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학스님─기도 수행시 망상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망상을 짓지 마라..

-우학스님-

기도 수행의 요체는 망상을 어떻게 극복 하느냐에 있다.

염불이란 말 그대로 기도 시간 만큼은 오로지 부처님을 생각 해야 하는데 실지로 순일 하게 정신을 모으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자세는 그럴듯하게 앉아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있지만 속으로는 천사량만계교(千思量萬計較)를 시시각각 부린다.

만일 입으로 부처님 명호를 외우면서도 생각은 다른데 있으면 그것은 송불(誦佛) 일 뿐 염불은 못 된다.

기도중에 계추를 생각했다면 염불이 아니라 염계추가 되고 돈을 생각 했다면 염돈이 된다.

그냥 딴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망상이 없는 듯 하다가도 기도 시간만 되면 온갖 잡생각이 뒤 끓는 것은 활동 의식이 가라앉으면서 갖쳐 있던 의식이 서서히 되 살아나는 것이다.

언젠가 한 보살이 찾아와서 기도를 해서 큰 영험을 보았다는 얘기를 하였다.

내용인즉 자신이 옛날 옆 짝꿍 이름을 기도 중에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

기가차서 한마디로 “망상일 뿐이다” 라고 하였더니 의기소침해 하였다.

그러면 기도 중에 잡생각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만일 헛된 망상이 일어나면 그냥 내버려두고 빨리 부처님쪽으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왜 이런 잡생각을 할까” 라든가 이런 망상을 피우면 안돼”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 자체가 망상이 될 뿐이다.

참선에서 화두 챙기듯 금방 관세음보살을 머리에 떠올려야 한다.

기도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집중력에 있다.

이 집중력을 헤집고 들어오는 티끌만한 잡생각이 처음에는 대수럽지 않을지 모르나 만일 이를 우습게 생각하면 겨울철 바늘구멍에서 황소바람을 맞는 꼴이 될 것이다.

망상은 업식이므로 꼭 호주머니에 넣어둔 송곳과도 같아 방심만 하면 금새라도 삐죽 거리고 튀어나와 자기 주인공을 찔러댄다.

늘 스스로 단속하고 조심하지않으면 망상은 바람에 잠시 누운 풀처럼 금방 꼿꼿하게 머리를 쳐들고 일어서는 속성이 있다.

망상을 피워가면서 기도하는 이가 있어 “하지 않는것 보다 낫지 않느냐” 고 항변할지 모르나 결국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아무튼 불교수행 일반이 출렁이는 마음 바다를 가라앉히는 일이므로 기도중에 망상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법성계에서도 파식망상필부득 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어떻게 이 망상을 제거할 것인가?.

첫째는 관세음보살 상호를 쳐다보면서 기도해야 한다.

만일 가정에서 혼자 기도를 할 경우는 사진을 보면서 하면 된다.

둘째는 큰소리로 염불하거나 여럿이 같이 기도한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 분위기에 젖는다.

만일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사대육신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절을 하면 금방 망상이 잡힌다.

천배 2천배 넘어가면 육신의 피로함 때문에 헛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넷째는 백팔염주를 들고 한번의 호흡지간에 관세음보살을 외우는데 염주 한알에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단숨에 108개를 다 돌리는 수련을 반복한다.

다섯째는 관세음보살을 일자 일배 사경하면 금방 기도 삼매에 들 수 있다.

기도할 때 부질없는 생각들은 쓸데없는 통화를 하느라 정작 중요한 전화는 놓쳐 도모하는 일을 크게 그르치는 것과 같다.

부처님 가피를 입는 그 영광스런 자리에는 망상이 절대 동석(同席) 할 수 없다.

우학스님─’큰 원(願)을 세우라 ‘

‘큰 원(願)을 세우라 ‘

-우학스님-

원은 곧 희망이다.

그러므로 원이 없이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은

산송장과 다를 바 없다.

원이 있는 사람은

의식이 분명하여서 자기가 이세상에

왜 살고 있는지 잘 알고있다.

그래서 살만한 가치를

설정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도 한다.

그런데 이원에는 중생이 세우는 작은 원이 있는가 하면

불보살이 세우는 큰원이 있다.

작은 원은 그 바라는 바가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이며 자기 이익적이다.

큰원은 종합적이고 입체적이며 전체 이익을 추구한다.

얼마전 방생및,야외 법회에서 본인들

스스로 원을 적은 축원 카드를 읽던중

놀랄만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백퍼센트 모두가 다 가족건강 및 가족의 소원을 잔뜩 적어두었지,

불국토 건설이나 사찰 발전 등의 원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더욱이 그날 법회의 목적이 미물의 방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미물의 해탈을 바라는

내용이 전혀 없어 기분이 씁쓸하였다.

“관세음보살님을 외우고 기도하는 관음행자는

천수경에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님의10원(願)

6향(向)을 자기원으로 삼아야 한다.

10원 6향은”일체법을 속히알고저 원합니다”에서

시작하여”축생을 향하면 그들이 큰 지혜를 얻게하여지이다”로

끝을 맺고있다.

뒷쪽의 6향은 앞서 세운 10원의 구체적

실천 다짐 이라고 볼수있다.

아무튼 이 10원 6향은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 원으로써,

우리 모든 관음기도자들이 다 함께 세워야

내 사는 이 현실이 가릉빈가 지저귀고 금옥수 돌돌돌 흐르는

보타락가산 극락의 동산이 될수있다.

한편,중생의 작은원은 원초적 욕망 같은 것이라서

불교수행의 일반적 가치 개념과는 상반되는 점이 없지않다.

예를들어”우리아이를 이번 대학 시험에 합격 시켜 주십시오”

하고 원을 세워 기도한다면 그 원이 성취는 되겠지만

보살의 기도로서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부처님 이 자식놈이 이 세상에 나서 인류와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할수있도록 온정성을 기우리는 부모가

되고자 하옵니다”하고 발원한다면 이에 앞서 언급했던 작은 원은

다 포함 되면서 공동선의 완성도 같이 있게 된다.

이같은 발원의 모양새는

스님들의 관음 축원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시 맞이에 동참 해본 신도님들은 가족 개개의 축원끝에

“연후원 세세 상행 보살도 구경원성 살바야 마하반야 바라밀”

이라고 읖조리는 스님 염불을 들었을것이다.

“나의 모든 기도 생활이 세세 생생 동안의보살도로 연결되어서

끝내 부처님 세계로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인데

바로 이 발원문이 가장 전형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불자로서의 뚜렸한 목적의식”즉,큰원을 세워야한다.

그 절에 오래주석하는 주지스님은

그절의 부처님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관음 기도를 하는 불자는 관세음보살을 닮는다.

우리는,겉모양은 물론이요,속모양도 닮아야한다.

속마음이 관세음보살을 닮으려면

관세음보살의 큰원을 잊어서는 안된다.

모든 관음 기도자는 관세음보살의 10원 6향을

자기의 원으로 삼기로 권한다.

-관세음보살님의 한량없는 가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