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제도한 스님들

임진왜란 때 동래 범어사에 매학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매학 스님은 원래 욕심이 많아 신도들의 재물을 탐내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쌓기에만 눈이 어두웠다.

어느 날 매학 스님이 당시 조선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던 소산이라는 마을 앞을 지나다가 조그마한 집에 서기가 돌고 잇는 것을 발견하였다.

옷깃을 여미고 그 집에 들어서니 웅장한 소리를 내며 옥동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매학 스님은 산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불가에 인연이 깊은 동자입니다.

그러니 잘 길러 주시면 몇 년 후에 내가 와서 동자를 데려가겠습니다.” “불가에 인연이 깊은 아이라면 당연히 부처님 앞으로 가야지요.” 산모는 매학 스님의 말에 순순히 응낙하였다.

그 후 십 년이 지나 매학 스님은 이 동자를 범어사로 데리고 와서 상좌로 삼았다. 하루는 산에 나무하러 갔던 상좌가 빈 지게로 돌아왔다. 그래서 매학 스님은 노기를 띠고 상좌를 크게 꾸짖었다.

그랬더니 상좌는 “스님 그저 놀다가 온 것이 아니옵니다.

제가 수풀을 헤치고 나뭇가지를 낫으로 베었더니 그 나뭇가지에서 시뻘건 피가 줄줄 흘러내리기에 무서워서 도저히 나무를 벨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상좌의 말에 스님은 노발대발하여, “고약한 놈 같으니라고, 어디서 그따위 거짓말을 배웠느냐, 나뭇가지에서 어떻게 피가 흐른단 말이냐. 나를 속이려거든 내 앞에서 당장 나가거라.”하고 호통을 쳤다.

상좌는 그 길로 범어사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가서 열심히 수도를 했다. 상좌가 금강산으로 들어간지 삼 년 되던 해에 매학 스님은 범어사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이 때부터 범어사 고방에 큰 구렁이가 도사리고 있었다.

절의 스님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구렁이는 이상하게도 팥죽을 잘 먹기 때문에 절에서는 구렁이에게 팥죽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금강산에서 매학 스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좌는 범어사로 돌아왔다. 상좌는 여장을 풀기가 바쁘게 즉시 고방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고 구렁이를 향해 정중하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서 상좌는 얼마동안 불경을 외우다가 “스님 이 일이 왠일입니까? 어서 해탈하시와 승천하시옵소서.”라고 말하며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구렁이도 꿈틀거리며 따라 나오는 것이었다.

구렁이가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도 상좌의 독경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구렁이는 냇가의 바위에다 머리를 한참동안 처박고 있더니 마침내 길게 뻗고 말았다. 몸을 벗고 죽은 것이었다.

바로 이 때 구렁이의 몸에서 한 마리의 새가 나와서 상좌의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이튿날 상좌는 새를 안고 다시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 이 새는 짐승들이 교미하는 곳마다 날아가려고 퍼득거리기 때문에 상좌는 이를 막느라고 무진 애를 썼다. 어느 날 날이 어두워 인가를 찾다가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서 묵게 되었다.

상좌는 새를 주인에게 맡기면서, “열 달 후에 당신들 내외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잘 길러 주기 바랍니다.

그 아이는 불가에 깊은 인연이 있는 동자이므로 십 년 후에는 내가 다시 와서 데려 가겠소이다.”라 하고, 이튿날 상좌는 혼자 떠났다.

(그 새는 중음신으로 상징되며, 또한 바로 중음신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 후 상좌는 다시 이 집을 찾아와서 동자를 절로 데려갔다.

상좌는 동자에게 열심히 불도를 닦게 해서 차츰 고승의 풍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루는 상좌가 동자 앞에 무릎을 꿇고, “스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옵니까? 어서 일어나시옵소서.””동자는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스님, 스님은 매학 스님의 화신이옵니다. 정신을 차려 똑똑히 보시옵소서. 본래 저는 스님의 제자였습니다.”하고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의 상좌는 다시 제자가 되고 범어사의 스님이었던 매학 동자는 상좌의 스승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전설에 나타나는 상좌는 앞에서 말한 영원 조사일 것이다.

그리고 매학 스님은 영원 조사의 스승 명학동지일 것이다. 앞의 영원 조사에 대한 이야기나 뒤의 매학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같은 이야기로써 조금씩 달리 구전되었다고 생각된다.

낙안 스님은 흔히 낭백수좌(浪伯首座) 혹은 만행수좌(萬行首座)라고 불린다. 일찍이 범어사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보시행을 발원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하여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스님에게 특기할 만한 일은 커다란 원력을 세워서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원력을 이룩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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