많이 알고 있다는 지식꾼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평생 배운 것이나 경전에서

얻어들은 도리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기 이전의 본래면목은 무엇이냐.”

그렇게 묻자 향엄은 꼼짝을 못했습니다.

몇 가지 대답을 해 보았으나 위산스님은 고개를 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습니다 .

“틀렸다.

아니다.”

향엄스님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위산스님에게 매달렸습니다.

“스님, 제발 이 도리를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위산스님은 냉정히 뿌리치고 말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도리를 말로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물건, 나의 소견이지 어찌 너의 물건이 되겠느냐.”

향엄스님은 물러나 여러 경전과 어록을 들추어보았으나

어디에서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의 떡으로는 허기를 채울 수 없구나.”

탄식을 한 그는 다시는 선수행 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공부를 포기하기 전에 그는 밤에 잠도 자기 않고 먹지도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잘되지 않았습니다.

나무를 해 오라고 시키 면 나무를 해 오고,

밥을 지으라고 하면 밥을 지었습니다.

똥을 푸라고 하면 똥을 푸고,

삼동절에 숯 동냥을 해 오라고 시키면 또 그렇게 했습니다.

일하면서 공부해 가지고 가서 물었습니다.

“이것입니까?”

“아니다.” 그러자 공부를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하고

도인스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던 중에

남양 땅에 이르러, 혜총 선사가 머물던 조그만 암자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곳에 머물렀습니다.

비질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돌멩이를 대밭에 버리다가

그것이 대나무에 부딪혀 ‘딱’ 하는 소리에

향엄스님은 활연대오를 했습니다.

실로 스승으로부터 요구받은

[본래면목]을 되찾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애를 썼으면 깨달았겠습니까.

때가 되었으므로 곡식이 익는 것처럼,

암탉이 스무 하루가 되어 병아리를 까는 것처럼

공부가 무르익어 마침내 깨달은 것입니다.

다 된 공부라도 조금 참지 못하면 허탕이 되어 버리고

공부는 영원히 남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처음과 끝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전쟁에 나가 십 리, 오십 리를 가다 돌아온 사람과

백 리쯤 가다 돌아온 사람이

서로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향엄스님은 깨친 뒤에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흘러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면서

멀리 있는 도인스님을 향해 절을 했습니다.

“큰 스님께서 대자대비하시니 그 은공은 부모보다 더하십니다.

그 때 제게 말로 ‘도는 이런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었다면,

어찌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도는 말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의심이 생명입니다.

의심이 불무더기와 같이 뭉치면 탁- 하고 터질 때가 옵니다.

모르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은 틀렸습니다.

몰라야 합니다.

공부가 안된다고 답답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히 몰라야 합니다.

공부를 할수록 더 깜깜하고 더 몰라야 합니다.

“공부를 해 보니 아무 것도 없더라.”

그런 말을 하지 말고 한 구멍만 파십시오.

쥐가 쌀자루를 뚫을 때 한 구멍을 뚫다가

주인이 와 도망을 하였다가

다음날 다시 와서 그 구멍만 뚫습니다.

그러니 쌀이 안 나오겠습니까?

공부도 그와 같습니다.

안된다고 답답하다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내면 공부를 못합니다.

알래야 알 수 없고, 재미도 없고,

모르는 자리에만 파고 들어가십시오.

부처님은 “힘이 없는 모기가 입부리로

철통(쇠로된 소가죽)을 뚫으려고 하는 것처럼

재미도 없고 될 것 같지도 안은 안 될 자리,

재미도 없는 자리로 파고 들어가면

몸뚱이까지 쏙 들어갈 때가 있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서운 힘,

법력이 있습니다.

마음이 모아지면 활로 바윗돌을 쏘아도

뚫고 지날 만큼 우리 마음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법이 있기 때문에 묘법이라고 합니다.

우리 마음은 하늘 땅도 없애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옛날, 지리산에 포수가 들어가기만 하면

호랑이 밥이 되어 나오질 못했을 적의 이야기입니다.

들어가는 포수는 있어도 나오는 포수는 볼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능수능란한 사냥꾼이 활을 짊어지고 사냥을 나갔는데,

하루 종일 활을 쏘다 보니 저녁 나절에 이르러

화살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짐승이 있어도 쏘지 못하고 아꼈는데 밤이 되자

너무 어두워 산을 내려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위 위에 올라가 망을 보고 있노라니

큰 집채만한 백호가 나타나더랍니다.

화살 한 방을 잘못 쏘 면 도리어 내가 죽는다’ 는 생각으로,

활시위를 당기고는 온 정성을 들이고

힘을 다하여 자신 있을 때에 탁 쏘니

호랑이가 한 방 에 떨어지더랍니다.

다음날 아침 날이 새어 가보니,

큰 바위덩이에 나무화살이 박혀 있더랍니다.

우리 마음이 한곳으로 뭉치면 그럴 수 있습니다.

난리가 났을 때에 열 사람이 들어도 못 들 부처님을

한 사람이 업고 법당 밖 으로 내놓은 일도 있습니다.

거짓말 같지만, 부처님이 불에 타버리지 않게

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무겁다, 못한다.

그런 생각이 들 시간도 없었으니

들지 못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부처님을 다시 법당 안으로 모시는데

여섯 명이 들어도 들리지 않아 열 명이

달려들어 그 부처님을 모셨더랍니다.

깨달아야 화두의 정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을 해도 그것은 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이 코 닦개,

똥닦개’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향엄은 깨닫자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하루는 법형이 되는 앙산이 물었습니다.

“그래 요즘 심경은 어떠하오?”

그러자 향엄스님이 대답했습니다.

“갑작스러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리고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지난해에 가난한 것은 가난한 것이 아니요.

올해에 가난한 것이 비로소 가난한 것이라.

가난하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번뇌망상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지난해에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었는데,

올 해에는 그 송곳조차 없어졌더라는 말입니다.

도는 이름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크게 깨쳤느니 하는 그런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도는 본디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치지 못합니다.

다만 범부를 대상으로 하려니까 깨쳤다,

닦았다 하는 표현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부증불감(不增不感) 이라고, 허공처럼

그대로 무량겁을 지내도 변화가 없는데,

무슨 닦고 말고 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부처는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무명심이 일어나서

번뇌망상이 되어 마음이 어두워진 것이지

우리 본 마음은 어둡고 깨끗한 것이 없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묻습니다.

“본디 깨끗한 마음이 어째서 어두워집니까?”

본디 한 물건이 없다고 했는데,

어찌 허공이 벌어지고, 땅이 벌어지고,

산과 물이 벌어지고, 사람이 차별이 많습니까?”

부처님이 오셔도 그것은 대답을 못합니다.

방망이만 때립니다.

나도 처음에 그런 생각이 났습니다.

‘한번 깨치면 다시는 매하지 않는다.

한번 깨치면 다시는 중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본디 부처인데

중생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찌 중생으로 떨어졌는가’하는 의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의심을 풀려고 선지식을 찾아가면

방망이로 맞기나 하지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 문입니다.

앙산이 말했습니다.

“여래선은 알았다고 할 수 있으나

조사선에 이르러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군.”

그러자 공부를 열심히 한 향엄은

다시 게송하나를 지어 바쳤습니다.

내게 하나의 작용이 있으니 눈을 남에게 깜빡여 보여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할 때에는 달리 삼일을 부리리라.

이를 들은 양산스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조사선도 알았군.”

도인은 속이지 못합니다.

말이 도는 아닌데 말 한자리만 하면

자기가 그 자리에 가 봤기 때문에 다 알아버립니다.

여자라도 도만 깨치면 아무리

큰 스님 백명이라도 때려잡습니다.

내가 비구니 스님들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말세에 비구니 스님 가운데 큰 도인이 나와 호통을 치고 다니면

비구들이 부끄러워 공부를 많이 할 것인데,.

비구 스님보다 비구니 스님들 사이에서

도인이 하나 나오면 우리 나라가 수지 맞을 것이니

빨리 도인이 되어 비구들을 제도하라고 했습니다.

향엄스님도 공부가 잘 안된다고 포기를 한 사람이 아닙니까.

일 주일 동안 용맹정진한다고 해서 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부처님이 무량겁을 두고 괴로운 행을 다 참고

이겨내 한이 없는 세상을 닦았다.”

말을 듣자 금방 깨치는 사람이라도,

과일이 익을 때가 되어 익은 것처럼

지난 말 고생을 했기 때문에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시절인연이라고 합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습니다.

안되는 것이 공부인 줄 알고 원숭이가

흉내를 내듯 ‘이 뭣고, 이 뭣고’ 하시오.

꽤 선근이 있는 보살의 아들이 지난 설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다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식구 모두가 신심도 깊고 선근이 있었는데 그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러니 절에 불공을 들이러 다니고, 참회하고

공부나 조금한다고 재앙이 없기 바라지 마시오.

우리는 업보 중생입니다.

지난날 업을 지어 이 세상, 이 시간에 받으러 온 것입니다.

오늘은 내일 받을 것을 만드는 시간입니다.

그러니 지난날에 지어 놓은 것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받아야 합니다.

정업은 면하지 못합니다.

부처님도 도인들도 지난날 지어 놓은 일을 다 받습니다.

그러니 나쁜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착한 일하는 것은 다음날 받는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지난날 지어 놓은 죄를

조금 감할 수 있고 작은 죄는 없어질 수 있습니다.

절에 다닌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아무 재앙이 없길 바라지 마시오.

닥치는 대로 받되 난관이 생길 때는

‘내가 전생에 복을 짓지 못했구나.

‘이렇게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올 때는 기뻐하지 말고,

‘언제 이런 착한 일을 했던가’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남이 나를 도와주더라도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 아니고

내가 착한 사람이고 내가 복이 있는 겁니다.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이나 똑같습니다.

집안 식구 가운데에서도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절대 원망하지 마시오.

죄가 더 커집니다.

까닭없이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