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종 교장의 깨달음
강원도 춘성군 부산면 추곡국민학교 교장 신명학 선생님의 별명은 재래종 교장 선생님이다.
그의 키는 1m 50cm가 조금 넘고 몸무게는 45kg 정도였다.
생김새가 전통적인 한국 인상을 그대로 닮고 걸어가는 것, 말하는 것이 시골 농부의 모습을 너무너무 닮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래종 교장 선생님이라 불렀다.
신교장 선생님이 추곡국민학교에 오시게 된 지는 13년이 훨씬 넘었는데, 역대로 신흥(新興) 국민학교를 다섯 개나 만들어 이미 개척자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리로 발령한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화전민 7백여 세대 가운데 5백여명의 학생들이 두 곳으로 나누어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국민학교 4학년까지는 그 곳에서 다니고, 5학년부터는 본교를 다녔다.
본교는 그 곳으로부터 약 10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산을 세 번씩이나 넘어서 다녀야 했다.
그래서 학교에 진학할 때는 열 사람이 한다면 실제 졸업은 세 사람이 하기 어려웠다.
3백여명의 학동들이 공부하고 있는 추곡국민학교는 겨우 교실 두 칸에 변소 한 칸이있을 뿐 교무실도 하나 없었다.
더구나 소양강 땜이 막아진 최 근래에 이르러서는 많은 학생들이 배를 타지 못해 학교에 나오는 경우가 적었으며 비바람이 불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교장 선생님은 부임하자마자 학교 부지를 얻고자 학부형 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학부형들은 천편 일률적으로 안 된다고 거절하였다.
『살땅(肉山)이라고는 단 백 평도 없는 이 산골짜기에서 3천평의 대지를 어떻게 마련한단 말입니까.』
『설사 땅이 마련된다 하더라도 돈 한 푼 없이 어떻게 학교를 짓는다는 말입니까?』
생각하면 교장 선생님으로서도 막연한 일이었다.
면소재지에 나아가 국유림 땅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군 ·도 학무과에 찾아가서 학교 부지로 제공해 줄 것을 허락받은 뒤, 이튼 날부터 교장선생님은 홀로 지게를 지고 바위 돌을 떨어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미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 계속하니 점점 터전이 넓어졌다.
그 때 마침 이 말을 들은 그의 부인이 찾아와 욕을 퍼부었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월급봉투 타서 집에 한 푼 부쳐주지 않고 학교만 짓고 다닐 것이냐.』
고 다그쳐 물었다.
교장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가십시다. 늘그막에 누구를 위해서 이런 일을 계속해야 나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고 손목을 끌어 잡았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할 일이 무엇이겠느냐.』
마지못해 부인은 갔으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교장 선생님은 돌을 캐서 굴리다가 어깨를 크게 다쳤다.
이 소식이 학교에 알려지자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몰려왔다.
교장 선생님이 아파 계신 것을 보고 학생들은 너나없이 모두 괭이 삽을 들고 나섰다.
아이들이 나서니 학부형들도 덩달아 나섰다.
이렇게 해서 3천평의 대지가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교장 선생님은 그 동만 나온 월급을 가지고 4km 정도 떨어진 임업소에 가서 나무를 사서 져 날랐다.
대지를 고르기보다는 훨씬 쉽게 학교가 지어졌다. 애들은 흙벽돌을 찍고 어른들은 나무를 날라 지붕을 덮었다.
네 칸의 교실이 완성되니 명실공히 하나의 학교가 설립된 것 같았다.
옛날에는 1·2학년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3·4학년이 한 교실에서 공부했으며, 선생님도 두 분밖에 계시지 않아 번갈아 교대해 가며 가르쳤다.
교장 선생님은 분교를 본교로 만들고 그동안 아이들은 노천(露天)교육으로 자연 실습을 많이 하였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교실삼고, 산들을 벽 삼아서 공부하는데도 애들의 공부열은 어느 학교 학동들에 뒤지지 않았다.
교장 선생님은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하되 근로를 존중하는 학생들을 만들기 위해
1. 근로는 생활의 꽃이다.
2.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한다.
3. 내 집은 내 힘으로 개척해 간다.
4. 내 고장은 우리의 힘으로 발전시킨다.
5. 내 조국은 내가 지킨다.
하는 교훈을 세우고 열심히 일하여 가르치고 배웠다.
마침 그 곳에는 백년전부터 유명한 약수가 개발돼서 서울, 대도시에서 많은 휴양객들이 몰려왔다.
교장 선생님은 그들이 소비하는 물품들이 멀리 도시에서 옮겨온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는 장에 나가 병아리 200마리를 사다 길렀는데 200마리의 1년 수입은 잡비용을 모두 빼고도 당시 돈으로 15만원에 이르렀다.
그걸로 교장 선생님은 송아지 4마리를 샀다.
닭은 이미 널리 퍼져 온 동네가 양계마을이 되고 송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1년 후에는 논밭을 갈 만큼 되였다.
재미가 난 학부형들은 여가를 이용하여 우사(牛舍)를 짓고 또 양계장을 만들어 주니 일시에 또 추동마을은 소를 기르는 마을로 탈바꿈하였다.
1965년 2월 처음으로 1회 졸업생이 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꼭 한사람이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도시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사람도 떨어지는 판에 이 산골짜기에서 일하는 것만 가르친 학교에서 진학이 가능할 리 없었다.
3명의 교사들은 서로 교대해가며 특별교육을 3개월 동안 실시했다.
학교의 명예는 오직 그 한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되면 백퍼센트 진학이고 한 사람이 떨어지면 백퍼센트 낙제다.
그래서 교사들은 그들의 명예를 걸고 지도했으며 그 학생 또한 전교의 명예를 걸고 공부했다.
과연 이듬 해 봄 그 학생은 성수중학교에 최우수 성적으로 합격했다.
신문에는 백퍼센트 입학한 것으로 났다.
다른 학교 낙제생들도 끌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공부를 위한 공부를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참 삶을 위한 한국적인 교육을 목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낙제생들을 도맡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듬해 66년에는 15명이 시험을 치뤘는데 춘천중과 춘천여중 및 성수중학교에 역시 백퍼센트 합격했다. 추곡국민학교는 일약 명문학교로 등장했다. 학생들은 얼마나 나오든지 모두 진학시키고도 걱정이 없을 정도로 부자 학교가 되었다.
양계에서 얻어진 수입, 축산에서 얻어진 수입 등이 1년이면 근 5,6백만원에 가까웠다.
학생들은 돈 한 푼 내지 않고도 학교공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중학진학금도 거기서 지불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일보사에서 특별교육상을 베풀어 사기를 돋우어 주었다.
학교기금의 일부를 떼어 텔레비젼 라디오 등을 비롯하여 온갖 과학 실험 기구를 사들였다.
사람들은 난생 처음으로 텔레비젼을 보더니 요지경이라 환호성을 울렸고 선풍기를 보고는 바람통이라 불렀다.
68년에는 51명이 모조리 진학하여 명예의 추곡국민학교상을 도로부터 받고 또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을 받게 되었다.
학생들은 중·고등학교를 가서도 실력 발휘를 제대로 하여 육사·공사·해사에도 들어가고 서울대학교에도 들어가 73년도에는 첫번째로 졸업했던 아이가 삼성회사에 취직해서 돌아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춤을 추고 동네사람들은 학교에 몰려와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심지 않은 곳에 열매가 맺을 리 없다.
우리의 힘으로 잘 살아보자.
부자학교를 만들며 이상적 의무교육을 실시해 보자.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단 15년이 못가서 결실을 맺어서 돌아왔다.
교장선생님은 국적 있는 교육을 실시코자 우선 우리말 사용을 본위로 한 뒤에 한번은 학생들이 군청에서 붙여놓은 광고물을 보고 와서 물었다.
『도․소매업 실태」라는 말이 써 붙여져 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
전혀 알 수 없었다.
붙여 놓은 광고를 다시 가서 보아도 알 수 없었다.
면사무소에 문의 하였더니
『우리도 알 수 없습니다 군청에서 붙이라 하여 붙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군청에 문의하니 거기도 알 수없다 하였다.
결국 총무처에 문의하여 그것이「도매·소매업 실태」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국정을 한다는 말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저 요즈음 외국말 모르는 놈은 아주 촌놈 취급을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라는 것이다.
불란서에서는 사람의 코를 얼굴 탑이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쵸코렛이니 맘보니 하여 아이들이 사먹는 과자 이름까지도 모두 서양식으로 불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는「롱슛」을「길게 꼿꼿이 차다」하고「골인」을「골문에 쑥 들어가다」하며「코너킥」을 「구석차기」라 하여 각기 자기말로 하고 있는데, 야구·농구·배구·축구 할 것 없이 우리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국적 있는 교육이냐고 반문하였다.
교장 선생님은 지금까지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매를 때리거나 모나게 꾸짖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에서 꼴등을 하면 일등상보다는 꼴등상을 더 푸짐하게 주고 격려했으며 싸움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전쟁하는 연습 잘한다. 괴뢰군이 오면 그 힘으로 일전에 격파하라.』
하면 애들이 그만 웃고 흩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한번은 담배 피우는 아이가 있어 담임선생이 걱정하므로
『무슨 담배를 피우는지 물어 보아서 고급담배를 사서 주라.」하였더니 물어보니「새마을을 피운다.」하여 이왕이면 고급 담배를 피워보아야 진짜 담배 맛을 알 수 있다 하며 거북선을 사서 주었더니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더라는 것이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세계 교육자대회를 하게 되어 그 견학학교로 지정되어 좋은 본을 보여주라 하여 공기놀이, 잣치기, 재기차기, 팽이치기를 시켰더니 견학 왔던 대학총장님들이 그것을 보고 실연을 해보아도 전혀 잘 되지 않으므로 이상하다 하였다 한다.
이것은 5천년 우리 민족이 아침저녁으로 익혀온 습관인데 하루아침에 될 수 있겠는가 가서 연습하면 2·3개월에 겨우 기초지식을 습득할 수 있으리라 하니 모두 웃더라는 것이다.
그는 잣치기를 야구 경기의 시초, 팽이치기를 아이스하키의 시초라 하니 모두 그렇겠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이다.
세상만사가 모두 일심소작(一心所作)이라 한 생각 깨달으면 만사가 다 지혜롭게 되는 것이다.
깨달은 지혜인이 없으면 우리는 항상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조국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신명학 교장 선생님과 같은 지도자가 더욱더욱 아쉬워진다.
그러므로 옛 사람들이 선구자의 노래를 이렇게 읊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속편 영험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