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율사와 세 여신

자장율사와 세 여신

‘투기하는 여인은 유치하고 꼴불견이다. 그러나 투기하는 여인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여인에게서 투기를 빼 버린다면 빈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김재량은 이런 생각을 하며 며칠 전에 만난 세 낭자를 떠올렸다. 청년 장수 김재량은 뛰어난 풍모로 인해 많은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김재량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돌아왔으니, 신라의 수도 서라벌 귀족들은 그를 사윗감으로 내심 점찍고 있던 터였다.

“참, 아름다운 여인들이야. 그것도 한 사람도 아니고 셋이 한꺼번에 나를 좋아하고 있으니, 흐흐흐.”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게 내게 있어서는 여난이 아닐까. 아무려면 어때, 여난이든 여복이든 나는 즐겁기 짝이 없는데.’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니 쏟아질 듯 걸려 있는 들보가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며칠 전 승전 축하연에서 그는 세 여인의 구혼을 받았다.

‘참 재미있는 세상이야. 여인들이 대담하기도 하지, 내게 구혼을 해 오다니. 하지만 자유연애가 허락되는 요즘 세상에 그리 대수로울 것도 없지.’ 김재량은 참으로 즐거웠다.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도 허물이 되지 않는 신라의 정치제도가 마음에 들었다. 만일 여인들이 규방에 틀어박혀 바깥 나들이도 제대로 못했다면 얼마나 슬픈일 일까. 그것은 고구려나 백제도 마찬가지였지만 불교의 자유사상을 바탕으로 남녀를 동등하게 대우해 주는 신라의 제도가 꽤 마음에 들었다.

“불교의 사상은 평등사사이야. 겉으로는 남성 우위인 것 같지만, 불교의 핵심은 남녀의 평등한 권리를 설파하고 있는 거라구. 우리 신라인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불교가 국교로 공식 인정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거야.” 그는 언젠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자기가 했던 말을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세 여인은 서라벌 진골 출신의 딸들이었다. 이들은 집안의 어른끼리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며 자주 왕래도 하고 의견도 함께 나누었다.

그녀들은 부모들로 인해 더욱 가까워졌고 또 절친하게 지냈다. “우리 시집갈 때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가자.” “어머, 그럴 수 있을까?” “왜, 안 되겠니. 어른들께 말씀드려 합동 혼례식을 거행하면 되지.” “듣고 보니 가능하기도 하겠구나. 얘, 그러면 오늘, 우리 이 얘기를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해 약속하자.” “어머! 어떻게?” 세 처녀들은 즐겁게 웃고 떠들다 헤어졌다. 셋은 늘 함께 몰려다녔다.

셋 중에 한 사람만 참석치 못하게 되어도 아예 약속을 취소하고 말 정도였다. 이 세 처녀는 김재량 청년의 승전 축하연에도 함께 참석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세 처녀는 마음속에 각자 김재량을 자기의 낭군으로 맞고 싶어했다. 다른 모든 것은 세 처녀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남녀관계란 언제나 혼자만 소유하고픈 독점욕이 있는 것일까. 서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김재량을 자기만의 남자로 만들려는 생각은 똑같았다. 세 처녀는 그날부터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늠름하면서 그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참 멋진 남자야. 내 낭군으로 맞이 해야지, 호호.’ 김재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 처녀를 번갈아 가며 만나기 시작했다. 다행인 것은 세 처녀가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여인들은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나머지 둘을 서로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김재량을 만나는 날만은. 꼬리가 길면 밟힌다지 않던가.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졌다. 더욱이 소문은 살이 붙고 덤이 곁들여져 한껏 부풀어 있었다. 나중에 그 소문이 부모들의 귀를 통하고 입을 통해 전달되었을 때 세 처녀의 질투심은 극에 달했다. 만나지 않을 뿐아니라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서로 외면했다.

그러던 중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청년 장수 김재량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다. 고구려의 기상은 대단했다. 그러나 김재량도 만만치 않은 장수였다.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둔 신라의 장병들은 김재량을 외쳐 대며 자축연을 베풀었다.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며 그들은 들떠 있었고 기강은 해이해져 있었다.

개선하는 중이었다. 이때 난데없이 일군의 복병들이 튀어나와 방심한 김재량을 죽이고 말았다. 김재량은 그렇게 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삼도의 강을 건넌 것이다. 김재량이 세상을 떠나자, 그 동안 그토록 서로 질투하고 적대시하던 세 처녀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화목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각자 김재량을 너무나 극진히 사랑했기에 시집갈 것을 포기하고 모두 산으로 들어가 두타고행을 하여 마침내 여신이 되었다.

그 산이 바로 오늘날 강원도 동해시 부근의 두타산이다. 세 여신의 이름은 나림여신과 혈례여신, 골화여신이었다. 그들은 도를 얻었고 신통변화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녀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누진통을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녀들은 김재량의 죽음을 서로의 잘못으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그것이 기화가 되어 마음속에서 저주의 불꽃이 조금씩 넘실댔다. 세 여신은 그곳 주민들이 산에 치성을 드려 자기네를 공경하기를 원했고, 만일 복종하지 않으면 노여움을 나타내 마을에 재앙을 내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대산에 성지를 개설하고 적멸보궁을 세운 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자장율사가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중이었다. 두타산의 산세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그는 우선 두타산에 들르기로 마음을 정하고 발길을 내딛었다.

이때 자장율사를 본 나림여신은 그가 산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한편 자신의 도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신하여 자장율사를 유혹했다. “스님, 어디로 가시옵니까?” 자장이 대답했다. “이 산의 산세가 하도 좋다기에 절을 창건할 인연지가 있나해서 왔소.” 여인이 짐짓 다소곳한 모습을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장하고 거룩하십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사오니 허락해 주옵소서.” 자장은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다.

“산길이 험합니다. 매우 힘들 것이니 나중에 절이 창건되거든 그대나 오시지요.” 달빛이 흐르고 있었다. 선선한 초가을 날씨라 춥지도 덥지도 않아 산길을 걷기에는 그만이었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풀잎도 나뭇잎도 이순을 넘긴 인생처럼 황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장은 혼자 중얼거렸다. “꽃은 피어도 곧 지고 사람은 나도 이윽고 죽는다.

이 허무한 법칙은 생명 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나고 죽음이 다하고 피고 짐이 다한 곳에 고요의 즐거움이 있나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참다운 즐거움이니라. 그래, 참 좋은 말씀이야. 부처님의 말씀은 구구절절이 옳거든.” 자장은 젊은 시절 어떤 스님으로부터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이란 열반사구를 듣고 환희심에 넘쳤던 일을 상기하며 그를 풀이해 본 것이었다.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해질녘에 두타산으로 들어왔고, 아무래도 지금은 삼경쯤은 족히 되었을 성싶었다. ‘참 괜찮은 산이로군.’ 그때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뒤를 돌아본 자장은 내심 크게 놀랐다. 멀찌감치 나림여신, 바로 그 여인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 여인이. 이 험한 길을?’ 하지만 자장은 모르는 체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골화전에 이르러 자장은 외딴 주막집을 발견했다. 너무 이슥하면 안되겠다 싶어 주막에서 하룻밤 유숙키로 했다. 어느새 여인이 따라 들어왔다. 한데 그녀는 손에 주안상을 들고 있었다. 자장이 말했다. “그게 무엇이오?” 여인이 대답했다. “주안상이옵니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주안상을 무엇하러 가지고 들어오시느냐는 것이외다.” “스님, 먼 길 오시느라 목도 마르실텐데 이 곡차로 목을 좀 추기심이 어떠할까 하여…” 잠시 대답이 없던 자장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모습은 아주 진지했다. “여인이여, 당신은 지금 신력을 얻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신해서 나를 유혹하는가 본데…’ 여인이 말을 잘랐다. “변신이라니요? 제 본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다고들 하는데요. 그리고 유혹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어쨌든 내 눈에는 인분을 싸고 있는 비단처럼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몸뚱이가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일지라도 속에는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전도된 인생관입니다. 내 보기에 여인은 많은 신력을 얻었는데, 이를 좋은 쪽으로 쓰시고 좀더 공부하여 열반락에 안주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자장의 법문을 듣고 나림은 깨달았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라니요. 참회하는 마음을 지닐 대 이미 죄업은 사라집니다. 나림은 참 착한 보살이십니다.” “아니, 어떻게 제 이름을?” “내 잠시 선정에 들어가 보았소이다. 마음 한 번 돌이키면 거기가 바로 극락이요, 부처님의 세계입니다. 나림여신이여, 그만 일어나 편히 앉으시오.” 나림여신은 자장의 법설에 감동하였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모든 생각을 돌이켜 참된 불제자가 되길 맹세하고 자장에게 귀의했다. 나림은 자기 처소로 돌아와 그 사실을 얘기하고 혈례와 골화에게도 함께 귀의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아직도 두 여신은 교만이 가시지 않았다. 비웃으면서 말했다. “그까짓 스님 하나 제대로 유혹 못 하고 오히려 매수를 당해? 도대체 우리 여신들의 자존심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우리 둘이라도 힘을 합하여 그 자장인가 뭔가를 혼내 주자.

그리고 이곳에 절을 짓게 되면 마을 주민들이 자장에게만 귀의하고 우리에게는 공양도 올리지 않게 된다구. 그러니 절대로 절을 짓지 못하게 해야 돼.” “그렇게 하자.” 혈례와 골화는 즉시 호랑이로 변하여 자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앞길을 막은 채 으르렁댔다. 자장이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어조로 꾸짖었다. “이런 무례한 짓이 있나, 아무리 축생이기로서니 스님의 길을 막다니, 어서 썩 길을 비키지 못하겠느냐.” 호랑이들이 달려들었다.

“어흐응. 어흐응.” 자장은 호랑이들의 기세를 대하며 금강삼매에 들어 몸을 금강석과 같이 하였다. 호랑이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한 마리는 발톱으로 내리쳤고 한 마리는 옆구리를 물었다. 그러나 스님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호랑이의 발톱이 부러졌고 이빨이 빠져 버렸다. 호랑이들은 기겁하고 놀라 꼬리를 사리면서 도망쳤다. 자장이 주문을 외웠다. 금강역사가 나타나 큰 칼을 들고 뒤를 쫓아 도망치는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아 왔다. 자장이 말했다.

“자, 이제 너희들의 본색을 드러내거라.” 순식간에 호랑이들은 혈례와 골화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두 여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참회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자장이 타일렀다. “잘못을 알았으면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마시오. 미움과 시기, 온갖 간악한 질투는 모두 욕망에서 비롯되니, 오늘부터 그대들은 욕망의 불을 끄는 공부를 하고, 이미 얻은 신통력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데 쓰도록 하시오.” 그때 언제 왔는지 나림여신이 곁에 와 있었다.

“스님의 원력으로 저희들은 개과천선하고 불심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앞장서서 금당자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스님을 도와 사찰 창건불사에 동참하겠습니다.” 나림여신이 안내한 장소에 자장율사는 가람을 세우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았고, 세 여신은 장사로 변하여 무거운 짐들을 운반하였다. 그 후에 이 절은 세 여신이 화합하고 발심하여 세운 것이라 하여 삼화사라 했고 마을의 이름도 삼화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 절을 짓고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삼화사라 했다고도 한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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