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가라월문보살행경(郁迦羅越問菩薩行經)
서진(西晉) 월지국(月支國) 축법호(竺法護) 한역 변각성 번역
1. 상사품(上士品)
2. 계품(戒品)
3. 의품(醫品)
4. 예거품(穢居品)
5. 시품(施品)
6. 예탑품(禮塔品)
7. 지족품(止足品)
8. 한거품(閑居品)
1. 상사품(上士品)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정사에서 큰 비구들 1,250인과 자씨보살ㆍ연수보살ㆍ제악보살ㆍ관세음보살 등 5천 인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세존은 무량한 백천 무리에게 둘러싸이어 설법하셨다. 이에 사위의 큰 성 안에 사는 욱가라라는 부호장자는 호희 장자ㆍ호탄 장자ㆍ선시 장자ㆍ유량 장자ㆍ소각 장자ㆍ상명문 장자ㆍ서명문 장자ㆍ유명문 장자ㆍ선재 장자ㆍ준행 장자ㆍ급고독 장자ㆍ빈기 장자ㆍ총구족 장자ㆍ심량 장자 등과 함께 있었는데 그 장자들은 다 각각 5백 권속들과 함께 사위성을 나와 부처님께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리고 부처님을 세 번 돌고 물러나 한 쪽에 앉았는데, 그들은 다 최상의 정진(正眞)의 도를 결심하였다.
그 때 욱가는 모든 장자와 정사들의 모임을 보고는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쭙고자 하나이다. 천중천(天中天)께서는 선권(善權)방편으로 가엾이 여겨 해설해 주소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음대로 물으라. 나는 설명하여 너를 기쁘게 하리라.”
욱가는 아뢰었다.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최상의 바르고 참된 도심(道心)을 내어 부처님의 무수한 슬기를 묻고 대승을 배우며 대승에 머물려 하고 대승을 돕고 대승을 타고 대승을 알아 일체 사람을 청하고 일체를 고루 편하게 하며 일체를 구호하고 대승의 갑옷이 되어, ‘구제되지 못한 자는 내가 구제하리라. 해탈하지 못한 자는 내가 해탈시키리라. 편안하지 못한 자는 내가 편안하게 하리라. 편안 얻지 못한 자는 내가 열반을 얻게 하리라. 나는 일체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 주리라’ 하여 최상의 서원을 세우고는 무량한 생사와 모든 악을 싫어하지 않고 무수한 겁동안 번뇌 속에 돌아다니면서 그 마음을 버리지 않거나, 혹은 보살도를 구하여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불법을 구족하려고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며 이 대승으로 일체를 기르고 3보와 가르침을 끊지 않고 일체의 지혜에 오래 머물면서 이 슬기를 구족하려 하면, 세존은 제가 보살의 계덕의 법을 말씀하시어 여래의 가르침을 분명히 행하고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이르러 최상의 정진의 도를 이루고 금세나 후세의 이르는 곳마다 대중에서 뛰어나며, 또 출가 보살은 애욕을 버리고 독실히 밀어 도를 지키며 수염과 머리를 깎고 비구가 되어 즐겨 계율을 받고는 법을 행하고 선을 행하며 정(正)을 행하게 하소서.
그리고 천종천이시여, 재가 보살(在家菩薩)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출가 보살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장자는 발심하여 여래에게 그런 이치를 묻는구나. 장자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나는 너를 위해 재가 보살과 출가 보살의 계덕과 정진의 쌓는 행을 해설하리라.”
이에 욱가는 분부대로 듣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집에 있으면서 수도하려면 귀명(歸命)해야 하나니 부처님께 귀명하고 법과 승에 귀명하며 자귀(自歸)의 덕으로 최상의 정진의 도를 구해야 하느니라.
장자야, 재가 보살은 부처님께 어떻게 귀명해야 하는가? 즉 ‘나는 부처님의 32종의 대인(大人)의 상을 구족하리라’ 하고 모든 하는 일이 선의 근본의 공덕을 삼아 그 32종의 대인의 상을 위해 무수한 원을 쌓아 항상 정진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부처님께 귀명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법에 귀명하는가? 법의 가르침을 받들어 섬기고 법을 공경해 받으며 법의 묘한 이치를 알고 법을 좋아하고 법을 즐거워하며 법에 들어가고 법을 뜻하며 법을 도어(導御)하고 법을 호지하며 법의 고요함에 머물며 법승(法僧)을 고무하고 법행에 머무르며 어디서나 법을 행하며 법의 힘씀을 위하고 법계를 설명하며 법의 힘을 위하고 법의 주인을 위하며 법시를 행하고 법보를 구하면서 ‘내가 최상의 정진의 도와 정각을 얻을 때에는 모든 하늘과 세간의 인민을 제도하기 위해 설법하리라’ 하나니, 이것을 법에 귀명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어떻게 승에 귀명하는가? 재가 보살로서 만일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과 제자나 범부를 보면 다 공손히 모시고 예로써 대우하며 나를 낮추어 공손하게 말하며 의심하지 않고 받들어 공양하며 행이 바른 우리를 받들면서 항상 생각하기를 ‘내가 최상의 정진의 도와 최상의 정각을 얻을 때에는 모든 하늘과 모든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설법하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업신여기지 않으리라’ 하나니, 이것을 승에 귀명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다시 장자야, 네 가지 법행으로 부처님께 귀명하나니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불도에 뜻을 두고 익히며, 둘째는 평등한 마음으로 보시하여 편벽 되지 않으며, 셋째는 대비(大悲)를 끊이지 않고, 넷째는 마음에 다른 승(乘)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재가 보살이 부처님께 귀명하는 네 가지라 하느니라.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네 가지 법행으로 법에 귀명하나니,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정사(正士)들과 친근하여 머리를 조아려 공경하면서 그 가르침을 받고, 둘째는 일심으로 법을 들으며, 셋째는 법을 들은 그대로 남에게 강설하고, 넷째는 보시하는 공덕으로 최상의 정진의 도를 구하는 것이니, 이것을 재가 보살이 법에 귀명하는 네 가지라 하느니라.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네 가지 법행으로 승에 귀명하나니,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성문과 연각의 법을 뛰어 넘어 일체의 지혜를 즐거워하고, 둘째는 음식을 보시하는 자에게 법을 가르치며, 셋째는 성현들의 해탈로 퇴전하지 않는 대중을 교도하고, 넷째는 제자의 업과 공덕과 해탈로 해탈을 삼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재가 보살이 승에 귀명하는 네 가지라 하느니라.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이 여래를 보고 마음으로 부처를 구하는 것을 부처님께 귀명하는 것이라 하고 설법을 듣고 마음으로 법을 생각하는 것을 법에 귀명하는 것이라 하며 여래와 성현들을 보고 마음으로 불도를 생각하는 것을 승에 귀명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서원의 보시를 구족하려는 것으로 부처님께 귀명하는 것을 삼고 법을 호지하는 보시로 법에 귀명하는 것을 삼으며 보시하고는 일체의 지혜를 구하는 것으로 승에 귀명하는 것을 삼느니라.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상사(上士)의 행을 행하고 하사(下士)의 행은 행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상사의 행이라 하는가? 이른바 상사는 재물에 법답고 비법으로 하지 않으며 정법으로써 사(邪)를 행하지 않고 사를 힘쓰지 않으며 곧은 업을 받들어 행하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보시하고 설법하며 재물을 생각하되 덧없다 생각하며 착한 일을 많이 행하고 부모를 효양하며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집사람과 친척과 아는 이와 벗과 손님과 하인에게 고루 주며 상법(上法)을 가르치고 하는 일이 법다우며 모든 짐을 버리고 일체를 위해 5음(陰)의 짐을 물리치며 항상 정진을 뜻하고 모든 짐을 일으키지 않으며 제자에게 연각승을 배우게 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되 싫증을 내지 않고 몸이 편안할 때 덧없음을 생각한다.
일체를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익이 있거나 기리거나 비방하거나 이름이 있거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이미 지난 세간의 모든 법에 교만하지 않고 빈부에 집착하지 않으며 재리와 명예와 고락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의 법행(法行)처럼 정법을 행하며 정제(正諦)에 자세히 머물고 도가(道家)를 분명히 보호하며 깨끗한 행을 구족하고 불도에 바로 머물며 온갖 더러움을 물리치고 항상 평등한 마음을 가지고 소원을 구족하며 다른 사람도 그 원을 가지게 하며 행을 버리지 않고 남도 그렇게 하게 하며 끝까지 해내어 망설이지 않으며 항상 되돌아하고 하는 일은 곧 착하며 가난한 사람을 보면 재물로 구제하며 두려워하는 이는 두려움이 없게 하며 걱정하는 이는 위로해 그것을 덜어 주며 연약한 이는 인욕으로 타이르며 세도 있는 자는 교만하지 않게 하며 잘난체 하는 자는 뽐내지 못하게 하며 존장을 공경하여 그 덕을 물으며 박식한 이를 친하고 그 방술(方術)을 물어 그 의심을 깨치며 항상 바른 견해를 위해마음에 거짓이 없으며 일체를 고루 가엾이 여겨 고적하지 않게 하고 해칠 마음이 없으며 종성을 가리지 않고 바람이 없으며 일심에 굳게 머물러 정진하기를 좋아하며 성현들과 모여 스스로 수행하기를 생각한다.
선량하지 않은 이를 보면 그를 매우 가엾이 여겨 자비에 머물고 다시 자비로 법에 마음이 평등하며 스승의 법을 업신여겨 방장한 자를 보면 들은 법 그대로 해설하고 개도(開導)하며 법을 듣고는 그 뜻을 생각하며 애욕과 기락(技樂)의 즐거움을 덧없다 생각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고 아침 이슬 같다 생각하며 재물을 헤아려 허깨비나 거품 같다 생각하며 권속들을 원수라 생각하며, 처자들을 무할지옥(無黠地獄)이라 생각하며 일체 받는 것을 고통이라 생각하며 가옥과 산업을 항상 멀리 떠나리라 생각하며 구할 때는 선의 근본인가 생각하며 가정을 종자라 생각하며 친척과 아는 이를 지옥과 축생이라 생각하며 밤과 낮이 다르지 않아 평등하다 생각한다.
몸은 요긴하지 않으나 요긴함을 행해야 하고 목숨은 요긴하지 않으나 요긴하게 머물게 해야 하며 재물은 요긴 하지 않으나 요긴하게 해야 한다. 어떤 것을 몸의 요긴함이라 하는가? 능히 수고로이 사람에게 와서 공경하고 승순(承順)하면 이것을 몸의 요긴함이라 한다. 만일 선의 근본을 줄이지 않고 공덕을 항상 늘게 하면 이것을 목숨의 긴요함이라 하며 모든 법에 받음이 없고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잘 보시하면 이것을 재물의 요긴함이라 한다.
장자야, 재가 보살이 이 비상(比像)으로 가정을 세우면 이것을 상사의 재가의 행이라 하며 이와 같은 집착이 없는 등정각의 계율을 잃지 않으면 이것을 지성(至誠)이라 하나니, 그 하는 일은 법다와 최상의 정진의 도에서 퇴전하지 않느니라.”
2. 계품(戒品)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5계(戒)를 받아야 한다. 첫째는 살생을 즐기지 않는 것이니, 즉 손으로 칼이나 막대기나 기왓장이나 들을 가지고 때리거나 해치지 않으며 남을 괴롭히지 않고 일체에 평등하고 항상 인자한 마음으로행하는 것이다. 둘째는 주지 않는 것을 취함을 범하지 않는 것이니, 즉 제 재물에 만족할 줄 알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으며 아첨과 지혜롭지 않는 일을 멀리 떠나며 만족할 줄을 알고 남의 소유를 탐하지 않으며 나뭇잎과 쌀낟까지도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
셋째는 사음(邪婬)을 즐기지 않는 것이니 즉 자기 아내에 만족할 줄 알고 남의 여자를 범하지 않으며 음욕을 생각하거나 음탕한 일을 익혀 심한 고통을 부르지 않으며 항상 스스로를 단속하여 이렇게 관(觀)해야 한다. 즉 아내에 대해 생각이 일어나면 곧 악로(惡露)로 관찰하고 항상 욕진(欲塵)을 즐거워하면 사심으로 욕심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나니, 사음은 사람을 지옥에 가까이 가게 한다. 몸에 대해 생각을 내는 것은 고상한 일이 아니요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지금 서원을 세우면 다시는 음욕을 익히지 않게 하겠거늘 하물며 음욕과 합함이겠는가? 고 하는 것이다.
넷째는 거짓말을 즐기지 않는 것이니, 즉 그 말이 정성스럽고 분명하여 실행이 말과 같으며 이간질하는 말을 하지 않고 더하거나 줄이지 않으며 실수하는 말이 없고 각의(覺意)를 행하며 보고 들은대로 말하여 법을 보호하고 차라리 신명을 잃을지언정 마침내 거짓말하지 않느니라.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니, 즉 술을 즐기지 않고 술을 맛보지 않아 성품을 편안히 하며 사납지 않고 우치하여 결정을 못하지 않으며 마음과 뜻이 강하고 생각이 편안하며 가진 것을 보시하고 무례한 자를 제어하며 만일 남에게 술을 주거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이 보시는 무극(無極)으로 건너갈 때 남의 하고 싶음을 따라 그 요행을 끊지 않고 원컨대 내가 하는 일과 내가 주는 술을 받는 자의 지혜와 의지가 보시에 머물러 어지럽지 않게 하리라. 왜냐하면 보살은 일체 보시를 구족하여 무극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살은 이와 같이 사람에게 술을 주어도 법에 죄가 없는 것이다. 재가 보살은 이 5계의 공덕을 가지고 최상의 정진의 도를 위해 이 5계를 호지하는 것으로 최상의 정진을 삼는다. 혹 싸우는 사람이 화해를 시키더라도 억센 말을 쓰지 않고 항상 기뻐할 말을 갖추어 쓰면서 두 가지 말을 쓰지 않으며 그 말이 이치다와 비법이 아니며 말하면 곧 선해 인자한 마음을 잃지 않으며 그 말이 말한 것과 같아 움직일 수 없으며 모든 고통을 끊어 주고 해칠 뜻이 없으며 인욕의 힘으로 승나승열의 갑옷을 입으며 바른 소견을 가지고 그릇된 소견을 멀리 떠나며 그 보시는 적막함이 없느니라.”
3. 의품(醫品)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그가 사는 나라와 고을을 항상 법으로 보호하고 신심 없는 자는 신심을 가지게 하며 공경함이 없는 자는 공경이 있게 하며 지혜가 없는 자는 지혜가 있게 하며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의리를 돌아보지 않는 자는 법으로 가르쳐 노인에게 충효하여 정진을 받들어 행하고 부지런하기를 뜻하게 하며 지혜가 적은 자는 널리 듣게 하며 빈궁한 자는 크게 보시하게 하며 계율이 없는 자는 계율을 지니게 하며 성내는 자는 인욕하게 하며 게으른 자는 정진하게 하며 방자하는 자는 일심을 지키게 하며 사뙨 지혜를 가진 자는 바른 지혜에 머물게 하며 앓는 자에게는 의약을 주며 보호할 이가 없는 자는 보호해 주며 돌아갈 곳 없는 자에게는 그 귀의를 받아주며 구제할 이 없는 자는 구제해 주느니라.
일체를 일과 같이 인도해 법으로 보호하는데 가령 한 사람이 악도(惡道)에 떨어지면 재가 보살은 한 번 두 번 세 번 내지 백 번까지도 선법에 머물게 하고 또 다른 갖가지 선덕(善德)에 머물게 한다. 재가 보살은 일체를 위해 큰 슬픔을 건립하고 일체의 지혜에 굳게 머물며 승나의 갑옷을 입고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해탈시키기 어렵고 사나우며 깨우치기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고서야 비로소 최상의 정진의 도를 취하리라. 내 마음은 이와 같이 아첨이 없는 사람과 거짓이 없는 계법을 완전히 갖춘 덕이 있는 사람을 바로 믿지 않는다. 큰 승나의 갑옷을 입고, 나는 이로써 법을 들으며 수행하는 사람을 받지 않기 때문에 승나의 갑옷을 입고 원하기를 내가 항상 정진하여 저 우치한 사람이 나를 보고 기뻐하게 하리라.’
보살은 어디 있거나 자세하고 분명하여 함부로 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잘못해 악도에 떨어지면 저 보살은 여래의 집착 없는 등정각에 대해 큰 허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가 보살은 집에서 수도할 때에는 항상 이 승나의 갑옷을 입고 서원하기를 ‘나는 이 나라와 고을에 있는 사람들로서 악도에 떨어지는 이가 없게 하리라’라고 한다. 비유하면 그 나라나 고을에 용한 의사가 있을 때 가사 어떤 사람이 횡사(橫死)했다면 그 의사는 그 사람에 대해 허물이 있는 것처럼 보살도 이와 같아서 그가 사는 그 나라의 고을에서 사람들을 구호하여 하지 않고, 만일 어떤 사람을 악도에 떨어지게 한다면 그는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께 허물이 있느니라.”
4. 예거품(穢居品)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재가의 더러운 일을 알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재가라 하는가? 온갖 선의 근본을 끊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온갖 불선한 번뇌에 살고 온갖 불선한 생각에 살며 온갖 불선한 행에 살고 항상 선량하지 못하고 고요하지 못하며 법이 없음과 더불어 일심을 없게 하고 사나운 악인들과 함께 모이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그러므로 악마가 그 틈을 엿보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음욕과 분노와 우치에 살고 온갖 번뇌의 괴로운 법과 세속의 잡일에 살게 되어 항상 신의 근본을 얻지 못하게 하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이런 가운데 살면서 하지 않아야 할 일을 경솔하게 하며 부모와 존장ㆍ중우(衆祐)ㆍ사문ㆍ범지ㆍ도사를 존경하지 않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애욕을 즐기고 근심의 고통을 가지며 온갖 마음에 맞지 않는 일에 우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감옥과 싸움과 불화와 소송과 욕설을 가지고 있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선을 쌓지 못하고 공덕의 근본을 파괴하며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함부로 하여 모든 부처님과 정사들의 칭찬을 받지 못하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이런 가운데 싫음으로써 사람을 악도에 떨어지게 하고 이런 가운데 싫음으로써사람을 음욕과 분노와 우치의 두려움에 돌아가게 하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계품(戒品)을 지키지 못하고 정품(定品)을 버리며 혜품(慧品)을 행하지 못하고 해품(解品)을 가리지 못하며 도지견품(度支見品)을 일으키지 못하나니 이것을 재가라 한다. 이런 가운데 사는 자는 부모ㆍ형제ㆍ처자ㆍ고향ㆍ지인ㆍ벗ㆍ권속ㆍ붕당(朋黨)의 은애의 근심에 집착하여 만족을 줄 모름이 모든 물이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재가라 하며 그 따라 더러움과 탐욕으로 생각을 일으켜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재가는 탐욕이 많고 모든 악과 근심이 끊이지 않는다. 재가의 은애의 모임은 독이 섞인 맛난 음식과 같다. 재가는 본래부터 고통과 원수의 모양이 지인(知人)과 같다. 재가는 방해가 많아 성현의 바른 가르침을 폐한다. 재가는 항상 투쟁이 있으니 온갖 일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재가는 탐욕이 많아 부호를 구하고 존귀함을 사모하여 항상 선악의 일을 행한다. 재가는 덧없는 것이어서 오래 가지 못하는 무너지는 법이다. 재가는 수고로와 항상 구함이 있고 모든 소유를 탐한다. 재가는 항상 악심이 있으므로 칼과 막대기를 쓰는 것이 원수와 같다.
재가는 정결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청백함을 나타낸다. 재가는 그림의 채색과 같아서 다만 좋은 것만 나타내지마는 그것은 빨리 없어지는 것이다. 재가는 허깨비의 변화와 같아서 아(我)가 없으면서 오가고 모이기를 좋아한다. 재가는 마치 수만꽃과 같아서 피자마자 곧 시드는데 구함이 많기 때문이다. 재가는 아침 이슬이 해가 뜨면 곧 떨어지는 것과 같다. 다만 죽음의 걱정이 있을 뿐이다. 재가는 부모와 같아 즐거움은 적고 걱정이 많다. 재가는 그물과 같아 항상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접촉ㆍ법을 걱정한다. 재가는 쇠부리의 새와 같아 다만 불선의 생각만 걱정한다. 재가는 독사와 같아 모든 일을 말함을 걱정한다. 재가는 몸을 태우는 불과 같나니 주의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재가는 항상 원수를 걱정하나니 이른바 5적(賊)과 원수 집안의 나쁜 자식 때문이다. 재가는 안온함이 적어 해탈할 수 없나니 평등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장자야, 재가 보살은 재가의 더러움을 알아야 하느니라.”
5. 시품(施品)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 등 온갖 선을 행하면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보시란 내 소유가 되고 재가란 내 소유가 안 된다. 보시란 요긴함이 되고 재가란 요긴함이 없다. 보시란 후세의 편안함이 되고 재가란 후세의 고통이 된다. 보시란 두려움이 없는 수비가 되고 재가란 걱정의 수비가 된다. 보시란 보호가 없고 재가란 경호가 된다. 보시란 애욕의 다함이 되고 재가란 애욕의 더함이 된다. 보시란 받는 것이 없고 재가란 받음이 있다. 보시란 두려움이 없고 재가란 두려움이 있다. 보시란 불도를 이루고 재가는 악마의 관속을 더한다. 보시란 다함이 없고 재가란 덧없음이 된다. 보시란 즐거움을 지키고 재가는 괴로움을 지킨다. 보시란 욕심의 번뇌를 끊고 재가란 욕심의 번뇌를 더한다. 보시란 큰 부자가 되고 재가란 큰 가난이 된다. 보시란 상사(上士)의 행이요 재가란 하사의 행으로서 뜻에 생각하는 바가 없고 받는 것도 없다. 보시란 모든 부처님의 칭찬을 받고 재가란 강인한 사람이 한탄하는 바가 된다.’
이와 같이 장자야, 재가 보살의 보시는 이런 요긴한 행이 되느니라.
거지를 보거든 세 가지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그 세 가지 생각이란, 첫째는 선지식을 대접한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불도를 얻게 하리라는 생각이며, 셋째는 후세에 큰 부자가 되게 하리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그 세 가지 생각이다.
다시 세 가지 생각이 없으니, 그 세 가지 생각이란, 첫째는 간탐과 질투를 없애리라는 생각이요, 둘째는 가진 것을 다 보시하리라는 생각이며, 셋째는 일체의 지혜를 버리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 생각이다.
다시 세 가지 생각이 있으니, 그 세 가지란 첫째는 하는 보시가 자상하여 여래를 위한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악마를 항복받는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갚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 생각이다.
다시 세 가지 생각이 있다. 첫째는 빈궁한 자를 보면 교화하기 위해 준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4은(恩)을 행하여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처음과 나중이 끝이 없는 생사를 받는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또 세 가지 생각이 있다. 첫째는 음욕을 떠난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분노를 떠난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우치가 없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 생각이다. 왜냐하면 장자야, 재가 보살은 거지를 보면 음욕과 분노와 우치가 엷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엷어짐이라 하는가? 인자한 마음으로 보시하여 아까와하지 않으면 음심이 곧 엷어지고 거지에게 성내는 마음이 없으면 분노가 곧 엷어지며 보시하되 일체의 지혜가 되기를 원하면 우치가 곧 엷어지느니라.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이 거지를 보면 여섯 가지 바라밀을 구족한다. 어떻게 구족하는가? 만일 보시하는 사람이 받는 사람의 취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시바라밀이라 하고 마음에 불도를 걱정하지 않으면 이것을 지계바라밀이라 하며 거지를 보고 성내지 않고 해칠 마음이 없으면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 하고 남에게 음식을 보시하고도 스스로 주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굳이 인정으로 보시하여 보시하는 마음을 어기지 않으면 이것을 정진바라밀이라 하며 거지에게 보시하고도 늘 만족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후회하지 않으며 마음으로 기뻐하면 이것을 일심(一心)바라밀이라 하고 모두에 법을 보시하되 집착하지 않고 갚음도 생각하지 않으며 이것을 지혜바라밀이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재가 보살은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을 멀리 떠나야 한다. 즉 세간의 재물과 처자ㆍ사택ㆍ노예ㆍ보배 등 모든 이익을 좋아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기뻐하지도 않고 걱정하지도 않으며 일체의 소유를 탐하거나 사모하지도 않고 항상 법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관찰해야 한다.
‘부모ㆍ처자ㆍ사택ㆍ노예ㆍ하인 등에 대한 욕심을 따르면 이것들은 내게 고락의 인연의 생각을 일으킨다. 이것들은 우리들에게 필요없는 것이다. 항상 정진을 원하면 이런 것들은 악을 더하게 하고 금생에 누리는 쾌락 등은 후세에는 고통이 된다. 나는 저런 것들을 빨리 구해야 하나니 이른바 보시ㆍ지계ㆍ지혜ㆍ정진이니 이것들은 방일이 없고 불도를 생각하며 선의 근본을구족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은 다만 이 소원을 구하는 것뿐이니, 차라리 신명을 잃을 지언정 처자와 남녀를 위해 온갖 악을 짓지 않으니라.’
장자야, 재가 보살이 집에서 수도할 때 부녀자를 보면 세 가지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덧없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소유가 없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발음이 없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 생각이 있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지금에 즐거워하는 벗은 후세의 벗이 아니라는 것이요, 둘째는 항상 정진을 행하여 드나 나나 뜻을 지키는 것이 벗과 같다는 것이며, 셋째는 이것이 안온한 것으로서 괴로운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 생각이 있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정결하지 않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더럽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냄새가 추악하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나찰이라는 생각이요, 둘째는 발을 돌려 뒤로 다니는 귀신이라는 생각이며, 셋째는 다만 색(色)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가 없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만족하기 어렵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타락한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반복이 없고 지족이 없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다. 그 세 가지는, 첫째는 나쁜 벗이라는 생각이요 둘째는 탐착한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청정한 범행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사람을 지옥에 떨어뜨린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사람을 축생에 떨어뜨린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아귀에 나게한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두렵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유유(有有)라는 생각이며, 셋째는 수취(受取)라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실체가 없다는 생각이요, 둘째는 발음이 없다는 생각이며, 셋째는 난잡함을 멀리 떠난다는 생각이니, 이것이 그 세 가지이다.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그 아내를 볼 때 탐애하지 말고, 그 자식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지 말며 세 가지로 그 마음을 꾸짖어야 하는 것이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불도에 대해 뜻이 평등하고 치우치지 말며, 둘째는 행이 평등하고 치우치지 말며, 셋째는 불도에 있어서 한 법을 행하고 여러 행이 없는 것이니, 이 세 가지로 그 마음을 단속해야 하느니라.
만일 그 아들을 보거든 원수라 생각하고 선지식이라 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때문에 나로 하여금 부처 종자의 선지식을 떠나게 하기 때문이니 더욱 좋은 마음으로 여래를 생각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일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키며 내 몸을 사랑하는 덕으로 일체를 사랑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일체는 내 아들이니 나도 일체를 위해 그 아들이 되리라. 그리하여 집과 고향을 오가면서 주선하는 일이 없으면 태어나는 곳이 도리어 원수의 집이 될 것이다. 원컨대 나의 하는 일과 행으로 하여금 선지식도 없고 악지식도 없게 하라. 왜냐하면 만일 선지식이 있으면 애욕의 생각을 더욱 더할 것이요 만일 악지식이 있으면 일체에 애욕이 없을 것이다. 나는 항상 그 마음을 조절하여 집착이 없게 하리라. 항상 일체 법을 행하고 일체 행에 들어가리라. 사행(邪行)을 행하는 자는 사사(邪事)에 떨어지고 정행(正行)을 행하는 이는 정사(正事)를 얻는다. 그러므로 나는 사행을 행하지 않고 모든 일에 평등하게 행하기를 원한다. 내가 배우는 소원은 일체의 지혜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장자야, 재가 보살은 모든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받는 것도 없으며 탐하는 것도 없고 애욕에 물들지 않고 그것을 일으키지도 않으며 일으킴이 없게 하지도 않는다. 재가 보살로서 만일 거지를 보면 그에게 어떻게 보시해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나는 이 물건을 가지고 보시함으로써 마침내 계행을 얻어 음욕과 생사의 근심을 없애고 정(正)에 들어가리라. 내가 가진 물건을 보시함으로써 죽을 때는 잘 죽으리니 내가 모든 것을 보시하기 때문에 임종 때에는 기뻐하면서 뉘우침이 없으리라’고.
또 마음은 있으나 보시할 수 없는 이가 거지를 보거든 네 가지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 공덕이 적을 것을 생각함이요, 둘째는 이것은 내 죄다. 이 대승의 마음으로 자재하게 보시를 행하지 못한다 함이며 셋째는 마침 뜻을 내어 내게 맡긴 것이기 때문에 인욕하여 남에게 보시하리라 함이요, 넷째는 원컨대 내가 지음으로 하여금 이 소원을 이루어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하고 거지를 타이르리라 함이다.
장자야, 재가 보살이 만일 세존의 가르침을 떠나면 부처님의 일어남도 없고 설법하는 자도 없으며 성현의 승을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때는 10방의 모든 부처님을 두루 생각해야 한다. 즉 ‘이 모든 부처님도 본래 보살도를 행할 때에는 다 정진을 해안 뒤에 부처님이 되고 모든 불법을 구족하였다’고. 이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고는 이렇게 권조(勸助)해야 한다. 즉 밤낮으로 각각 세 번째 그 몸과 입과 뜻을 깨끗이 하고 그 다음에는 자비를 고루 행하고 모든 소유를 버리며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공덕으로 스스로 장엄하고 그 마음이 청정하여 남을 기쁘게 하며 신심으로 불도를 즐기어 어지러움이 없으며 하는 일은 자상하고 공경하여 모든 잘난체함과 교만을 끊고 항상 3품법경(品法經)을 외우며 모든 악행을 버리고 80가지 일로 허물을 뉘우치며 일심으로 모든 복을 돕고 상호를 구족하며 모든 법바퀴를 굴리고 모든 부처님의 법바퀴 굴리심을 도우며 무량한 행으로 스스로 그 나라를 받아 그 수명이 헤아릴 수 없느니라.
장자야, 재가 보살은 8관재(關齋)를 행해야 하나니 이 재계의 공덕을 가지고 범행이 청정한 사문으로서 보살의 선의 근본을 행하면서 모든 계율을 구족한 도덕의 사문과 범지를 사귀어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되 그 악을 보거나 그 장단을 찾지 말아야 한다. 혹 계율을 범하는 비구를 보더라도 그 가사를 공경히 섬기면서 ‘이것은 세존 여래 무소착 등정각의 가사’라 하고 계율ㆍ삼매ㆍ지혜ㆍ해탈ㆍ견해를 가사라 하여 그 가사에 예배하고는 일체 음진(婬塵)을 떠나나니 ‘이것을 모든 성현의 신통의 법이라 한다’ 하고 이렇게 생각하고는 더욱 이 비구를 공경한다.
그리하여 그 비구에게 큰 슬픔을 일으켜 이 악행과 그 계율을 범한 것은선이 아닌 계율을 행한 것은 불법의 적정(寂定)이요, 조유(調柔)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래의 법문에 들어가 사문이 된다. 적정이 아니요 조유가 없는 것은 현자의 행이 아니니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여래 말씀에 계율이 없고 배우지 못한 자라 하여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사람의 허물이 아니요 허물이기 때문이다. 애욕으로 불선의 본태를 보면 불법의 보호가 있다고 하셨다. 만일 이 음진의 생각이 공한 것을 깨달으면 곧 제일의 도의 뜻을 얻고 평등의 인(忍)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잘 애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세존 말씀에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평등한 상을 한정해서는 안 된다’ 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을 평등한 상으로 하려면 곧 평등한 상의 여래가 될 것이니 여래의 아시는 바는 나의 궁구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그는 악심으로 그 장단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니라.”
6. 예탑품(禮塔品)
“다시 장자야, 재가 보살이 부처의 절 정사에 들어갈 때는 문 밖에 서서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한 뒤에 정사에 들어가서는 이렇게 생각해야한다.
‘이것은 빈 절이다. 경계도 없고 생각도 없으며 원도 없다. 자ㆍ비ㆍ희ㆍ사를 얻기 위해 사는 절이요, 평등을 얻기 위해 사는 곳이다.’
그리고 ‘나는 언제 이런 절을 얻고 번뇌를 떠나 이 절에 살면서 보름의 계를 설명하는 모임을 얻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문의 뜻을 일으켜 ‘보살로서 집에 있으면서 최상의 정각을 얻은 이는 없다. 다 집을 떠나 산에 들어가 바위 굴에 살면서 불도를 얻었다. 왜냐하면 집에 사는 것은 더러움이요, 집을 떠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과 항하의 모래와 같은 부처님의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 동안에 절을 짓고 일체의 소유를 보시하리라. 그리하여 출가해 도를 배우는 것은 내 마음을 기쁘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신심이 없는 사람과 반복이 없는 사람과 도적ㆍ백정ㆍ나찰ㆍ아전 등도 보시하기 때문이다. 그 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나는 계율과 지혜를 최상으로 하고 인자한 마음으로 공경하며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체를 쓰기 때문에 나도 여래의 계율을 받들어 행하여 최상의 정진의 도인 최상의 얻게 하며 일체를 위해 불사를 짓고 여래가 되어 열반을 얻지 못한 자는 열반을 얻게 하리라’ 한다.
그리고 정사에 들어가 모든 비구승의 행을 관찰한다.
‘어느 비구가 지혜가 많고, 누가 법을 알며, 누가 계율을 지니고, 누가 법에 머무르며, 누가 보살품을 가지고, 누가 한거(閑居)를 행하며, 누가 걸식(乞食)하고, 누가 다섯 가지 누더기를 입으며, 누가 족함을 알고, 누가 혼자 다니며, 누가 좌선하고, 누가 대승을 행하며, 누가 정진하고, 누가 절을 맡은 자인가?’
이렇게 모든 비구승의 행을 관찰하고는 다 고루 보시하되 다른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겠거늘, 하물며 촌락으로 다니는 자를 가까이 하거나 촌락을 가까이 하거나 또한 문안하러 촌락으로 가겠는가?
만일 비구가 옷이나 바리때가 없거나 혹은 앓으면서 약이 없으면 평등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보시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세간 사람은 다 안온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더욱이 범부들의 마음을 아라한보다 더 돌보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범부들은 원망하는 일이 있지마는 아라한은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많은 비구를 따라서는 그 말을 듣고 배워야 하고 경전을 아는 비구를 따라서는 그 앎을 듣고 배우며 계율을 지니는 이를 따라서는 죄를 앎을 배우고 보살 등을 가진 이를 따라서는 6바라밀과 좋은 방편을 배우며 한거 행자를 따라서는 그 일심의 행을 배워야 한다.
만일 가난한 비구가 있으면 의복과 바리때ㆍ침구ㆍ의약 등을 보시하여 불도 가운데서 평등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보시의 은혜를 베풀음으로써 큰 보리심을 도와 일의키기 때문이니, 사문은 이렇게 잘 알아야 하느니라. 서로 싸우는 사문이 있으면 곧 화해시키고 법으로 싸우거든 신명을 아끼지 않고 법으로 구호하며 병을 앓는 비구가 있으면 살이라도 베어 주어 고쳐주고 원망하지 말게 하라. 부처의 마음으로 일체 공덕의 근본을 삼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제가 보살은 이런 이치와 이런 행과 이런 믿음으로 집에서 수도해야 하느니라.”
그 때 욱가 장자와 모든 가라월은 다 한꺼번에 큰 소리로 아뢰었다.
“참으로 천중천님에는 미치기 어렵습니다. 여래께서는 재가의 더러움과 악마의 행과 출가의 공덕과 명예를 잘 말씀하셨읍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재가의 번뇌를 직접 보았사오며 출가의 공덕행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저희들도 세존을 따라 법을 받기 원하나이다. 머리와 수염을 깎고 비구가 되어 삼가 대계(大戒)를 받고자 하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출가하기는 매우 어렵다. 항상 오로지 계율을 수호하여 결함이 없게 해야 한다.”
장자들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출가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나이까? 여래께서는 저희들을 가엾이 여겨 수염과 머리를 깎고 대계 받기를 허가해 주소서 저희들은 삼가 그 가르침을 받들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곧 허락하시어 수염과 머리를 깎게 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미륵보살과 제행청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저 장자들을 너희들에게 부탁하여 그 수염과 머리를 깎게 하노니 이 장자들은 곧 상사가 되리라.”
미륵보살은 곧 천 2백 장자들을 위해 그 수염과 머리를 깎고 제행청정보살도 천 2백 장자들을 위해 그 수염과 머리를 깎았다. 부처님이 재가 보살의 계덕적법품(戒德寂法品)을 말씀하실 때 천 2백인은 다 최상의 정진도의를 내고 2천 5백 보살은 음향인(音響忍)을 얻었으며 4천의 하늘과 사람은 유순법인(柔順法忍)을 얻었다.
7. 지족품(止足品)
그 때 욱가 장자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은 재가보살의 선악과 대승이 행할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를 말씀하셨읍니다. 원하옵나니 세존은 다시 출가의 수염과 머리를 깎는 보살의 행과 지계ㆍ경진ㆍ지혜ㆍ지족의 덕을 말씀해 주소서. 천중천님, 출가 보살은 어떻게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률을 받들어 행해야 하며 무엇을 출가라 하고 그 마음이 다름이 없으며 그 행이 바뀌지 않고 또한 마중하여 예를 거스리는 합장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착하고 착하다. 장자야, 여래에게 출가보살이 수염과 머리를 깎는 구족한 행을 묻는구나.”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장자여,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예, 세존이시여.”
욱가 장자는 분부를 받고 들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출가 보살은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무엇 때문에 나는 출가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는가?’라고.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불법을 구족하기 위해 출가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는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항상 지혜와 무소착에 정진하기를 생각하되 머리에 붙는 불을 끄는 듯 해야 한다. 그리고 출가해서는 곧 성현 안에 머물면서 이렇게 지족(止足)을 알아야 하며 지족을 명문(名聞)이라 한다. 분위(分衛)에서 지족을 알면 분위에서 지족을 아는 것을 명문이라 하며 침구에서 지족을 알면 침구에서 지족을 아는 것을 명문이라 하며 의약과 의복에서 지족을 알면 의약과 의복에서 지족을 아는 것을 명문이라 한다. 장자야 이것을 성현의 행이라 하며 이 가운데 서서 불법을 이루는 것이 이른바 성현의 행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출가 보살에게는 옷을 입고 지족을 아는 열 가지 행이 있다. 그 열 가지란, 첫째는 옷을 입고 항상 부끄러워하는 것이요, 둘째는 가사를 입고는 애욕을 단속하나니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사문의 옷을 위해 봄이 없고 생각함이 없게 함이며, 넷째는 가사 의복을 갖추고 모든 하늘과 세상 사람을 돕는 것이요, 다섯째는 가사를 입는 까닭은 마음이 쾌락을 좋아하지 않고 쾌락을 익히지 않기 위해서며, 여섯째는 좋은 방편으로 모든 음진(婬塵)을 멸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지족을 아는 것은 선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이 옷을 받는 것이며 여덟째는 모든 악을 버리고 선의 인연이 되는 것이요, 아홉째는 성현의 도에서 퇴전하지 않고 일심으로 정진하는 것이며, 열째는 나로 하여금 열심히 끝까지 가사를 입게 함이다. 장자여, 이것이 열 가지로서 출가 보살이 가사를 입고 지족하는 행이니라.
다시 열 가지가 있으니 목숨이 다하도록 걸식을 행해야 한다. 그 열 가지란, 첫째는 스스로 지혜와 덕이 있어 남을 의뢰하지 않고, 둘째는 누가 내게 분위를 주면 먼저 3승에 선 뒤에 그 분위를 받으며, 셋째는 누가 내게 분위를 주지 않으면 나는 그에 큰 슬픔을 일으키고 넷째는 누가 내게 보시하면 나는 그것을 먹고 정진하여 이룸이 있어야 하며, 다섯째는 여래의 가르침을 잃지 않고, 여섯째는 발심할 때 1심으로 지족을 알게 하며 일곱째는 교만행이 없고, 여덟째는 이 공덕으로 정수리를 볼수 없는 이가 되며 아홉째는 누가 나를 보면 그도 내 배움을 본받게 하고, 열째는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가 내게 보시하면 나는 그들에게 마음이 평등하고 오로지 일체의 지혜를 이루려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로서 출가 보살은 분위를 버리지 않는다.
만일 아는 이가 있으면 기쁘게 하고 회한이 없게 하며 어디로 가나 바람이 없어야 하겠거늘 하물며 내게 집착함이겠는가? 그리고 아첨이 없으며 음식이 있는 곳에서는 내게도 유익하고 남의 소원도 이루게 해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허락하여 걸식하게 하리라. 보살은 풀자리에 있거나 나무 밑에 있거나 무덤 사이에 있거나 열 가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 그 열 가지란, 첫째는이미 모든 내 소유의 행을 끊고, 둘째는 나도 없고 내가 받는 것도 없으며, 셋째는 한가히 있으면서 문을 열고 평상에 앉고, 넷째는 애욕의 모든 집착을 멀리 떠나며, 다섯째는 조금 구해도 집착이 없이 덕의 근본을 생각하고, 여섯째는 신명을 아끼지 않고, 다만 한가히 있기를 즐기며, 일곱째는 모든 모임을 아주 버리고, 여덟째는 지은 죄를 다 소멸시키며, 아홉째는 일심 삼매에 더러움이 없고, 열째는 공을 생각하면서 드나 나나 뜻을 지킴이니, 장자야, 이것이 그 열 가지이니라.
출가 보살은 나무 밑에 있거나 풀자리에 앉았거나 가사 법회에 나아가 스승인 화상이나 문병하는 이가 정사에 오면 자신이 가되 몸과 마음이 함께 가야 하며 만일 경을 외우는 이에게 배우러 가면 모든 슬기를 다 이해하며 정사의 방에 있으면서 고요히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가히 있는 이는 항상 정진하여 법을 구하되 일체 소유는 나가 아니라 생각하고 일체의 법은 남을 위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출가 보살은 약을 쓸 때 열 가지 일이 있다. 그 열가지란, 첫째는 나는 여래의 지혜를 얻으리라 하고, 둘째는 남에게서 족함을 취하지 않으며, 셋째는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생각을 되풀이하지 않고, 넷째는 나는 청정히 살리라 하며, 다섯째는 모든 욕심의 맛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온갖 집착을 버리고, 여섯째는 나는 범부들보다 다르리라 하며, 일곱째는 모든 좋은 맛이 저절로 내 앞에 나타나리라 하고, 여덟째는 악으로 온갖 번뇌를 끊으며, 아홉째는 스스로의 모든 소견의 집착을 끊고, 열째는 모든 병을 빨리 고쳐 안온함을 얻는 것이니, 장자야, 이것이 그 열 가지로서 출가보살은 목숨이 다하도록 약을 써야 하느니라.”
8. 한거품(閑居品)
“다시 장자야, 출가 보살이 한가하게 살 때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한거행에 있는가?’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다만 한거에만 있는 것이 사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 한거에는 부조정(不調定)과 불성취(不成就)와 법칙이 없고 의리가 없는 자가 많이 있으니, 이른바 크고 작은 사슴과 날으는 새들과 벌레와 여우와 잔나비ㆍ야인(野人)ㆍ마후륵ㆍ사냥꾼 등은 사문이라 할 수 없다. 내가 필요하여 한거에 있는 것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이니 이른바 사문의 길이다.’
장자여, 어떤 것이 출가 보살의 사문의 길인가? 이른바 뜻이 어지럽지 않아 모든 총지와 이해와 모든 슬기를 얻고 들음을 구족하며, 여기에서 고명(高明)을 얻고 대자(大慈)를 익히고 대비를 버리지 않으며 다섯 신통과 여섯 바라밀을 얻고 그 마음이 자재하여 일체의 지혜를 버리지 않으며 좋은 방편의 지혜로 말하고 일체의 법을 보시하며 인민을 교도하고 4은(恩)의 행을 어기지 않으며, 6념(念)을 생각하고 들으면 곧 익히며, 일심에 정진하고 법을 받들어 바로 알며 일심으로 도의 슬기를 얻어 적정한 곳을 떠나지 않으며 바른 법과 인연의 죄와 복을 단속하며 곧은 소견으로 일체의 생각과 생각 없음을 끊고 곧은 생각으로 설법하기를 원하며, 항상 곧은 말로 모든 죄를 끊어 복의 행을 구족하고 곧은 다스림으로 모든 소유의 집착을 끊으며 곧은 업으로 불도에 이르고 곧은 뜻으로 일체의 지혜를 얻으며 곧은 선정을 행해 공에서 두려움이 없고 생각 없음을 행하여 나에게 원도 없고 일으킴도 없으며 지성으로 경전의 이치를 옹호하며 법의 뜻도 떠나지 않거니와 또한 사람도 없나니, 장자야, 이것이 출가 보살의 사문의 길이니라.
저 출가 보살은 여러 가지 일을 익히지 않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덕의 근본을 익히고 나 한 사람을 위해 선의 근본을 익히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출가 보살은 마땅히 네 가지 일을 익혀 여래의 아는 바가 되어야 한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법회를 익히고, 둘째는 남의 말을 익히며, 셋째는 여래를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기를 익히고, 넷째는 부단히 불승의 뜻을 익히는 것이니, 이것이 그 네 가지로서 항상 여러 익힘을 해탈하느니라.
만일 한거에 있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여기 왔다. 무엇이 두려운가? 모임과 음욕ㆍ분노ㆍ우치를 익힘이 두렵고 뽐냄과 분노와 교만과 남을 위해 해칠 뜻이 두려우며 탐욕과 질투가 두렵고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접촉 등의 생각이 두려우며 몸의 악마ㆍ욕심의 악마ㆍ죄의 악마ㆍ하늘의 악마가 두렵고 비상(非常)을 상(常)이라는 생각이 두려우며 괴로움을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두렵고 실(實)이 없는 것을 실이라는 생각이 두려우며 나가 없을 나가 있다는 생각이 두렵고 나(吾我)가 있음이 두려우며 의심과 바르지 않은 생각ㆍ망설임ㆍ음탕함이 두렵고 악지식이 두려우며 애욕과 지혜롭지 못함이 두렵고 마음과 뜻과 알음이 고르지 못함이 두려우며 모든 덮개와 구함이 두렵고 스스로 몸을 봄이 두려우며 재리와 모든 색이 두렵고 구처견(求處見)이 두려우며 염(念)과 무념(無念)과 타념(他念)이 두렵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함이 두려우며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 함이 두렵고 의식 없이 말함이 두려우며 사문의 번뇌가 두렵고 갖가지 행이 두려우며 욕계ㆍ색계ㆍ무색계가 두렵고 지옥ㆍ축생ㆍ아귀가 두려우며 생기는 8난(難)이 두렵고 생기는 5도(道)가 두려우며 갑작스런 생각과 모든 불선법이 두렵다. 나는 이 때문에 여기 왔으며 집에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모임의 시끄러움 속에서 일심으로 공을 생각하면 이로써 두려움에서 해탈하고, 모든 과거를 두려워하는 보살은 다 두려움으로 인해 해탈하며, 한거의 힘을 입어 불도의 무외(無畏)를 얻는다. 나는 두려움으로써 일체의 두려움을 초월하여 한거에 머무르지마는 일체의 두려움을 내게 받기 때문에 나(吾)에 머무르고 나[我]에 집착하여 신애(身愛)에 더럽혀지며, 나에 집착하고 나를 일으켜 아상(我想)이 있고 오견(吾見)이 있나니. 이른바 나의 몸이라는 생각이 있으므로 내 몸을 지키기 위해 이 한거에 온 것이다. 나의 수용을 끊고 나의 인연을 단속하려면 나를 한거에 있게 하여 평등한 뜻의 무외(無畏)를 얻어야 한다.’
한거에 있는 자는 나라는 생각이 없고 한거에 있는 자는 남이라는 생각이 없으며 한거에 있는 자는 얻는다는 생각이 없고 한거에 있는 자는 스스로 몸의 자취를 보는 일이 없으며 한거에 있는 자는 머무름을 구하는 생각이 없고 한거에 있는 자는 열반이라는 생각이 없거늘 하물며 음진(婬塵)의 생각이있겠는가? 그러므로 한거라 하는 것이다.
모든 법에 집착이 없고 3계에 사는 자를 가엾이 여기며 일체 두려워하는 생각과 삶을 익힐 생각이 없고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접촉에 살 생각이 없으며 일체 삼매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고 그 뜻을 안정시키고 고요히 살며 모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삶에 두려움이 없으며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번뇌의 무를 이미 건넜으며 모든 존재에 삶이 없고 성현의 행에 살 생각이 없으며 일심에 족함을 알고 살며 풀자리에 살고 슬기에 깊이 들어가 살며 정진과 일심에 살고 계율에 살며 모든 결박과 집착을 끊어 감옥을 해탈로 삼아 살며 공ㆍ무상ㆍ무원에 살고 3해탈문과 조유(調柔=부드러워서 어떤 일을 이루는데 적합함)를 얻어 그곳에서 떠나지 않고 살며 12인연을 관찰하고 할 일을 마치고 살면서 열반에 든다.
비유하면 장자야, 산택에 초목이 있지마는 들소와 코끼리와 말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장자야, 출가 보살도 한거의 행에 있으면서 그 몸을 보기를 초목과 같이 보아 털끝만큼의 생각이 없다. 몸을 어떻게 보고 정진할 때에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두려움이 없다. 그 몸은 공이어서 나가 없고 사람이 없으며 수명이 없는데 마음을 좇아 여러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애욕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으며 내가 생각을 떠나면 좋은 생각이 된다고 관찰한다.
비유하면 산천의 초목을 들소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모든 법을 남이 쓸쓸한 곳에 있다고 이렇게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한거에 있는 자는 모든 생각을 끊고 음탕의 더러움에 떠나며 한거에 있는 자는 남처럼 나가 없고 믿음이 없다. 출가 보살로서 한거에 있는 자는 이렇게 배워야 한다. 즉 ‘한거에 있는 자는 정품(定品)에 화순(和順)하고 한거에 있는 자는 지혜품을 생각하며 한거에 있는 자는 해탈들을 생각하고 한거에 있는 자는 도지견품(度知見品)에 머무르며 한거에 있는 자는 불법품을 애호하고 한거에 있는 자는 12사(使)를 끊으며 한거에 있는 자는 바른 원을 생각하고 한거에 있는 자는 제법품(諸法品)에 평등하며 한거에 있는 자는 경계를 짓지 않고 한거에 있는 자는 모든 입(入)을 벗어났으며 한거에 없는 자는 불도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거에 있는 자는 공에 집착함이 없으며 한거에 있는 자는 법에 바라는 것이없고 한거에 있는 자는 본래 좋은 덕과 명성이 있으며 한거에 있는 자는 부처님의 칭찬을 받고 성현도 한거를 익히며 한거에 있는 자는 애욕을 벗어나고 차특(差特)이 있기 위해 일체의 지혜에 들어 가야한다’는 것이니라.
다시 장자야, 한거에 있는 보살은 소소한 일로 6바라밀을 구족한다. 왜냐하면 한거행에 있으면서 신명을 아끼지 않나니 이것이 보시바라밀이요, 지족을 알고 적정하여 3전(專)에서 기거하나니 이것이 계율 바라밀이며, 해칠 마음이 없는 자비가 일체에 두루하고 일체의 지혜에서 참아 다른 길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이 인욕바라밀이요, 이 한거를 끝내 버리지 않고 인(忍)을 얻고서야 버린다 하나니 이것이 정진바라밀이며, 선정을 얻어 나에 집착하지 않고 덕의 근본을 일으키나니 이것이 일심바라밀이요, 마음에 생각한 것을 몸으로 그대로 행하나니 이것이 지혜바라밀이니라.
장자야, 한거에 있는 보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보살이 여기서 많은 지혜를 얻고, 둘째는 잘 분별하여 모든 법률을 결정하며, 셋째는 모든 덕의 근본을 알고, 넷째는 이 넓은 지혜로 일심으로 정진하여 한적한 데 사나이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니라.
다시 장자야, 보살이 만일 음진이 많으면 음진을 익히지 않아야 비로소 한거에 머물 수 있으며 음진에 집착하지 않고 욕심을 받지않으면 들은 법 그대로 받들어 행할 수 있느니라.
다시 장자야, 보살은 다섯 가지 신통을 얻어 모든 하늘ㆍ용ㆍ귀신ㆍ건달바 등을 위해 설법하나니, 한거에 있어서는 이러해야 하느니라.
다시 장자야, 보살은 불법의 지혜를 배운 뒤에라야 공한에 있나니 이렇게 함으로써 일체 선의 근본을 구족할 수 있으며 그 다음에는 이 덕의 근본을 가지고 나라의 군현에 들어가 도로서 인민들을 제도한다. 만일 보살이 경을 읽기 휘해 내려오면 화상을 공경하고 받들어 섬기며 노소와 중년에게도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게으리지 않고 일에 정진하며 공경하고 봉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은 저 하늘ㆍ용ㆍ귀신ㆍ건달바의 봉사(奉仕)함을 받고 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의 봉사와 모든 제석ㆍ범천ㆍ인비인 등의 공경을 받으신다. 세존은 일체를 안온하게 하시면서 자신을 위해 공양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이 스스로 와서 공양한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한창 배우려 할 뿐인데 도리어 남의 공양을 바라겠는가?’
왜냐하면 남을 위해 법을 보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해야 한다. 즉 ‘공양함으로써 내게 와서 봉사하다. 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스스로 신심이 있다고 하여 와서 공양한다고 생각하는 보시는 그 복이 크지 않다. 화상에게 가되 몸과 마음이 함께 가며 몸과 뜻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 만일 내 화상이 다른 곳으로 가면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경을 외우고 배우는 지혜로운 사람은 화상을 위해 신명을 아끼지 않아야 하며 법을 즐기기 때문에 화상의 행을 따르고 법의 이익을 위하기 때문에 일체 재리의 색을 버려야 하며 화상에게서 한 4구게라도 즐겨 들어야 한다.
경을 외우는 일이나 보시를 행하는 일이나 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의 일이나 지혜의 일이나 자ㆍ비ㆍ희ㆍ사의 일이나 일심으로 불도를 익히는 일이나 4구게를 듣고 외우는 일이나 화상에게 공양하며 그를 좇아 자구의 뜻을 배우고 그 배운 뜻은 곧은 마음으로 아첨하지 말며 일체 만물로 공양해도 스승의 은혜를 갚을 수 없겠거늘 하물며 법의 공양이겠는가?
장자야, 만일 그 전하는 설법을 듣거든 좋은 음성이거나 불법의 음성이거나 열반의 음성이거나 가르침 그대로의 음성이거나 여래의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 한겁동안 스승님께 봉사해도 그 은혜는 다 갚을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설법의 복은 무량하고 그 지혜는 한정할 수 없으며 세존의 법에 머무름도 무수하다. 어떤 보살이 무량한 법을 공양하려면 출가 보살에게 공양해야 한다. 어떤 것이 출가자가 배워 익힐 것인가. 들은 법 그대로 행하여 그 계품을 자세하고 청정히 해야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출가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어서 제품이 청정하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성현의 가르침에 살고, 둘째는 덕으로 걸식하여 즐겨 지족을 알며, 셋째는 출가 보살은 집을 즐거워하지 않고, 넷째는 계율을 익히지 않아도 아첨이 없고 한거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의 지성(至誠)스러운 행으로 몸도 얻음이 없는 것이며, 둘째는 입의 지성스러운 말로 입도 얻음이 없는 것이며 셋째는 뜻의 생각이 유연하고 뜻도 얻음이 없는 것이며, 넷째는 모든 소견을 멀리 떠나 일체의 지혜에 머무는 것이니,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또 네 가지가 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내 일을 버리고, 둘째는 내 일을 멀리 하며, 셋째는 자재를 끊고, 넷째는 인연의 법을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또 네 가지가 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내 몸이 법의 하나라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종자가 법의 종자와 같다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입(入)이 저 공취(空聚)와 같다는 것이요, 넷째는 지혜의 행을 얻어 가도 살 곳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또 네 가지가 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몸의 앎이 몸이 스스로 지음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남에게 흔들리지 않음이며 셋째는 사람의 죄에 들어가지 않고 모든 생각을 멸함이요, 넷째는 모든 법을 받들되 자세하고 다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또 네 가지가 있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공에서 해탈하고, 둘째는 생각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며, 셋째는 일체를 위해 크게 슬퍼하고, 넷째는 무아인(無我忍)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만일 그가 청정한 삼매란 말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즉 ‘어떤 것이 청정한 삼매인가’고. 모든 법을 받들 때에는 그 뜻이 욕심과 내 소유를 버리고 그 마음을 하나로 만들며 그 마음이 흐름이 없고 마음에 업신여김이 없으며 유희의 결박으로 뜻을 묶고 마음에 집착이 없으며 마음을 볼 수 없고 마음이 안에 나타나며 뜻의 경계에 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뜻이 나와 법에 있어서 어떤 것을 생각이라 하는가? 법계에 평등하여 남도 없고 행도 없이 안팎에 집착 없이 바로 받아들이나니 이것을 삼매라 하고 이것을 법에 머무르는 삼매라 하느니라.
만일 그의 들음이 분명하고 지혜가 청정하면 그는 곧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즉 어떤 것을 지혜라 하는가? 이른바 법구를 해석함에 있어서 분별하는 지혜를 슬기라 하고 아는 지혜에 들어가는 것을 슬기라 하며 남의 마음속 생각을 아는 것을 슬기라 한다. 그는 법을 바로 받아들여 지혜와 무지에 있어서나 상(相)에 몸이 없어 공하고 상이 가짐도 없고 버림도 없어 상이 있는 곳이 없고 다함이 없이 많은, 상(相)의 생각을 비우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이렇게 법을 관찰해야 하나니 이것이 출가 보살의 행이니라.”
부처님이 이 경을 다 말씀하시자 8천 사람은 큰 보리심을 내고 이 여러 장자로서 출가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은 이들은 다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으며 3만 2천의 하늘과 사람들은 번뇌를 멀리 떠나 모든 법에 대해 법눈이 깨끗해졌고 2백 비구들은 일어남이 없고 번뇌가 다하고 의심이 없어졌으며 욱가 장자는 기뻐하면서 백천의 가치가 있는 뛰어난 옷을 여래께 바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이 선의 근본과 공덕을 가지고 일체 보살에게 보시하여 이 공덕으로 하여금 저 재가 보살들에게 돌아가게 하여 다 여래처럼 이 법을 구족하게 하며 출가보살들로 하여금 계율과 지혜를 얻어 이 법을 구족하게 하겠나이다. 그리고 또 출가 보살로 하여금 여래처럼 계율과 지혜를 얻게 하기를 원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재가 보살은 그 사는 곳에서 출가의 계법을 구족히 배우겠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제가 보살은 일체를 보시하되 아까와 함이 없고 그 마음은 항상 대승을 구하면서 그 갚음을 바라지 않느니라.
또 장자야, 재가 보살은 범행을 깨끗이 닦으면서 마음에 음욕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행함이겠는가?
또 장자야, 재가 보살은 공을 이해하고 네 가지 선정에 들며 좋은 방편으로 의지없는 이를 구제하여 그 마음을 편하게 해야 하느니라.
또 장자야, 재가 보살은 크게 정진하고, 지혜바라밀을 알며 일체에 대해 큰 사랑을 행하여 일체의 법을 받아 들이고 옹호하여 법의 가르침으로 사람을 교화해야 하나니 이것이 네 가지 행이며, 재가 보살은 집에 있으면서 출가의 계법을 세우느니라.”
그 때 욱가 장자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재가의 자리에 홀로 서서 여래의 가르치신 계율에 살고 저는 여래를 위해 불도를 널리 펴며 또한 이 출가의 법을 배우고 다시 이 법의 계율을 봉행하겠나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미소지으셨다. 모든 세존의 법으로써 웃으실 때 무수한 빛깔ㆍ갖가지 빛깔ㆍ불가사의한 빛깔이 입 안에서 나와 무량한 불국토를 비추는데 위로 범천에 이르렀다가 다시 돌아와 부처님 몸을 돌고는 정수리 위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천자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함부로 웃지 않으십니다. 웃으신 그 뜻을 듣기 바라나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욱가 장자가 법 때문에 여래에게 공양하고 다시 사자후하는 것을 보았는가?”
아난은 말하였다.
“예,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보았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욱가 장자는 재가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 현겁(賢劫)에서 모든 여래께 다 공양하고 그 교법을 받았었고 재가로 있으면서 출가의 계법을 구족하였다. 이 때 여러 여래가 널리 말씀하시는 교법을 들었었다.”
이에 아난은 욱가 장자에게 물었다.
“이 재가가 즐겁습니까? 재가가 괴롭습니까? 성현의 교법을 받기에 재가가 출가보다 못합니까?”
욱가는 답하였다.
“아난님, 그만 두시오. 그런 말 마시오. 저 성현들도 번뇌가 없읍니다. 대비의 해탈이 있지마는 자신의 편안함을 생각지 않으며 저 보살은 모든 고통을 참으면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욱가 장자는 재가 자리에 있지마는 항상 평등한 마음이 있어서 이 현겁에서 제도한 인민은 매우 많아 다른 출가 보살의 백천인의 가르침보다 더 훌륭하다. 왜냐하면 아난아, 출가 보살 백천인 있더라도 그 덕의 지혜는 욱가 장자에 미치지 못하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경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오며 어떻게 받들어야 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경의 첫째 이름은 욱가장자소문(郁迦長者所問)이요, 둘째 이름은 재가출가품(在家出家品)이며, 셋째 이름은 일심연좌기덕명문(一心宴坐其德名聞)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이 이 경을 듣고 모든 법을 구족하면 백 겁 동안 범(梵)의 청정하고 게으리지 않은 행을 닦은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아, 큰 정진을 닦으려는 이나 남에게 정진을 가르치려는 자나 스스로 일체 법의 덕(德)에 머무르려는 자나, 일체를 법의 덕에 세우려는 자는 이 경을 듣고 수지독송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법을 구족하고자 하면 이 경법을 여래처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난아, 그 어떤 보살이 이 경을 멀리 떠나면 그것은 일체 부처님을 멀리 떠나고 다시 일체 부처님을 보지 못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이가 이 경을 설명하면 그는 일체 부처님을 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난아, 가사 이 3천대천 세계 안에 불을 가득 세우고 보살이 그 속에 들어가 이 법을 구해 듣고 수지 독송하면 그것은 이 3천대천 세계 안에 보배를 가득 채워 그것으로 스승님께 공양하고 이 경법을 받아 수지 독송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난아, 어떤 보살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되 목숨이 다 하도록 그 부처님께 공양하고도 이 경법을 받지 않고 독송하지 않으며 또한 그 안에서 공덕을 짓지 않으면, 그것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 않음이 되느니라.
아난아,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수지 독송하며 남에게 널리 설명하고 그 안에서 온갖 공덕을 지으면 이것은 이미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ㆍ무소착ㆍ등정각은 법을 최상으로 삼고 그들이 법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