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남스님─보리심과 사홍서원

보리심과 사홍서원

-혜남스님-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봄비가 기름과 같이 값진 것이지만 길가는 나그네는 그 질퍽거리는 것을 싫어하고 가을달이 세상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도적질하는 사람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한 것처럼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지금이 곡식을 파종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니 지금 내리는 비는 정말 값지고 고마운 비일 것이다.

그러나 길가는 나그네는 ‘왜 하필 오늘 비가 내리느냐’고 투덜댈 것이다.

그래서 “칠년 대한(大旱) 큰 가뭄에도 하루만 더 참아 달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어떠한 상태도 모든 사람에게 다 만족을 주기도 힘들고 또 같은 상황도 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다르게도 보인다.

그렇다면 대중을 위해서 도움이 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는 일정을 바꿀 수도 있고 일의 내용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불자가 지녀야할 마음가짐 심지어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에서는 “처음 발심한 사람은 오계와 십계 등을 받아서 잘 가지고 범하고 열고 막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오계와 십계는 불자로서 혹은 사미 사미니로서 반드시 받아 지녀야할 것이지만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여 계를 한번 파함으로 인하여 더 많은 생명을 구제할 수 있거나 환난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그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로서 절대로 버리지 않고 꼭 지녀야할 마음가짐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보리심과 사홍서원이다.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줄인 말로 위없이 올바른 법을 깨달으려는 마음을 말한다.

대승보살의 특징은 보리심을 일으키는 발심에 있다.

보리심은 마치 종자와 같아서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을 출생시키고 보리심은 마치 좋은 밭과 같아서 일체의 청정한 법을 키워내고 보리심은 대지(大地)와 같아서 일체의 세간을 호지하고 보리심은 대지(大池)와 같아서 일체 번뇌의 때를 깨끗하게 씻을 수 있고 보리심은 바람과 같아서 일체 세간에 장애를 없앨 수 있다고 하였으며 보살계를 받는 것도 이 보리심을 일으켜 끊어짐이 없이 이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이 보리심의 삼대요소는 중생을 연민히 여기는 대자비심과 불도를 이루겠다는 큰 원력과 그것을 이룩하기 위한 큰 지혜를 갖추어야한다.

그럼으로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마땅히 중생을 다 건지겠다.

번뇌를 다 끊겠다.

법문을 다 배우겠다.

불도를 다 이루겠다는 네 가지 서원을 반드시 세워야 하는 것이다.

보살계로 보리심 잇자 영명연수(904~975)선사는 (보살계를 받는 길(受菩薩戒法序))이라는 책에서 “보살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려는 마음 즉 보리심을 일으키기 위한 까닭으로 계를 받았기 때문에 비록 잠깐 범하였더라도 만약 보리심과 사홍서원만 끊어지지 아니하면 범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영원히 보리심을 버리고 사홍서원을 어기면 곧 계를 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문은 보리심을 발하지 못하고 계를 받았기 때문에 다만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기만 구함으로 사계(事戒)를 범하면 계를 지니는 마음이 곧 끊어져버리니 생멸의 쪽에서 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리심에 바탕을 둔 보살계는 보리심만 간단없이 이어진다면 영원하다고 하였다.

혜남스님─밤낮으로 부처 안고 있는데

영축총림 율주 혜남 스님

밤낮으로 부처 안고 있는데 어디서 부처를 찾으려 하나

한 성품이 일체 성품에 통해

내 안에 부처있음 깨우쳐전도된 생각 바로 잡음이 우란분절의 참 다운 의미

▲혜남 스님

우란분절은 많은 불자님들이 아시다시피 목련존자가 어머니를 제도한 날을 기념하는 날인데 ‘우란분’이라는 말은 인도식 표현으로, 번역하면 거꾸로 매달린다는 뜻입니다.

금생에 나쁜 일을 하면 다음 생에는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거꾸로 매달리는 것은 생각을 거꾸로 해서 그렇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고 했습니다.

거꾸로 된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라, 그렇게 하고 나면 구경열반(究竟涅槃), 근심 걱정 고통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평화로운 세계에는 평화로운 마음이 들어갑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화평하면 자연히 편안한 말이 나오고 그렇게 되면 생활이 진실을 말하고 남을 화합시키는 말을 합니다.

생명을 해치지 않는 자비로운 행동을 하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내 것을 베풀며 살고 이성 관계도 욕정에 못 이겨서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도된 생각을 여의려면 탐, 진, 치 삼독이 없어야 됩니다.

‘화엄경’에서는 십선계(十善戒)를 설하고 있는데 탐, 진, 치를 삿된 소견으로 보고 이 사견의 죄가 가장 크다고 했습니다.

소견이 삿되면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 마음자리에서는 육도(六道)가 공(空)하다고 했습니다.

지옥, 아귀, 천상 모두 마음의 작용이지 실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생에게 업이 있는 동안에는 엄연히 현실로서 우리 눈에 보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악한 마음, 표독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지옥을 만듭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었든 나 혼자 배불리고 내 것을 다 챙기는 것이 아귀도입니다.

그 다음, 지혜가 없이 미련하면 축생도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 마다 힘으로 눌리고 힘으로 결판을 보려고 하면 그것이 아수라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착한 이가 오계를 받아서 잘 지키면 사람 몸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십선도를 잘 지키면 천상에 태어나고, 또 십선도를 잘 닦으면서 사성제 법문을 듣고 잘 수행하면 아라한이 되고, 십선도를 잘 지키면서 십이연기를 잘 관찰하면 연각(緣覺)이 되고, 십선도를 잘 지키면서 육바라밀을 잘 수행하면 보살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십선도를 지키면서 사무량심으로 사섭법을 실천하고 십팔 불공법을 닦으면 부처님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십선도이지만 십선도를 닦는 마음가짐에 따라서 성문도 될 수 있고 연각이 될 수도 있고 보살이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자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생각이 사라지면 공적한 대원경지에 들어가서 바로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증도가’의 한 구절이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설산에 가면 잡초가 생기지 못합니다.

거기에 향기가 아주 좋은 비니라는 풀이 있습니다.

맛도 좋습니다.

그런데 설산에 있는 흰 소가 이 비니를 먹고 자랍니다.

그 소에게서 나오는 우유를 정제하면 제호(禮職) 맛이 된다고 했습니다.

일체 쓸데없는 근심, 걱정, 번뇌, 망상이 없어지면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죄업을 지을 일이 없습니다.

자연히 심선도만 실천하면서 오직 나도 부처님이 되겠다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을 나도 생각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나도 말하고, 부처님께서 행동하시는 것을 나도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어를 배워도 무조건 따라 해야 실력이 늡니다.

일단 암기를 해야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자, 설산의 풀을 먹고 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체 중생에는 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백 가지, 천 가지 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모두 바다가 되듯이 현실적으로는 사람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등 별별 차별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연에 따라 나타난 허상일 뿐이고 똑같이 소중한 부처의 성품을 소유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불성이 무엇입니까.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잠 오면 잠 잘 줄 아는 것,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불성입니다.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불성의 작용입니다.

한 성품이 원만해서 일체의 성품에 다 통합니다.

이것으로 선도 하고 악도 하는 것입니다.

한 법이 일체의 법을 다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그 도리를 비유한 표현이 하나의 달이 하늘에 나타나면 일체의 물에 다 나타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물이 있는 곳에는 달그림자가 비춥니다.

그런데 만약 탁한 물이 있으면 달그림자가 비치치 않습니다.

달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물이 탁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불성이 모든 중생에게 다 있습니다.

성서에도 그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속에 있다.

너희가 내 속에 있다.”

이 역시 같은 말입니다.

도교에서는 ‘도성’이라는 표현으로 “도가 있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불성이니 도성이니 하는 것은 표현의 차이일 뿐 모두 한 곳으로 돌아갑니다.

“하나의 달이 나타나면 일체의 물에 비치니, 일체의 물에 있는 달이 한 달로 거두어 질 것”이라는 말이 그와 같습니다.

중생의 본성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라고 해서 많은 것도 아니고 중생이라고 해서 적은 것이 아니라 모두 똑같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훗날 큰스님들께서 말씀 하시기를, 우리는 아침마다 밤마다 부처님과 함께한다고 했습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부처를 안고 일어난다, 안거나 눕거나 걸어 다니거나 항시 함께 한다.

마치 몸이 가면 그림자가 따라 붙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범망경’에도 이런 말이 나옵니다.

노사나 부처님이 연꽃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 주위에는 천 송이 연꽃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천 송이 연꽃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분씩 계십니다.

그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마다 백 억 세계를 거느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천백억 석가모니불 화신의 본신이 노사나 부처님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분신입니다.

그것을 굳게 믿고 부처답게 행동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심하고 겸양하고 남을 존경하지만 그 성품에 있어서는 나도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란분재를 제대로 맞이하는 방법은 생각을 바꿔서 ‘내가 바로 부처님의 나타남’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경에 말씀하시길, 부처님 법신이 지옥, 아귀, 축생, 천상, 인간 오도의 순환이고 그것을 이름 하여 중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중생 속에 부처가 있고 부처 속에 중생이 있다, 모든 부처님 몸 속에 중생이 새록새록 성불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 도리를 깨달으면 내가 부처고 부처가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다 마음이 착하고 효성심이 있습니다.

해마다 우란분절을 맞아 조상을 위한 천도재를 지내는 것도 부모님에 대한 효성심이 표현된 것입니다.

아까 우란분이라는 것은 거꾸로 매달리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구제하는 참다운 방법은 전도된 생각을 바른 생각으로 고치는 것입니다.

그 바른 생각은 우리는 모두 똑같은 불성의 소유자임을 믿고 내가 바로 부처의 나타남이고 우리 부모, 형제, 생명 있는 모두가 부처의 나타남이라는 점을 믿는 것, 그래서 서로 존경하고 칭찬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잠 섬기는 것 역시 참다운 불성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이 법문은 7월31일 부산 홍법사(주지 심산 스님)에서 봉행된 불기 2557년 백중 49일 기도 4재 법회에서 혜남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