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향승 묘찬과 과부
봉향승이란(향을 올리는 스님)이란 뜻인데 법당의 의식을 책임지고 있는 의전법사, 즉 부전을 말한다.
격을 높여 노전이라고도 하고 노전 밑에 부전을 두기도 한다. 함경북도 회령 등지에 재가승 촌락이 있었다. 재가승 촌락이란 불교의 승려가 환속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살되 집단을 이룬 촌락이었다. 특히 재가승 촌락의 특징은 그 구성원들 대부분이 여진족이었다.
즉 우리나라에 쳐들어와 온갖 노략질을 일삼던 여진족들이 관군에 의해 정복을 당하고 귀화해 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불교를 신앙하는 불자였다.
그래서 한 마을에 대여섯 가구씩 모여 살되 거기에는 부처님 한 분을 공동으로 모셔 놓고 매달 재일을 정하여 불공을 하고 기도를 했다. 이를 테면 생활불교를 실천하는 자들로서 생활이 곧 불교요, 불교가 곧 생활인 그러한 삶이었다.
조선 순조 19년(1891)에 이곳 회령 지역의 재가승 촌락을 찾은 젊은 승려가 있었다. 그 스넘은 묘찬이라 했다. 묘찬이 재가승 촌락을 찾은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봉향승이 뭐 하는 스님인지도 몰랐고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봉향승이란 직무가 그 대여섯 가구의 공동체적 신앙의 성소인 불당의 시자임을 알았다.
그는 거기서 겨울 한 철을 지내면서 봉향승으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재가승들파도 친해졌다. 장기 , 바둑도 함께 두고 겨울에 군불 지핀 방에서 이슥하도록 불교의 재미난 얘기들을 들려 주기도 했다. 그들 중의 일부는 한때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묘찬의 얘기를 쉽게 이해했고 또 듣기만 하지 않고 함께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한 번은 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면서 참 재미나는 일을 목격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숭늉을 따르는 차례가 되었다. 한 부인이 주전자에 숭늉을 담아가지고 와서 차례대로 숭늉을 따르는데 물을 받는 남자가 숭늉 그릇을 약간 흔들었다.
그러자 부인도 물 따르던 것을 곧바로 멈추었다. 그때 그 여인이 남자를 보고 말했다. “보아하니 아저씨, 옛날에 중노릇했던 속한이로군요.” 그러자 남자가 되받았다. “남의 말 하고 계시네 그려.” 그 래서 좌중엔 한바탕 웃음바다가 일었다.
절에서는 식사를 할 때 얘기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측간과 욕실자 식당을 삼묵당이라 하여 이들 세 장소에서는 일체 잡담이나 얘기를 금하게 되어 있어서 식사를 더 하고 싶다거나 그만 먹고 싶다면 이를 입으로 표현하지 않고 몸짓으로 신호를 주고 받는다.
물을 받을 때 그릇을 흔들면 충분하다는 뜻이므로 물을 따르는 사람은 멈추어야 하며 만일 그러한 신호가 없을 경우는 계속해서 신호가 있을 때까지 따르게 되어 있다. 숭늉을 따르는 남자나 숭늉을 따르는 여자는 모두 이런 신호를 알고 있었고 또 익숙해 있었다. 이처럼 묘찬은 그들과 잘 어울렸다. 묘찬은 승려였다.
그러다 보니 일반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부담을 느끼지 않고 묘찬과의 만남을 쉽게 생각했다. 재가승들 가운데 과부가 한 사람 있었다. 그녀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20대 중반에 혼자 되었다. 비록 과부는 되었을망정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었다.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는 과부가 되면 평생을 수절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워 주곤 했지만 이 재가승촌에서는 그러한 제약을 받지 않았다. 남자들이 상처를 하면 다시 아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여자들도 남자가 세상을 떠나면 다시 시집을 가더라도 전혀 허물이 되지 않았다. 하루는 묘찬이 혼자 경을 읽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오직 그만의 시간이었다. 낮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차를 마시고 온갖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지만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시간은 바로 저녁 예불을 끝내고 나서 그만이 홀로 누릴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스님 계세요?” 분명히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묘찬은 야릇한 흥분과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감성이 들고 일어났고 또 다른 구석에서는 이성이 그 감성을 누르려 하고 있었다. 묘찬은 아직 젊었고 승려이기 이전에 어엿한 남자였다.
그는 문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호롱불을 들고 있는 여인은 소복을 하고 있었다. 어른거리는 불빛에 그녀의 얼굴이 보이다 말다 했다. 과부, 바로 그 여인이었다. 여인이 말했다. “스님, 이렇게 찾아온 손님을 계속 밖에 세워 두실 건 아니겠지요? 지나가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하도 청아해서 들렀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죠” 묘찬의 허락은 아직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마당에서 봉당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예. 드드 들어오시지요.” “고맙습니다, 스님.” 여인이 자리를 잡고 앉자 묘찬이 물었다. “어인 일이신지요?” “아이, 스님두. 아까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스님의 독경소리에 반해서 이렇게 체면불구하고 들어왔다구요. 스님, 계속해서 저를 난처하게 하실 건 아니시겠지요?” 묘찬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그것은 실수의 화살이 되어 되돌아와 자신에게 꽂힐 것만 같았다.
그는 아예 입을 다물리라 생각했다. 여인이 말했다. “스님, 그 읽고 계시던 경전이 무슨 경이에요? 그 경전의 내용에 대해 말씀 좀 해주세요. 네?” 묘찬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얘기라면 모르되 경전의 제목과 내용은 말해 줄 수가 있다고 생각한 까닭에서였다. 불교 얘기라면 그는 자신이 있었고 또 신이 났다.
그날은 그 정도에서 돌아갔다. 여인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찾아와서는 불교 얘기를 해달라며 졸라대곤 했고 미리 작정이 나 한 듯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가차없이 일어나 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묘찬은 그녀가 부담이 가지 않았다. 행여 조금 늦어지기라도 하면 은근히 기다려지고 초조했다.
가슴은 방망이질을 했고 때로는 위가 쓰리기도 했다. 뒷간에도 더 자주 가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하루는 그녀가 얘기를 듣고 일어서려 하자 묘찬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웬지 붙들어 놓고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일어서려던 여인은 느닷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묘찬을 덮쳤다.
묘찬도 그녀를 안고 말았다. 그녀의 입김은 이미 뜨거운 열기로 방안을 덥히고 있었다. 한참 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는 묘찬의 억센 팔을 풀고 슬며시 일어섰다. “미안하오. 보살님 . 나도 모르게 그만…”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빠져 나갔다.
그 뒤로 여인은 한 달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묘찬으로서는 초조와 갑갑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잘못했나? 그래, 그날 저녁 그런 일은 없었어야 했어. 그녀가 날 보고 뭐라고 할까? 승복을 입고 삭발을 한 중이 엉큼하다고 할까? 아! 나는 어찌해야 좋지?…” 그때였다. 삽짝문 밖에 희끄무레 무엇이 다가오고 있었다.
묘찬은 반가웠다. 그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아니, 그럴수록 나는 태연해야만 한다. 그녀에게 내 속마음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아니야, 그래도 한 달 만에 나타나는 보살인데.) 그는 생각과는 달리 몸이 이미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 옆에는 50은 족히 되어 보이는 초로의 남자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보살님.” 여인이 목례를 해 보이고 얼굴을 남자에게로 돌렸다. 남자가 말했다. “이 아이의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딸년으로부터 스님 얘기는 많이 들었습너다.” “아, 그러시군요, 거사님. 어서 오십시오. 이렇게 산승의 처소를 다 방문하여 주시고… 자, 안으로 드시지요.” 방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여인을 옆에 앉히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거, 스님 정진하시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아, 괜찮습니다.
살아가는 게 모두가 정진이지요. 어디 공부가 따로 있겠습니까?” 남자는 말을 할 듯 말듯하면서 좀체로 입을 열지 않았다. 초조해진 쪽은 오히려 묘찬이었다. “무슨 긴히 하실 말씀이라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지요. 여기 제 딸을 스님께서 좀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공부하는 스님에게 이런 말씀 드려서 미안하기는 합니다만…” 묘찬은 뒤통수를 어떤 둔기로 얻어맞은 듯했다. 마당에 들어 설 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실제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믿지 않았었다. 묘찬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소승은 출가수행하는 불제자입니다.
출가인의 첫째가는 계율은(음행하지 말라)입니다. 계를 파하고 혼인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말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이 녀석이 스님과 혼인을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살리신다 생각하시고 들어 주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뒷일을 감당키 어려울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지요?” “우선 내가 스님을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애비의 마음에서 말입니다.” 말을 마치고 남자는 품안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끄집어내어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걸려도 된통 걸렸구나 싶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묘찬은 한참 동안을 지키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내일 아침에 가부간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그 정도는 양보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옆에 앉아 다소곳이 말만 듣던 여인이 불쑥 말했다. “안 됩니다.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십시오.” “콩밭에 가서 메주와 두부를 달라고 하실 참이오? 아니면 밀밭에 가서 국수와 수제비를 달라 하실 참이오. 거 참, 성미 한 번 꽤나 급하시구려. 무릇 흔인이란 인륜의 대사인데 서둘러서 될 것이 아니잖소.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나도 그대와 같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놓치고 싶지는 않소이다. 허허허.” 묘찬은 직지사에서의 생활이 그리웠다. 김천의 직지사는 그에게 있어서는 고향과 같은 곳이었고 함께 공부하던 도반들도 있었다. 묘찬은 혼인을 하나의 굴레라 생각했다. 자유를 속박하는 인생의 굴레였다. 그것은 인생의 무덤이었다.
도반들과 함께 불법을 논하구 전국의 명산과 대찰, 고승석덕들을 찾아 운수를 떠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오도가도 못하게 생겼다.(아! 나의 20년 수도가 여기서 끝이로구나. 옛날 지족선사는 송도 기생 황진이와 몸을 섞고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이라 했다더니 나는 20년 공부가 풀잎의 이슬이 되어 가는구나.) 과부의 아버지가 칼을 집어 들고 나가면서 말했다.
“얘야, 이젠 네 수단에 달린 것이니 네가 알아서 하렴. 내 할 일은 끝난 것 같구나. 잘해라. 불쌍한 것 같으니라구.” 그때였다. 여인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방안에는 묘찬과 과부 두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방문 앞에서 옷을 풀고 있었다. 짐작으로 보아 사내는 문 밖에서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그런데 어째서 한 달 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이제 느닷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이토록 난처하게 한담.) 묘찬은 큰일이었다. 그는 앉아서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좋습니다. 결혼합시다. 약속하겠소. 그러니 우선 옷을 입고 언약을 하십시다.” 묘찬의 말을 듣고서야 여인은 윗옷을 입었다. 그리고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스님, 약혼은 하신 거예요?” “약혼이라! 물론이지요. 약혼입니다.” “그럼 증표를 주십시오. 증표도 없이 구두언약한 것으로 마음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갈수록 태산이었다.
이젠 약혼한 것을 증표로 써달라고까지 했다. 하는 수 없었다. 묘찬은 약혼서약을 써 내려갔다. 그녀의 이름은(끝막이)였고 성은 조씨였다. 경진년 정월 열나흗날 술시에 나 묘찬은 조씨 끝막이와 결혼할 것을 서약하는 약혼을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 신표를 대신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반드시 결혼하여 부부가 될 것을 불제자로서 부처님께 맹세합니다.
비구 묘찬 청상 조씨 과부와 그의 부친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묘찬은 그들 부녀가 돌아가자 걸망을 챙겼다.
그리고는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고 밤을 틈타 거처하던 불당 요사를 빠져 나왔다. 그는 생각했다. “내가 써준 것에(부처님께 맹세한다)고 했는데, 부처님께서는 용서해 주실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갈 길을 갈 뿐이다. 나는 그녀를 원망하지는 않으리라. 사실 표현을 안해 그렇지 나도 은근히 그녀를 기다렸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을 털어 버리리라. 불타는 집으로부터 벗어나리라.
부처님께서는(법회경)에서(궁자비유)(환택비유)(화성비유) 등을 통해 때로는 거짓을 말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내가 그녀에게 써준 것은 빠져 나오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대신 나는 더욱더 열심히 정진하리라.” 반은 중얼거림 속에서 걸었다. “그래도 천만다 인 것은 여태껏 그녀에게 나의 재적본사가 직지사라는 것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만일 내 처소를 알리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나.” 그는 혼자 중얼거리다 고개를 끄덕이고 또 그러다간 가로 젓고 또 중얼거리며 회령에서 김천을 향해 걸었다. 꼬박 보름을 걸었다.
그는 직지사에 들어가 선원에서 참선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한편, 다음날 묘찬이 있던 처소에 왔던 청상 조씨는 묘찬이 떠난 것을 알고 배신감을 이기지 못해 심장마비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부친은 딸의 죽음을 보며 묘찬을 아주 단념하기로 했다.
그는 정진하는 스님을 파계시키려 한 자신과 딸이 죄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운 불당에 나아가 딸의 명복을 비는 한편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였다. 청상과부 조씨는 죽어서 원귀가 되었다. 원귀가 된 조씨는 직지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천왕문 밖에서만 맴돌 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천왕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침 직지사에서 한 비구스님이 출타하는 중이었다.
사천왕문을 나서는데 웬 여인이 산발을 하고 소복을 한 채, 스님을 불렀다. 보기에도 머리끝괴 쭈뼛하고 솟아올랐다. “어떻게 오신 보살님이십니까” 여인이 말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귀신입니다. 지금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나 사천왕들이 무서워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절에 묘찬 스님이란 분이 계시지요” “예, 있습니다.” “수고스럽지만 스님께 좀 나와 달랜다고 전해줄 수 있겠습니까?” 비구스님이 선방에 들어가 묘찬스님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이 말을 들은 묘찬은 천왕문에 나와 천왕들을 돌아보며 간곡히 부탁을 했다. “저 불쌍한 원귀를 일주일만 붙들어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오.” 묘찬은 그 길로 절에 들어가 지장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너무나 절박한 상황이어서 밤과 낮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잠자고 식사하는 것도 제쳐 두었다.
그는 오로지 지장보살에게 매달렸다. 한때 잘못하여 잠시 저지른 실수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 데 대한 참회기도도 함께 했다. 묘찬은 그녀를 건드린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어마어마한 상황이 벌어진데 대해 그 일차적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참회했고, 그녀의 왕생극락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7일 지장기도가 끝나는 때 묘찬은 성대하게 음식을 장만하여 천도재를 지냈다. 바로 그 천도재가 끝났을 무렵 공중에서 소리가 있었다. “나는 스님의 지장기도와 천도재 가피를 입어 원결을 풀고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부디 정진 잘하십시오.” 원귀의 마지막 부탁의 소리가 오래도록 묘찬스님의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