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비령의 애환
이조 영조 때의 암행어사 박문수(朴文殊)는 울산 출신으로 울산 문수암에서 기도하여 남았으므로 이름을 문수라 지었다 한다.
문수보살과 같이 지혜가 박달(博達)하여 많은 민생을 구하기도 하였지만 불교계에는 한때 금성령(禁城令)을 내리게 하는 정치진로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어느 때 폐의파립(弊衣破笠)으로 풍산(豊山)지방에 들어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있다.
풍산은 명자 그대로 산령(山嶺)이 풍부하고 또 거기 험한 골짜기가 많은 대신 산나물이 많이 나서 산채약재를 구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곳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산이 험하고 고개가 높아서 한번 넘어본 사람들은 다시 넘지 않는 곳이 이 산이기도 하 다.
그런데 박문수 어사가 멋모르고 민심을 살피고 오다가 그 고개에서 기허(飢虛)에 쓰러져 꼭 죽게 되었다.
이틀 동안을 발도 움직이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하고 있었으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다 힐끔힐끔 쳐다보고만 갈 뿐 누구 하나 와서 묻는 사람이 없었다.
「미친 거지인가봐?」
「글쎄, 아무래도 살기는 다 틀렸는걸.」
그 때 나물을 캐 가지고 4,5명의 여인들이 함께 내려오다가 그중 한 여인이 말했다.
「웬 사람이지?」
「글쎄, 지나가는 사람이겠지.」
먼저 번 의심한 사람이 옆으로 다가가니 몰골이 초췌한 중년 장부가 <물·물·물>하고 허기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 높은 산 골짜기에 물이 있어야지―」
여인은 망설이고 있다가 팅팅 부른 자기의 젖을 그 남자에게 물렸다.
문수어사는 마치 갓난아이가 어미의 젖을 쪽쪽 빨 듯 밀크통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고맙소.」
「어찌하여 이 산중에 혼자 이렇게 누워 계십니까?」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가십시다.」
여인은 무거운 나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그 남자를 부축하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한편 동행하였던 여인들은,
「흥, 재미 보는구먼.」
「그렇게 굶주렸나.」
「분명히 자식과 남편을 가진 사람이.」
「미쳤어, 미쳐. 아기의 젖을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내 먹이다니, 그것도 새파란 중년에게‥‥」
이렇게 주고받고 내려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다른 사람들의 남편은 마중을 나오지 아니했는데 하필이면 그 부인의 남편만 아기를 업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어찌하여 애 엄마는 아니 옵니까?」
「뒤에서 재미 보지요.」
「재미라니, 이 캄캄한 거리에서.」
「아마 애 아버지가 잘못해 주어서 그렇겠지요.」
하고 비꼬았다.
부인들의 얘기를 들은 남편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미친년, 나물 캐러 다니면서 외간남자 보러 다니는구나.」
그 남자는 자기의 부인을 만나자마자 발로 차고 매를 때려 옆 사람들이 보기도 흉하게 되었다.
박어사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용서하십시오.」
그런데 그의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를 지르며,
「이 새끼, 남의 여인을 희롱하고도 뭐라 하느냐?」
하고 마구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코가 깨져 피가 나고 옷이 다 찢어지도록 맞았다.
그런데 마침 허리춤에 찼던 마패가 나타나자,
「암행어사다. 암행어사.」
하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때서야 남편은 무릎을 끊고 빌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빌어먹을 세상, 사람은 무섭지 않고 마패만 무섭구나.」
박어사는 일어서서,
「만일 내가 당신의 아내의 젖을 먹지 않았다면 나는 그 곳에서 죽었을런지 모르오.
허나 당신의 행패는 너무 극심했소. 아내와 걸인을 이렇게 학대한다면 어떻게 여자가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중생을 살필 수 있을 것이며 거지가 밥 한 숟갈 얻어먹고 살겠소.
당신이 한 행위로 보아서는 마땅히 벌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아내의 은혜 때문에 그만 물러가니 집에 가서 근신하고 기다리시오.」
남편은 밤낮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부르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10여일 후 출두명령이 왔다. 동헌에 나아가니 감사와 함께 나란히 앉아 있던 박어사가,
「아내를 사랑하여 주십시오. 아내를 공대하여 주십시오.
은혜를 잊지 못하여 논 몇 마지기를 하사하오니 가난한 살림에 보태어 쓰십시오.」
하고 문서를 내주었다.
이로 인해 그 산 고개를「금비령」이라 하고 준비 없는 사람은 아예 그 산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였다.
<한국지명연역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