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님은 어디 계실까? -진각스님- 관세음보살님은 일체 모든 중생이 지극히 나를 부르고 나를 원한다면 언제 어떤 모습으로든 나투신다고 하셨습니다. 기업가가 나를 부르면 기업가의 몸으로 나툴 것이요, 상업가가 나를 원한다면 상업가의 몸으로 나툴 것이요, 농사꾼이 나를 부르면 농사꾼의 몸으로 나툴 것이요, 어머니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면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툴 것이요, 이렇듯 일체 중생의 모습으로 나툰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각스님─관세음보살님은 어디 계실까 계속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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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각스님─관상
관상 /
-진각스님-
늘…..
자신을 한탄하고 원망하고 또는 주위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면 그 마음은 바로 자신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찬 얼굴로 나타 나느니라.
그 수심 가득한 얼굴은 마침내 자신의 관상을 변하게 한다.
반대로……
늘….
자신의 환경을 감사하고 남을 미소로 대하고 악의를 버리고 자신은 항상 베푸는 습관을 하면 그 마음이 바로 얼굴에는 미소 가득한 모습으로 변하여 나타 나게 된다.
그 미소 머금은 얼굴의 관상으로 어찌 무엇인들 않되리.
상이 좋다는 것은 태어날때 부터 갖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나감으로 스스로 변한다.
그 모든 변화는 바로……..
그대의 마음 속에서 부터 나오는 것 이다.
이제 모든 사람을 즐거운 마음으로 대하라.
이제 모든 사람에게 자비로운 미소로 대하라.
이제 자신에게도 즐거운 미소를 주어라.
그리하여..
지금의 울상으로 된 그대의 관상 부터 바꾸라.
그러면 반드시 복과 덕이 따를 것 이다.
진각스님─ 짐승들도 기분나쁜말을 알아듣는다
◈ 짐승들도 기분나쁜말을 알아듣는다◈
진각스님
법문
함부로 말할 때는 강해 보이지만 험한 말을 들으면 강하던 사람도 의외로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본생경》에는 남에게 나쁜 말을 하지 말고 즐겁고 듣기 좋은 말을 하라는 교훈을 위해 부처님이 전하는 전생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이 제타바나에 계셨을 때였다.
수행이 부족한 한 비구가 함부로 남을 매도하는가 하면 욕설도 서슴지 않았다.
어진 비구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사뢰었고 부처님은 대중들에게 그것이 사실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는 그 비구를 호되게 꾸짖었다.
“잔혹한 말이란 동물들조차도 꺼리는 말이다.
나의 전생 수행시절에도 한 동물이 자기에게 험한 말을 퍼붓는 주인에게 천금이나 손실을 입힌 일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전생이야기를 설했다.
옛날 석가보살이 수행할 시절에 어느 장자 집의 송아지로 태어났다.
주인은 그 송아지를 친자식처럼 잘 먹여 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 송아지는 자란 다음에 생각했다.
‘이 장자는 고생하며 나를 길러 주었다.
이 세상에서 나처럼 힘이센 소는 없다.
내 힘을 보여 주어 이 장자의 흔혜를 갚아야 하리라.’ 어느 날, 소가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이시여, 돈 많고 욕심 많은 고을 유지에게 가서 ‘내 소는 백대의 수레를 동시에 끌 수 있다.’고 말하고 천금의 내기를 거십시오.” 장자는 돈 많은 이에게 가서 자신이 가진 소는 100대의 수레를 동시에 끌 수 있다고 자랑했다.
돈 많은 이는 장자가 허풍을 떤다고 생각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장자가 계속 우기자 돈 많은 이는 내기를 하자고 했다.
장자의 소가 수레 백 대를 끌면 돈 많은 이가 장자에게 천금을 주어야 하고 끌지 못하면 장자가 돈 많은 이에게 천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장자는 백 대의 수레를 일렬고 세워서 서로 연결시킨 후에 수레마다 돌을 가뜩 실었다.
그리고 맨 앞의 수레에 석가보살인 소를 매었다.
그리고 장자는 보살인 소를 채찍으로 두들기며 소리를 질렸다.
“가자, 이 허풍쟁이야, 끌다가 죽을지라도 너의 허풍에 대한 책임을 져.” 석가보살인 소는 ‘이사람은 허풍도 떨지 않은 나를 허풍쟁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생각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날의 시합에서 장자는 졌고 천금을 돈 많은 이에게 주어야 했다.
천금을 날려 버린 장자는 억울함과 속상함을 가누지 못해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소는 장자 주인에게 다가가서 어찌하여 누워 있느냐고 물었다.
장자는 천금을 잃은 것이 속상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가 장자에게 말했다.
“주인이시여, 내가 이 집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무슨 물건이든 하나라도 부순 적이 있습니까? 혹은 무엇이든 마구 짓밟고 다닌 일이 있습니까? 아니면 함부로 아무 곳에다가 오줌이나 똥을 눈 적이 있습니까?” 장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답했다.
소는 장자에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허풍쟁이라고 불렀습니까? 그것은 주인의 잘못입니다.
이제 2천금의 내기를 거십시오, 그러나 말을 조심하십시오.
함부로 허풍쟁이라고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장자는 소가 말하는 대로 돈 많은 이에게 가서 이번에는 2천 금을 걸었다.
이번에는 소를 쓰다듬으며 공손하게 말했다.
“가자, 슬기로운 자야.
끌어라, 현명한 자야,” 석가보살인 소는 백 대의 수레를 힘도 안 들이고 끌었고 장자는 2천금을 받아서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장자는 석가보살인 소로 인해 엄청난 재산을 손에 넣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부처님은 남에게 즐거운 말을 하고 불쾌한 말을 하지 말라고 다시 한 번 당부했다.
그리고는 “그때의 장자는 지금의 아난이고 그때의 소는 바로 지금의 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전생과 금생을 관련이었다.
불쾌한 말을 해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이 소의 이야기를 설한다.
소도 허풍쟁이라고 말하자 반발심이 생겨서 장자에게 천금을 손해보게 만드는데 하물며 사람이라면 더 손해보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은 참 약한 존재이다.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할 때는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 자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험한 말을 들으면 그렇게 강하던 사람도 의외로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아무리 강한 사람도 상대가 악한 말을 하게 되면 그방 이성을 잃고 화를 내고만다.
아니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 일수록 더욱 성을 잘 낸다.
그것은 분명 겉 모습만 강한 것에 불과하다.
진정 강한 사람이란 갖은 모욕과 험담이나 악한 말에도 변화할줄 모르고 묵묵히 견디어 나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심 하는 보살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잘 보지 못한다.
자신이 생각할 때는 자신이 잘못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있어서 부득이 잘못을 저지르니 그것은 결과적으로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다가 잘못을 남으로부터 지적받으면 당황해 하고 억울해 한다.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자신을 돌아보질 못하기 때문이다.
행여 자신의 잘못을 안다고 하더라도 쉽게 고치려 들지는 않는다.
그대신에 오히려 상대의 잘못만 들추기를 좋아하고 상대의 약점을 여기저기에 험담을 늘어 놓기를 좋아하게 된다.
남을 흉보는 사람을 자세히 보라.
모르긴 몰라도 그 흉보는 사람은 그것이 취미가 아니면 그 사람은 육체나 정신이 흉 덩어리 자체일 것이다.
잘못을 지적할 때도 애정 어린 설득과 비난조의 경격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상대가 애정 어린 표정이나 말씨로 어떤 이의 잘못을 꺼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할 때에 그는 태도를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공격적으로 비난하면 반발한다.
그리고 비난하는 사람의 자격을 생각한다.
비난하는 사람도 생각해 보면 허물이 많은데 무슨 자격으로 남의 사정도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 비난하느냐고 원망하게 된다.
직접적으로 남의 허물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그래도 신사적이다.
참으로 좋지 않은 것은 뒤에서 남의 말을 나쁘게 하는 것이다.
뒤에서 남의 말을 나쁘게 하는 것도 장점은 있다.
남의 말을 부담 없이 말함으로써 자신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가 있다.
또 남을 비판하다 보면 경우를 따지게 되고 경우를 따지다 보면 혹시 나에게는 그와 같은 잘못은 없는지 반성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스트레스를 푼다거나 비판력을 기르는 장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등뒤에서 비판을 받는 주인공에게 오는 상처는 너무도 크다.
상대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해 주는 것보다 남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수근거리는 눈치를 알게 되면 당사자는 몇배의 강한 충격을 받게 된다.
알고 있는 많은 불자들은 남의 나쁜 점을 이야기하는 것을 삼가한다.
본인이 없는 데서는 물론이거니와 본인이 앞에 있을 때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분위기가 되더라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고는 남의 잘못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을 뒤에서 흉보지 않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본인이 있는 데서 나쁜 말을 함부로 하지 않기도 어렵다.
반야의 언덕을 넘어서 는 남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않는 분들과 인연이 있는 것을 큰 복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 사람을 상대해 보신 분들은 그들이 얼마나 남의 말 나쁘게 하는 것에 대해서 조심하는가를 잘 알 것이다.
경험에 의하면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일본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남에 대한 비평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아쉬움을 표현할 정도이다.
물론 거기에도 문제는 있다.
일본 사람들이 인격적으로 훌륭하기만 해서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 자체에 자기의 속을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특성이 있다.
철저히 자신의 마음을 숨긴다.
자신을 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의 진정한 마음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으로 접근하기가 어렵다.
솔직담백하게 자신을 보이는 면에 있어서는 우리 한국인들이 훨씬 좋다.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위장하면서 살지 못하는 성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솔직함을 장점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남의 말을 나쁘게 하는 것은 고쳐야 한다.
부처님은 소 같은 가축도 나쁜 말을 직접 들으면 기분이 상한다고 한다.
그 짐승들이 누군가가 자신들을 뒤에서 흉보는 것을 알면 더욱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소로 태어난 석가보살도 함부로 말하는 주인에게 천금의 손해를 보게 만들었다.
뒤에서 흉보는 일이 있었다면 더 많은 손해를 보게 했을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의 전생수행담을 듣고 직접적으로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나쁜 말을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본인이 없는 데서 남을 흉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더 나아가 앞에서나 뒤에서 남의 장점만을 드러내서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불도수행은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백화점에 가서 비싼 옷을 사 입지 않고도 우리는 고상하고 멋있는 인격자가 될 것이다.
이것을 실천한다면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고 남도 편안케 해줄 것이다.
불법을 입으로 선전하지 않고도 자신의 인격으로 불법의 위대함을 알리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 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반야의 언덕을 넘어서 회원이지 않은가 ? 이것이 반야의 언덕을 넘어서를 찾는 보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