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경산 최부잣집에 애송이 머슴이 새로 들어왔다.
며칠 부리면서 살펴보니 짐은 남보다 세 배를 지고, 몸은 두 배로 재바르며, 일눈까지 밝아 기특하기 짝이 없다.
흡족한 최부자는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애송이에게 제꺼덕 사랑채 심부름을 도맡기며 각별하게 대하였다.
어느 날, 파계사 스님이 와서 보니 새로 온 머슴의 상이 예사롭지 않다. 절집의 큰 시주인 최부자에게 횡액을 끼치고도 남을 업장을 지닌 위인이 아닌가. “저런 업장을 지닌 위인은 언제 어디서건 불씨만 와 닿으면 터지게 되어 있는 화약고와 같소이다.
전생의 악업 때문에 온몸에 분심과 살상의 기운이 옹이처럼 박혀 있으니, 모진 중생 거두었다가 괜한 횡액 당하지 마시고 속히 내보내도록 하시지요.” 천리를 꿰뚫고 삼생을 관하시는 스님의 법력이사 익히 알고 있는 터, 최부자는 입안에 혀 같은 상일꾼을 내놓기가 아쉬웠지만 어쩔 것인가,
그날로 당장 내보낼밖에. 졸지에 쫓겨난 머슴의 심경은 허탈탈하기 짝이 없다. 병든 홀어미와 동생들을 위해 여남은 살 때부터 나선 머슴길이었다.
일솜씨는 좋았으되 분독(憤毒)이 유난하여 일단 다툼질이 났다 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패악질 때문에 세경 한 푼 못 받고 쫓겨난 집이 한두 곳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억울했다. 모처럼 좋은 주인을 만났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분기를 다스리려 마음고삐 다잡은 덕분에 아직까지는 다툼질이 없던 터였다.
억울하고 분한 심사로 다리목에 도착하니 마침 홍수 뒤끝이라 다리마저 떠내려가고 없다. 초년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이놈의 팔자는 어찌 이리도 박복한지…. 강기슭에 퍼질고 앉아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데 흙탕물에 잠겼다 떠올랐다, 떠내려가는 이상한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살펴보니 썩은 짚단에 개미들이 새까맣게 엉겨 붙어 있다.
머슴은 동병상련의 측은지심으로 그 짚단을 끌어 당겨 개미들을 모두 뭍으로 옮겨 주었다. 해가 저물어 머슴은 하는 수 없이 최부잣집으로 되돌아가 다리 끊긴 사연을 아뢰고 하룻밤만 재워줄 것을 청하였다. 그런데 미심쩍어하는 최부자 옆에서 오히려 아까 그 스님이 머슴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어 들인다.
“오늘 아침 이 집을 나갈 때까지 너에겐 분명 살상의 기운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기운이 없다. 이는 그 사이에 네가 큰 복밭을 일구었다는 얘긴데, 그렇게 두터운 업장을 소멸시킬만한 복을 하루낮에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털어놔 보게나.” 머슴이 오늘 하루 겪은 일과 그 심사를 소상히 아뢰자 스님은 무릎을 쳤다.
“과연 그렇구나! 짚단 하나를 까맣게 덮을 정도라면 개미가 수만 마리는 될 것인즉, 어려움에 처한 수만 생명을 구하였으니 너는 오늘 스스로 큰 작복의 터를 일구었고, 그것으로 전생의 두터운 업장이 소멸되어 남에게로 향하던 분심과 원심(怨心)이 봄눈 녹듯 사라졌다.
이렇듯 화도 복도 내안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부디 그 복전의 종자를 잘 갈무리하여 앞으로는 부지런히 복농사만 지으시게나.” 머슴이 감격하여 스님께 눈물로써 삼배를 올리니, 이로써 경산 최부잣집의 머슴 을덕이의 개과천선 설화가 완성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