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스님─우리 마음속 `긍정의 주파수`

우리 마음속 ‘긍정의 주파수’

-현진스님-

해인사 법보전의 양쪽 기둥에는 이런 글귀가 걸려 있다.

“깨달음의 장소가 어디일까? 현재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다!” 우리 속담에도 ‘애 업고 삼년 찾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 가르침은 깨달음의 자리가 멀리 있거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법문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먼 곳에서 따로 구하려 한다면 평생 공부해도 진척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들이 마주하는 현재의 모든 일이 실존을 확인하는 극적인 상황이며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깨달음의 현장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고통-슬픔은 삶 점검하는 시험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본질은, 일상의 상황이나 조건을 주체적으로 바꾸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참다운 깨달음의 장소는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행복의 영역 같은 것이다.

우리의 인생 또한 주어진 현재의 상황들을 인정하고 극복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 속에서 깨달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고난과 위기가 많을수록 건강하고 생동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본다.

생활 속에서 만나는 슬픔과 고통은 현재의 삶을 점검할 수 있는 또 다른 시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역경과 고난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더 중요할 것 같다.

우리의 의식구조에는 긍정적인 주파수와 부정적인 주파수가 있다고 한다.

긍정적인 주파수가 강한 사람일수록 삶의 스트레스가 적으며, 또한 인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두운 생각보다는 밝은 생각을 많이 하라는 뜻과 통한다.

하늘에 구름에 모이면 비가 내리듯이, 살아가면서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을 키우면 힘들고 우울한 일이 그림자처럼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자신에게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밝고 적극적인 사고로 이끌어가는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을 유지하면 어떤 일이 잠시 기분을 망치거나 마음을 상하게 했더라도 금세 평상심으로 돌아올 수 있다.

괴로움은 그 상황을 인정하기까지의 갈등이며 그 일에 대한 집착을 털어내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므로 마음의 주파수를 바꾸면 그 자리에서 마음의 상태가 반전될 수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무슨 소리든 만 번만 외우면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한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만 번을 외우면 우리 인생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날마다 욕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이끌어내는데 그 주문을 다 소비해 버린다.

미워하거나 원망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일로 하루를 보내면서 남의 탓을 1만 번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긍정적 마음 키우는 훈련 필요 따져보면, 세상살이는 주어진 고통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되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부정적인 마음이나 욕심을 가지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또한 긍정적인 주파수는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진 상태에서 더 선명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의 마음 속 긍정의 주파수는 얼마나 될까? [불교신문]

현진스님─번뇌를 껴안아라

번뇌를 껴안아라

-현진스님-

현실의 고난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닭은 추우면 나무 위로 올라가고, 물오리는 물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피한다.

지금의 상황보다 더 깊이 몰입해서 고난을 전환한다는 것.

때로는 번뇌를 피하지 말고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물코 하나를 당기면 그물망은 따라오는 법.

삶의 원리를 크게 통찰하면 세세한 번뇌는 우수수 떨어질 것이다.

우리가 어리석은 것은 번뇌를 다스릴 줄 몰라서가 아니라 번뇌의 원인을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리석음의 근원을 정확히 알고 그 상황을 반전시키는 그것이 지혜이다.

그래서 삶의 지혜는 번뇌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가르침인지 모른다.

한자로 ‘탐낼 탐貪’ 자는 ‘조개 패貝’ 위에 ‘이제 금今’ 자가 있고, ‘가난할 빈貧’ 자는 ‘조개 패貝’ 위에 ‘나눌 분分’ 자가 있다.

이는 탐욕이 화폐를 계속 쥐고 있는 것이라면 청빈은 그것을 나눌 때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재물을 쓰지 않고 감추는 것은 스스로 소유의 골방에 갇혀 있는 꼴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빠져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지금의 일이 화를 불러올지 복을 불러올지를 알아야 한다.

당장의 이익에만 눈 멀면, 등 뒤에 숨어 있는 불행을 보지 못한다.

화는 눈덩이다.

자꾸 굴리면 커지지만 그냥 두면 작아져서 없어진다.

눈덩이가 녹고 나면 무슨 실체가 있던가.

화 역시 감정의 거품인 것이다.

따라서 화내는 자신을 알아차리면 화의 급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네들도 혀를 언제나 부드럽게 간직하게.

딱딱한 혀를 가진 사람은 남을 화나게 하거나 불화를 가져오는 법이니까.” “용서를 구할 때 받아 주지 않는 것도 허물이다.

원한을 품어 오래 두지 말고 분노의 땅에도 또한 머물지 말라” 이제 결론이다.

화를 냈다면 그 화를 알아차리고, 화를 참았다면 그 화를 지켜보아라.

그럼 둘 다 병이 되지 않고 용해된다.

이 말은 화낼까, 참을까, 이 둘을 가지고 고민하지 말라는 뜻이다.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화를 내는 것, 적당하게 화를 내는 것, 적절한 시기에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목적을 위해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