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한국불교

1) 삼국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공식 기록은 불기 916(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중국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이다. 그 이전에 인도 출신으로 가야국의 수로왕비가 된 허씨 부인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가져 왔다고 일부 학자들이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불기 915년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불교가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받아들인 시기의 불교는 격의불교였다. 이후 인도의 중관 사상을 계승한 삼종론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고구려의 패망을 맞았다.

백제불기 928(서기 384)침류왕때에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 연구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에는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불기 961 (서기417)년에 불교가 전래 되었으나, 불기 1071 (서기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되었다. 신라불교의 고승 대덕들은 ≪삼국유사≫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안함-자장-보덕-낭지-혜숙-혜공-대안-원효-의상-태현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화려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원광법사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에 세속오계를 주어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 하였다. 또한 원효, 의상스님이 이루어낸 눈부신 교학 연구의 성과와 인재 양성은 중국까지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국 불교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신념 으로 가득차게 되는데 이를 불국토사상이라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한다. 이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선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인들의 이런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 용화향도라 불렀던 화랑과 불국사, 석굴암, 경주 남산 등의 불교성지를 들 수 있다.

용화향도란 ‘미래불인 미륵 부처님이 오시는 용화세계를 여는 무리’라는 뜻으로 신라땅에 미래불의 국토인 용화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인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다.

삼국시대에 전해진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 내렸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과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는 불교 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다.

2) 고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지배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목조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 인정되는 봉정사 극락전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때에 지어졌다. 아울러 문화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 고승을 국사로 모시어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다. 이에따라 왕실의 후원 으로 사찰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어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이에따라 뜻있는 스님들 사이에 권세를 멀리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스님의 정혜결사, 요세스님의 백련결사가 그러한 예이다.

3) 조선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억압과 수난의 시기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주자학과 성리학으로 통치이념을 정립하여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큰 규모로 성장하였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고 서울 도성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뿐 아니라 불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십 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당했고, 각기 특성을 지니며 계승 발전하던 각 종단도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되는 등 세계종교사에서 드문 종교탄압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불교는 혹독한 억불정책 아래에서도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 명맥을 이어갔다. 비록 유교 성리학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왕족과 양반가의 부녀자들은 대대로 믿어온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특히 태조와 세종, 세조, 정조등은 매우 독실한 불자였으며,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세조는 즉위 7년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신미등 당시 고승들과 함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출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능엄경」「묘법연화경」「금강경」 등 많은 국역 불전들이 간행되었는데 이들은 오늘날 한글 연구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시하면서 한문 경전을 민중들이 쉽게 알 수 있고 이해하도록 한글로 번역시키기도 하였다.

서기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서산, 사명대사가 구국을 위해 의승부대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비록 나라는 그들을 버렸으나 그들은 나라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수 많은 스님들이 피를 흘린 대가로 불교에 대한 탄압은 얼마간 완화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혹독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4) 일본제국주의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아래 놓여있던 20세기에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다. 국가의 강력한 통치아래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는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아래 각기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교활동과 동시에 식민지배의 정당화에 봉사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제국주의에 열강들이 군사적인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 지배의 정보 탐색과 지배 이념의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특히 1911년에 조선 총독부가 제정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지총독 통제 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이것은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하였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권장 한 것이었다.

사실 일본불교는 오래전 부터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었는데 이 점은 조선불교의 청정비구와 대비 되는 약점이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하여 처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위배되었고 조선 불교의 전통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나가기 위해 본사 주지스님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박용성, 한용운, 박한영등 적지 않은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 청년회, 만당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5) 1945년 해방후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 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쟁직후 일제시대에 합법화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 정화를 요청한 청정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몇차례에 걸친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러차례의 혼돈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중심의 출가승려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을 하였다. 이리하여 한국불교는 여러 종단으로 나누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기구인 <한국 불교 종단 협의회>를 구성하여 전불교도의 총의를 대변하고 있다.

한편,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인 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 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 3대 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 불교 운동과 민중불교 활동이 전개되어 성과가 있었다.

「종헌」과「종법」등 제도 개혁을 단행 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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