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법과 방편

일승법과 방편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만 있고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는데

부처님의 방편설도 빼놓는다.

十方國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쉽게 말하자면 온 시방세계는 이대로가 항상 있는 세계[상주법계]이고, 걸림이 없는 세계[무애법계]이고, 하나의 참 진리의 세계[일진법계]인데, 이것을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일승법(一乘法)이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가 있음으로써 무애법계, 무장애법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시 이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인데 부처님이 그것을 바로 아시고 그것을 중생에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전체가 일승뿐입니다. 무애법계, 일승법계뿐이지 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고, 온갖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일승 이외의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은 딴 것이 아니라, 못 알아들으니까 방편(方便)으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그것이 실설(實說)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부처님 법문을 알려면 일승법계의 소식을 알아야만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방편설로는 모릅니다. 방편설은 실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고서 ‘돈설화엄(頓說華嚴)’이라고, 처음 한꺼번에 {화엄경}을 설해 버렸습니다. {화엄경}을 설(說)해 놓으니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도 없고 하니,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처님 혼자 아무리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하시나 안 하시나 중생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귀가 어둡고 눈이 어두워 이러하니, 차차 키워 가지고 귀도 조금 듣고 눈도 조금 밝게 해 가지고 일승(一乘)법문을 해야 되겠다, 하고 물러섰습니다. ‘퇴설삼승(退說三乘)’이야, 물러서서 삼승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막 나옵니다. 이런저런 말도 나오고, 유치원 아이를 보면 유치원 아이에 해당하는 법문을 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또 그에 해당하는 법문,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 보아 가면서 옷 해 입히는 식입니다. 키 작은 사람은 짧은 옷 해 입히고, 키 큰 사람에게는 긴 옷 해 입히고,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팔만 사천 법문이 벌어진 것입니다. 중생 근기가 팔만 사천으로 모두 다 각각 다르니, 그게 소위 방편설(方便說)입니다. 그것은 전부 실설(實說)이 아닙니다.

처음에 일승법문, 돈설화엄 할 때 그때에 모두 알아 버렸으면 눈깔사탕 따위는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유치원 이야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 이야기 모두 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할 수 없이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법문이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정도 커졌습니다. 부처님 법문을 알아들을 만큼 근기가 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에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으로 말한 연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화엄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이고 최후에 또 {법화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인데, 화엄·법화 중간에 40년 동안 설한 그것은 전부 다 방편설입니다. 거기에 가면 온갖 법문이 다 있습니다.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그것도 실제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 키우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승(一乘)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이냐. 이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것은 실법(實法)이니까. 일승이란 화엄·법화가 일승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화엄·법화는 어떤 진리에 서 있는가? 화엄·법화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일승 원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조직하여 집대성한 사람이 천태 지자(天台智者)선사입니다. {법화경}에 대해 천태 지자선사가 정의(定義)한 말씀이 있습니다.

“원교라 함은 증도를 나타낸 것이니 양변을 막아 버렸다[圓敎者 此現中道 遮於二邊].”

일승 원교란 것은 실지 그 내용이 중도(中道)인데 중도란 것은 양변을 여읜 것이라는 말입니다. 양변이란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 선(善)과 악(惡), 이것이 전부 양변입니다. 상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전부 양변으로 되어 있는데, 그 차별적 양변이란 것은 실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양변을 쌍으로 막고

정히 중도에 들면

이제를 쌍으로 비춘다.

心卽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諦

말하자면 도를 자꾸자꾸 많이 닦아 가지고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연히 밝을 것 아닙니까. 수도(修道)를 많이 해서 마음이 완전히 밝고 깨끗해져 버리면,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이 얼음알같이 그렇게 깨끗해져 버리면, 그러면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런 동시에 정(正)히 중도에 들어갈 것 같으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그것도 양변과 같은 것인데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이 밝아 가지고 확철히 도를 깨칠 것 같으면 쌍으로 이변을 막아 버린다, 이변을 초월한다고 했고, 그러면 그것이 중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중도에 들어가면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은 진속이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2제(二諦), 진(眞)과 속(俗)이 서로 합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합합니다. 서로 융합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차별적인 선악이나 유무의 양변을 완전히 초월하는 동시에 이것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중도라 하며, 이것이 원교(圓敎)이고, 이것이 일승이다, 그 말입니다.

천태스님 말씀은 {법화경} 위주인데,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이란 것은 현실 이대로가 절대(絶對)라는 말로, 이것은 그 원리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현실의 모든 차별적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에 있습니다.

그러면 ‘차(遮)’와 ‘조(照)’라 하는 말, 양변을 초월한다[遮]와 양변이 서로 통한다[照] 하는 이것이 어떻게 다른가? 양변을 여읜다, 초월한다는 이 말은, 비유를 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꽉 끼어 있어 해가 안 보이지만 구름이 확 걷히면 해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변을 초월한다는 말은 ‘구름이 걷힌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양변이 서로 통한다 하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구름이 걷혔다’ 하면 으레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해가 드러났다’고 하면 ‘구름이 걷혔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遮)’와 ‘조(照)’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쌍차쌍조(雙遮雙照), 쌍으로 걷히고 쌍으로 초월하고! 쌍으로 비추고 쌍으로 통하고!

쌍으로 통한다 하는 것은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승원교, 중도라 하는 것은 모든 차별을 초월하고 모든 차별들이 원융무애하여 서로 융통자재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세계를 일승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진법계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평등하여 전부 진여(眞如)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애법계(無碍法界)라 합니다. 유무도 가림이 없고, 시비도 가림이 없고, 선악도 가림이 없고, 이래서 모든 것이 무애자재, 무애법계인 것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 즉 무애법계이고, 무애법계 즉 일진법계인데, 이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법화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원교대종(圓敎大宗)이라고 하는 화엄에서는 일승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화엄이라고 하면 요새 강원(講院)에서 배우는 {화엄청량소(華嚴淸凉疏)}라는 것이 있는데, 청량(淸凉)스님이 여기에서 화엄종취(華嚴宗趣)에 대해 정확히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곧 비추며 막고

곧 막으며 비추니

쌍으로 비추며 쌍으로 막아서

둥글게 밝아 일관하면

이 종취에 계합하는도다.

卽照而遮

卽遮而照

 照 遮

圓明一貫

契斯宗趣

즉조이차(卽照而遮), 곧 비추면서 막는다. 결국 모든 것이 융통자재했다, 즉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시에 즉차이조(卽遮而照)니 모든 것이 융통한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을 초월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융통해 버리고, 모든 것이 융통할 때 모든 것이 다 초월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쌍조쌍차(雙遮雙照)가 되지 않습니까. 쌍으로 다 통하고 양변을 초월했다, 즉 양변이 서로서로 융통하고 양변이 서로서로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명일관(圓明一貫), 둥글게 밝다, 모든 것이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관할 것 같으면 계사종취(契斯宗趣), 화엄종취에 맞다 그 말입니다.

근본요지는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화엄종취라는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쌍차쌍조에 있다, 그 말입니다. 쌍차쌍조라 하는 것을 확실히 바로 알면 이 화엄종취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청량국사(淸凉國師)의 화엄종취에 대한 정의입니다.

천태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중도란 것이 쌍차쌍조이니 이것을 바로 알면 중도인 동시에 일승이고 원교이고 법화도리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청량스님은 “화엄이 원교인데 화엄도 또한 딴 것이 아니라 쌍차쌍조인데, 이 도리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화엄도리의 종취를 알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화엄에 대해 천태스님, 청량스님이 말씀하신 것은, 원교라는 것은 같은데 화엄종에서는 {법화경}을 대승종교(大乘終敎)라 해서 ‘최후의 교리’이지 ‘원만원교’는 못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으나, 그것은 서로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이리도 표현하고 저리도 표현한 것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간에 불교에서 가장 구경인 최후 원리를 설한 경을 화엄법화라 하는데, 화엄·법화를 총칭하여 일승원교(一乘圓敎)라 합니다. 그러니 일승원교란 그 대표적인 천태스님, 청량스님 말씀과 정의에 의하면 쌍차쌍조하는 중도에 서 있는 것이 즉 화엄이요, 법화이다, 이것입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라는 것, 이것이 이론적으로 들어가면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초월하여 양변이 완전히 합해서 통한다. 그러면 화엄의 사법계(四法界)가 벌어집니다.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무애법계(理無碍法界), 사무애법계(事無碍法界)입니다. 결국 이무애법계, 사무애법계를 말하려고 이법계, 사법계를 말한 것인데, 이법계 중에 사법계가 있는 것이고, 사법계 중에 이법계가 있는 것이지 이법계 사법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법계 사법계를 따로 세웠지만 각각 이법계 중에 사법계, 사법계 중에 이법계, 이렇게 하여 이사(理事)가 무애(無碍)입니다. 이사가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滿象)이 하나도 무애법계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 시방세계의 모든 존재가 중도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절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것이 화엄·법화의 근본이론입니다.

그러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로서, 내 말했듯이 극락세계를 딴 데 가서 구할 것 없고 천당을 딴 데 가서 구할 것이 없습니다. 실지 근본원리인 쌍차쌍조하는 중도도리를 확실히 깨쳐 버리면 이대로 전체가 무애자재, 무장애법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앉은 자리 선 자리가 극락입니다. 근본요지는 어디 있나 하면, 눈을 바로 떴나 못 떴나 이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소리이지만 해가 아무리 떠 있다고 해도 눈감고는 광명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무애법계, 일승법계, 진여법계, 무장애법계에 살고 있지만 눈을 감고 앉아서 자꾸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면 그것 참 딱한 노릇 아닙니까.

참으로 다행한 것은 우리가 눈을 떴든지 감았든지 간에 이 무장애법계, 광명의 세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눈을 감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하더라도 자기가 눈을 떠서 광명을 못 본다 그뿐이지 이 광명의 세계, 무애법계, 일진법계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사실을 확신하고 노력하여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 이외에 그와 모순되는 말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전부 방편설입니다. 방편가설일 뿐 실설(實說)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노력하여 실설을 따라가야지 방편가설인 줄 알면서 그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방편가설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좀 정신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 꼬마들에게 아무리 대학 과정을 배우라고 해도 모르니 그것을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 할 수 없이 유치원 과정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일승이 실지로 근본법은 근본법이지만 일승을 위해서는 방편가설이 전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시방국토(十方國土) 중에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이라, 일승법뿐입니다. 본래 전체가 일승법계고, 전체가 무애법계고, 전체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는데 그러면 왜 부처님은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가? 그게 모두 방편설입니다. 설사 아무리 방편설을 설하였지만, 우리가 아무리 어둡다 어둡다 해대지만, 사람 개개인 전체가 다 광명 속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눈을 감았든가 떴든가 간에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은 다르지만 광명 속에, 일진법계 속에, 무장애법계 속에 살고 있는 것만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가장 구경법(究竟法)이냐? 그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에는 일승법이 실(實)이고 삼승은 권(權)이라, 이렇게 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본다 해도 나중에 가서는 전체가 중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삼승도 중도 아닌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무애자재한 교리, 사법계(事法界)라든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든지 무애법계, 일승원교라 하는 것이 우리 불교의 구경(究竟)이냐? 그게 아닙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선(禪)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승이니 하며 아무리 큰소리 해대지만 이것은 말에만 그칠 뿐, 말! 말이지 실은 아닙니다. ‘교’라 하는 것은 뭐라고 하든 ‘말’이지 ‘실’은 아닙니다. 아무리 일승이 실법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빨간 거짓말입니다. 일승 이야기 아무리 해봤자 밥 이야기는 배 안 부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해탈 못 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밥은 실제 떠먹어야 됩니다. 그러니 오직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려면 참선(參禪)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교외별전, 즉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교’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마음을 전한 것인데, 말씀이란 것은 마음을 깨치기 위해 한 것이지 딴 것 아닙니다. 요리강의라는 것은 밥 잘 해 먹자는 것인데 밥 잘 해 먹자는 이외에 뭐가 있습니까. 요리강의를 천날 만날 해도 배가 부르는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교외별전에서 볼 때는 일승 아니라 더한 일승이라도 이것 전부가 방편이고 전부 가설인 것입니다. 실지에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진정(眞淨)스님 말씀이 있습니다.

다함이 없는 자성바다는 한 맛이나

한 맛이 끊어져야 나의 선이다.

無盡性海含一味

一味相沈是我禪

무진성해(無盡性海), 다함이 없는 자성바다, 자성바다 전체가 한 맛이니, 일진법계 무애법계다 그 말입니다. 일미(一味)라 하는 그것이 즉 무애(無碍)입니다. 어째서 일미(一味)가 무애냐 하면 이 우주 세계라 하는 것은 차별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이 틀린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일미가 되려면, 한 맛이 되려면 서로 완전히 통해 버려야 됩니다. 안 통하면 한 맛이 안 됩니다. 결국 일미라 하는 것은 전부가 통하는 세계, 색과 공이 통하고 모든 것이 다 통해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목에서 볼 때는 일미상침시아선(一味相沈是我禪)이라. 일미, 한 맛이란 것, 무애, 모든 것이 통했다는 것, 중도니 뭐니 해대지만 사실에 있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입니다. 실지와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하는 소리 아닙니까.

“손가락을 가지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 일승불교가 “실(實)이다, 실이다!”라고 하는 이것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에 얽매여도 안 됩니다. 결국 화엄이니 법화니 하는 것이 “실이다, 실이다” 하고 자꾸 주장을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동시에 이것도 방편가설입니다.

화엄·법화 일승원교가 다 방편가설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만 비로소 자기 마음을 깨치는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일승원교가 참으로 우리 불교의 진리다, 그것이 구경(究竟)이다, 최고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손가락에만 매달려 있지 달은 영원히 못 보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방세계가 전부 일승불교이며 일승도리인데, 일승도리라 하는 것은 무애법계 즉 중도에 서 있습니다. 이 중도란 불생불멸입니다. 또 양변을 여읜 것, 생멸이 완전히 통하는 무애법계란 말입니다. 이것을 ‘교’에서는 실이라 하여 구경법이라 하는데, 참으로 사실을 알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방편이고 가설이며,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화엄이고, 법화고, 일승이고, 원교고 다 내버려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저 태평양 한복판에.

그리고 어떻게든 노력해서 손가락만 보지 말고 달을 봐야 되겠다 이것입니다. 예전에 늘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조사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바야흐로 공부할 분(分)이 있도다.

見佛祖如 寃家相以

方有參學分

그러면 예전 조사(祖師)스님들의 어록(語錄)은 모두 실(實)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겠지요. 물론 화엄·법화와는 틀립니다. 그러나 나중에 참으로 바로 깨쳐 놓고 보면 조사스님의 어록도 사실에 있어서 ‘눈 속 가시[眼裏荊棘]’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초불월조(超佛越祖),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하는 이런 출격대장부가 되어야만 비로소 횡행천하(橫行天下)하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든지 내 말 듣지 말아라 하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이 방편에 얽히고 저 방편에 얽히고 하여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하면 영원토록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이렇게 말하니, “허, 그러면 다 필요 없네. 그 뭐 화엄·법화도 필요 없고 조사어록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런 것 다 뭐 할 필요 있나, ‘이 뭣고!’만 하면서 앉아 있으면 안 되겠나!” 그야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 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리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유치원에서는 유치원 과정이 필요하고 초등학교에서는 그 수준에 맞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모든 방편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유치원 자격밖에 안 되는 사람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한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한다고 말만 그렇게 들었지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조그만 돌도 하나 못 드는 어린애가 큰 바위를 들려고 한다든지 태산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역량에 따라서 방편도 실이 되고 실도 방편이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모든 것에서 한 법에 국집(局執)해도 못쓰고 또 한번이라도 함부로 버려도 안 됩니다. 사람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원 근본은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해서 불타와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참으로 공부할 분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근본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서야 참으로 크게 눈을 뜨고 살불살조(殺佛殺祖)하는 그런 대출격장부가 될 것입니다.

이만 했으면 방편이 무엇이다 하는 것, 그에 대해 무엇을 취하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니, 강원에서는 경(經) 부지런히 익히고 선방에서는 화두(話頭) 부지런히 해 가지고 어떻게든 자기 하는 공부를 하루바삐 빨리 성취하도록 노력합시다.

영혼의 세계

(方丈 大衆法語 1981년 음 10월 30일)

지난 수천 년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과 시비가 되면서도 완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로 영혼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종교가는 영혼이 꼭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영혼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싸움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내려왔습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는가? 대승이나 소승이나 어느 경론을 막론하고 팔만대장경에서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생사윤회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생전에 지은 바 업(業)에 따라 몸을 바꾸어 가며 윤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윤회는 우리 불교의 핵심적인 원리의 하나입니다.

그러면 윤회란 것은 확실히 성립되는 것인가? 근래 세계적인 대학자들은 윤회를 한다는 영혼 자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윤회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윤회는 부처님께서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실제 윤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윤회가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행동을 잘하게 하려고 교육적인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근래 과학이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과학도 자꾸 발달함에 따라 영혼이 있다는 것이, 윤회가 있다는 것이, 또한 인과가 분명하다는 것이 점차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 열릴 수 있는가? 해탈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그런 의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확실한 판단을 내려야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 또 신앙생활하는 데에나 불교 포교를 하는 데에, 그리고 수행하여 성불하는 데에 근본적인 토대가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만 바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세계의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 아니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세계적으로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이 높고 객관성을 띠고 있는 연구방법으로 전생기억(前生記憶)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두서너 살 되는 어린아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인데, 이들이 말을 배우게 되면서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전생에 어느 곳에 살던 누구인데 이러이러한 생활을 했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사를 해보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생기억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터키 남부의 ‘아나다’라는 마을에 ‘이스마일’이라는 어린애가 있었습니다. 그 집은 정육점을 하는데, 난 후 일 년 반쯤 되는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런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우리 집에 가겠다. 이 집에는 그만 살겠어요.”

“이스마일아,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가 네 집이지 또 다른 네 집이 어디 있어?”

“아니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은 저 건너 동네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어. 내 이름도 ‘이스마일’이 아니고 ‘아비스스루무스’야. 아비스스루무스라고 부르세요. 그렇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대답도 안 할 테야.”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말했습니다.

“나는 저 건너 동네 과수원집 주인인데 50살에 죽었어. 처음에 결혼한 여자는 아이를 못 낳아서 이혼하고 새로 장가를 갔어. 그리고는 아이 넷을 낳고 잘 살았지. 그러다가 과수원의 일하는 인부들과 싸움이 일어나서 머리를 맞아 죽었어. 마구간에서 그랬지. 그때 비명소리를 듣고 부인하고 애들 둘이 뛰어나오다가 그들도 맞아 죽었어. 한꺼번에 네 사람이 죽었지. 그 후 내가 당신 집에 와서 태어난 거야. 아이들 둘이 지금도 그 집에 있을 텐데, 그 애들이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그리고는 자꾸 전쟁의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런 소리 못 하게 하면 웁니다. 그러다가 또 전생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크고 좋은 수박을 사왔습니다. 이 어린애가 가더니 제일 큰 조각으로 쥐고는 아무도 못 먹게 하는 것입니다.

“내 딸 ‘구루사리’에게 갖다 줄 테야! 그 애는 수박을 좋아하거든.”

그가 말하는 전생에 살던 곳은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지방 사람이 간혹 이 동네에 오는 이가 있습니다. 한번은 웬 아이스크림 장수를 보더니 뛰어나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알 턱이 있겠습니까?

“나를 몰라? 내가 ‘아비스스루무스’야. 네가 전에는 우리 과수원의 과일도 갖다 팔고 채소도 갖다 팔았는데 언제부터 아이스크림 장사하지? 내가 또 네 할례(割禮)도 해주지 않더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사실과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터키는 회교국으로서 회교 교리상 윤회를 부인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재생을 주장하면 결국 그 고장에서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비스스루무스’가 전생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자꾸 아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으나, 우는 아이를 달래려면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입니다. 확인도 해볼 겸 아이를 과수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다른 길로 가려면

“아니야, 이쪽 길로 가야 해.”

하면서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장서서 과수원으로 조금도 서슴지 않고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과수원에는 마침 이혼한 전생 마누라가 앉아 있다가 웬 어린애와 그 뒤를 따라오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눈이 둥그렇게 되어 쳐다보았습니다. 어린애는 전생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더니 다리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너 고생한다.”

어린애가 중년의 부인을 보고 “너 고생한다”고 하다니! 부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놀라지 말아라. 나는 너의 전생 남편인 ‘아비스스루무스’인데 저 건너 동네에서 태어나서 지금 이렇게 찾아왔어.”

또 아이들을 보더니

“‘사귀’, ‘구루사리’ 참 보고 싶었다.”

하면서 흡사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 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을 자기가 맞아 죽은 마구간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전에는 좋은 갈색 말이 한 필 있었는데 그 말이 안 보이니 어떻게 되었는지 묻고, 팔았다고 하니 무척 아까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여러 인부들을 보지도 않고서 누구누구 하며 한 사람씩 이름을 대면서 나이는 몇 살이고 어느 동네에 산다고 하는데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생의 과수원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결국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어 ‘이스마일’이 여섯 살이 되던 1962년 학자들이 전문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 검토하기 위해 조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에서도 다수 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조사 보고서에서 보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전생기억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과수원 주인이 생전에 돈을 빌려 준 것이 있었는데 ‘아비스스루무스’가 죽어 버린 후 그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 돈 빌려 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네가 어느 날 돈 얼마를 빌려 가지 않았느냐. 내가 죽었어도 내 가족에게 갚아야 할 것이 아니냐. 왜 그 돈을 떼어먹고 여태 갚지 않았어?”

돈 빌려 간 날짜도 틀림없고 액수도 틀림없었습니다. 안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전생 빚을 받아냈습니다. 이것은 죽은 ‘아비스스루무스’와 돈 빌려 쓴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틀림없이 환하게 말하는데, 이것을 누가 어린애에게 말해 줄 것이며 또 어린애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이스마일’은 ‘아비스스루무스’의 재생이라는 데에 확정을 짓고 보고서를 냈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이스마일’의 예와 같은 전생기억의 사례는 학계에 보고된 것만 해도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에 한두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몇 해 전 스리랑카에서의 일입니다. 태어난 지 37개월된 쌍둥이가 자꾸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단이 아이를 전생에 살았다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근처의 주민들을 수백 명 모으고 그 가운데에 그 아이의 전생의 부모형제를 섞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더러 전생의 부모형제를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 사이에서 “이 사람은 아버지, 이 사람은 어머니, 이 사람은 누나, 이 사람은 형님……” 하면서 가족을 한 사람 한 사람 다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의 전생기억을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세 살 되는 어느 아이는 전생 이야기를 하는데 그는 다이빙선수였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도 다이빙할 수 있겠니?”

“그럼요, 할 수 있고 말고요. 전에 많이 했는데요.”

이리하여 세 살 되는 어린애를 높은 다이빙대 위에 올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린애는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고, 조금도 서툴지 않게 서슴없이 다이빙을 하는 것입니다. 전생기억이란 이런 식입니다.

또 흔히 보면 천재니, 신동이니, 생이지지(生而知之)니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한번도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글자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을 보여도 모두 읽을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이지지라고 하는데 나면서부터 다 아는 것입니다. 이 생이지지가 바로 전생기억입니다. 전생에 배운 것이 없어지지 않고 금생에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또 처음 가보는 곳인데도 낯이 설지 않고,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친근감이 가는 경우는 전생의 기억이 희미하게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생기억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우매하여 전생기억이 캄캄하지만 조금 희미한 사람도 있고 분명한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전생기억이 분명하여 증거가 될 만한 사람을 전문으로 조사 연구하는 학자와 단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가 미국 버지니아 대학에 있는 이안 스티븐슨(Ian Stevenson)입니다. 그는 세계 도처에 연락기구를 조직하여 전생기억을 가진 아이나 어른이 있어 연락해 주면 학자들을 보내어 갖가지로 조사 확인하여 그것이 확실한가를 알아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는 수년 동안에 600여 명의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그 중 대표적인 20여 명에 대한 사례를 뽑아서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윤회를 암시하는 스무 가지 사례(Twenty Suggestive Cases of Reincarnation)}라는 책입니다. 전생기억에 대한 보고서로는 가장 확신이 있고 그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유명한 책으로 세계 각국에서 많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수년이 지난 1975년까지는 1,300여 명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수십 명도 상당한 숫자인데 1,300명이라는 자료에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전생기억 이외의 차시환생(借屍還生)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나는 것이 아니고 내 몸뚱이는 아주 죽어 버리고 남의 송장을 의지해서, 즉 몸을 바꾸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입니다. 1916년 2월 26일자 중국 신주일보(神州日報)에 보도된 사실입니다.

중국 산동성에 최천선(崔天選)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무식한 석공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32살이 되는 해에 그만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장사지낼 준비를 다 마친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관 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고 사람기척이 났습니다. 부랴부랴 관을 깨고 풀어 보니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가 살았다.”

하며 그 부모, 부인, 자식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식구들을 하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더니 정신착란이 되어서 집안식구들도 못 알아보고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기운을 차리고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식구들을 못 알아보고 또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본인도 퍽 답답한 것 같았습니다. 마침 주위에 붓과 벼루가 있는 것을 보더니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을 아주 잘 씁니다. 유식하다 이 말입니다. 본래는 일자무식(一字無識)인데.

그 글 내용을 보니, 이 사람은 중국사람이 아니고 안남(인도지나)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글은 한자를 쓰지만 말은 다릅니다.

“나는 안남 어느 곳에 사는 유건중(劉建中)이라는 사람인데 병이 들어서 치료하기 위해 땀을 낸다고 어머니가 두터운 이불을 덮어 씌워 땀을 내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 이렇게 와 있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어 버리고 안남사람의 혼만 산동으로 온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전생입니다. 전생이란 것이 반드시 몸뚱이가 죽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시 나는 것만이 아니고 죽은 육신이 그대로 다시 살아나는데 영혼만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시환생이라고 합니다. 남의 육체를 빌려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후 중국말을 조금씩 가르쳐 주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을 가르쳐서 중국말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꾸 전생에 살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 소문이 났습니다. 나중에는 북경대학에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로 정신감정을 해보고 치료도 하고 하였습니다만, 정신은 조금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또 그가 말한 안남에 사람을 보내어 조회를 해보았습니다. 과연 유건중이란 사람이 살다가 죽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 그가 말한 전생의 일이 모두 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최천선이라는 사람이 죽었다 깨어났으니 안남 유건중의 혼이 최천선의 몸을 빌려 환생했다는 것이 완전히 증명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참 희귀한 일이라고 하여 정부에서 이 사람에게 내내 연금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당사자가 전생기억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하는 경우들입니다만, 또 심리학에서 전생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최면술을 사용하여 그 사람의 전생을 알 수 있는 그 방법이 연구된 것인데, ‘연령역행(年齡力行)’이라는 것입니다. 최면을 걸어서 최면 상태에서 사람의 연령을 자꾸자꾸 후퇴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즉 스무 살 되는 사람을 최면을 걸어서 열 살로 만듭니다. 그러면 열 살 먹은 사람이 되어 그때의 행동이나 말을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또 네 살이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네 살 때의 노래를 하고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살로 만들어 놓으면 울기만 합니다. 말도 못 하고. 이런 것을 연령역행(Age Regression)이라고 하는 것인데 심리학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의학에서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병이 났는데 아무래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연령역행을 시켜서 그 원인을 조사해 봅니다. 그러면 10년이나 20년 전의 옛날에 그 원인 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간첩이 잡혔을 때에도 이용합니다. 본인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부인할 때 최면술을 사용하여 연령역행을 시킵니다. 그러면 이전에 간첩교육 받던 것을 모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녹음해 두었다가 다시 물어보면 꼼짝 못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전생 문제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연령역행을 하여 한 살로 만들어 둡니다. 그러면 40∼50세 되는 사람도 손발을 바둥거리고 빽빽 울면서 어린애 몸짓만 할 뿐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묻느냐 하면,

“네가 태어나기 1년 전, 2년 전에는 어디 있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완전히 바뀌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여기 해인사 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연령역행을 시켜 한 살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태어나기 3년 전을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소 성명이 바뀌어져서 전라도 어느 곳의 누구라든지, 일본 어느 곳 사람이라든지,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학에서 전생회귀(前生回歸)라고 합니다. 전생으로 돌아간다 이 말입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한 생뿐만이 아니고 이생, 삼생…… 여러 수십 생까지 올라가는 방법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정신 상태를 세 가지 단계로 나눕니다.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의식 상태입니다. 의식 상태 안에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의식 속에 무의식 상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이 완전히 끊어진 그런 상태입니다.

프로이드(Sigmund Freud)가 잠재의식은 어지간히 연구하여 발표하였지만 무의식에 대해서는 별로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무의식 상태에 대해 큰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영국의 캐논(Sir Alexander Cannon) 박사입니다. 그는 원래 정신과 의사인데 영국 국가에서 주는 가장 최고의 명예인 나이트(Knight) 작위까지 받은 대학자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미국 등 5개국 학술원의 지도교수이기도 합니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전생 조사에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과학자의 입장에서 영혼도 있을 수 없고 윤회도 없다고 철두철미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최면술을 이용한 무의식 상태에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자꾸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연령역행하여 열 살, 한 살, 출생 이전으로 역행시키면 전생, 삼생, 십생……, 저 로마시대까지로 역행되어 전생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른 사실의 기록과 조사해 보면 모두 맞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1,382명에 대한 전생 자료를 수집하여 {인간의 잠재력(The Power Within)}이라는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1952년).

이 캐논보고서에 의하면 병이 들어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는데 전생회귀를 통해서 조사를 해보면 그런 병들이 전생에서 넘어온 것으로, 그 전생의 발병원인에 의거해서 치료하니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전생요법으로 거기에 보면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만 보면 겁을 냅니다. 바다를 구경한 적도 없고 큰 강 옆에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물만 보면 겁을 내는데 아무리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생회귀를 시켜 보니 그는 전생에 지중해를 내왕하는 큰 상선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상선의 상인들에게 죄를 지어서 쇠사슬에 묶인 채 바닷물 속으로 던져져서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러니 금생에 물만 보면 겁을 내는 것입니다. 이 원인에 의거해서 치료를 하니 병이 나았습니다.

또 한 사람은 높은 계단을 무서워 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보니 그는 전생에 중국의 장군인데 높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곳만 보면 겁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캐논보고의 사례에 의거해서 학자들이 전생요법을 개발하여 요즈음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1977년 10월 3일자 {타임(Time)}지에 보면 이에 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잡지에서 자신 있게 보도할 때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처럼 전생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 병 치료에 있어서도 전생요법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도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의심을 갖는다면 불교를 안 믿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전생이 있고 윤회를 한다고 할 때 어떤 법칙에서 윤회를 하는가? 내가 마음대로 원하기만 하면 김씨가 되고 남자가 되고 할 수 있는가? 캐논보고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순전히 불교에서 얘기하는 인과법칙에 의한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인과법칙이란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착한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원인에는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전생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어떤 사람이 전생에 착한 사람이었는지 악한 사람이었는지를 알아서 그 사람의 금생의 생활이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비교해 보면, 전생에 악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불행한 사람이고 전생에 착한 사람이면 반드시 금생에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받는 그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느냐?

금생에 하는 그것이다.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전생에 내가 착한 사람이었나 악한 사람이었나를 알고 싶으면 금생에 내가 받는 것, 지금 행복한 사람이냐 불행한 사람이냐를 살펴볼 것입니다. 내생에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불행하게 살 것인가를 알고 싶으면 지금 자신의 하는 일을 보면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과학에서는 인과(因果)를 인도말인 카르마(Karma:業)라고 하여 이제는 세계적인 학술용어가 되었습니다. 인과문제에 대해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도 많이 나와 있는데, 그를 ‘기적인’이라고 부르는데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기적을 행사하느냐 하면,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주소 성명만 가르쳐 주면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병을 모두 진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서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하는데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무려 3만 명 이상이나 치료를 했습니다.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봅니다. 그의 답을 듣고서 바로 뉴욕에 전화를 해보면 그의 말이 그대로 맞습니다.

케이시가 병을 진찰해 보면 그 원인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과는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병 치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사후에도 버지니아 비치(Virginia Beach)에서는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前生透視)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한 전생과 금생과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간에도 그 사이가 무척 나쁩니다. 그 전생을 알아보니 서로가 원한이 맺힌 사이입니다.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아버지와 딸 관계이거나 혹은 어머니와 아들 관계입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 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은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숙명통(宿命通:전생의 일을 훤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 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쟁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사람이 야망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 작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봐야 하고 남이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를 한다, 인과가 있다는 것이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라든지 케이시라든지 하는 과학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3천여 년 전에 모두 말씀하셨는데 현대과학이 이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니 불교 믿는 사람은 부처님 말씀 중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이해가 부족한 줄을 알고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반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며, 알고 또 바르게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신심(信心)이 성지(聖地)다

어떤 것이 부처인고

금사탄 여울가의 마씨 부인이로다.

如何是佛

金沙灘頭馬郎婦

이것은 임제종의 3세인 풍혈스님의 법문입니다. 어떤 스님이 풍혈스님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금사탄 개울가의 마씨 부인이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는 곳(낙처), 즉 근본 뜻은 각자가 공부를 하여서 확철히 깨쳐서 참으로 자성을 밝혀야 알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할 뿐이고, 단지 ‘금사탄두마랑부’라는 말의 출처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섬서, 지금은 중국 섬서성에 ‘금사탄’이라는 유명한 강이 있습니다. 당나라 정원(貞元) 때,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는 천하일색의 여자가 이 강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사방에서 돈 있는 사람, 벼슬 높은 사람 등 온갖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청혼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내 몸은 하나인데 청혼하는 이가 여러 사람이니 내 조건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시집가겠습니다.”

그리고는 {법화경} 보문품을 외우는 사람에게 시집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튿날 보니 20명이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스무 명이 다 외우고 달려왔습니다. 이번에는 {금강경}을 외워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보니 또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법화경}을 다 외워 오라는 것입니다. {법화경}은 좀 많은데도 그래도 이 처녀에게 장가들 욕심으로 죽자하고 외웠습니다. 마씨집 아들 즉 마랑(馬郞)이 사흘 만에 다 외우고 달려왔습니다.

“참 빨리 외우셨습니다. 한번 외워 보십시오.”

줄줄줄 다 외우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천하에 좋은 낭군을 찾아다니는 터인데 당신같이 좋은 낭군을 만났으니 이젠 한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시집가겠습니다.”

이렇게 결정되어 혼인날을 받고 성례(成禮)를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부가 방으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축하객들이 채 헤어지기도 전인데 신부가 아이구 배야, 아이구 머리야! 하더니 갑자기 데굴데굴 구르다가 덜컥 죽어 버렸습니다.

마랑은 이 처녀에게 장가가기 위해 밤잠도 안 자고 외우고 또 외웠는데 신부가 죽어 버리다니. 그런데 금방 죽은 여인의 시체가 썩어서 그 당장 진물이 줄줄 흐르는 것입니다. 천하일색, 그 아름답던 사람이 그 당장에 죽더니 금방 오물이 흘러내리니 참으로 흉합니다. 아무리 만승천자(萬乘天子)가 좋다 해도 죽어서 썩으면 그만이듯이, 아무리 미인이지만 죽어서 썩으니 그만입니다. 부랴부랴 관을 짜서 산에 묻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죽기 전의 그 처녀가 마씨집 아들의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자신이 박복하다고 한탄하며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때 웬 스님 한 분이 마씨집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일전에 이곳에서 처녀 한 사람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 묘소가 어디 있습니까?”

묘소를 안내하니 스님이 갖고 있던 석장으로 묘를 탁 치니 묘가 둘로 갈라지면서 그 속에는 누런 황금뼈가 소복하게 쌓여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에 죽은 사람인데 석장(錫杖)으로 추켜드니 금쇄골(金鎖骨)입니다. 뼈 마디마디가 고리가 되어서 머리부분을 드니 발 뒤끝까지 끌려 올라왔습니다. 그때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그 처녀가 바로 관세음보살이야. 이곳 섬서성 사람들이 하도 신심이 없어서 너희들을 제도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이 처녀 몸을 나투어 온 것이야. 이 금쇄줄을 봐!”

{법화경}을 사흘 만에 다 외운 영리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참으로 내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구나!”

“이렇게 관세음보살이 좋은 법문을 해주었으니 너희들은 불교를 부지런히 믿으라!”

이렇게 말하고 그 스님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금사탄두마랑부’, 금사탄 개울가의 마씨부인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고사에서만이 아니고 불교를 좀 아는 분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관세음보살이 화현(化現)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관세음보살이 세인(世人)에게 나타난 사례는 아주 흔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보타락가산( 陀洛迦山)입니다.

‘보타’란 인도말로 ‘희다’는 뜻이고, ‘낙가’는 꽃이란 말입니다. ‘흰 꽃’이란 뜻입니다. 관음도량(觀音道場)은 백화도량(白華道場)입니다. 보타락가산에 조음동(潮音洞)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나는 못 가보았지만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누구든지 정성껏 기도하면 수시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성지(聖地)와 명소가 많지만 돈이 많이 생기는 곳은 보타락가산입니다. 온 천하 신도들이 관세음보살 친견하려고 많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향을 꽂고 정성껏 기도를 하면 여러 수백 수천 명이 모여 있는데,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혹 법문도 하고 여러 동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신심이 솟아나서 신도들이 돈을 막 쏟아 놓고 갑니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보타락가산 절 한 곳에만도 대중스님이 4천여 명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도들이 자꾸 와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에는 돈을 쏟아 놓고 갑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되는 것은 사신공양(捨身供養)입니다. 관세음보살 친견에 너무 감격하여 “이 몸을 관세음보살께 바치겠다”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져 몸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신공양을 못하도록,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주변에는 이리저리 막아서 사람이 죽지 못하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그래도 흔히 사신공양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보타락가산의 관세음 현신(現身)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금사탄두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금사탄두마랑부라는 이 이야기는 보통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고 선종의 가장 큰 종파인 임제종의 제3세 적손(嫡孫)인 풍혈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풍혈스님이 말씀하신 그 내용, 법문의 근본 뜻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확철히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으로, 그것은 공부해야 되는 것이며, 그 연유가 어찌 된 것인가를 나는 말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선가에서 유명하며 기적적인 법문이 있습니다. ‘전삼삼 후삼삼(前三三 後三三)’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문은 유명한 {벽암록(碧巖錄)} 100칙(百則)에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수보살이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무착 문희(無着文喜)선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오대산에 갔다가 금강굴(金剛窟) 앞에서 웬 영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영감을 따라가니 아주 좋은 절이 있어서 그 절에 들어가 영감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영감이 물었습니다.

“남방 불법은 어떻게 행합니까?[南方佛法 如何住持]”

“말세 중생이 계행이나 지키고 중노릇합니다[末法比兵 小奉戒律].”

“절에는 몇 사람이나 모였는고?[多少衆]”

“3백 혹은 5백 명 모여 삽니다[或三百 或五百].”

무착스님도 한마디 묻고 싶었습니다.

“여기는 불법이 어떠합니까?[此間如何住持]”

“범인과 성인이 같이 살고, 용과 뱀이 섞여 살지[凡聖同居 龍蛇混雜].”

“그럼 숫자는 얼마나 됩니까?[多少衆]”

“앞으로 3, 3, 뒤로도 3, 3이지[前三三 後三三].”

‘용과 뱀이 섞여 살고 범인과 성인과 같이 산다’는 말은 보통으로 들으면 그저 그런 것 같지만 그 뜻이 깊은 곳에 있습니다. 겉말만 따라 가다가는 큰일납니다. 무착선사도 그 말뜻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노인과 작별했습니다. 한참 나오다가 돌아보니 절은 무슨 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것에 대해 게송(偈頌)을 읊은 것이 있습니다.

시방세계 두루 성스러운 절

눈에 가득히 문수와 말을 나누나

당시는 무슨 뜻을 열었는지 모르고

머리를 돌리니 다만 푸른 산 바위 뿐이더라.

廓周沙界聖伽藍

滿目文殊接話談

言下不知開何印

廻頭只見翠山巖

그 후에 또 문수보살을 친견하여 법문을 들은 것이 있습니다. 불교 선문에서 흔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누구나 잠깐 동안 고요히 앉으면

강가 모래같이 많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도다.

보배탑은 끝내 무너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루는도다.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境碎微塵

一念淨心成正覺

이 게송을 아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 출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착 문희선사가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 문수보살이 ‘직접’ 문희스님에게 설한 법문입니다. 그러니 관세음보살 뿐 아니고 문수보살같은 그런 대보살들도 32응신 만이 아니라 3백, 3천, 몇 백천억 화신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불법을 성취하여 대해탈부사의경계를 얻을 것 같으면 문수보살도 될 수 있고 관세음보살도 될 수 있고 보현보살도 될 수 있으며, 32응신이 아니고 백천 화신을 나타내어 자유자재하게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수보살을 보면 가장 유명한 성지가 중국의 오대산인데, 그곳에 가서 실제로 친견한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나타나는가 하면, 노인으로 또는 동자(童子)가 되어 나타나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로 몸을 나투어 비유로써 중생을 교화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심이 있고 오대산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면 문수보살을 직접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대산에 가야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낙가산에 가야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는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내가 실제 죽는 것 아니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槃

而實不滅道

常住此說法

‘상주차설법(常住此說法)’, 항상 여기 계시면서 설법하시는 것입니다. ‘여기’란 시방세계(十方世界), 처처(處處)가 여기입니다. 꼭 영축산만 여기가 아닙니다. 보타산이 어느 곳이냐? 사람 사람의 신심이 보타산입니다. 철저한 신심으로 기도를 하면 어디든지 나타납니다.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는 곳이 보타산입니다. 문수보살 나타나는 곳이 오대산입니다. 오대산이 따로 없고 보타산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마다 신심에 있습니다.

신심(信心)! 신심으로 공부도 기도도 하면, 누구든지 살아서 관음도 문수도 볼 수 있으며 산 부처님도 볼 수 있습니다. 신심으로 공부하고 기도할 뿐이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