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西山)대사
서산(西山)스님은 1520년 3월에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부친이 글을 가르쳤는데
남보다 배움이 빨랐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0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걱정되었던지 막내를 꼭 안고 죽었다.
어려서 이름은 최여신(崔汝信)이었다. 부친이 사망한 해 겨울
군수 이사승이 일찍이 여신이 총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여신을 불렀다.
군수는 먼저 사(斜)자 운(韻)을 부르며
글을 지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신은 즉석에서
香凝高閣日初斜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하고 읊었다. 군수가 다시 화(花)자를 부르니까
千里江山雪若花
‘천리 강산에 눈이 꽃과 같구나.’
라고 응답하였다. 그러자 군수가 여신의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으면서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내 아들아.(吾兒也)”
라고 하였다.
여신은 12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부모를 잃은 여신은 가끔 우울하고 쓸쓸하였던지
친구들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였고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
15세에 친구들과 지리산에 들어가 여러 계곡을
구경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숭인(崇仁)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숭인 장로는 여러 명의 청년 중에서도 유독 여신을 보고
“마음을 심공급제(心空及第)에다 돌려서
세상의 명리심을 아주 끊어버리도록 하여라.”
라고 말하였다. 여신이 궁금한 목소리로
“심공급제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숭인 장로는 아무 말없이 한 참을 있다가
눈을 깜박거리고는
“알겠느냐?”
하고 되물었다. 여신이
“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니까, 노승은
“말로써는 어려운 것이니라.”
하고는 전등록과 불경책 여러 권을 보여주면서
“이 책들을 자세히 읽고 잘 생각하면
차츰 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일행들은 돌아가고 여신 혼자 지리산에 남아
불전을 읽어보게 되었다.
숭인 장로는 영관(靈觀) 스님을 소개하여 주었다.
여신은 영관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지리산에 들어간 지 3년이 지나갔다.
산사 생활에 몸이 밴 여신은 불전만 읽는 것이 아니고
그 깊은 뜻의 근원을 구명(究明)하는데 마음을 붙들어두면서
장작도 패고 물도 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경전을 읽다가 문득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언제나 듣는 소리였으나 그날 따라
유별나게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다.
순간 홀연히 문자를 떠난 오묘한 이치가 가슴에 들어왔다.
캄캄하던 마음 속에 한 줄기의 밝은 광명을 얻은 듯하였다.
여신은 그 때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忽伴字啼窓外
滿眼春山盡故鄕
문득 창 밖의 두견새 울음소리 들으니
눈에 비치는 모든 춘산(春山)이 다 내 고향이로구나.
또, 하루는 물을 긷고 돌아오다가 멀리 구름에 싸인
산들을 바라보고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서 또 시를 읊었다.
汲水歸來忽回首
靑山無數白雲中
물길어 올라오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푸른 산은 흰 구름 속에서 셀 수가 없네.
이 두 수는 여신이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 한 후
처음으로 두견새소리와 자연을 보고
느껴오는 깨달음을 글로 적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은 아니었다.
욕심과 번뇌를 벗어난 상태에서 청정한 자연과
고요한 만물을 보게 되자, 평상시와 다르게 보이는
시각이 열려서 경전 속의 뜻과 연관하여 적어본 시였다.
이렇게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다르게 보여지는 시각이
열려야 다음으로 깨달음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조용히 진리를 탐구하는 나날을 보내던 여신은
이를 계기로 스스로 수행자의 길을 갈 것을 맹세하고
머리를 깎았다.(19세경) 그리고
‘차라리 일생을 바보 멍청이가 될지언정 맹세코
문자법사(文字法師)는 되지 않겠다.’
* 문자법사(文字法師) : 문자만 알고 깊은 뜻은 모르는 법사
라고 다짐하였다.
양육사(養育師) 숭인 스님은 여신에게
휴정(休靜)이라는 법명을 주었다.
출가전부터 불서를 읽고 수선(修禪)까지 겸하고 있던
여신은 스님이 되자 더욱 분발하여 공부에 열중하였다.
휴정 스님은 어느 정도 불지(佛旨)가 들어나자
도솔산 학묵(學默) 스님을 찾아가 문답을 하였다.
문답후 학묵스님으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다시 지리산으로 되돌아가 삼철굴(三鐵屈)에서 3년을 지냈다.
그 다음 대승암에서 두 여름을 지내고 의신암, 원통암, 원적암,
은신암, 등의 여러 암자에서 2~3년을 보내며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용성(龍城: 지금 南原)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촌(星村)이라는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한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때 마음이 툭 터져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26세)
시 두 수를 지었다.
髮白心非白 古人會漏洩
今聽一聲鷄 丈夫能事必
머리는 희어도 마음은 희지 않다고
고인이 여러 차례 말했어라.
이제 외마디 닭 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하여야할 일 마쳐버렸네.
忽得自家底 頭頭只此爾
萬千金寶藏 元是一空紙
문득 내 집에 이르르니
모든 것이 이러할 뿐이로다.
값지고 값진 보배 장경(藏經)도
이 한낱 빈 종이 일러라.
이것을 흔히 서산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라고 하는데
15세에 차음 불교를 만나 불교공부를 한지
10여 년만이고 출가한지 8년만이었다.
그후 오대산 금강산 등을 돌면서 33세까지
여러 암자에서 계속 보림 수행하였다.
때로는 굶주림에 시달리기도 하였고,
때로는 추위에 떨기도 하였다.
어떤 때에는 낯선 길을 잘못 들어 밤새껏 헤맨 적도 있었고,
어떤 때에는 낙엽 속에 파묻혀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휴정 스님은 모든 부딪혀오는 난관을 피하지 않고
그저 맞서서 부딪혀 나갈 뿐이었다.
휴정 스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수행이었다.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을 몸으로 부딪쳐서 마음에
실증(實證)하므로써
인생과 자연과 진리를 참되게 체득하면서
보림에 임하였던 것이다.
33세에 국가에서 시행하는 승과에 합격,
36세 전법사가 되었고,
3개월 뒤에 판교종사(判敎宗事)가 되었다.
다시 3개월 뒤에 판선종사(判禪宗事)가 되어
젊은 나이에 국가에서 인정하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던 것이다.
37세에 양종판사(兩宗判事)를 그만두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45세 선가귀감 지음, 52세, 57세 병들어 누었던 적이 있었고,
62세에 사명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또 태능(太能)스님이 가르침을
요청하여 다음의 게송을 일러 주면서 잘 터득해보라고
하였다.
砂來無影樹 초盡水中구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
모래 속에서 나온 그림자 없는 나무
물 속의 거품 속에 다 타서 없어져버렸다.
가소롭구나. 소를 탄 자여.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
태능 스님은 그 후 20년 만에(40세) 이 뜻을 알고 찾아와
문답후 휴정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67세 선교결(禪敎訣)을 지었으며,
70세 노승 휴정은 무고하게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힌 바가 있었다. 그러나 1년 뒤에 곧 풀려났다.
73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대왕의 부름을 받아
왕궁에 들어갔다가 묘책을 물음에 전국민이 총합단결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길 밖에 달리 대안이 없음을 역설하고
8도16종 선교도총섭으로 임명되어 1,500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제자 사명스님이 1,000 명을 거느리고
달려와 합세하여 2천 5백명의 승병과 함께 왜군과 싸웠다.
최초의 승전은 평양성 탈환이었고, 다음 개성을 되찾기
위한 혈전 끝에 개성을 탈환하였고
다음 수도 한양을 탈환하고 관군과 함께 계속 남쪽으로
적군을 밀고 내려갔다.
국왕이 한성으로 환도하고 어느 정도 서울이 복구되자
75세 노승은 도총섭자리를 내놓고 뒷일은 유정(惟政)스님과
처영(處英)스님에게 부탁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만년 85세,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 기거하던 휴정스님은
정월 어느 날 대중을 불렀다. 그는 그 날 깨끗이 몸을 씻고
위의를 갖추어 향불을 사루고 대중 앞에서 법을 설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影幀) 뒤쪽에다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 전에는 네(畵像)가 나였는데
팔십년 후에는 내가 너(畵像)로구나.
라고 쓰고 그날 참석하지 못했던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각각 글을 남기고 결가부좌한 상태로
조용히 입적에 들었다.
이것이
보제존자 서산대사 청허당 휴정선사
(普濟尊者 西山大師 淸虛堂 休靜禪師)의 마지막 열반
모습이었다.
휴정스님 밑에는 1천명의 문도가 있었고
이름이 알려진 제자는 7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서산 스님의 시와 저서는 현재 여러 개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