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을 하든지 열불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한다.
허망한 것은 간직할 것 없다.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은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밖에 없다. 다른 건 다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서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 뿐이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 하고 오온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하고 있다. 만날 돌아다녀봐도, 시집을 천만번 가봐도 소용없고 장가가도 별 수 없고 세계 갑부가 되어도 별 수 없다. 생로병사를 면할 수 없고 반야 지혜는 얻을 수 없다.
지금부터 밤낮을 가리지 말고, 오나가나 가만히 있거나 부지런히 일을 하거나 않았고 누워 있는 동안이라도 다만 모든 일에 무심할 줄만 알아가면 자연히 만사에 잘못을 따지는 분별심이 없어지며, 또한 어디에 의지할 생각도 없어지며, 어느 한 곳에도 늘어붙어 살고자 하는 애착도 없으며 또한 사방으로 돌아다니고자 하는 벌떡거리는 망상도 없어지리라.
우리가 천당 갔다 지옥 갔다 하고 육도세계를 돌아다니고 윤회를 하고 그것이 다 번뇌의 업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번뇌의 잠재의식이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를 떠나서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돌아 다니는 것은 아니며 본 마음 자리가 한 것이다.
그러니 죽어서 천당에 가도 그 실상자리, 자기 근본정신이 올라간 것이지 망상 그것이 자체가 있어서 본 마음을 떠나서 올라간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마음이 우주에 편만했다.
즉 크다고 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작은 거냐 하면 바늘 가지고 찔러 볼 수도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는 거면서 그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 있다.
지금 그대가 망상을 일으키고 있으나 그 망상이 일어나는 줄 아는 자리는 망상이 아니므로 그것이 곧 부처님이다. 그러므로 만약 모든 망상을 근본적으로 딱 끊어버리고 나면 그 자리는 또한 부처도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도 중생도 아니고 본래부터 그대로인 이 마음에서 그대가 (나는 부처가 아니다)는 다른 망상을 낸다면 그것이 허물이 되어서 그대는 또한 다시 이유없는 망상을 일으켜 (나는 성불 해야 할 것이다)고 생각할 것이며, 또 한 중생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저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고 나설 것이다.
그러니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이다. 그대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렇게 볼 뿐이다. 망상의 늪에서 헤매일 때, 우리는 결코 나를 찾을 수 없다. 망상은 나의 부재에서 생겨나는 괴물이다. 나의 파괴자는 바로 망상, 그것이다.
도가 높아지면 죽을 때 몸뚱이를 옷 벗듯 벗고 간다. 실은 죽는 것도 아니지만 육체가 죽는다고 보고 지게를 지고 가다 지게를 세워 놓듯이 한다. 그렇게 놓고도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해서 망상이 일어나고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가지 있지만 탁한 마음, 곧 색정이 일어난다. 금생의 자기 몸뚱이는 옷 벗듯이 했지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 깜짝 미해서 피로 엉켜서 있다.
그런데 도가 더 높은 사람을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하지 않고 자기 공부 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 달동안 가만히 하는 이도 있고 아홉 달만에 자기 공부하던 걸 나와서 미한 사람도 있고 또 여덟 달에 미한 사람, 한 달에 미한 사람, 또 열 달을 다 선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2백 80일 동안 하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속에서 나오느라고 큰 고통을 겪게 되므로 출태할 때 제일 미하다. 그래서 깊고 완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닦지 않으면 안된다.
마누라를 자기 명령에 복종하도록 만든 것은 정말로 5천년을 통한 영웅 가운데 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천하없는 영웅도 마누라한테는 꼼짝 못한다. 백만대병을 거느리는 대장이라도 부하를 물속, 불속으로 들어가게 명령 하는 것은 할 수 있고, 항우 같은 천하장사를 단번에 때려눕힐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기운 없는 마누라에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우리가 기분으로 만물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니 제 기분대로 비판해 치워버린다. 남의 말을 들어도 자기 기분 좋을 때는 그 말이 좋게 들리고 기분 나쁠때는 나쁘게 처리되어 버리니 이것이 망상이다. 그것은 결국 육체 때문에 하루 밥 세 그릇 먹느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좋은 말도 나쁘게 받아들이고 나쁜 말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없다. 나는 물질도 허공도 아니니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고 죽을 방법이 없다. 그게 이렇게 얘기하고 듣고도 있다. 이것이 마음이다.)
늘 이것을 앞세워서 나다, 남이다 하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해야 중생을 초월하게 된다. 불이 꺼져도 눈으로 깜깜하게 어두운 것을 보고 불이 켜져도 환하게 밝은 광명을 보는 것이니 어두운 때나 밝은 때나 보는 눈은 변동이 없고, 이 마음자리는 볼 때나 안 볼때나 변하지 않는다. 중생들은 미래 것은 모르고 과거의 기억은 희미해져서 망각해야 되는 것은 번뇌망상으로 경계를 치고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기 때문에 망상 그것만이 나인 줄 알고 깨끗하고 자유 자재한 본체가 있다고 여간 설명해 줘봐도 좀체로 인정할 생각을 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망상이 어떤 자체가 있어서 능동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는 것이고 마음의 본체가 그러는 것이다. 마치 파도와 물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의 움직임이 파도고 파도 자체가 물이듯이 실상 망상도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음이 착각을 한 것이 망상일 뿐 마음을 다 정리해 놓고 보아도 그전 마음 그대로이다. 산은 높은 그대로 있고 물도 깊은 그대로이며 성불을 해도 항 상 그대로이다.
육지와 바다가 갈린다는 걸 부처님께서 늘 말씀해 놓으셨는데 그런 예로 봐서 이 지구가 항상 안전하게 있는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도 얘기하다가 갑자기 사망하듯이 지구도 역시 그런 변동이 있다. 그러니까 현상계인 이 땅덩어리도 그렇게 믿을 수 없는 무상한 존재이고 몸뚱이도 믿을 수 없는 허망한 것이다.
양은 줄곧 이리떼의 침공을 받아왔지만 결코 그것들을 모방하려 들지는 않았다. 낭성을 본받아 미친놈처럼 고함을 지르는 허스키의 유행가가 번지는가 하면, 발작하는 간질환자처럼 온몸을 비틀고 궁둥이를 휘두르는 것으로 첨예를 자처하거나, 제임스 딘의 영화 한두 편으로 이유없는 반항을 시도 한다든가, 텍사스 황야의 개척자를 흉내내 권총강도질, 폭력단의 조직, 몽둥이를 휘둘러 행인을 노리고–확실히 우리는 무언가 빠져 달아난 것만 같다.
정진하는 사람에게 가장 고민되는 것은 망상에 얽히어 정진이 잘되지 않는 그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다. 무엇을 먹을 수도 없고 바짝바짝 사람이 마른다. 이렇게 고생을 하다가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질 때면 참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안 낼 수가 없다.
깊은 산골짜기에만 살던 사람이 어느날 우연히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앞이 툭 트인 무변대해를 바라다볼 때 앗소리를 안 지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넓은 창해를 볼 때 기쁜 마음이 일어나듯이, 번뇌 망상이 뚝 끊어진 경지에 들어가면 이만하면 됐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번뇌망상에 짓밟혀 가지고 맥을 못 쓰다가 큰 우주를 발견하고 보면 온 우주가 내 기운이 된다.
모든 생각을 다 쉬고, 쉬었다는 생각마저 없으면 천진본래의 자기 부처가 뚜렷이 나타나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인 시절에도 이 마음은 조금도 덜해진 적이 없었고, 부처가 된 때에도 이 마음은 또한 늘어나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대들이 별별 망상을 다 내고 온갖 망동을 다 저지른다 할지라도 어찌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아닌 이 마음을 떠나서 할 수 있는 일인가. 비어서 아무 것도 아닌 이 마음은 본부터 클 수도 작을 수도 없으며, 어디로 새어서 흘러 갈 수도 없으며 아무 것도 하는 일도 없으며 또한 아득한 일도 없으며 깨달아 아는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도 분명하며 진실하고 확실하여서 털끝만한 물건도 얻어볼 수가 없으며 또한 범부도 부처도 아니라서 한점 만큼도 아는 것도 없다. 이 마음은 어디에 의지해 있는 것도 아니며 어디다가 붙여서 꾸며진 것도 아니다. 끝까지 청정한 이 마음은 진리며 진아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따져보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부처는 입이 없기 때문에 설법을 할 줄 모르는 것이며, 허망하지 아니한 이 마음에 는 귀가 없는데 그 무엇이 들릴 것인가? 당장에 무심한 줄 알면 만법에 두루하며 천지 이전의 본래 부처 자리가 곧 우리의 이 마음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저 해가 떠서 온 세계를 비추어 아무 데도 거리낌이 없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다만 보고 듣고 따지고 생각하며 행동하고자 하는 모든 생각만 놓아버리면, 이 본래 있는 마음만이 온전히 남아 앞뒤가 뚝 끊어져 있으며 또한 깨달아서 들어설 곳도 없으며 들어설 나도 없으므로 보고 듣는 것이 눈이나 귀가 아니고, 곧 이 마음인 것이다.
모든 생각과 일체 망상, 이것은 다 그대가 스스로 일으켜 낸 것이 아닌가.
그대가 일으키면 계속해서 있고, 내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단지 말하는 이 마음이 곧 무심하며 또한 본래 부처인 줄 확실하게 알고 보면 이 마음은 본래 망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 스스로가 부질없이 망상이거나 하는 딴 생각을 낸 것이다.
산은 높고 물은 깊다.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다는 말인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淸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