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 정조대왕의 효심
“백성들에게는 효를 강조하는 왕으로서 내 아버님께는 효도 한번 못하다니……”
왕세손이었던 정조 나이 11세 때, 할아버지 영조는 부친 장현세자(장조, 사도세자)에게 비참한 죽음을 내렸다. 뒤주에 못을 박고 큰 돌을 얹게 한 후 손수 붓을 들어 세자를 폐하고 서인을 만들어 죽음을 내린다는 교서를 발표한 것이다.
그로부터 8일 후,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어릴 때 목격한 당시의 모습이 뇌리에 떠오를 때마다 정조는 부친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 임금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부모님의 은혜를 10가지로 나누지요. 그 첫째는 나를 잉태하여 보호해 주시는 은혜요, 둘째는 고통을 참고 나를 낳아주신 은혜며……”
설법을 다 들은 정조는 부친을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지금의 화산으로 묘를 옮김과 동시에, 용주사를 창건하여 기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자주 용주사를 찾았다.
어느 초여름 날, 능을 참배하던 정조는 능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음을 보았다.
“허허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로서 어찌 임금의 아버님묘 앞에 있는 소나무 잎을 갉아먹는 단 말인가.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이렇듯 독백하며 송충이를 한 마리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 이후로는 이 일대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