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흘리는 돌미륵
경북 안동 제비원에서는 선혈의 자욱이 서려 있는 목 잘린 돌미륵이 한 분 서 있다.
이 돌미륵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조선시대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보름도 안된 어느 날의 일이다. 왜구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이 정가에 전해지자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북인이니 하며 안일하게 당파싸움만 일삼던 관료들을 비롯하여 일부 썩은 선비들은 나라에 대한 걱정은 뒷전이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조정에서는 우국지사들만 남았다. 밀고 올라오는 왜구들은 얼토당토 않은 구호를 내걸었다.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달라.” 조정에서는 이 말을 놓고 빌려 주자는 쪽과 빌려 주어서는 안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섰으나 결국은 빌려 주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들의 세도가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의 속셈은 딴 데 있었다. 명나라로 가는 길을 조선에게 빌려 달라고 한 것은 한낱 구실에 불과하고, 실은 조선을 송두리째 삼키려는 것이었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구들은 거침없이 치달아 동래성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그중 일군의 왜구들이 안동의 제비원을 지날 무렵이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질풍같이 달리던 말이 무슨 일인 지 달리기를 멈추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장이 놀라 칼등으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쳤지만 말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왜 말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것이냐.” 다른 말들도 움직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병들이 채찍을 휘둘렀고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힘껏 당겨 보았지만, 앞발은 떡 버틴 말들은 그 자리에 붙박아 선 채로 였다. “참 이상한 놈들이네. 잘 달리다 갑자기 멈추다니.” “이게 무슨 조짐이 아닐까?” “글쎄, 뭔가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모양이야. 말이란 본디 영물이거든.” “여봐라, 말들이 어찌하여 움직이지 않는지 아는 놈이 없느냐?”
왜장은 소리를 질렀다. 왜병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 대답을 못 했다. 왜장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지 주위를 샅샅이 살펴봐라.” 왜병들은 말에서 내려 주위를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이상한 것이라곤 없었다. “아무래도 조선놈들이 쓴 마법이 분명하다.” 왜장의 소리가 더욱 높아 졌다. 그리고 확신에 차 있었다. 그때였다. 한 왜병이 소리쳤다. “저기 왠 암자가 하나 보입니다.”
왜장이 말했다. “그럼 그렇지. 바로 저 암자에 사는 중이 마법을 부린 게 틀림없다. 모두들 들어라. 저 암자를 샅샅이 뒤져 중이 있거든 당장 포박하라.” 왜병들은 암자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법당 추녀 끝에서 풍경이 울고 있었다. 고요한 한 낮이었다. 어디선가 산꿩이 울었다. 그리곤 고요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법당 안에서 스님의 독경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청은 낡을 대로 낡았고 퇴색했지만 아담하게도 깨끗한 도량이었다.
왜병들은 흙발로 법당에 뛰어들었다. 법당 안에는 노스님이 한 분 앉아 있었다. 일행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노 스님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 경만 읽고 있었다. 일행 중에 한 명이 소리쳤다. “요망한 중아, 오랏줄을 받아라.” 왜병들은 순식간에 달려들어 경 읽는 노 스님을 꽁꽁 묶어 밖으로 끌어냈다. 왜장은 스님을 법당 뜰 아래 억지로 꿇어 앉혔다. 그리고 법당 마루에 거만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은 왜장은 죄인 다루듯 호령을 했다.
“네 이놈, 바른 대로 말하거라.” “허허, 장수의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뭐야? 고약하다고? 조선을 평정하러 온 대일본의 장수보고 뭐가 어쩌고 어째?” “일개의 사병도 아니고, 적어도 일군을 통솔하는 장수는 말에도 무게가 실려야 하는 법. 그게 무례한 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너는 어찌하여 우리 군사의 진군을 방해하느냐?” 스님은 온화한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스님의 미소에 왜장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웃지 말고, 마법을 풀어 어서 말을 움직이게 하라. 만약 내 말을 거역하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스님은 여전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왜장이 더욱 큰소리로 호령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너는 벙어리가 되었느냐?” 스님이 왜장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저 혼자 미쳐서 길길이 뛰는 왜장이 측은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스님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이 돌이나 나무를 향해 말을 건넸다가 돌이나 나무가 말이 없으면 어찌 하겠는가? 그때 당신은 화를 내겠는가?” “나무나 돌이 대답하지 않는다고 화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있다면 미친 놈이지. 그런데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내게 말을 걸었다가 대답이 없자 당신은 미친 사람처럼 길길이 뛰었다. 애초부터 나는 돌이나 나무처럼 초월할 수 있다면 되지 않았겠는가? 안 그런가, 왜장?” 듣고 보니 그 말이 그럴듯했다.
왜장은 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 이윽고 평정을 되찾았다. 스님이 말했다. “그것 보게. 마음이 좀 가라앉지 않았는가. 모든 것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네. 그러나 저러나 그 칼이나 치우라.” “하하. 그러면 마법을 풀겠단 말인가. 진작 그럴 것이지.” 왜장은 아직 기고만장했다. 스님이 말했다. “마법이라니, 그런 술수는 모른다. 우리 조선에는 없다.
있다면 그대의 섬나라에나 있을까. 특히 불제자는 그러한 사술을 모른다. 내 모르긴 모르되 지금 그대의 말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뜻일 것이다. “무엇이라고? 부처님의 뜻이라. 거참 재미있군.” 농담으로 받아넘기려는 왜장을 향해 스님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부처님은 이유 없는 살생을 금하신다.
이는 그대들에게 업을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시현하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구태여 무차별 살생을 저지른다면 우선 그대들의 병마가 온전히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부디 자중하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뭐라고? 우리를 온전하게 보내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좋다. 내가 그 부처인지 뭔지를 그냥 놔두지 않겠다.” “칼로 생업하는 자는 그 칼이 도리어 자기 목을 칠 것이다.
나는 부처님의 뜻에 따라 살생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니 공연히 업을 지어 무간지옥에 떨어지지 말고 말머리를 돌이켜 돌아가라.” 왜장은 화가 나서 이빨을 드러내 놓고 으르렁댔다. “네 이 요망한 중놈아. 내 생각 같아서는 당장 네 목을 베어도 시원치 않겠다. 하지만 그 부처의 목을 베기 전에 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우선 참는다. 목이나 길게 늘이고 기다려라.” 그때 한 왜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왜장에게 고했다. “대장님 저기 산마루에 돌부처가 있습니다.”
“구래? 가자. 그리고 너희들은 저 중을 끌고 따라와라. 내 단칼에 그 돌부처의 목을 베고 나서 저 중놈의 목도 자를 것이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왜장은 왜병이 가리킨 산마루를 향해 뛰었다. 왜장은 돌부처 앞에 두 다리를 벌리고 우뚝 서서 칼을 뽑아 들었다. 무쇠도 마치 무 자르듯 한다는 명검이었다. 햇살이 칼날을 받아 튕겨져 나갔다. “네 이 돌부처놈아, 네가 마법을 부려 우리 말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지? 어니 내 칼 맛이나 좀 봐라.” 왜장은 불상에서 서너 걸음 뒤로 물러서서 칼끝으로 돌부처를 노려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를 칼끝에 모으고 칼을 높이 치켜드는가 싶더니, “야앗”하고 기합을 넣었다. 기합소리와 함께 돌부처의 목이 땅바닥에 뒹굴었다. 자신의 검술에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돌아보던 왜장은 깜짝 놀랐다. 그 순간 왜장뿐만 아니라 왜졸들도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왜냐하면 돌미륵불의 잘린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갑자기 하늘에서 먹장구름이 일면서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사람들만 놀란 게 아니었다. 놀란 말들이 미쳐 길길이 날뛰었다. 왜졸들은 혼비백산했다. 땅을 설설 기었다. 당황한 왜장이 황급히 명하였다. “어서, 저 스님을 풀어 드려라, 어서.” 왜장은 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다.
왜병들은 흩어졌고, 그 틈에 인근의 의병들이 봉기하여 왜병들을 물리쳤다. 그날 그 스님이 어떤 분인지, 왜장의 이름이 무엇인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안동 제비원에는 피를 흘린 돌미륵만 남아 옛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