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온도

겨울 날씨는 영하의 기온이 되어 추위를 느끼게 하는 날이 많고 여름 날씨는 30도를 웃도는 기온이 되어 더위를 느끼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날씨다. 사계가 분명한 우리나라는 계절의 특색이 완연하여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가을 하늘이 우리나라가 가장 맑다 하고, 겨울이 기고 봄이 오는 영춘(迎春)의 자연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고 말하기도 한다.

요즈음 와서는 날씨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커져서 그런지 날씨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져 내일의 날씨와 기온이 어느 정도 될 것인가를 미리 알려주는 일기예보가 기상청에서 각 방송국을 통하여 매일 보도되고 있다. 사람 사는 인연 가운데 기후의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생활 풍습이 일차적으로 기후에 따라 생기고 신체환경도 기후에 따라 다르다. 열대는 흑인이 되고 한 대는 백인이 되는 것도 기후 조건 때문인 것이다.

이 기후조건이 세월 따라 변하는가 보다. 물론 하루아침에 변하는 건 아니지만 세월이 오래 가면 조금씩 기후에도 변화가 온다. 소위 이상기온이 자주 나타나고 한서(寒暑)의 주기적인 사이클(cycle)이 바뀌는 현상이 나타난다. 60년대까지 있었던 우리나라 겨울 날씨의 삼한사온(三寒四溫)이 없어진 게 그 한 예다. 그런가 하면 지구의 온난화가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아 지구촌 전역에 큰 재앙이 올지 모른다는 불길한 소식을 전해주는 사례도 매스컴에 자주 오른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없어지면 생태계에 치명적인 위기가 오고 바다 속으로 잠겨 없어질 땅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애기도 나왔다. 실제로 동해의 한류가 수온이 올라가 고기떼가 이동되었다는 애기도 나왔다. 또한 근년에는 여름의 폭우가 잦아 막대한 수해를 입은 지역이 해마다 나왔다.

지구 온난화의 주원인은 가스 배출이라 한다. 차량가스 온실 가스 등으로 지상의 기온이 점점 올라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구촌의 땅과 바다가 신열(身熱)을 앓고 있는 셈이다. 마치 사람의 체온이 적정선을 유지해야 되듯이 지구도 적정선의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열이 난다는 것은 병증일 수밖에 없다. 목하 지구촌은 과열화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에너지 과열화에서 발달된 문화 문명이 소비의 과열화를 촉발 해 지구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이다. 차를 많이 탐으로써 가스가 많이 나오고 온실의 난방을 많이 함으로써 가스가 많이 배출되고 있다. 이 모두가 사람이 사용하는 소비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비례하는 현상이 있다. 과소비 현상이 나타나는 사회일수록 물질적 이해타산에 민감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워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고급 주택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그 사람의 마음속의 따뜻한 온기가 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차가운 사람이 되어 냉장고와 같은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현대인을 냉장고 인간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냉장고 생리라는 것이 그렇다. 식품 따위를 저장하여 상하지 않게 차가운 온도가 유지되게 하여 식품의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냉장고이다. 이는 바로 사람이 물질적 이익의 고급을 위하여 냉정한 이성으로 마음의 온도를 일부러 낮추고 산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석학 레비 스트로스 박사는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현대사회를 차가운 사회라 하고 원시시대를 오히려 뜨거운 사회라고 말한 바가 있다.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로 대비시킨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온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또한 지식이 많고 비판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이성적 냉기가 몸에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사람의 마음은 뜨거워질 수도 있고 차가와질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기운이 들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불교에서는 자연현상의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볼 때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원리에서 하는 말이다. 만물이 생장하는 봄의 화창한 날씨처럼 마음이 그렇게 되어야 할 때가 있고 뜨거운 여름처럼 정열에 넘치는 마음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서늘한 가을이나 추운 겨울처럼 냉철한 판단으로 가차 없이 경계를 물리쳐야 할 때도 있다. 요컨대 사람의 마음 온도가 이상 기후처럼 되지 말자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아 놓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생각을 냉동시켜 얼어붙는 마음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렇게 사는 것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냉장고는 문을 열어 놓으면 냉장이 안 되기 때문에 물건을 넣거나 꺼낼 때를 제외하고는 닫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닫아 두기만 하면 폐쇄증이 나타나 정상적 심리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심리가 되기 일쑤다. 자폐증이 생기거나 우울증이 생기는 것도 마음의 비정상적인 불안 심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음 잘 쓰는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였고 마음 잘못 쓰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였다. 마음을 잘 쓰려면 얼지 않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어느 선사가 큰절의 주지 소임을 맡은 상좌에게 편지를 보내 대중을 잘 외호하는 비법을 일러 주었다.

“주지는 성품이 너무 엄하고 딱딱하여 사람을 대할 적에 찬바람이 난다. 그렇게 하면 대중이 멀어지지 쉽다. 봄기운과 같은 부드럽고 봄바람과 같은 온화한 마음을 써야 대중의 분위기가 좋아지니 봄의 마음을 잘 쓰도록 하여야 한다.”

대인춘풍(對人春風)이라는 말은 예로부터 숙어가 되어 잘 써진 말이다. 사람의 마음에 부드럽고 따뜻한 봄의 기운 같은 온도가 유지되어야 너와 나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2008년 3월 제88호

마음의 벽을 허물어라

며칠 전 나는 어느 신도님의 자제분 결혼식에 참석해 주례를 서 준 일이 있다. 신랑 되는 사람의 어머니가 두어 달 전부터 주례부탁을 해와 약속을 해 놓고 날 잡히기를 기다렸다가 축하를 하는 뜻에서 주례를 섰다. 작년에 신랑의 아버지가 작고하여 심심한 애도를 표한 바 있는 집안인데 고인이 된 아버지와는 불교를 통해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

내가 예식장에서 신랑 신부를 앞에 세워 놓고 간단한 주례사를 했는데 그 요지는 결혼을 하여 부부인연을 맺은 이상 서로의 마음에 벽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과 마음을 통하게 하여 평생토록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이었다. 부부일심동체라는 말은 예로부터 자주해 온 말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각자의 개성이 강한 탓인지 부부사이에도 일심동체는 이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그 예로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결혼을 했다가 헤어지는 이혼율이 미국 다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뜻이 안 맞는 사람 사이에는 가슴에 벽이 가로 막혀 서로의 마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의 행복은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있다. 다시 말해 마음과 마음이 통해지는 정신적 소통공간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상대가 없는 내 혼자만의 마음에는 행복이 들어오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혼자일 때 항상 고독하고 외로움의 슬픔이 그림자처럼 따른다. 다만 고도의 명상세계에서 자기의 정체를 찾는 공부에 있어서는 주객을 초월해 버리므로 행과 불행을 다 함께 뛰어넘는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의 일상적 생활감정은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 답답해지며 불우해지기 시작한다.

이 세상의 모든 불화는 마음과 마음의 사이가 좋지 않은 데서 조성된다. 또 불화란 개개인의 비위가 서로 상하는 데서 시작되는데 비위가 상하는 원인은 나와 상대의 감정적 충돌 때문이긴 하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자신의 마음 조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감정을 나쁘게 가지는 것은 내 마음의 조절문제이지 결코 남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기분을 나쁘게 하는 상대방의 그릇된 처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는 내 마음의 여유 있는 너그러움이 있다면 감정의 상처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겨울철에 감기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부주의로 감기가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감기의 병원체인 바이러스 등에 증오를 품지 않는 것처럼 사람 사이의 감정마찰도 남에게 탓을 하지 않고 내 자신의 부주의를 먼저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든 일에 주의를 요한다. 그것은 차를 모는 사람이 운전주의를 해야 하는 것과 같이 때로는 세상을 살면서 주의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생활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사이가 나쁜 사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가정에서 같이 사는 가족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잘못 말해진 실언이 될 때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이가 나빠지고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믿음이 무너지면 서로를 가로막는 벽이 생기게 된다. 말 한마디에도 독화살에 묻은 독과 같은 것이 있다. 남의 가슴을 멍들게 하는 말 한마디의 독이 평생토록 상처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히 있다. 육신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잘 낫지 않는다. 누구나 겪는 생존의 상처가 있지만 남으로부터 침해당하는 상처는 견디기 어려운 분노와 원망을 유발하여 자타의 인격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기준이 있다. 그른가 옳은가 하는 시비의 기준과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손익의 기준이다. 사람들은 곧잘 남의 그름을 지적하고 흉보기는 잘해도 자신의 그름은 잘 보지 못한다. 시비의 기준을 남에게만 적용하고 자신에게는 잘 적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에 남에게 이익이 되건 손해가 되건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의 손익만 따지는 이기적 편견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불공정한 마음 때문에 사람사이에 금이 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협동되는 인간유대가 좋은 사회를 이루는 근본인 것이 분명함에도 우리 사회는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해 골이 파이고 벽이 쌓이는 불행한 면들이 노출되고 있다. 나와 남을 같이 보는 공동의 입장에 서서 자리이타를 똑같이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지안스님 글. 월간반야 2005년 2월 제51호

마음 속에 있는 지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생각의 지도가 있다. 땅 위에 있는 장소가 그려진 한 나라의 지도나 세계지도처럼 마음의 여기저기에 생각이 머물 수 있는 수많은 터가 지도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지도에 산이 있고 강이 있으며, 평야가 있고 또 호수나 바다, 그리고 섬도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생각의 지도에도 산이 있고 강이 있으며 섬도 있다. 사람은 생각의 지도를 가지고 산다. 차를 몰 때 사용하는 길을 안내하는 교통지도 같은 지도가 있는가 하면 도시의 거리를 따라 번지가 다른 건물이나 주택지가 표시된 지도도 있다. 물론 긴 산맥이나 강줄기를 따라가는 지도도 있다.

지도를 보고 지리적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을 할 때 생각의 지도가 반드시 먼저 길을 안내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일은 생각이 먼저 일어나야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려는 사람이 기차표를 사야 가차를 탈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표를 사게 하는 것은 마음이 시켜서 하는 것이다. 차표가 있어 차를 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있어 차를 타는 것이다.

생각의 지도는 지구 면적의 한계를 훨씬 벗어나는 무한한 사유공간의 지도이다. 말하자면 우주 보다 더 큰 지도가 된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처럼 사색의 날개를 달고 유토피아를 날아가는 자유를 생각의 지도에는 언제나 담아두고 있다.

지도를 보면 아무리 여행을 많이 한 사람도 아직 가 본 곳보다 가보지 않은 곳이 더 많을 것이다. 세계지도가 아닌 한 나라의 지도를 놓고 본다 하더라도 아직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발 들여 보지 않은 곳이 더 많을 것이란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사색을 좋아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직 생각해 보지 않은 미사고의 영역이 더 많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항상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찾아 생각해 보라고 충고할 수 있다. 생각의 지도를 찾아 사유의 세계를 개척해 가는 것, 이것은 확실히 자신을 일깨우는 좋은 일이다. 물론 망상을 하지 말라는 불교에서 하는 경책의 말도 있다.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가 정신적 손해를 보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의 자유가 없다면 어찌 사람을 사람이라 하겠는가? 생각의 자유!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선물이다.

사색을 즐기는 편인 나는 가끔 어딘가 멀리 떠나보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어렸을 때 과학 잡지를 읽고는 미소의 우주경쟁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그 속에 사람이 타고 간다는 걸 알고 달에도 가보고 화성에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우주비행사가 되지 못한 탓에 지구 궤도권 밖을 가보지 못했지만 출가하고 과학 잡지 읽다가 동경하던 미국의 수도 워싱턴과 그때 소련의 수도 모스코바를 동심을 회상하면서 가 본적은 있다.

근년에 와서는 산에 오래 살아서 그런지 먼 섬에 가서 며칠을 푹 쉬다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작은 섬에서 며칠을 파도소리도 듣고 달밤에 수평선을 응시하며 사색에 젖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벌써 10년 전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피지를 아무도 몰래 혼자 다녀온 적도 있다. 마음 한 구석에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을 동경하며 정신적 휴식의 돌파구를 찾았다 할까? 그러던 것이 작년 가을이다.

속가의 숙부가 모 사찰 신도 회장을 오래한 탓에 집안에 출가한 스님이 있어 자랑스럽다면서 내게 공양을 같이 하기를 원해 부산 해운대에 가 저녁 공양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뜻밖에 호텔에 방을 하나 예약하여 하룻밤 묵도록 주선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 방이 APEC 정상회담을 할 때 모 나라의 대통령이 묵었던 방이라 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호텔의 고급특실에서 하룻밤 묵은 것이다. 호의에 감사해 바다를 바라보고 섬을 생각하자 하였는데 아쉽게 비가 내려 달빛도 바다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방 책상 위에 어느 시인의 시 한편이 적힌 인쇄물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 시의 제목이 섬이었다. 이 시를 읽고 나는 이 시가 하도 좋아서 메모지에 베껴 적어왔었다. 지금도 머리를 식히고자 할 때 이 시를 꺼내 한 번씩 읽는다.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 번 가 봐라, 그 곳에

파도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 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 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 눈 밝혀야 하리.

(안도현 ‘섬’ 전문)

지안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6년 12월 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