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과 내원사 창건연기
원효스님(617–686)은 수백여 권의 저서를 남긴 고승으로서 유명하고, 그의 화쟁사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더 없이 소중한 지표가 되고 있다. 그는 귀족불교에서 서민불교, 민중불교로의 전환을 부르짖었고 또한 그것은 실천한 스님이기도 했다.
요석과의 관계는 세인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만들었고,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던 중 중도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 길을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도 유명하다. 그리고 숱한 일화들을 남겼는데 그 일화 하나하나가 모두 목마른 중생들의 갈증을 쉬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원효스님이 천청산에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천성산은 지금의 양산 통도사 앞에 우뚝 선 산을 말한다. 토굴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삼매에 들었던 원효대사가 갑자기 혀를 차면서 혼자말로 말했다. “어허, 이것 큰일이구먼. 어쩐다. 빨리 서둘러야겠는데. 그러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다치겠구나. 얘, 사미야!” 원효스님을 시봉하던 사미는 이름이 학진이었다. 학진사미는 큰스님의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달려와 차수하고 섰다.
“부르셨습니까? 큰스님.” 원효스님은 사미를 돌아보지도 않고 뭔가를 황급히 찾고 있었다. 학진사미는 큰스님의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달려와 차수하고 섰다. “부르셨습니까? 큰스님.” 원효스님은 사미를 돌아보지도 않고 뭔가를 황급히 찾고 있었다.
사미가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큰스님, 무엇을 찾으시옵니까?” “으음, 사미냐? 급한 일이 생겼느니라.” 사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큰스님, 사방이 온통 고요하기만 한데 화급을 다투는 일이 무엇이옵니까?” 원효스님이 말했다. “멀리 중국땅 태화사에 변이 일어날 조짐이 있구나.” 사미는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가까운 곳도 아니요, 저 멀리 중국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계시다니,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효스님은 급한 김에 앉아 있던 마루청을 뜯었다. 그리고 거기에 이렇게 적었다.
“신라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중생을 구원한다.” 원효스님은 판자를 공중에 날렸다. 판자는 순식간에 천성산에서 아득히 사라졌다. 사미가 말했다. “큰스님, 천안통을 얻으셨습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중국에서 일어난 변을 미리 보실 수 있단 말입니까?” 원효스님은 빙그레 웃고 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좌선삼매에 들었다. 시자도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한편, 중국의 태화사에서는 천여 명의 스님들이 법당에 모여 대법회를 열고 있었다. 한참 열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법당 밖에 있던 대중들이 왁자지껄했다.
“아니, 저기 저 날아오는 게 뭘까?” “어디 어디, 그러게 말이야. 웬 널빤지 같은데 그래.” 법당 안에서 법회를 하던 천여 명의 스님들이 법회를 중단하고 마당으로 몰려나왔다. 신도들도 따라 나왔다. 이제 법당안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우르르릉, 쾅.” 폭음과 함께 멀쩡하던 법당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은 무너지는 법당을 바라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쳐다보니 공중에서 배회하던 널빤지가 빙글빙글 돌면서 마당에 사뿐히 내려 않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판자를 들여다보니 그 판자에는 글이 씌어 있었다. “신라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중생을 구원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랐다.
중국과 신라와의 거리가 그토록 먼데 그 판자가 공중을 가르고 날아왔다는 것이 불가사의했고, 원효스님이 태화사의 일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었으며, 또한 대중들이 몰려나오자마자 법당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 불가사의했다. “아니, 이건 그 유명한 신라의 원효스님이 보내신 거로군요.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참으로 원효스님은 부처님과 다름없는 분입니다. 그분의 천리안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꼼짝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나무 원효보살마하살.” 그들은 ‘나무 원효보살마하살’을 합송하며 동방을 향해 합장하고 무수히 절을 했다. 그들은 원효스님의 도력이 그토록 뛰어난 데 다시금 찬탄하기를 마지 않았다.
“정말 원효스님이야말로 도인 중에 도인입니다. 참으로 장한 어른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참다운 스승을 만난 것입니다. 우리 그분 곁에 가서 수행하도록 하십시다.” “갑시다.” “떠납시다.” 법회에 나왔던 스님들이 하나 둘 신라로 갈 것을 제의하며 나서자, 모두들 서로 뒤질세라 앞장을 섰다.
스님들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까지 나서 신라의 원효스님에게로 향하는 대중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신라로 원효스님을 찾은 천여 명의 대중들은 서로 앞다투어 원효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원효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곳은 움막이나 다름없는 협소한 토굴이었다. 천여 명의 대중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다.
한꺼번에 몰려온 천여 명의 제자를 한 순간에 얻은 원효스님은 대중들이 함께 수행할 절터를 찾아 나섰다. 스님이 산을 내려오고 있는데 백발노인 한 분이 나타났다. 천성산의 산신령이었다.
“큰스님, 절터를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디 마땅한 데가 없을까요? 적어도 천여 명 대중이 기거할 만한 도량이어야 하는데요.” “네, 큰스님, 이 산 중턱의 계곡에 이르면 아주 좋은 절터가 있습니다.
천여 명이 기거하더라도 협소하지 않을 것이오니 다른 데 가시지 말고 곧장 그곳으로 가 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노인장.” 원효스님은 대중들을 이끌고 발걸음을 되돌려 산 중턱으로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과연 반듯한 터가 나왔다.
원효스님은 그곳에 큰 가람을 세웠다. 그리고 멀리 중국에서 천여 명의 대중이 왔다고 하여 내원사라 이름하였다. 천성산이라 불리게 된 것도 이러한 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즉, 중국에서 원효스님의 제자로 온 천여 명의 대중들이 모두 훌륭한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었다는 데서 기인하였다.
또 산신령을 만난 자리를 ‘중방래’라 부르게 되었다. 한편 천성산에는 칡넝쿨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밤길을 가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등 불상사가 일어났다. 원효스님은 산신령을 불러 당부하였다.
“산신령은 들으라. 우리 절 대중들이 밤길을 걷다가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다리를 다치고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앞으로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산신령은 이 산에 칡넝쿨이 자라지않게 하라.” 그러나 칡넝쿨을 아주 없앨 수는 없었던지 있기는 있되 옆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수직으로 자라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천성산의 칡넝쿨은 옆으로 뻗어나간 것은 볼 수 없고, 모두 수직으로 곧게 자란 것뿐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효스님이 산신령에게 당부한 뒤부터였다고 한다.
그리고 원효스님이 마루청을 뽑아내어 던진 암자를 ‘널빤지를 날려 보냈다’하여 척판암이라 부르며, 내원사는 언제부터인가 내원사로 표기되어 왔다고 한다.
<동봉스님이 풀어쓴 불교설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