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법과 방편

일승법과 방편

시방 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만 있고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는데

부처님의 방편설도 빼놓는다.

十方國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쉽게 말하자면 온 시방세계는 이대로가 항상 있는 세계[상주법계]이고, 걸림이 없는 세계[무애법계]이고, 하나의 참 진리의 세계[일진법계]인데, 이것을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일승법(一乘法)이라고 합니다. 우리 불교가 있음으로써 무애법계, 무장애법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시 이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인데 부처님이 그것을 바로 아시고 그것을 중생에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전체가 일승뿐입니다. 무애법계, 일승법계뿐이지 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고, 온갖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일승 이외의 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은 딴 것이 아니라, 못 알아들으니까 방편(方便)으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그것이 실설(實說)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부처님 법문을 알려면 일승법계의 소식을 알아야만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방편설로는 모릅니다. 방편설은 실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고서 ‘돈설화엄(頓說華嚴)’이라고, 처음 한꺼번에 {화엄경}을 설해 버렸습니다. {화엄경}을 설(說)해 놓으니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도 없고 하니, 아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처님 혼자 아무리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말씀하시나 안 하시나 중생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귀가 어둡고 눈이 어두워 이러하니, 차차 키워 가지고 귀도 조금 듣고 눈도 조금 밝게 해 가지고 일승(一乘)법문을 해야 되겠다, 하고 물러섰습니다. ‘퇴설삼승(退說三乘)’이야, 물러서서 삼승법문을 설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막 나옵니다. 이런저런 말도 나오고, 유치원 아이를 보면 유치원 아이에 해당하는 법문을 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또 그에 해당하는 법문,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수기설법(隨機說法)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 보아 가면서 옷 해 입히는 식입니다. 키 작은 사람은 짧은 옷 해 입히고, 키 큰 사람에게는 긴 옷 해 입히고,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팔만 사천 법문이 벌어진 것입니다. 중생 근기가 팔만 사천으로 모두 다 각각 다르니, 그게 소위 방편설(方便說)입니다. 그것은 전부 실설(實說)이 아닙니다.

처음에 일승법문, 돈설화엄 할 때 그때에 모두 알아 버렸으면 눈깔사탕 따위는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유치원 이야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 이야기 모두 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할 수 없이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법문이 모두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어느 정도 커졌습니다. 부처님 법문을 알아들을 만큼 근기가 성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에 {법화경}과 {열반경}을 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으로 말한 연유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화엄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이고 최후에 또 {법화경} 설한 것이 일승법문인데, 화엄·법화 중간에 40년 동안 설한 그것은 전부 다 방편설입니다. 거기에 가면 온갖 법문이 다 있습니다.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그것도 실제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 키우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승(一乘)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이냐. 이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그것은 실법(實法)이니까. 일승이란 화엄·법화가 일승을 대표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화엄·법화는 어떤 진리에 서 있는가? 화엄·법화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일승 원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조직하여 집대성한 사람이 천태 지자(天台智者)선사입니다. {법화경}에 대해 천태 지자선사가 정의(定義)한 말씀이 있습니다.

“원교라 함은 증도를 나타낸 것이니 양변을 막아 버렸다[圓敎者 此現中道 遮於二邊].”

일승 원교란 것은 실지 그 내용이 중도(中道)인데 중도란 것은 양변을 여읜 것이라는 말입니다. 양변이란 유(有)와 무(無), 시(是)와 비(非), 선(善)과 악(惡), 이것이 전부 양변입니다. 상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전부 양변으로 되어 있는데, 그 차별적 양변이란 것은 실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양변을 쌍으로 막고

정히 중도에 들면

이제를 쌍으로 비춘다.

心卽明淨

雙遮二邊

正入中道

雙照二諦

말하자면 도를 자꾸자꾸 많이 닦아 가지고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연히 밝을 것 아닙니까. 수도(修道)를 많이 해서 마음이 완전히 밝고 깨끗해져 버리면, 번뇌망상이 하나도 없이 얼음알같이 그렇게 깨끗해져 버리면, 그러면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런 동시에 정(正)히 중도에 들어갈 것 같으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그것도 양변과 같은 것인데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이 밝아 가지고 확철히 도를 깨칠 것 같으면 쌍으로 이변을 막아 버린다, 이변을 초월한다고 했고, 그러면 그것이 중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중도에 들어가면 ‘2제(二諦)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은 진속이 서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2제(二諦), 진(眞)과 속(俗)이 서로 합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합합니다. 서로 융합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차별적인 선악이나 유무의 양변을 완전히 초월하는 동시에 이것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중도라 하며, 이것이 원교(圓敎)이고, 이것이 일승이다, 그 말입니다.

천태스님 말씀은 {법화경} 위주인데,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이란 것은 현실 이대로가 절대(絶對)라는 말로, 이것은 그 원리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현실의 모든 차별적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에 있습니다.

그러면 ‘차(遮)’와 ‘조(照)’라 하는 말, 양변을 초월한다[遮]와 양변이 서로 통한다[照] 하는 이것이 어떻게 다른가? 양변을 여읜다, 초월한다는 이 말은, 비유를 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꽉 끼어 있어 해가 안 보이지만 구름이 확 걷히면 해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변을 초월한다는 말은 ‘구름이 걷힌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양변이 서로 통한다 하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구름이 걷혔다’ 하면 으레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해가 드러났다’고 하면 ‘구름이 걷혔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遮)’와 ‘조(照)’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쌍차쌍조(雙遮雙照), 쌍으로 걷히고 쌍으로 초월하고! 쌍으로 비추고 쌍으로 통하고!

쌍으로 통한다 하는 것은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승원교, 중도라 하는 것은 모든 차별을 초월하고 모든 차별들이 원융무애하여 서로 융통자재한다, 이 말입니다. 이런 세계를 일승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진법계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평등하여 전부 진여(眞如)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융통자재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애법계(無碍法界)라 합니다. 유무도 가림이 없고, 시비도 가림이 없고, 선악도 가림이 없고, 이래서 모든 것이 무애자재, 무애법계인 것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 즉 무애법계이고, 무애법계 즉 일진법계인데, 이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원교라 하는 것입니다.

법화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원교대종(圓敎大宗)이라고 하는 화엄에서는 일승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화엄이라고 하면 요새 강원(講院)에서 배우는 {화엄청량소(華嚴淸凉疏)}라는 것이 있는데, 청량(淸凉)스님이 여기에서 화엄종취(華嚴宗趣)에 대해 정확히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곧 비추며 막고

곧 막으며 비추니

쌍으로 비추며 쌍으로 막아서

둥글게 밝아 일관하면

이 종취에 계합하는도다.

卽照而遮

卽遮而照

 照 遮

圓明一貫

契斯宗趣

즉조이차(卽照而遮), 곧 비추면서 막는다. 결국 모든 것이 융통자재했다, 즉 모든 것을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시에 즉차이조(卽遮而照)니 모든 것이 융통한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을 초월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융통해 버리고, 모든 것이 융통할 때 모든 것이 다 초월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쌍조쌍차(雙遮雙照)가 되지 않습니까. 쌍으로 다 통하고 양변을 초월했다, 즉 양변이 서로서로 융통하고 양변이 서로서로 초월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명일관(圓明一貫), 둥글게 밝다, 모든 것이 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관할 것 같으면 계사종취(契斯宗趣), 화엄종취에 맞다 그 말입니다.

근본요지는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화엄종취라는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쌍차쌍조에 있다, 그 말입니다. 쌍차쌍조라 하는 것을 확실히 바로 알면 이 화엄종취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청량국사(淸凉國師)의 화엄종취에 대한 정의입니다.

천태스님은 말씀하시기를 “중도란 것이 쌍차쌍조이니 이것을 바로 알면 중도인 동시에 일승이고 원교이고 법화도리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청량스님은 “화엄이 원교인데 화엄도 또한 딴 것이 아니라 쌍차쌍조인데, 이 도리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화엄도리의 종취를 알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화엄에 대해 천태스님, 청량스님이 말씀하신 것은, 원교라는 것은 같은데 화엄종에서는 {법화경}을 대승종교(大乘終敎)라 해서 ‘최후의 교리’이지 ‘원만원교’는 못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있으나, 그것은 서로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이리도 표현하고 저리도 표현한 것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간에 불교에서 가장 구경인 최후 원리를 설한 경을 화엄법화라 하는데, 화엄·법화를 총칭하여 일승원교(一乘圓敎)라 합니다. 그러니 일승원교란 그 대표적인 천태스님, 청량스님 말씀과 정의에 의하면 쌍차쌍조하는 중도에 서 있는 것이 즉 화엄이요, 법화이다, 이것입니다.

쌍차쌍조(雙遮雙照)라는 것, 이것이 이론적으로 들어가면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양변을 완전히 초월하여 양변이 완전히 합해서 통한다. 그러면 화엄의 사법계(四法界)가 벌어집니다.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무애법계(理無碍法界), 사무애법계(事無碍法界)입니다. 결국 이무애법계, 사무애법계를 말하려고 이법계, 사법계를 말한 것인데, 이법계 중에 사법계가 있는 것이고, 사법계 중에 이법계가 있는 것이지 이법계 사법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법계 사법계를 따로 세웠지만 각각 이법계 중에 사법계, 사법계 중에 이법계, 이렇게 하여 이사(理事)가 무애(無碍)입니다. 이사가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천삼라(天森羅), 지만상(地滿象)이 하나도 무애법계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 시방세계의 모든 존재가 중도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절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결론이 내려집니다. 이것이 화엄·법화의 근본이론입니다.

그러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로서, 내 말했듯이 극락세계를 딴 데 가서 구할 것 없고 천당을 딴 데 가서 구할 것이 없습니다. 실지 근본원리인 쌍차쌍조하는 중도도리를 확실히 깨쳐 버리면 이대로 전체가 무애자재, 무장애법계인 것입니다.

그러면 앉은 자리 선 자리가 극락입니다. 근본요지는 어디 있나 하면, 눈을 바로 떴나 못 떴나 이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소리이지만 해가 아무리 떠 있다고 해도 눈감고는 광명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무애법계, 일승법계, 진여법계, 무장애법계에 살고 있지만 눈을 감고 앉아서 자꾸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면 그것 참 딱한 노릇 아닙니까.

참으로 다행한 것은 우리가 눈을 떴든지 감았든지 간에 이 무장애법계, 광명의 세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거기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눈을 감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하더라도 자기가 눈을 떠서 광명을 못 본다 그뿐이지 이 광명의 세계, 무애법계, 일진법계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사실을 확신하고 노력하여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 이외에 그와 모순되는 말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전부 방편설입니다. 방편가설일 뿐 실설(實說)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노력하여 실설을 따라가야지 방편가설인 줄 알면서 그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방편가설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좀 정신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 꼬마들에게 아무리 대학 과정을 배우라고 해도 모르니 그것을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니 할 수 없이 유치원 과정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일승이 실지로 근본법은 근본법이지만 일승을 위해서는 방편가설이 전부 다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시방국토(十方國土) 중에 유유일승법(唯有一乘法)이라, 일승법뿐입니다. 본래 전체가 일승법계고, 전체가 무애법계고, 전체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는데 그러면 왜 부처님은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가? 그게 모두 방편설입니다. 설사 아무리 방편설을 설하였지만, 우리가 아무리 어둡다 어둡다 해대지만, 사람 개개인 전체가 다 광명 속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눈을 감았든가 떴든가 간에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은 다르지만 광명 속에, 일진법계 속에, 무장애법계 속에 살고 있는 것만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가장 구경법(究竟法)이냐? 그건 아닙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에는 일승법이 실(實)이고 삼승은 권(權)이라, 이렇게 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본다 해도 나중에 가서는 전체가 중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삼승도 중도 아닌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무애자재한 교리, 사법계(事法界)라든지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든지 무애법계, 일승원교라 하는 것이 우리 불교의 구경(究竟)이냐? 그게 아닙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선(禪)이란 것이 있습니다. 일승이니 하며 아무리 큰소리 해대지만 이것은 말에만 그칠 뿐, 말! 말이지 실은 아닙니다. ‘교’라 하는 것은 뭐라고 하든 ‘말’이지 ‘실’은 아닙니다. 아무리 일승이 실법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빨간 거짓말입니다. 일승 이야기 아무리 해봤자 밥 이야기는 배 안 부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 가지고는 해탈 못 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 가지고는!

밥은 실제 떠먹어야 됩니다. 그러니 오직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려면 참선(參禪)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교외별전, 즉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교’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마음을 전한 것인데, 말씀이란 것은 마음을 깨치기 위해 한 것이지 딴 것 아닙니다. 요리강의라는 것은 밥 잘 해 먹자는 것인데 밥 잘 해 먹자는 이외에 뭐가 있습니까. 요리강의를 천날 만날 해도 배가 부르는가,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교외별전에서 볼 때는 일승 아니라 더한 일승이라도 이것 전부가 방편이고 전부 가설인 것입니다. 실지에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진정(眞淨)스님 말씀이 있습니다.

다함이 없는 자성바다는 한 맛이나

한 맛이 끊어져야 나의 선이다.

無盡性海含一味

一味相沈是我禪

무진성해(無盡性海), 다함이 없는 자성바다, 자성바다 전체가 한 맛이니, 일진법계 무애법계다 그 말입니다. 일미(一味)라 하는 그것이 즉 무애(無碍)입니다. 어째서 일미(一味)가 무애냐 하면 이 우주 세계라 하는 것은 차별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이 틀린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일미가 되려면, 한 맛이 되려면 서로 완전히 통해 버려야 됩니다. 안 통하면 한 맛이 안 됩니다. 결국 일미라 하는 것은 전부가 통하는 세계, 색과 공이 통하고 모든 것이 다 통해 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목에서 볼 때는 일미상침시아선(一味相沈是我禪)이라. 일미, 한 맛이란 것, 무애, 모든 것이 통했다는 것, 중도니 뭐니 해대지만 사실에 있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입니다. 실지와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하는 소리 아닙니까.

“손가락을 가지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 일승불교가 “실(實)이다, 실이다!”라고 하는 이것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에 얽매여도 안 됩니다. 결국 화엄이니 법화니 하는 것이 “실이다, 실이다” 하고 자꾸 주장을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동시에 이것도 방편가설입니다.

화엄·법화 일승원교가 다 방편가설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만 비로소 자기 마음을 깨치는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일승원교가 참으로 우리 불교의 진리다, 그것이 구경(究竟)이다, 최고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손가락에만 매달려 있지 달은 영원히 못 보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방세계가 전부 일승불교이며 일승도리인데, 일승도리라 하는 것은 무애법계 즉 중도에 서 있습니다. 이 중도란 불생불멸입니다. 또 양변을 여읜 것, 생멸이 완전히 통하는 무애법계란 말입니다. 이것을 ‘교’에서는 실이라 하여 구경법이라 하는데, 참으로 사실을 알고 보면 이것도 일종의 방편이고 가설이며, 달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화엄이고, 법화고, 일승이고, 원교고 다 내버려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저 태평양 한복판에.

그리고 어떻게든 노력해서 손가락만 보지 말고 달을 봐야 되겠다 이것입니다. 예전에 늘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조사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바야흐로 공부할 분(分)이 있도다.

見佛祖如 寃家相以

方有參學分

그러면 예전 조사(祖師)스님들의 어록(語錄)은 모두 실(實)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겠지요. 물론 화엄·법화와는 틀립니다. 그러나 나중에 참으로 바로 깨쳐 놓고 보면 조사스님의 어록도 사실에 있어서 ‘눈 속 가시[眼裏荊棘]’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초불월조(超佛越祖),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하는 이런 출격대장부가 되어야만 비로소 횡행천하(橫行天下)하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든지 내 말 듣지 말아라 하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이 방편에 얽히고 저 방편에 얽히고 하여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하면 영원토록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이렇게 말하니, “허, 그러면 다 필요 없네. 그 뭐 화엄·법화도 필요 없고 조사어록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런 것 다 뭐 할 필요 있나, ‘이 뭣고!’만 하면서 앉아 있으면 안 되겠나!” 그야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 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리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유치원에서는 유치원 과정이 필요하고 초등학교에서는 그 수준에 맞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모든 방편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유치원 자격밖에 안 되는 사람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한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한다고 말만 그렇게 들었지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조그만 돌도 하나 못 드는 어린애가 큰 바위를 들려고 한다든지 태산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역량에 따라서 방편도 실이 되고 실도 방편이 되는 것이니까 우리가 모든 것에서 한 법에 국집(局執)해도 못쓰고 또 한번이라도 함부로 버려도 안 됩니다. 사람 사람이 그 정도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원 근본은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해서 불타와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참으로 공부할 분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근본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서야 참으로 크게 눈을 뜨고 살불살조(殺佛殺祖)하는 그런 대출격장부가 될 것입니다.

이만 했으면 방편이 무엇이다 하는 것, 그에 대해 무엇을 취하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니, 강원에서는 경(經) 부지런히 익히고 선방에서는 화두(話頭) 부지런히 해 가지고 어떻게든 자기 하는 공부를 하루바삐 빨리 성취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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