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큰 가르침 보여주신 분

“말 없는 큰 가르침 보여주신 분”

경산 스님은 서울 도봉산 천축사의 무문관(無門關)에서 장장 6년간 용맹정진한 ‘수행자중의 수행자’였다.

‘무문관’이란 말 그대로 사람이 드나드는 문이 없는 방을 말한다. 무문관에 한번 들어가서 6년 동안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면벽수행, 그것도 혹독한 용맹정진을 계속한다는 것은 웬만한 각오로는 어림도 없는 일.

경산 스님은 바로 그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가 길고긴 6년의 면벽수행을 치루고 나온 ‘무서운 수좌’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 그래서 경산 스님은 총무원장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단 하루의 참선수행을 거른 적이 없었고 수좌로서의 몸가짐을 한 치 한 푼도 흐트러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흔히, 아무리 철저한 수행승이었다 하더라도 한번 감투를 쓰고 행정승이 되어버리면 세속물이 들게 마련이라고 걱정들을 했으나 경산 스님은 총무원장직을 맡았으면서도 늘 변함없는 수좌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제자들은 회고하고 있다.

경산 스님은 세속 나이 50을 넘기면서부터 젊었던 시절 금강산 유점사에서 득도하고 수행했던 일을 늘 그리워하고 회상하며 지금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가고 올 수 없음을 못내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젊은 수행자시절을 보낸 유점사와 참선수행에 몰두했던 마하연의 추억을 제자들에게 자주 들려주곤 하였다.

특히 당신의 출가본사였던 금강산 유점사를 잊지 못하여 당신이 머물고 있던 서울 돈암동 적조암에 ‘53존불’을 모셨는데, 바로 금강산 유점사에 모셔져 있었던 ‘53존불’을 그대로 본떠 적조암에 모셨던 것,

“53존불 앞에 이렇게 정좌하고 앉아 있으니, 그 옛날 유점사 그 법당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드는구먼. 정말 어느 세월에나 유점사 그 법당에 앉아볼 수 있을는지…”

촉촉히 젖은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며 그 옛날의 유점사 법당을 회상하곤 하던 경산 스님은 결국 금강산 관광길이 열린 오늘 같은 세상이 오기도 전에 “다시 한번만 유점사 가 보았으면…”하던 그 소원을 접고 말았으니, 지금쯤 경산 스님은 평소의 소원대로 북한 땅에 다시 태어나 다시 또 부처님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을 맡고 계실 무렵이었다.

경산 스님은 방송작가들을 사찰로 초청, 불교세미나를 열게 되었다. 방송작가 초청 첫 불교세미나는 당시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이능가 주지 스님이 열어 40여명의 방송작가가 참가했었는데 방송작가들에게 불교와의 인연을 맺어주고 불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방송을 통한 불교의 포교에 기여하자는데 그 뜻이 있었다. 이 불교세미나를 계속 마련하는 데는 필자도 미력을 보태기로 했었는데, 방송작가 초청 불교세미나가 본격적으로 계속 개최되고 지원을 받게 된 것은 누구보다도 경산 스님의 뜨거운 관심과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포교를 위해서 방송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른 일은 못하더라도 이 불교세미나만은 적극 지원할 테니 매년 한번씩 열도록 합시다.”

경산 스님은 당시 필자에게 그렇게 당부하시며 아무리 바쁜 가운데서도 방송작가 초청 불교세미나에만은 반드시 참석하여 방송작가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직접 특별 법문을 들려주셨다.

그 뿐만 아니라 경산 스님은 총무원장으로서 당시의 방송작가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빨간 마후라’, ‘남과 북’,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쓰신 한운사선생, ‘조선왕조 5백년’의 작가 신봉승선생, ‘광복30년’의 작가 김교식선생, 지금의 열반종 총무원장인 방송인 김해근선생, 그리고 필자에게 조계사 대웅전에서 직접 계를 내려주시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그분들 모두는 지금도 어김없는 불자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5명의 방송인이 수계식을 한 그날 경산 스님은 손수 연비를 해주시고 법명을 내린 후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었는데, 어찌나 겸손하시고 따듯하게 대해 주셨는지, 모두들 그날의 총무원장 스님을 못 잊어 했다.

대한불교 총무원장 스님이라면 누가 뭐라든 대한민국 종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불교계는 물론 대한민국 종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머물고 계시는 돈암동 적조암에 당시는 화장실다운 화장실이 없었다. 40여년 전이었으니 지금 같은 수세식 화장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고 모두가 다 재래식 변소가 있었을 뿐. 분뇨탱크가 가득 차면 퍼내야 했고, 얼어붙어 넘치면 분뇨덩어리를 곡괭이로 찍어 내어 퍼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을 맡고 계시던 때, 적조암 암주는 스님의 제자 자용이 맡고 있었는데 가장 곤욕스러운 일이 바로 엄동설한에 얼어붙어 넘치는 화장실 치우기였다.

“세상에 명색이 암주가 얼어붙은 X이나 치워야 하다니…”

스님의 제자가 이렇게 탄식을 할 정도로 얼어붙은 화장실 치우기는 젊은 스님에게도 지겨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1월 어느 날.

총무원장이신 경산 스님이 손수 괭이를 들고 솟아오른 오물 덩어리들을 찍어내어 그 덩어리를 분뇨통에 담아 지게에 짊어지고 텃밭으로 옮겼다.

“아니 스님, 스님께서 어찌 이런 일을 다 하십니까…”

제자가 몸둘 바를 몰라 하며 만류했다. 그러자 경산 스님이 빙긋이 웃으며 제자에게 말했다.

“나는 지게로 옮길 것이니 자네는 소쿠리에 담아 들고 오시게나…..”

경산 스님은 그렇게 몸엔 밴 겸손으로 제자들에게 말없는 큰 가르침을 전해 주시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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