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공주와 상사뱀

원나라 공주와 상사뱀

“어머니, 저 공주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에요. 공주를 좀 보게 해 주세요. 공주를 보지 못하면 전 이래도 죽어요” 청년은 공주를 짝사랑했다.

원나라 순제(1333–1368 재위)의 딸인 공주를 사랑하는 청년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아무리 부모가 달래고 협박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상사병에 걸린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약을 쓰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 상사병에는 약이 없었다. “나라에서 이 일을 알면 우린 삼족을 멸하고도 남는다. 언감생심 그런 생각일랑 접어 두어 참한 여자아이를 택해 장가를 들도록 해라” 청년의 어머니는 아들이 이마를 만지며 타이르고 또 타일렀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자식 하나 있는 것이 상사병이 들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타는 어머니의 가슴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우리 같은 평민이 어떻게 감히 공주를 꿈이나 꾼단 말이냐. 그러니 어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거라. 어디 여자가 공주 뿐이더냐. 많고 많은 것이 여자가 아니냐?” 청년은 궁전의 한 부서를 관리하는 관리인이었다.

그는 궁전의 정원을 한가로이 거니는 공주를 보고 짝사랑을 하게되었다. 그는 오나가나 자나깨나 오로지 공주 생각 뿐이었다. 공주는 아름다운 미모에 예절이 바르고 마음씨 또한 곱기로 평판이 높았다. 그러므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그녀를 한 번 바라만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만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공주였다. 아무나 만날 수 없었으며 또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관리인의 처지에 있는 청년이 공주를 짝사랑하다가 병이 들었으니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청년의 어머니는 늘 다니는 절의 스님을 초청하여 아들의 마음을 달래 보려 하였다.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집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청년이여! 집착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겪는 고통을 얘기하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를 크게 묶어 보면 여덟 가지 고통이 있다.

첫째는 이 세상에 태어나 중생으로서 살아감이 고통이다. 중생은 그의 의지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요, 의지대로 살아가지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업의 힘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둘째는 늙는 것이 고통이다.

생명을 담고 있는 육체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이어서 늙지 않으려 해도 늙게 마련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점차 늙어가는 것이다. 바위도 세월이 가면 풍화작용에 의해 자꾸만 닳아 없어지게 마련인데 하물며 인간이 어찌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늙음이 고통이다. 셋째는 질병이 고통이다. 산야에 널려 있는 약초가 각기 약성이 다르듯이 인간은 수많은 질병에 시달려야 한다. 부처님은 인간의 질병을 4백 4병으로 보고 계시는데 어찌 4백 4병에서만 그치겠는가. 8만 4천의 병마가 항상 육체를 괴롭히고 마음을 고달프게 한다. 넷째는 죽음이 고통이다. 사람은 육체를 가진 존재로서 언젠가는 주어진 삶을 마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죽지 않으려 발버둥쳐도 때로는 질병으로 죽기도 하고 때로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게도 된다.

때로는 신경성 과민으로 죽기도하고 때로는 천명이 다하여 죽기도 한다. 하여튼 죽음은 고통이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르면 불안하고 그 불안이 가중되면 말할 수 없는 두려움에 떤다. 한 마디로 죽음은 고통이다. 청년이여, 이를 네가지 근본고라 이른다. 이러한 네 가지 근본고는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다.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태어나게 되고, 살고 싶지 않아도 살아야한다. 늙지 않으려 해도 늙어야 하고 아프지 않았으면해도 건강에 이상이 온다.

또 죽지 않으려 하지만 마침내 죽음은 온다. 청년이여, 이 네 가지 근본고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또 다른 네가지 고통이 있다.

첫째는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고통이다. 사랑하는 아내와도 헤어져야하고 귀여운 자식과도 반드시 이별은 있게 마련이다. 그 헤어짐은 생이별도 있을 수 있고 사별도 있을 수 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한 날 한 시에 죽는다 하더라도 생전에 닦아온 업력이 다르므로 죽음 이후에는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마련이다. 둘째는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이 고통이다.

사랑과 미움이란 본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게 아니고 미워하는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미리 예정된 게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사랑하던 사람이 미워지기도하고 미워하던 사람이 친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인간으로 살면서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사랑하는 사람만이 있는게 아니라 반드시 미워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 괴롭다. 청년이여, 셋째는 뜻대로 되지 않음이 고통이다. 이 세상 일이 모두가 마음 먹은 대로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얘기한 근본고 네가지도 마찬가지지만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날 때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질때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부귀와 영화 온갖 것을 다 소유하고자 해도 그게 마음대로 얻어지지 않기에 고통인 것이다. 넷째는 이 몸과 이 마음 그대로가 고통을 담는 그릇이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것만을 보려하고 거친 것, 추한 것, 미운 것은 보지 않으려 한다.

귀는 좋은말, 좋은 음악, 좋은 소리만을 들으려 하고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으려 한다. 코로는 향기로운 냄새만을 맡으려 하고 역한 냄새, 혼탁한 공기는 맡으로 하지 않는다. 입도 마찬가지요 몸도 마찬가지며 인간의 심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이를 고통이라 한다.

청년이여, 앞의 근본고 네 가지에 지금 말한 네 가지 부수적 고통을 합하여 인간이 겪어야 하는 여덟가지 고통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들은 다른 데서 오는 게 아니다 바로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집착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제 몸에 집착하고, 제 지식에 집착하고, 제 소유에 대해 집착한다.

이를 일러 아집이라 한다. 둘째는 상대방에 대하여 집착하는데 이를 인집이라 한다. 셋째는 깨달음에 대해 집착하니 이를 법집이라 한다. 이와 같은 집착에 의해 온갖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집착은 지꾸만 자기가 유리하도록 끌어모으는 것이다. 청년이여, 그러므로 우선은 집착을 버려야 한다. 자네가 집착을 버릴 때 병은 낫게 된다.

공주에 대한 생각을 버려라 그리하여 건강을 회복하라. 건강한 후에라야 그대는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다. 공주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대는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병들어 골골하는 청년을 공주가 만나 줄 리 있겠는가? 그녀를 만나고 싶거든 먼저 그녀에 대한 집착을 훌훌 털어버리고 기력을 회복하라.” 하지만 청년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삼도의 강을 건넜다.

그 청년은 죽으면서도 그 집착을 떨어버리지 못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내생에라도 반드시 이룰 것입니다. 나는 상사뱀이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둔 청년의 몸에서 느닷없이 구렁이 한 마리가 스르르 빠져 나오더니 뚫어진 문구멍으로 쏜살같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년의 어머니와 스님은 그 광경에 그만 기가 질리고 말았다. 스님이 중얼거렸다.

“부처님 말씀에(나는 어진 의사와 같아서 병의 원인을 알아 약을 처방하기는 하지만 먹고 안먹는 것은 중생들 자신에 달려 있다)하시더니, 내 그토록 타일렀건만 집착을 버리지 못함을 어이하랴.” 그 후 얼마가 지나서였다. 하루는 공주가 한참 낮잠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아랫도리가 서늘함을 느꼈다 촉감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주위를 둘러본 공주는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자 살그머니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뭔지는 알수 없으나 뭉클했다. 기겁을 한 공주는 고개를 숙이고 살펴보았다. 거기에 웬 구렁이 한 마리가 있었다. 넓적다리에 제 몸을 칭칭 감고 머리는 사타구니 쪽을 향해 있었다. 행여 물릴세라 조심스럽게 일어난 공주는 왕후에게로 갔다.

공주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느낀 황후가 먼저 물었다. “아니 공주야, 너 어디 다치기라도 했느냐? 어쨰 걸음걸이가 전과 다르구나.” 공주는 느닷없이 일어난 사건을 사실대로 고했다. 황후는 몰래 사람을 시켜 그 구렁이를 떼어 내다 궁전밖에 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날 또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황후는 다른 사람을 시켜 소문 나지 않게 공주의 몸을 감고 있는 상사뱀을 떼어 궁전밖에 가지고 나가 칼로 여러번 토막을 내버렸다. 하지만 그 일은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돌로 쳐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죽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하루 이틀만 지나면 어김없이 공주의 침소에 스며들어 몸을 감곤 했다. 공주는 황후에게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다. 도저히 이래가지고는 궁전 내에서 기를 펴고 살수도 없겠거니와 남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산천이나 구경하다가 일생을 마치고 싶었다. 그러나 황후에게는 수일간 여행을 하다 돌아오겠노라 했다.

황후는 공주에게 시녀 몇 사람을 붙여 주었다. 여리디 여린 공주의 몸으로 어떻게 혼자 여행을 하겠는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주는 단신으로 궁궐을 빠져 나왔다. 하체에는 여전히 뱀이 달라붙어 있었다. 일부러 남이 알까봐 누더기 옷으로 변장을 했다. 그녀는 이제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거지였다. 하지만 수중에는 돈도 많고 폐물도 값나가는 것들이 꽤 많아 여행을 하기에는 곤궁하지 않았다.

중국 전역을 돌아 보았지만 마음을 안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요동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 고려 땅으로 들어섰다. 그때가 충혜왕 4년(1343)이었다. 그녀는 평양을 거쳐 송도로 내려왔다. 송도에 이르니 그야말로 천하의 절경이었다. 거기서 다시 북쪽을 향해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묘향산에서 우연히 노스님 한분을 만났다.

“스님, 저는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제 몸에 상사뱀이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옵니까?” 노스님이 조용히 미소를 지으면서 주장자로 땅을 가리켰다 공주가 바위에 걸터 앉자 노스님도 곁에 앉았다. “덕 높은 스님네를 모함하고 비방한 업이지요. 나무관세음보살…” 그는 굵은 단주를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몇 십년 갖고 돌렸는지 단주알은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했다. “그 상사뱀을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오만…” 공주를 애처로운 눈길로 쳐다보던 노스님이 말을 이었다. “스님네에게 법복을 보시하면 그 상사뱀을 떼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공주는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러면 제가 노스님에게 법복을 한벌 보시하면 어떨까요? 제가 이렇게 형색은 누추하오나 그만한 능력은 있습니다. 노스님 저를 위해 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노스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스님은 말했다.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보면 가사불사를 하는 곳이 있을 게요 그곳에서 함께 가사불사에 동참하시면 무엇보다도 공덕이 큽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가사불사요? 가사불사가 무엇인가요?” “가사란 부처님이 입으셨던 옷과 같은 것으로 스님네가 장삼위에 입는 것입니다. 가사는 복전의라 하는데 7조, 9조, 13조, 25조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크기와 관계없이 얼마나 조의 수가 높으냐가 더욱 중요하지요. 조란 가사의 조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25조란 세로로 스물다섯 조각을 잇대어 만든 가사이며 7조란 일곱조각을 잇대어 만든 것이라오. 가사불사하는 곳을 찾아 꼭 동참하시오.” 공주는 노스님의 말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녀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감사…!” 그녀가 인사를 하려고 말을 꺼내며 노스님이 앉아 있는 옆으로 얼굴을 돌린 순간 그녀는 말을 중단하고 말았다.

노스님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몸을 깃들일 만한 곳은 없었다.

“참 이상도 하다. 그새 어디로 가신 것일까?” 그녀는 문득 금강산이 구경하고 싶어졌다. 금강산은 세계 제일의 명산이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묘향산을 빠져나와 금강산으로 향했다. 한양에 이르니 빼어난 산세도 산세려니와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이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했다. 강물 줄기를 따라 오르던 그녀는 양평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어 춘천 쪽으로 향했다. 춘천에는 막국수가 유명했다.

주막에 들러 막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운 그녀는 기왕 온 김에 춘천에서 유명하다는 청평사를 보고 싶었다. 그녀가 청평천을 건너려 하는데 갑자기 하체를 막고 있던 상사뱀이 꿈틀댔다. 이제껏 10여년 넘게 상사뱀을 데리고 다녔지만 항상 가만히 붙어 있을 뿐이었다. 상사뱀은 이미 그녀의 몸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생각이 나면 징그럽다는 느낌이 있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청평천을 건너려 하자 갑자기 요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는 상사뱀을 달래며 말했다. “내가 너와 더불어 함께 다닌지 10여 년이 넘었지만 너를 떼어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청평사 절에 참배나 하고 가려는데 어째서 그 일을 막고 있느냐. 네가 진정 나를 짝사랑하다가 상사뱀이 되었다면 내가 원하는 것도 들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정 네가 가기 싫다면 이곳에서 너 혼자 잠시만 기다려라. 내 얼른 다녀오마.

그것은 가능하겠지?” 뱀은 공주의 말을 알아들은 듯 싶었다. 허벅지를 감고 있던 상태에서 스스로 풀려나와 길 옆 넓은 바위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공주는 날아갈 것 같았다. 그 지긋지긋하던 10년간은 느껴 볼 수 없었던 기분이었다. 그녀는 청평천을 건넜다. 물은그런대로 꽤 깊었다. 냇물은 이끼가 끼어 푸른 빛깔로 보였다. 너무 나도 상큼한 기분에 그녀는 청평천에서 멱을 감았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한 번도 빨아 본 적이없는 누더기 옷을 깨끗이 빨아 입었다. 봄날 따스한 햇살이 청평천에 한 줄기 흰 선을 그었다. 냇물 바닥은 하얀 모래와 크고 작은 돌들이 수천 년을 흐르는 물에 씻기고 씻겨 모서리가 없어져 버렸다. 미꾸라지를 비롯해서 모래무지, 송사리, 피라미, 민물새우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을 갔다. 멱을 감고 난 그녀는 청평사에 올라갔다.

계곡을 끼고 난 비탈길은 험하기짝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청평사에 도착하니 막 점심 공양을 하기 위해 많은 스님들이 큰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러기가 날 듯 한 줄로 열을 지어 나란히 질서있게 걷는 스님들을 바라보며 공주는 환희심이 났다. 그녀는 법당에 들어가 간단하게 참배를 하고 요사채로 내려오니 큰 방 옆에 또 하나의 큰 방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가사불사가 한창이었다. 많은 신도들이 모여 스님의 지시에 따라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공주도 자리를 잡고 앉아 다른 사람이 하던 바느질을 인계받았다. 그는 공양을 하기 위해 방을 빠져 나갔고 공주는 옆눈으로 남이 하는 것을 보아가며 바느질을 했다. 재미있었다. 그때였다. 도편수를 맡았다고 하는 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나오더니 공주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이 가사불사는 매우 신성한 것인데 너 같은 거지가 손을 댈게 못된다.

냉큼 이 방에서 나가거라” 공주는 도편수 스님의 호령에 주눅이 들어 가사를 만들던 바늘을 살그머니 놓고 방을 빠져 나왔다. 무안을 당해서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안에서 또 한 사람의 남자음성이 굵직하게 굴러 나왔다. “스님, 좀 너무 하셨소. 하하인에게도 상상의 지혜가 있고 상상인에게도 하하의 지혜가 있는 법이오. 외양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오.”

“그게 아니고요, 주지스님” “됐어요. 이미 엎지른 물이니 할 수 있겠소? 잊어 버립시다.” 얘기의 내용으로 보아 도편수와 주지와의 대화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청평사에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춘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평천을 건널 때쯤 난데없이 먹장구름이 하늘을 시꺼멓게 뒤덮었다. 어디선가 안개가 번뜩이며 천둥이 울렸다. 소나기가 동이로 퍼붓듯 쏟아져 내렸다.

번개와 천둥은 더욱 가까워졌고 그 소리는 골짜기 전체를 찢어 발기고 있었다. 청평천을 다 건너 상사뱀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뱀은 아직 그 곳에 있었다. 바위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였다. “저 지긋지긋한 뱀을 다시 데리고 다녀야 하나. 아! 내 팔자야.” 공주는 자연 걸음이 더뎠다. 더딘 공주의 발걸음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뱀이 또아리를 풀기 위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번쩍! “우르릉 꽈꽝”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공주는 넋을 잃고 혼절했다. 바로 앞에 벼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한참만에 깨어난 공주는 하늘이 파랗다고 느꼈다. 햇살이 화사하게 비추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어 뱀이 있던 곳을 바라보니 그 뱀은 벼락을 맞아 새까맣게 타죽어 있었다.

“뱀이 죽었잖아? 오! 부처님, 부처님께서 제게 가피를 내리셨군요. 부처님은 제게 은혜를 베푸셨다구요.” 그녀는 너무나 기뻤다.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산야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청평사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돌부리에 넘어지고 청평천에서 몇 번 허우적대기도 했지만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녀는 단숨에 청평사에 도착했다. 입고 있는 누더기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법당에 들어갔다.

부처님이 환하게 웃고 계셨다. 세상이 온통 그녀의 것인 양 너무나 아름다웠다. “부처님! 이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힘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님들이 입으시는 최상의 복전의인 가사를 만진 공덕이옵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제가 부처님께 이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옵소서…” 그녀는 수없이 절을 했다. 아무리 절을 해도 다리가 아픈 줄 몰랐다. 저녁때가 되어 스님들이 예불을 하러 왔지만 그녀는 한사코 절을 했다. 밤이 가고 새벽이 왔다.

스님들은 또 새벽 예불을 하기 위해 법당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절했다. 새벽 예불이 끝나고 주지스님이 공주의 절하는 모습을 대견하게 여겼는지 조심스레 물어왔다. “시주님은 어제 낮에 우리 절에 오셨던 분이지요? 기도를 하도 열심히 하시니 기특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주님은 어디 사는 뉘신가요?” 공주는 사실을 숨기고 그냥 지나가다가 들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청평사 부처님과 스님들게 은혜를 입었기에 너무나 감사하여 기도를 올리는 중이라 대답했다. 아직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단계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잘못했다가는 원나라 순제의 딸 공주를 사칭했다는 이유로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육조혜능이 어째서 15년 동안이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었는가를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대견스레 여겼다. “주지스님, 이 절에서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허드렛일이라도 좋습니다. 무슨 일이든 제 힘 닿는 대로 힘껏 일하겠습니다. 주지스님,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던 주지스님도 마침내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녀는 밥 짓고 빨래하고 바느질까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냈다. 채소밭을 가꾸며 기도도 열심히 했다.

청평사 스님들은 뛰어난 미모의 여인이 제발로 찾아와 온갖 궂은 일을 마다않고 하는 데 대해 매우 신기하게 여기며 또 때로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가사불사를 회향하고 난 주지는 대중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다. 안건은 대웅전 중창불사였다. 대웅전이 퇴락하여 부처님을 뵙기가 민망하다고도 했다. 불사를 하려면 화주를 선택해야 했다.

화주란 일반 시주자들로부터 시주금을 받아들이는 이른바 수금사원이었다. 그러나 가사불사를 회향한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고 또 대중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누구 하나 선뜻 화주를 맡겠다고 나서는 스님이 없었다. 후원에서 공양을 짓다가 스님들의 회의 내용을 들은 공주는 옷깃을 단정하게 여미고 큰 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스님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본디 대중공사석상에는 스님들 말고는 일체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젊은 여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니 놀랄 만도 한 일이었다. 공주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외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면 대중스님들께 참회하겠습니다.

하오나 제가 후원에서 들으니 스님들께서 대웅전 중창불사를 계획하고 계신다고요?” 주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렇소이다만.” “제가 그 중창불사의 화주를 맡겠습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부처님과 대중스님들게 입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제가 그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점입가경이었다.

후원의 허드렛일을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도맡아 하던 미모의 젊은 여인이 이제는 대웅전 중창불사의 화주를 맡겠다니, 스님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어떤 스님이 말했다. “여인의 힘으로는 꽤나 벅차실 텐데요. 화주란 생각보다 어려운 직책입니다.” “하지만 맡겨 주십시오.” 스님들은 공주에게 화주를 맡겼다. 공주는 지필묵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다.

그 편지는 춘천 부사와 강원 감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를 다 쓴 공주는 사람을 시켜 강원감사와 춘천부사에게 전하도록 부탁했다. 며칠도 지나지 않았다. 강원감사와 충천부사가 말을 몰아 헐레벌떡 청평사에 도착했다. 스님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강원 감사가 말에서 내리더니 인사를 차릴 겨를도 없이 물었다.

“공주님은 지금 어느 방에 계십니까? 어느 방에 계시느냐고요?” 주지가 놀라 물었다. “공주라니요? 무슨말씀이신지? …” “이 편지를 보내신 분이 바로 원나라 순제의 공주님이십니다. 어서 우리를 공주님께 안내하십시오.” 그제서야 대중들은 그녀가 일개 미천한 여인이 아니라 공주였음을 알았다.

“공주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원나라 조정에서는 우리 고려국에 공주님이 있을 것이라며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아주 잘된 일이 아니옵니까?” 그렇게 해서 고려 조정에서는 거금을 희사하여 청평사를 세우고 원나라 공주의 뜻을 오래도록 기리게 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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