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스님─남의 허물 꾸짖기전에 자기잘못 먼저 살펴야

남의 허물 꾸짖기전에 자기잘못 먼저 살펴야

고산스님

지금의 우리 사회는 너무나 혼탁해서 하루라도 빨리 도덕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될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무너져가는 윤리·도덕을 바로 잡는 길은 오직 부처님 법의 실천과 포교뿐임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2천5백년전 이 사바세계에 오셔서제일 처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일곱걸음을 걸은신 후에 한손은 하늘을 가르키고 한손은 땅을 가르키며 하신 말씀이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부처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류, 심지어 미물, 곤충, 초목,총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불성(佛性)자리를 가지고 있고, 그 불성 자리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첫 사좌후로 “이렇게 거룩한 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너희는 왜 암흑세계에서 헤매고 있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듣고 생각을 돌려서 깨달아라”고 설하셨습니다.

이렇듯 49년간 설하신 부처님의 법문은 구절구절마다 윤리·도덕 아닌 말씀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3천위와 8만수행을 갖추신 분입니다.

위엄과 거동이 3천가지, 실행에 옮긴 부처님의 행이 8만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 3천위 8만행을 듣고 배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배우려고 하지는 않고 그저 부처님앞에 달라며 바라기만 할 뿐 입니다.

화엄경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얻는 복은 ‘거러지’ 복이요.

주는 복은 ‘보살복’이다”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거러지 복을 계속 지으려고만 하니 참 암담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 나도 남과 같이 남에게 자비심을 베풀게 해 주세요” 라고 빌어야 그 사람에게 복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복을 달라고만 한다면 그 사람은 금생 내내 불교를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바꿔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인연으로 종을 삼아 심신을 주창했으며, 믿음으로 실천에 옮기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심(信心)입니다.

신심은 믿을 ‘신’ 마음 ‘심’자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은 너희 마음을 믿어라”며 스스로의 마음에 가책되는 행을 하는 자는 당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자는 ‘무위무작(無爲無作)(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고 조작함이 없는 것)’으로 행을 삼아 생을 살아가니 죄지을 일이 없다고 얘기 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애착을 가지고 아웅다웅 싸울게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리고 공자께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종을 삼아서 신의를 주창했습니다.

이렇듯 세계 모든 성인을 통틀어서 살펴 본다면 그 어느 성인도 윤리도덕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신 분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많은 분 가운데 일거수 일투족 도덕에 대한 말씀을 하신 분은 오직 부처님 뿐입니다.

우리 스님네들이 입산해서 제일 처음으로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서 보면 부처님께서는‘큰자는 형으로 삼고, 작은 자는 아우를 삼으라’ ‘높은 소리로 침뱉지 마라’ ‘옷깃을 헤치고 팔을 흔들고 돌아다니지 마라’ ‘병든 사람이 있거든 자비한 마음으로 간호를 잘 해라’ ‘음식을 먹을 적에 쩝쩝 음식 씹는 소리, 후루룩 물마시는 소리를 내지 마라’등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결론적으로‘자기 몸 가운데 잘못됨을 항상 꾸짖고 고쳐 착한데로 옮기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8만대장경의 경·율·론에 윤리·도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율장)에는 ‘자기의 잘못을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의 흉을 보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제일 근본입니다.

남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의 허물은 열가지도 넘기 마련입니다.

자기 허물 없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입에 담지 않는 법이죠.

그래서 부처님의 율장은 불문에 귀의했을때 오계(五戒)를 설해줍니다.

오계는 ‘산 목숨 죽이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음행하지 마라.

거짓말 하지 마라.

술마시지 마라’는 것으로 이것은 전체 윤리·도덕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팔관제계를 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또 스님들 비구 250계 비구니계 348계 모두도 ‘~해라, ~하지마라’ 등으로 전체가 윤리성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논장또한 그렇습니다.

(능엄경)에 보면 ‘한 국토에 생(生)하는 자, 한 나라에 태어나는 자, 전체가 동업(同業) 중생이다’했습니다.

동업중생이란 업을 같이 지었기 때문에, 똑같이 한 나라에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동업중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동업으로 태어난 우리 중생이 서로 치고 박고 얼굴을 붉혀서 되겠습니까 남북이 가로막힌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여러분 마음 가운데 담장이 높이 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 각각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남북통일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능엄경에서는 ‘동업중생’화엄경에 “일체중생의 뜻을 거스리지 아니하고 일체중생의 숙원하는 바를 따라 베풀어 주는 것이 가히 다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남을 위해 베푼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이험악한 세상을 풍요롭고 따뜻한 세계가 될 것입니다.

또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해 중생업이 다하고, 중생번뇌가 다하더라도 나의 원은 다 할 날이 없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일체 중생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베풀어 주는 이 생각, 허공계 내지 중생업·번뇌가 다 하더라도 내 원이 다 할 날이 없다는 광대무변한 보현보살의 행원이 있는데도 여러분들은 얼마나 실천을 하고 있습니까.

행하려고는 아니하고 욕심 보따리만 안고 있으시겠지요.

욕심을 버리고 텅빈 마음으로 법문을 들어야 제대로 들릴 것입니다.

마음 그릇을 먼저 비워야 물건이 담깁니다.

또다른 예로, 여러분은 모두 보살계를 받았을텐데 경전 구절에 ‘부모·스승·삼보를 효순하는 법’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부처님이 설하신 (부모은중경)에 보면 ‘나를 낳아 키워 준 부모를 양 어깨에 모시고 수미산을 돌고 돌아 이 몸이 닳아 미진이 될지라도 부모 은덕은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는 세상인 것입니다.

가끔 제주도 법회차 그곳에 들렸다가 들었는데 4,5년전부터 노인들을 제주도에 버리고 가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효도관광시켜 준다고 제주도로 데리고 가 “어머니, 아버지 여기 잠깐 기다리고 계세요, 뭐 마실 것 좀 사 올게요”라고 말하고는 그 길로 내빼, 자기들만 비행기타고 와 버리는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만이 아니라 설악산, 지리산, 공원지대마다 노인들을 갖다 내 버린다고 합니다.

자, 이렇게 내 버리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 보세요.

물론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가끔 잔소리로 젊은 사람을 귀찮게해서 그렇다고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자식된 도리를 그렇게 저버려서 되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을 지나가는 말로 한번 들었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부처님 말씀만이 아니더라도 세계 4대 성인들의 명언을 한번 들었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교수가 자기 아버지를 죽여 놓고 허장성쇠로 곡하는 비양심적인 행위를 취할 수 있는 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과욕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극락을 가고자 한다면 욕심부터 버려라.

성불을 하고자 하면 욕심을 버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절에 오면 법회 시작전이나 끝난후에 엎드려서 빈다는게 ‘달라’ 소리만 합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 입니까.

부처님은 “목숨이 짧은 사람은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면네 목숨이 길어질 것이다.

병든 자를 구완하면 네 병이 없어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복이 없는 자는 복덕 종자를 심어 베풀어라.

베풀면 온다.

결과의 열매를 스스로 거둔 것이다”고 윤리·도덕의 실천을 말씀 하셨을 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복도 주고, 명도 주고, 모든것을 나눠 주리라’처럼 ‘오너라, 준다’는 요행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2천만 불자는‘달라’ 소리 하는 사람만 많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적은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포교를 못한 스님들에게 있겠죠.

그러나 여러분들의 짧은 실천력에도 그 원인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법문을 실천하려 하지 않고 ‘그냥 하는 말이다’라며 지나치지는 않습니까? 설령 그렇다고한들 악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이 더 많은이 세상에 착한 사람이 조금 더 신경써 악한 몇몇 사람을 교화시키면 이 사회는 밝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행하는 사람이 윤리도덕을 제대로 행하는 사람이고 참다운 불자가 되는 길입니다.

부처님 법에는 발로참회라는 것이 있습니다.

드러낼 것을 확 드러내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발로참회입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살때 집안이 화평하게 됩니다.

하나가 될때 비로소 세상이 확 트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상을 버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반조하지 아니하면 경을 아무리 봐도 이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실천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이 그릇된 세상을 바로 잡을 이는 부처님 밖에 없습니다.

또 부처님 법을 전하는 스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사회를 부처님 법으로 밝히지 아니하면 영영 이 세상을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법문을 듣는 여러분이 모두 하심해서 포교사가 돼 보세요.

하루 아침에 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바른 소리만 하고, 부처님 법을 전달하며 사세요.

그것이 부처님 뜻을 이어 이 세상을 밝히는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세상을 밝히는 선구자가 돼야 하고 인도자가 돼야 합니다.

이 세상에 나신 것은 그 나름대로 다 뜻이 있어 나셨을테니까요.

고산스님─경전공부 염불정진

경전공부 염불정진

-고산스님-

경(經)은 부처님이 되는 길로 인도하는 구도의 지침서요, 온갖 번뇌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을 적어놓은 책입니다.

자연, 경을 읽고 탐구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지식으로 쌓아두기 위함이 아니라, 실천 수행을 하기 위함에 있습니다.

현존하는 경전을 크게 나누어 보면 참선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은 경전, 공부에 좋은 경전, 중생교화에 효력이 큰 경전 등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불자들이 ‘어떤 경전을 보는 것이 좋은가’를 물어보면, 자기성불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선가구감.선문촬요.육조단경.금강경오가해 등을 지송하라고 합니다.

경전 공부를 하는 이는 초발심자경문부터 시작하여 철학적인 능엄경.금강경.

원각경.법화경.화엄경.유마경.해심밀경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중생을 포교하는 데 있어서는 여러 경전을 가르치는 것보다 천수경.반야심경.

관음경.금강경.법화경을 깨우쳐 주는 것이 적당한데, 이 경전들은 성불에도 좋지만 특히 염송을 하거나 사경을 하는 복덕도 대단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면 경을 봐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경을 읽는 목적은 그것을 수행의 지침으로 삼아 일념으로 정진하여 열반의 길로 나아감에 있습니다.

마음을 반성하지 않은 채 경전을 본다는 것은 곧 더러운 걸레로 깨끗한 방을 다시 닦는 것과 같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세월만 허비할 뿐입니다.

선(禪)을 안(內)이라고 한다면 교(敎)는 그 안 을 감싸고 북돋워주는 밖(外)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과 속이 일치할 때 진정한 공부가 됩니다.

흔히들 불교를 알고 싶어도 한문 경전을 가까이 할 수가 없고 어렵다고들 하지만,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팔만대장경이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있고, 옛 고승들의 어록도 한글로 되어 있습니다.

또 불교서점에 가면 부처님 일대기를 비롯하여 알기 쉬운 불교 상식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사서 마음을 모아 정독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읽다가 모른 것이 있으면 가까운 절에 계신 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어 보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기도 하십시오.

그렇게 하다보면 자연히 깊게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평소에 염불을 하는 불자들은 지극한 마음으로 꾸준히 해야 합니다.

염불을 하는 그 순간에는 자신이 희구하는 그 일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염하는 부처님만을 관(觀)하면서 부처님의 명호를 불러야 진짜 염불입니다.

그러므로 염불을 할 때는 부처님만 생각하십시오.

흔히들 조상천도를 위해서는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염하고, 자기 성불을 위해서는 석가모니불을, 학생들 학업성취를 위해서는 문수보살,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많을때는 관세음보살이 최고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자기 형편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부처님 명호를 불러야 하는가를 많이 질문합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아미타불을 했으면 어떠한 경우에 처하든 아미타불을, 관세음보살을 했으면 어떠한 경우에 처하든 계속 관세음보살을 하면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름지기 불교의 목표, 불교수행의 목표는 성불이요 열반입니다.

성불, 열반의 경계는 본래 청정한 본심자리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찾으면 성불합니다.

또 그 자리를 찾으면 열반에 들지 말라고 하여도 열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열반의 경지는 어떠한 것인가? 열반에 들면 열반의 4덕인 상락아정(常樂我淨)에 머물게 됩니다.

늘 변함이 없으며, 괴로움이 없고 즐거움만 있으며, 가아(假我)가 아닌 진아(眞我)만 있으며, 더러운 것 없이 깨끗함만 있는 상태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러한 열반의 경계에 들려고 하면 일체 생각을 다 쉬어버리고, 쉬었다는 생각도 쉬어버려야 합니다.

쉬고 쉬고 또 쉬어 쉬었다는 생각마저도 쉬어버려야 합니다.

그 자리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았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하나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이름 하여 열반락(涅槃樂)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행하여 열반의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래의 방에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열반묘락(涅槃妙樂)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고산스님─“행복하려면 감사하고 미소 짓고 말 아껴라”

행복하려면 감사하고 미소 짓고 말 아껴라

조계종 전계대화상 고산스님

고산 스님께서 사자좌에 올랐다.

스님께서는 주장자를 높이 한 번 들어보였다.

스님은 이미 주장자 법문을 마쳤는데, 주장자를 보는 이의 마음은 주장자를 떠나지 못한다.

달마대사는 (사행론)의 ‘시유관찰형색문(示諭觀察形色門)’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장자를 보고 주장자란 견해를 지으면 이는 주장자 상(相)을 보고 주장자 견해(見解)를 짓는 것이요, 마음으로 이 주장자를 보더라도 이는 주장자 상(相)이라.

법은 주장자도 없고 주장자 상도 없으니 이러한 까닭에 주장자를 봄으로 곧 주장자 법을 얻는 것이다.

일체 형색을 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고산 스님은 (유마경)을 펴서 한 구절을 독송하고 나서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주셨다.

“중생들은 생사에 윤회합니다.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려면 중생의 나고 죽는 곳에 들어가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중생을 다 제도하고 나서야 열반에 듭니다.

보살은 죽고 태어나는 것이 자유자재하여 돼지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돼지로 태어나고, 개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개로 태어나며,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또한 보살은 영화롭고 욕되는 일에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공부하는 이를 업신여기지도 않아요.

이 세상 만물에는 배울 것이 다 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 전체가 다 우리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강은 강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다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워야 해요.

바라밀은 미혹의 언덕에서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으로 모든 보살이 육바라밀에 의지해 행을 닦을 때는 바라밀을 부모님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데는 끝이 없어야 하며, 한량없는 보시를 행해야 합니다.

늘 용맹정진하고, 한량없는 부처님의 공덕을 듣고 지혜의 보검으로 번뇌 도적을 베어내야 합니다.”

고산 스님께서는 매달 석왕사에서 약사재일을 맞이하여 법문을 하신다.

법문 때마다 어디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유마경)강의를 한품씩 해 주시는 것이다.

(유마경)강의를 끝낸 스님은 대중을 한 번 훑어보시고서는 다음 법문을 이어갔다.

“어떤 보살이 기도 잘하다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뇌경색이라 의식이 없는 거여.

그래서 산소호흡기 꼽고 병원에 누워 있으니 그 치료비가 엄청난거라.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야.

억지로 목숨 이우는 것도 그렇고 해서 자식들이 산소호흡기 빼줄라고 해도 병원에서 안 빼준다카데.

그래서 법원에 호소를 해도 1심, 2심, 3심 다 병원이 이긴다고 하데요.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것이 다 병원이 돈 벌려고 그런다고 해요.

여러분들은 죽을 때 병원에서 호스 주렁주렁 달고 죽지 말고 그냥 집에서 편안하게 죽어요.

그것이 본인에게도 좋고, 죽고 나면 자손들에게 피해 안 끼치고 좋은 일이야.

오래 살려는 것도 다 헛된 욕심이지.

아무 소용없어.”

고산 스님은 법문을 통하여 육신의 무상함을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육신의 공(空)함을 일깨워주는 소동파와 불인요원선사의 재미있는 일화가 생각난다.

어느 날 홍주자사로 부임해 간 소동파는 명성이 자자한 불인요원 선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불인 선사의 방에는 앉을 의자조차 없었다.

선사는 소동파에게 말했다.

“마침 오늘 내 방의 의자를 누가 빌려갔으니 아무 데나 앉으십시오.”

소동파는 선사를 좀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한마디 하였다.

“의자가 없으면 스님의 몸뚱이를 좀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소동파의 말에 불인 선사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맞추면 자사의 의자가 되어드리겠지만,

만약 그대가 틀린다면 옥대(玉帶)를 풀어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몸뚱이는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대는 원래 공(空)한 것인데 자사는 어디에 앉으려 합니까?”

‘사대는 원래 공하다’는 한 마디에 말문이 막힌 소동파는 불인 선사에게 옥대를 풀어주고는 가르침을 청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저 염불 열심히 하여 자기 갈 날을 준비해야지.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죽는 것을 모르고 자꾸 욕심부리지.

어리석음, 탐욕, 세상에 대한 분노를 놓아버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마지막 가는 준비 잘 하는 것이지.

탐진치 만큼 무서운 것이 없어요.

그리고 빨리 성불하고 싶으면 교만한 마음이 없어야 되요.

상대방보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낫다 싶으면 상대방을 얕보고 그래.

남을 업신여기면 염불, 간경, 기도 등 무엇을 해도 성불하기 어려워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상불경보살로 살 때 돼지보고도 부처가 될 것이라 했고, 거리에 있는 무엇을 보고도 다 부처가 될 것이라 하면서 공경했어요.

우리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내 앞에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공경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것이 바로 성불하는 길이고 부처 되는 길이지.

요즈음 우체국이다 하고 전화해서 돈 다 빼가지고 가는 그런 사기단이 있다고 하데.

보살들이 피해를 당하고 나서는 ‘스님 어쩌까에?’ 하는데 내가 뭐 판검사가 어찌 아노.

자신이 잘 해야지.

그리고 요즈음 뉴스 보니까 부모에게 몹쓸 짓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세상에서 가장 못된 짓이 부모에게 불효하는 거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힘들게 키웠고 세상에 내 보낸다고 힘들었고 또 키운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 은덕을 모르고 불효를 해.

타인을 해치는 것보다 부모를 해하는 것이 더 나빠요.

지금 말법시대라 하지만 부처님 시대나 지금 시대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요.

단지 부처님 재세에는 착한 사람이 많고 나쁜 사람이 적었을 것이고, 말법 시대에는 착한 사람이 적고 나쁜 사람이 많은 것이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고민을 안고 고산 스님을 찾아온다.

그럴 때면 고산 스님은 사람들에게 분별심을 버리라고 한다.

좋은 날을 택해달라는 이에게는 비가 오면 촉촉이 와서 좋고,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바람이 부는 날은 선선해서 좋고, 구름이 낀 날은 끼어서 좋으니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일러준다.

좋은 방위를 찾는 이에게는 불교는 무남무북무동무서(無南無北無東無西)라, 우주는 갓이 없기 때문에 동서남북이 본래 없으며 중앙이 본래 없는데 어디에서 중심을 잡아서 동서남북을 정할 것이며 방위를 정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 한단다.

기도 염불을 해도 부자가 안 된다고 하는 이에게는 남에게 베풀어 복덕종자를 심으라 한다.

스님은 삿된 법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정법을 간곡히 일러주신다.

그래서 스님은 세납이 칠십이 훨씬 넘었건만 법문을 청하는 이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 바른 법을 들려주신다.

“부처님 말씀에 첫 번째 생각할 때 종자가 마련되고, 두 번째 그 생각을 거듭할 때 싹이 틔고 세 번째 생각을 하면 스스로 열매를 거둔다고 했어.

그러니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배운 사람은 함부로 나쁜 생각, 잡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데,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은 함부로 모든 생각을 일으켜서 많은 종자를 심어서 그 열매를 거두는 거지.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되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사람들은 분주하게 끝없이 업을 짓고 과보를 받아요.”

고산 스님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요, 둘째는 항상 미소를 지을 것이요, 셋째는 말을 아끼라고 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일체만유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미몽을 깨우쳐주시니 감사한 것이요, 부모님이 나를 낳아 키워주시니 감사하지요,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입 아프게 꾸짖어주는 것이 감사하지요, 나를 때리는 사람이 있으면 손 아프게 채찍질해 주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말을 아껴야 합니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 항상 침묵하고 말을 조심하면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인데, 들은 대로 본 대로 말을 쏟아낸다면 날마다 시시비비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 행복할 수가 없지요.”

고산 스님은 출가 이후 64년 동안 수행과 포교, 불사로 일관된 실천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논어), (맹자), (중용), (대학)등 사서를 배웠을 정도로 머리가 뛰어났다.

초등학교 때 뒷동산에서 친구랑 한시(漢詩)를 주고받으며 놀았을 정도이다.

일찍 너무나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여윈 고산 스님은 출가하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출가를 결심했던 분이다.

꿈에는 더러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100일 관음기도를 모시기도 여러 차례였다.

1000일 관음기도를 올리기도 했으며, 지금까지 조석 예불 끝에 삼십분간 관음 정근과 발원문은 빠진 적이 없다.

스님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라 한다.

고산 스님이 범어사에서 동안거 결제를 했을 때이다.

이때 가행정진까지 너끈히 해내었다.

입승스님이 죽비를 들고 돌아다니다 졸고 있는 고산 스님의 어깨를 힘껏 세 번을 내리쳤다.

그 죽비에 맞는 순간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한 생각이 번쩍 하고 일어났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진짜 나를 치지 못하고 송장만 치는 구나”하고 큰소리로 외쳤더니 입승 스님이 할을 했다.

입승스님의 할이 끝나기가 무섭게 ”역부여시 도봉타월(亦復如是 掉棒打月, 또한 그와 같은 할은 방망이를 잡아 달을 치는 격이라는 뜻)이라 했다.

그랬더니 조실스님께서 ‘니우끽철봉 석인유혈루(泥牛喫鐵棒 石人流血淚, 진흙소가 쇠망이를 맞으니 돌사람이 피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라 했다.

고산 스님은 조실 스님의 그 말씀을 듣고 순간 뇌리에 번개처럼 한 생각이 지나가서 큰소리로 “알겠습니다”라고 했단다.

고산 스님은 은사 스님이신 동산 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동산 스님은 대중이 차고 넘쳐도 방부를 받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대중과 함께 예불과 도량청소도 하셨어.

은사 스님의 이런 모습을 본받아 지금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상관없이 예불에 빠지는 일은 없어요.”

고산 스님은 비구계를 받은 후부터 경(經), 율(律), 론(論) 삼장을 꾸준히 익혔다.

28살이 되던 1961년 직지사에서 고봉 스님으로부터 전강(傳講)을 받았다.

그때 학업을 증장시키기 위하여 고봉 스님을 모시고 김천 청암사 극락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고봉 스님의 명성이 자자한 터라 청암사에 비구 비구니 학인들이 오십 명 가량 모여들었다.

청암사에서 고산 스님은 강사로 임명되어 자신의 공부를 더욱 증강시킬 수 있었다.

고산 스님은 1966년 고봉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새벽 예불 후 좌선 중에 홀연히 한 경계가 있어 게송을 지었다.

심행일장몽(心行一場夢) 마음 작용은 한 바탕 꿈이요 식심즉시각(息心卽是覺) 한 마음 쉰 것이 곧 잠깬 것이라.

몽각일여중(夢覺一如中) 꿈과 잠깸이 한결같은 가운데 심광조대천(心光照大千) 마음 광명이 대천세계에 비추도다.

고산 스님은 게송을 읊고 나서 “이 우주에 오직 나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이제 되었다.

앞으로 매이지 말라”면서 인가하셨다.

스님은 강사, 율사, 선사로서 어느 한 분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하여 여쭈었다.

“옛 어른들 말씀에 ‘용력가중배 사력십중배(用力加重倍 死力十重倍)라는 말이 있어요.

힘을 쓰면 평소보다 몇 배의 힘이 나오고, 죽을 힘을 다하면 평소보다 열배의 힘이 나온다는 말이지.

사람이 신심을 내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

고산 스님은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초발심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학생이 입학할 때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우등생으로 졸업 못할 사람이 없고, 결혼할 때의 마음으로 산다면 싸울 일이 없고 이혼할 일이 없을 것이며, 회사원이 입사할 때 마음으로 근무한다면 회사도 발전시키고 진급도 할 것이란다.

하는 일이 시들하게 느껴질 때면 ‘첫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돌이켜볼 일이다.

첫 마음으로 잘 살고 있는지 점검한다면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기에 우리는 날마다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약력

1945년 범어사에서 동산화상을 은사로 득도.

48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56년에 동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

1954년부터 1970년까지 20여 안거 성취.

강원에서 삼장(三藏)을 연구하였고, 61년 직지사에서 고봉호상를 법사로 건당 및 전강을 받음.

72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석암화상으로부터 전계를 받음.

조계사, 은혜사, 쌍계사 주지를 역임.

98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

2008년 조계종 전계대화상으로 추대.

저서로는 (우리말 불자 수지독송경), (반야심경 강의), (대승기신론 강의), (사람이 사람에게 가는 길), (지옥에서 극락으로의 여행) (지리산의 무쇠소) 등 다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