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패만 무서운 세상
풍산지방에 가면 금비령이라는 큰 재가 있다. 이 재는 어사박문수(1691–1756)와 관련이 깊다.
영은군 박항한과 공조참판 이세필의 딸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박문수는 영의정에까지 추증되었던 사람으로 그 어떤직위보다도 암행어사로서 많이 알려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울산의 문수암에서 어머니가 기도를 올린 끝에 낳았다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도 한다. 비록 한문으로는 다르나 음이 같은것으로 택하여 문수보살과 같이 지혜가 뛰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부모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척불정치에 앞장을 섰고 심지어는스님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는 이른바 ‘금성령’까지 제공하여 불교계로부터원성을 사기도 했다. 한 번은 풍산지방의 민정을 살피고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옷은 다 헤어져누덕누덕 기워 입었고 갓은 다 떨어져 너덜거렸다. 암행어사의 복색은 일반서민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신분을 위장해야 했기에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죽을 고비를 겪었다. 풍산은 산이 험하고 숲이 울창하여장정들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넘을 수 없는 그러한 고개들이 많았다. 산이험하면 산짐승도 많고 산나물이나 기타 영약도 많이 자라게 마련이어서 풍산일대는 물론 다른 징역에서조차 산나물을 뜯으러 가거나 사냥을 하러 가곤했다. 박문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민정을 살피고 오던 중 그 고개에서 피로와굶주림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꼬박 사흘이 되었지만 지나가는사람들은 웬 거지가 누워 있나 하는 정도로 지나쳐 가곤 했다. 한 무리의 사냥꾼들이 지나고 얼마쯤 있다가 나물을 뜯으러 온 아낙네들이지나치게 되었다. 아낙네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아니, 이런 산마루에 웬 거지람.” “글쎄, 누구지?” “아무려면 어때. 어서 가자구.” “얼굴이 반반한데 임자 없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가서 살자고 할까?” 그들은 한바탕 까르르 웃어 댔다. 그중 한 아낙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젊은 여인이었다. “아니야,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그냥 가? 한번 가 보세.” 그러자 다른 여인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댁이나 가 보구려. 우린 먼저 내려갈 테니. 자, 그럼. 집에 가서보드라구.” 아낙네들은 모두 내려갔고 젊은 여인은 혼자 남아 누워 있는 사람 옆으로다가갔다. 남자는 간신히 신음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물, 물, 물…” 여인은 그가 물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물은커녕계곡조차 보이지 않았다.
상황으로 보아 산 아래 계곡까지 가서 물을 길어오자면 그 동안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여인의 머리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내 젖을 먹여 주면 되겠다.” 그녀는 아기를 낳은 지 이제 석 달밖에 안 되었고 아기를 시어머니와남편에게 맡기고 왔기에 젖은 불 대로 불어 있었다. “그렇지만 생면부지의 남정네에게 어떻게 젖을 물린담?” 그녀는 망설이다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사람을 살려 놓고 보자는것이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이 세상에 사람의 생명 아닌가. 그녀는자신을 굽혀 남자에게 젖을 물렸다. 한참 동안 여인의 젖을 먹은 박문수는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고맙소, 부인.” “고맙기는요. 그런데 어찌하여 이 산중에 홀로 쓰러져 계십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여인이 남자를 부축하여 일으키면 말했다. “가시지요, 가셔서 일단은 기력을 회복하셔야 하니까요.” “정말 고맙습니다. 부인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내 그 은혜는 꼭 갚겠소.”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나저나 우선 가시고 그런 얘기는 나중에하십시오.” 여인은 남자를 부축하고 머리에는 나물 보따리를 이었다. 한편 동행했던 아낙들은 저희들끼리 짓고 까불고 까르르 웃어 제치며내려갔다. 그들은 남은 여인에 대해 별별 추측을 다해 가며 지껄여 댔다.
마침 여인의 남편이 아기를 업고 마중을 나왔다. 그런데 다른 아낙들은 다보이는데 그의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여인의 남편이 물었다. “우리집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이들 가지 않았나요?” 한 여인이 톡 튀어나오며 말했다. “아마 댁이 만족을 못 시켜 주었나 보지요? 지금 저 뒤에서 어떤 중년남자에게 젖을 물리고 있습니다, 흥.” 다른 여인이 말을 이었다.
“아마 지금쯤 재미 좀 보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너무 닥달하진 마세요.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재미라니요? 이 어둠이 깔리는 산중에서 말이오?” “흥, 그게 다 댁의 책임 아니겠어요? 자, 다들 내려가자구.” 아낙들이 말을 들어 보니 일이 벌어져도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놈의 여편네 내려오기만 해 봐라. 그냥…” 마침 그때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아낙들의 말대로 중년 남자였다.
행색은 비록 남루했지만 꽤나 잘생긴 사람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과 비교를 한 남편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아내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때 박문수가 나서며 말했다. “다 나 때문에 그리된 것이니, 과히 허물치 마시오.” 남편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이번에는 박문수에게 달려 들었다.
농촌에서 잔뼈가 자라고 그 힘든 농사일과 사냥으로 단련된 몸이라 힘이 장사였고 더없이 날렵했다. 한참을 이리 치고 저리 박고 하던 그의 눈에 박문수의 옷깃이 헤쳐지며 마패가 나타났다. 순간 그는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었다. 한편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호기심이 많던 아낙들은 무슨 볼거리라도 생긴 양 우루루 몰려들어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마패다! 암행어사다!” 남편도 아낙들도 어느새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의 그 등등 하던 기세를 이젠 찾아볼 수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어사님인 줄 몰라뵙고, 그만…” 박문수가 손바닥을 털고 일어나면서 한마디했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사람은 무섭지 않고 마패만 무섭구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어사 나으리.” 한숨 돌린 박문수가 말을 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신들을 모두 벌하고 싶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아내가 내개 젖을 물려 주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은혜가 지중하기에 용서하는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어사 나으리.” “또, 무엇보다도 너희 아낙네들.” 아낙들은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하며 “예예’를 연발했다. “너희들의 소행이 더욱 나쁘다. 사람을 아무런 연유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토록 모함할 수가 있느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하니 이 여인의 남편이 화도 나게 되었느니라. 나도 같은 남자로서 이 사람의 심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대할 수가 있느냐?” 박문수는 여인에게 위로의 말을 남겼다.
그것은 진정 고마움의 발로였다. “고맙소이다, 부인.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소. 후일을 잘 기다려 보시오. 그리고 부인의 남편도 화가 날 만해서 그런 것이니 너무 허물치는 마시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여인과 여인의 남편은 출두명령을 받고 동헌으로 나갔다. 그때 박문수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앞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따뜻하게 위해 주시오.
내 은혜를 잊지 못하여 논 몇 마지기를 하사하니 부족하지만 받아 주시오.” 그 뒤부터 그 고개는 금비령이라 되었다. 그것은 나그네로서 만반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는 그 고개를 넘지 말라는 뜻이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