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5권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제5권

따져서 말하기를 어째서 색 등의 온갖 경계와 더불어 상관하지 않음을 ‘봄’이라 이름하는가라고 한다.

만일 이 논란을 부정해 버린다면, 여기 수고롭게 더 말하지 않으리라. 이 식의 자체가 스스로 형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비록 색 등이 없다 하더라도 경계가 성립될 수 있음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다. 꿈·지옥·눈병 등을 비유할 수 있는 일로 정하고, 거기에 알맞은 대상을 따라서 널리 비량(比量)으로 진술하였다.

이것으로부터 억념이 생긴다고 하였다. 바깥 경계를 상대하지 않고, 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봄’의 자성(自性)이 그제야 비로소 생길 수 있다. 비록 실제의 뜻이 없을지라도, 새겨둔 생각[念]이 의식[意]과 더불어 함께한다. 현재 보는 식의 소유한 공능(功能)이 안치된 힘이기 때문이다. 그 차례를 따라 그 외 다른 연[餘緣]을 빌려서, 이끄는 주체[能牽引]가 되어야만, 감각의 상[覺想]이 비로소 생겨난다. 그 때를 억념(憶念)이라고 이름한다.

어떻게 또 ‘봄’과 기억의 두 체가 특별히 다른 줄 알겠는가. 만일 이 봄과 기억이 함께 아울러 바깥 경계의 존재를 빌리기 때문에, 자체를 일으킬 수 없어서, 유사한 경계를 따른다고 한다면.

잘못된 의심을 막기 위해 분별의 식[分別識]을 설하리라. 이를 보고 사용하게 된다면, 헤아려 따짐이 생기지 않으리라. 앞 경계의 모양과 상태는 단지스스로 깨닫는 자체 성질이 일으킨 마음에 새겨둔 생각[念: 記憶]의 모양만 있을 뿐이다. 그 말의 모양이 잘 펼친 차별을 취해서, 모양을 앎이 밝지 못한 분별이 생긴다. ‘봄’이 앞장서서, 버릴 대상을 훈습(薰習)하고, 당장 이 [念]의 자성(自性)이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생기지만, ‘봄’은 그렇지 않다. ‘봄’과 마음에 새겨둔 생각[念]은 조리가 정연하여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결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음과 같은 이치를 인정해야 한다. 가령 또 그 바깥 경계가 있어서, 둘(봄과 기억)이 다 경계를 두고, 모양을 인연함이 다르지 않을지라도, ‘봄’과 마음에 새겨둔 생각은 자체가 똑같지 않다.

만일 다른 길이 있다면, 마땅히 설해주기 바란다.

저것이 가령 현재의 경계를 인연한다 하여 봄이라고 이름할지라도, 과거를 인연했다면, 기억[念]이라고 한다. 경계가 없는데 근거한다면, 저것이 비록 경계가 다를지라도 있고 없는 모양은 인식의 대상[所緣]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달라진 모양은 연(緣) 또한 어쩔 수 없이 봄과 기억에서, 한쪽을 생각하게 된다. 마땅히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이 달라진 모양을 성립시킨다고 말해야 하리라.

그렇다면 이 경계가 바로 그 식이 나타낸 모양이리라. 만일 이렇게 결정한다면 다음과 같이 알 수 있겠는가. 앞 경계에서 알아봄을 결단하고 나서 저와 서로 유사하게 일으킨 식이 분명하여 잊지 않기 때문에, 저 일을 취할 때에 곧 이 일이라 이름하여 유사한 모양을 삼는다. 마치 장부 모양[丈夫相]의 생김새를 결정하여 분명히 알아보고 나서, 비로소 이를 유사한 장부라고 이름함과 같겠는가. 유사한 모양을 분명하게 앎은 이전에 본 적이 없지 않아야 하지만, 그러나 이전에 본 적이 없는데도, 이와 같이 결단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다면, 바깥 경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다. 저 자체가 깨달았기 때문에 심왕과 심소가 생겨서 아는 모양이 똑같지 않음은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기에 전혀 논란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대가 이미 일을 썩 교묘하게 분별하였으니, 내가 마음대로 이치가 어떤지 물어보리라. 똑같은 때에 자체의 깨달음이, 이미 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 봄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과거의 일이 아니면서, 기억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면, 저것은 자체의 깨닫는 성질이아니기 때문이다. 또 자체의 깨달음이 아니라면, 설명한 사실이 도리를 어긴 것과 같기 때문이다. 먼저 당연히 자기를 돕고 난 뒤에 남의 소유한 진술의 책략(策略)을 공격해야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새겨둔 생각[念]이 경계를 의탁하여 생겼으니, 함께 성립하지 않았다. 또 꿈의 경계에서도 바깥 경계를 받아들여 함께 의탁함이 성립되어야만, 다음 시기에 스스로 저것이 원래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즐거움 등이 즐거운 일을 받아들임과 같다. 만일 그 바깥 경계가 원래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단지 유사한 모양만이 있어서 뒤섞이고 어지럽게 앞에 나타날 뿐이다.1)
그럴 때 바깥 경계가 있지 않으니 자연히 결단하기를, 마치 꿈꾸는 사람이 깨고 나서 이에 실제가 아님을 아는 것과 같다고 하리라. 꿈꾸는 사람이 있지 않은 일을 보다가 깨고 나서 이에 실제가 아님을 안다. 만일 또 깨었을 때도 또한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꿈속에서 저 경계가 있지 않음을 세상 사람이 저절로 아는 것과 같으리라.2)
그렇지만 이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한다. 바로 깨었을 때는 색 등의 경계를 진실하게 받아들임은, 꿈속의 식에 힘의 작용이 없는 것과 똑같지 않다. 이 또한 가능하지 않지만 그래도 깨우치기 위해 색 등에서 받아들임의 뜻을 성립시켜 보리라. 꿈꾸는 사람이 꿈속에 빠져 있을 때는 이 경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없다. 만일 잠의 어두움을 멀리 벗어났을 때, 분명한 지혜를 얻는다면, 그 소유한 갖가지 이전의 인연을 따라서, 기억[念]의 종자를 훈습한다. 그리고 꿈자리에서 받아들인 경계에 대해 기억[憶]이 윗자리[上]의 마음에게 비로소 이 일이 있지 않다는 결단을 내리게 한다. 저것이 이미 이와 같다면, 이것 또한 그렇다. 비록 바깥 색이 아닐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서 곧 반대로 바깥 색을 보는 마음이 허망한 분별을 일으켜서, 거듭거듭 앞에 나타나며, 자주자주 생각을 인연한다. 그리고 이 종류의 성질이 소유한 공능(功能)이 생겨서 훈습(薰習)하여 종자를 이루고, 그 윗자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곧 이것을 훈습케 한다. 다시 그 실제의 일이 아님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뒤에 그 외 다른 연(緣)을 일으켜, 밝게 진실한 뜻을 본다. 잠과 서로 유사한 법이 있으므로, 비록 깨어 있는 자리일지라도 역시 잠이라고 말한다. 이 훈습(薰習)이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면(睡眠)3)은 그 외 다른 잠과 같이 단지 허망한 감각이 있을 뿐이다. 식을 떠나서 별도로 색성(色聲) 등의 경계를 보면서, 묶임을 당하고 극심한 괴로움을 받는다. 삶의 나루를 떠다니며 욕심의 바다에 빠져 윤회함은, 아직 올바르게 훈습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꿈속에서 색 등의 경계가 없음을 깨달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실에 아직 부합할 수 없기 때문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경계에 끌려 속게 된 것이다. 비록 듣고 생각하는 데서 생기는 지혜가 있을지라도, 분별의 훈습을 따르기 때문에 아직 참다움을 뚜렷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다. 올바르게 일으킬 수 없음을 또한 ‘허망함에 속음’이라고 이름하며, 이 때를 ‘깨닫지 못함’이라고 이름한다. 저 훈습된 종자에 대해 다스려 끊음이 미리 생김으로, 끝내 깊이 들어 있는 힘의 작용을 뽑아 없앤다. 처음 일어날 때에 세상이 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았으니, 이를 근거로 ‘세상을 벗어난 지혜’4)라고 이름한다. 바르게 온갖 분별의 성질을 끊어버리기 때문에, ‘분별이 없는 지혜’5)가 현재에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훈습된 무명[無知]6)의 수면(睡眠)을 없앨 수 있으므로 ‘진실한 깨달음’을 체득한다. 이 때 이 분별이 없는 지혜를 빌려서 원인을 삼았으므로, 이 힘을 근거로 방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결단코 색 등의 온갖 뜻에 굳게 집착한 훈습(薰習)을 끊어 없애 버릴 수 있으니, 청정(淸淨)이라고 이름한 다. 온갖 경계의 모양에 끼어들어 헤아려 따지기 때문에, 세간(世間)이라고 부른다. 저 지혜가 나타나고 나면 단지 오직 이 식만이 그 색의 종류를 따를 뿐이다. 연(緣)이 힘을 모으기 때문에 생겨 일어날 때 오직 자기의 식에서 그 상분(相分)이 나타날 뿐이지만, 허망하게 모든 경계에 집착해서 생기는 원인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식을 떠나지 않고 자체의 성품이 있기 때문에, 색성(色聲) 등의 경계에서 분명한 앎이 생긴다. 그 세운 바 인식의 수단이 만일 전체적 양상에 의지하여 저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세운 주체의 원인[能立因]에, 성립되지 않는 허물이 있음을 인정하리라.

만일 차별이라 말한다면.

깨칠 때를 알지 못하니 되려 성립되지 않음이 앞과 서로 유사하다. 깨달음의 자리에는 경계가 원래 없음을 분명히 아는 일임은, 종(宗)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 허물이 있으니, 이치로는 참으로 이 세움의 주체를 가지고, 그 앞 경계에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음을 성립시킬 수 없다.

어떤 이는 여기에 성립되지 않는 허물이 있으니, 해석한 글을 진술해도, 원래와 다름이 없으리라. 경계라는 견해를 두지 않는다면, 이것이 없다는 지혜이리라고 하였다.

마땅히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반드시 먼저 경계를 알아야만, 비로소 이 일에 이 마음을 내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앞 경계가 여기 존재함을 분명히 아는데, 어찌 다시 또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양이 있음을 바로 보고 있으면서, 또 이에 없다고 말한다면 분명 서로 어긋나리라. 만일 널리 해석하여 저 모든 종(宗) 등이 부정해서 있지 않다고 한다면, 진정 서로 어긋나지 않으리라. 모든 외도(外道)의 논리에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등을 말하면서 생기기 이전이나 멸한 이후에도 다 아울러 없지 않으며, 혹은 장소에 대해서도, 혹은 이것이 그 외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경계가 있을 뿐 그 외 다른 것이 없다고 한들 무슨 잘못이 있으랴. 만일 때로는 ‘나’에 대해서 오히려 없다고 한다면, 분명히 알지 못하고 부정하여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없는 데서 앎을 일으킴은 인정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색 등에는 내가 없다. 그리고 색 등의 조작된 곳에는 진실한 내가 없으니, 나를 의지하지 아니한다는 글과 같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색 등의 쌓임에서는 잠시 허물이 없을 수 있으나, 식에 ‘나’가 없다고 설한다면, 어떻게 논란을 면하겠는가.

제 2의 식[第二識]7)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외 다른 식의 경계에서, ‘나’가 없음을 분명히 아는 것도, 역시 앞에서 받아들임이 없이, 뒤에 억념할 수 없다. 가령 마음에 새겨둔 생각이 일어날지라도, 경계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인정해야 하리니, 단지 오직 식만 있어서, 모양이 나타날 뿐임은 곧 인정한 바와 같다. 그러니 식의 자리에 ‘나’가 없음을 알고, 그 ‘나’가 없다고 부정하다가, 식이 만일 생길 때가 되면, 이 지혜가 이 때에 ‘나’의 자체가 없음을 안다.

그리면 경계를 떠나서 오직 식뿐임을 분명히 알고, 이 모양의 생김새를 따라서 연(緣)이 만일 생길 때에 경계가 없다고 안다면, 어찌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색 등에서 ‘나’가 없음을 분명히 알 때, 색 등의 경계에서는 이 공동으로 인식한 모양이요, 이 자체의 모양이 아니다. 이를 근거로 각기 의지하여 결정된 성질로 여기면서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유사하지 않는 온갖 모양의 생김새는, 이 실제한 사실이 있으니, 그 외 다른 것에서 가려내려는 것이다. 그 달라진 모양이 있어서 식에 기대어 일어남은, 마치 실제한 일에 마음을 모으는 몫이 있는 것과 같다. 식의 자체에서 굴러 일어나며, 눈앞에 나타나니, 세속의 언론은 이를 근거로 생긴다. 바깥 경계를 분명히 앎은, 단지 이 자기의 마음에서 생긴 일을 받아들일 뿐, 본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에 가장 뛰어난 수습(修習)으로 체득할 성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명(無明)이 지혜를 덮어씌웠으므로, 밖에서 굴러 변해서 이 공동의 모양을 보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일이 시기에 적절한 세속의 말을 성립함과 다르지 않다. 세속의 감각을 따라서, 언설의 길[言說路]을 밝게 알 수 있게 하니, 온갖 언론의 자리에서 사실과 유사하게 구른다.

다르게 형상(形相)을 들어 이를 선양하여 말한다면, 그 주장과 다른 대상의 일을 내세워 부정해 버린다. 이 사실 가운데에는 마땅히 형상의 구분이 있어야 한다. 만일 총체적 양상이 실(實)이라면, 곧 총체적 양상은 마땅히 색 등과 같이 자체가 각기 달라지면서 다른 일에서는 체가 서로 응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색 등이 달라진 체가 아님이 성립하니, 마치 색(色)이 성(聲)과 유사함과 같다.

또다시 저와 같이 하나이면서 달라짐은, 인정한 바 공동의 모양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단지 세속에 뒤덮인 그 감각이 나타났을 뿐이니, 다툴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실제한 일[實事]로 여기니, 이것은 이에 곧바로 성립되어, 색성(色聲) 등에서 달라진 체가 아님을 성립시킨다.

또다시 색 등의 하나하나가 곧바로 성립되어 많은 체가 있으므로 공동의 모양과 상태는 자체가 끝이 없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많은 종류의 자체 성질이 합쳐 있어서 곧바로 모든 일을 이루고, 모두 하나의 체(體)가 된다. 자체의 연[自緣]이 가진 모양을 따라서 앞 경계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것과 같다. 이 체(體)의 모양도 역시 가정으로 세웠으니, 수많은 모양의 생김새는 세속이 언론의 대상으로 삼아서 이것을 분별한다. 이를 근거로 색성(色聲) 등에서 ‘나’가 없다는 지혜를 성립시킨다. 역시 공동의 모양이 적절하게 처리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그 경계가 없다는 것을 취하였으니, 다시 유식종(唯識宗)이 환하게 밝혀졌다. 내가 없음을 알 때는, 다른 상분(相分)이 있다. 또 앞뒤의 구분이 본래 없으므로, 이것은 이에 우선 다른 모양을 취해서, 분명하게 결단한다. 달라진 결단을 따라서 일과 경계의 성질을 받아 취하기 때문이다. 만일 푸른 연꽃이라면, 흰 것을 가려내고, 식은 연꽃 자체를 인연하여, 푸르다고 결단한다. 내가 없다고 말한 이치 또한 똑같이 그렇다. 일반적으로 결단을 내림이란, 곧 다른 것에 집착한 아상(我相)이 이 짜여진 생각을 의지해야만, 비로소 별도로 나의 자체가 없다는 결단을 내린다. 비록 경계는 없을지라도 지혜가 생길 수 있다. 이치가 이미 고르고 같으니, 어찌 어긋난 다툼이 있겠는가.

만일 모든 유정(有情)이 자기의 상속(相續)을 따른다면이라고 하였으니, 만일 이 자기모양의 체[自相體] 가운데에 각각 한량없는 공능(功能)이 있어서 똑같지 않다고 말한다면,
자기의 식 가운데서 변하여 나타남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숙해졌을 때, 자체종자의 힘으로 말미암아 식이 나타나서 앞에 있으니, 바깥 경계를 근거로 일어날 수 없으며, 자기의 식을 떠나서는 바깥 경계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착한 벗이나 악한 벗을 친하여 가깝게 지냈을지라도, 이익을 얻거나 손해 보는 일이 성립될 수 없으리라. 참과 거짓, 손해와 이익 가운데에서도 단지 말과 소리만으로 경계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미 소리와 뜻을 인연했으니, 두 가지8)는 다 없는 셈이다. 이 적절한 처리에서는 곧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저것 때문에 그 이치에 맞고 이치에 맞지 않는 행이 있어서, 선악(善惡)으로 하여금 저를 좇아 행하게 할지라도, 저 행은 이미 취하여 따라 배울 수 없다. 어찌 까닭이 있음을 용납하겠는가.

이것은 일찍이 바깥 경계를 의탁하여 식이 생길 수 없으니, 인정한 바를 어기는 잘못이다.

반드시 결정해서 바깥 색 등의 경계를 의탁해야 한다. 색 등을 인연하는 마음은 오히려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일이 없는 소리의 마음은 또 다른 것이 소유한 행의 자취를 관찰함과 같다. 이것이 경계에서 결단할 수 있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색 등의 모든 식과 같이 바깥 경계를 결정해서 인연하기 때문에, 마치 성언량(聖言量)9)과 같다. 단지 안에서 유사한 모양만 나타날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힘이 없어서, 유식의 뜻[唯識義]을 무너뜨린다.10)
연달아 구르며 더욱 불어남으로 인하여, 식이 서로 결정한다고 하면, 연달아 구르며, 식이 서로 빌리기 때문이다.11)
곧 이 두 식이 번갈아 서로 의지한다면, 본래부터 소리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며, 또 색 등에서 세운 비유도 종(宗)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전혀 가르침을 어긴 과실이 없다. 다른 상속이 있어서, 다른 식이 되었으므로, 다른 식이 원인이 되어 자기 식이 생겼기 때문에, 선악(善惡)의 두 벗이 작용하는 이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바깥 경계는 꿈을 끌어들여 없다는 주장을 성립시키면서, 직접 보는 벗은 어째서 똑같이 자는데도, 옳지 않다고 부정하지 아니 하는가. 또 어찌 수고롭게 억지로 연달아 구르는 모양을 주장하는가. 꿈으로 인하여 좋고 나쁨을 듣는 것도 다른 식을 근거로 생기지 않았는데, 어찌 현재에 다른 식을 따라 행하겠는가. 또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단지 그 외 다른 식만을 근거로, 분별이 생길 수 있을 뿐이다. 다른 말과 일에서도, 감정(感情)을 따라 일어난다. 이 식이 생길 때, 그 외 다른 식의 공능(功能)의 차별이 있어서, 원인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들어본 이는 알리라. 결계(結契)12)할 때에 오직 소리가 나타난 모양만이, 차별의 체[差別體]가 있어서, 식이 생길 수 있을 뿐이다. 바깥 경계를 의지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일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자기 공능이 소유한 차별을 근거로 자기 내부의 인연을 의탁해서, 소리의 모양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앞 경계에 대해서 분명한 앎이 있다는 말이다. 이 때는 단지 자기 식의 성숙된 자리에서 공능이 굴러 일어났을 뿐이다. 단지 소리의 모양만 있을 뿐이지만, 공동의 식이 함께 생겼으니, 자세히 이 도리를 살펴야 한다.

또다시 성자(聖者)의 위력(威力)이 신비로움은 매우 뛰어나다. 그 문자(文字)도 쓰지 않고, 소리의 모양을 취하지도 않으면서, 한가로운 틈이 있을 때, 방편을 설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단지 뛰어난 차별만을 따르기 때문에 이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니, 결국 그 외 다른 식으로 하여금 특별한 모양이 생기게 하였음은, 모두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유식의 공력(功力)이라고 하리라. 그러면 일찍이소리의 자체 모양이 없어도, 그 외 다른 식에 이를 수 있음은 그들[聖者]이 공동으로 인정하니, 이를 가지고 비유를 들어보리라. 비록 다음과 같이 단지 다른 식만을 의지할지라도, 소리의 감각이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하리라. 이것은 이에 언제라도 메아리13)가 들린다는 것을 성립시킨다. 이 소리의 감각은, 어디에서나 모두 생기게 하는 나루이니, 비록 먼 곳에 머물거나 귀의 기능이 무너졌더라도, 아울러 마땅히 설함을 들어서 안 들릴 때가 없어야 한다. 만일 그 감각이 바깥 소리를 근거로 일어난다면, 어느 일정한 시간에 들어야만, 귀의 식이 비로소 행하여 분별하는 원인이 일어난다. 때문에 반드시 장소는 서로 알맞은 데 있어야 하고, 귀의 감각기관[耳根]도 무너짐이 없어야만, 비로소 경계에서 옳고 그름을 깨달아 살필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전혀 봄을 겸할 수도 없다. 들음의 허물은 모두 홀로 이러할 뿐만 아니다. 식은 차별할 수 있는 성질을 기다려야 하므로 일은 소리에서 판단한다. 마치 소리의 자체 성질이 각기 달라진 데서 이 감각이 생길 수 있는 것과 같다. 그 외 다른 모양의 마음이 아니니 또한 소리에서 일체를 듣지 못함과 같다. 이 소리를 인연하는 모양은 단지 되돌려 이것만을 인연할 뿐이요, 오직 이 감각만이 생겨서 감각에 때가 있을 뿐이다. 단지 이러한 차별의 인연을 일으키매, 힘의 작용이 있을 뿐이기 때문에, 원인이 됨은 그 외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소리에 서로 알맞은 곳이 있고, 스스로 상속하는 데서 그 모양이 생기는 것과 같다. 또 이 일의 종자가 앞에 나타나서, 자신의 즐거움을 수용(受用)하는 결과[自用果]를 따라야만 비로소 생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곧바로 성립되어야만 서로 유사한 잘못이 없으리라.

또 다음에 모든 문자[諸字]14)에는 다 지분(支分)이 있어서, 분석하여 궁극에 이르면 감각기관으로 취할 성질이 아니다. 마치 극미(極微)15)가 똑같은 때에 생기지 않음과 같이, 합하여 모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어울려 모이지 않았으니, 그 결단을 내려 한결같이 변함없는 소리[一常聲]가 허공에 자리했다고 헤아린다면.

도리에 알맞지 않다. 이 소리를 인연하는 마음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저들은 그 속성(屬性: 所有)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자체가 서로 유사함을 인정했기 때문이며, 그리고 감각기관이 행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능에 그 차별이 있을 수 있다거나, 또는 조작으로써 세력을 안치한 도리가 있음을 용납하지 아니 한다. 또 마치 바깥 소리가 의지의 대상인 연(緣)을 따라서 차별된 메아리에 그 자체의 모양이 있어서 연(緣)의 근거[因]가 되는 것과 같이, 식도 또한 이와 같다.

무엇이 좋아하지 않을 일인가. 어찌 말한 바 연달아 굴러서 더욱 늘어나는 이유라고 하지 않으랴. 곧 그 외 다른 식을 취한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이 식은 바로 바깥 경계에 존재함이 성립한다. 만일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비유의 몫은 곧 어긋나리라,
이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 식은 그 외 다른 식이 나타난 모양을 근거로, 인식의 대상[所緣]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유가 이에 공동으로 성립함이 그 외 다른 종(宗)의 주장과 같다. 오히려 저기에서 현재의 소리가 따라서 한 모양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지 저 모양만이 있어서 식이 생길 뿐임은 그 종(宗)이 성립을 인정하였고, 나의 비유도 또한 그렇다. 성립시킨들 무슨 잘못이 있으랴.

어떤 이유로 여래(如來)의 식은, 그 외 다른 것을 차별하여 분별의 경계를 모두 다 없애기에, 달라짐이 없이 상속하여 구르면서, 한없이 차별하는가.

교화 받을 유정이 저 많은 마음에서 모양이 비록 일어나게 될지라도, 저 한 소리가 자체에 차이(差異)가 없는 것과 같이, 스스로 좋아하는 모양을 좇아서 식이 따라 생겨 일어난다. 단지 여래의 위세(威勢)와 신비로운 힘이 지극한 수행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저들에게 별도의 공능이 생길 수 있도록 하였을 뿐이다. 하나가 아닌 경계와 똑같지 않는 색의 종류는 많으면서도 뒤섞임이 없이 일시에 작용을 일으켜서, 분별하는 일이 성립한다. 마치 등불·보배·거울 등이 모양을 나타냄과 같다.

또 여래의 온갖 교화 작용의 일은 생각으로 알기 어려운 위력이며, 살펴 헤아림을 벗어난 경계이니, 이 모두가 배워야 하기 때문이리라.

억지로 이런 논란을 짓는다 해도, 미묘한 설[妙說]이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꿈과 깸 두 자리가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둘은 아울러 그 실제 경계의 성질이 없음을 인정하였으므로, 그 차별을 따라 다 결과에서 이끌어 낸다. 꿈속에 보여진 일은 때로는 좋기도 하고, 때로는 나쁘기도 하다. 이것은 총체적 표시이다. 그리고 깬 자리에서도 마음 역시 경계가 없으니, 이 또한 마땅히 같은 때에 결과를 얻어야 한다.

어떤 이는 마땅히 꿈과 같이 또한 결과도 없어야 하고, 경계의 성질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또 이와 반대라고 하였다.

이 논란은 그렇지 않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16)
마음은 수면(睡眠)에서 무너지니, 꿈과 깸은 결과가 똑같지 않다고 하였다.17)
그렇다면, 꿈속의 마음은 수면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성질이 분명하지 않으니, 곧 이 좋고 나쁨은 열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깨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리라. 혹은 특별한 일에 관련해서 공경을 받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다른 생각이 상대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비록 은혜를 베풀었을지라도 결과는 더 커지지 않는다. 식이 비록 경계가 없을지라도 결과 또한 똑같이 그렇다. 종류의 차별을 따라서 미래의 결과가 좋거나 좋지 않는 일을 불러들일 수 있으리라.

이 꿈과 깸이 자체에 서로 특별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결과를 얻음이 똑같지 않음은 도리를 어기지 않는다. 또 경계의 선(善) 등이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에, 지은 바 업의 작용이 뛰어난 결과나 열등한 결과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성(自性) 및 서로 응함 등이 자체가 증가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게 되었으리라.

이것은 꿈 등에 그 차별이 있어서 이것을 가지고 연(緣)을 삼았으니, 경계가 있는 것과 상관이 없다. 어떤 때는 생기고 나면, 곧바로 이 경계에서 해치는 마음을 일으켜 극히 나쁜 일을 지을 수도 있고, 또 이 경계에서 뛰어난 과보(果報)를 불러들일 수 있으니, 아래·중간·상위의 좋은 업과 좋지 않는 업을 심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말한다면, 참으로 그 바깥 경계의 존재를 빌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라난 결과가 달라짐은 어떤 때는 연(緣)이 있기도 하리라. 과거 나한(羅漢)18)의 몸과 복(福) 등의 일은 실로 그 경계가 없으니, 오히려 꿈과 같으리라.

얻은 결과가 똑같지 않으니, 결정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다. 뒤에 꿈속에서나 발돋움의 정성으로 경사스럽게 여기며 기뻐할 일이다.

여래(如來)께서 세상에 오심이 비록 실제의 경계가 없을지라도, 큰 결과를 불러들였다. 이 비유는 곧바로 성립하리라.

종(宗)에서 따르지 않는다.

어떤 다른 스승이 말하기를 비록 꿈에 정액의 손실을 당했다가 감정이 앞 경계를 결단했을 때, 캄캄하게 어둡지 않을지라도, 마치 잠에서 처음 깨었을 때처럼, 오히려 혼미함이 남아 있다. 아직 잠이 충분하지 않았을 때, 뒤덮인 감각을 억지로 일깨우려고 하나 몸은 가라앉고 무거워서 보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곧 이 정액의 손실은 저 꿈속에서 서로 응하는 식이니, 참으로 보존하기 어렵다. 꿈속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생기는 법이므로 이 때에는 명백하게 경계를 관찰한다. 그러나 근심과 두려움, 지극한 사유(思惟)의 마음은, 비록 깨어 있을 때라도 이와 똑같을 수 없다. 이에 따르면, 반드시 이 유정의 무리[有情數]가 함께 보는 경계에서 상분(相分)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꿈속의 7색업(七色業)19)에 대해서는, 업도(業道)20)를 세우지 않는다. 그 꿈속의 모양[色]은 평소에 보이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으며, 공동의 경계도 아니다. 세상의 언론이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한 바 색업(色業)이 업도(業道)가 아니라면, 이에 곧바로 유래의 단서를 살피지 않았음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논한 대상이 저 꿈의 식에서는, 보는 것이 분명치 않고, 결과를 얻음도 미약하다. 깬 자리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하였다. 이미 이 허물이 있었음에도 문득 답하여 말하기를 꿈에 의한 정액의 손실이므로, 그 얻은 결과는 작다고 하였으니, 만일 손실되지 않았다면, 깨었을 때와 어떻게 다른가. 말한 대로라면 꿈속의 식이 경계에서 일을 앎이 분명하니, 곧 뛰어난 결과를 불러들이리라. 이것이 만일 통해진다면 꿈속에서 마음이 분명하여 적절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그 최상의 미묘한 과보를 불러온다고 인정하리라. 7색업도(色業道)가 건립되지 않는다면, 본래는 불러들인 과보의 차별을 평가[評章]하기 위하여, 결국 업도(業道)를 논하였으니, 유래의 단서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과보를 불러들임은, 반드시 이 업도(業道)를 빌려야만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방편위(方便位)에서 극히 무거운 묶임을 당하고, 이 의지(意志)의 욕구(欲求)를 해쳐서, 드디어 최악의 과보를 불러들이게 한다. 번뇌가 엷고 가벼워서 비록 근본(根本)을 지을지라도, 또한 지극히 청정한 마음과 똑같을 수 없다. 선을 닦는 자리에 방편의 근본도, 이를 견주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유식론자(唯識論者)도 또한 다른 데서 상속(相續)하여 해로움을 일으키기 때문에, 마음을 따라서 생긴 일이 그 업도(業道)를 이루는 것이다.

어떤 다른 스승이 말하기를 다른 것을 근거로 알기 때문에, 비로소 죄(罪)가 성립된다면, 이는 바른 답이 아니다. 무슨 뜻으로 반드시 공동의 경계를 기다려야만, 비로소 이것이 건립된다고 하는가. 다른 힘을 의지해야만, 비로소 업도(業道)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세상이 언론의 일로 빌려 감당할 만하다. 필추(苾蒭: 比丘)가 푸른색을 끊어 더러움을 흘려 보낸 일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죄를 범함이 어찌 감각의 주변에 있다고 하랴. 공동의 경계를 의지할 때 상대를 빌려서 알기 때문이다. 만일 꿈속의 실제한 푸른 색깔 등을 알아야 할 일이라고 한다면, 대사(大師: 부처님)의 제정(制定)에 따라서, 곧 유죄(有罪)가 성립되리라. 혹은 마땅히 반대로 그 외 다른 것이어야 한다면, 그 일 때문에 있거나 없지 않으리니, 이것은 알맞은 이치를 성립하리라.21)
만일 또 중생계가 단지 오직 식뿐이라고 한다면, 곧바로 어업(語業)과 신업(身業)은 존재하지 않음이 성립하리라.22)
그러나 사대종(四大種)과 종자(種子)23)로부터 생겼기 때문에, 몸이라고 이름한다. 말의 업은 곧 종자로부터 생긴 색(色)이다. 이 둘이 일을 만들어서 살생(殺生)과 망어(妄語) 등을 저지른다. 두 가지가 만일 없다면 일도 곧 있지 않다.

도살(屠殺)하고 사냥하는 모든 짓은, 단지 오직 자기의 식만이 구르며 변하여 나타날 뿐인데, 곧바로 살생죄를 불러들인다면 어찌 서로 어긋나지 않으랴. 지난 세상의 목숨을 스스로 끊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상대에게 살생죄를 얻게 하였다는 것인가. 이것은 인정한 바 신업(身業)·어업(語業)의 두 업과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다른 식을 근거로 다르다고 한 것은, 도살과 회침 등의 식이 오히려 도살자가 이미 편리한 수단을 일으키고 나면, 저것이 드디어 분리되는 것처럼 이것도 또한 이와 같다. 단지 자기의 식만을 근거로 능히 작용이 있어서, 차별이 나타날 때에 곧바로 저 목숨과 더불어 살해의 원인이 될 뿐이다. 그러면 이에 단지 자기 식의 공력(功力)만을 근거로 허망하게 몸의 모양이 나타날 뿐이다. 이 세력을 빌리기 때문에 이를 세워 업도(業道)라고 하였다. 가령 그 외 다른 업도일지라도, 이를 견주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도리에 따르면, 또 공동으로 인정한 식의 차별이 있어서, 결국 다른 몸과 더불어 원인을 무너뜨리는 성질이 생긴다. 곧 귀신과 건달바(健達縛) 등이 꺼리는 경계에서 문득 나쁜 생각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귀신 등의 식이 변하여 나타나서 원인이 되기 때문에, 드디어 전생(前生)의 기억 등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다. 또 성자(聖者)가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생각할 때, 다른 식의 힘이 뛰어난 인연이 되기 때문에, 결국 꿈속에서도 깊은 잠을 물리쳐서, 곧바로 저들마다 달라진 형상의 거동을 관찰한다. 식은 많은 형상일지라도 이를 받아들인다. 명근(命根)이라 말함은 따라서 응한다는 말이니, 저 세계의 업력이 불러들인 대상을 따른다. 달라지며 성숙된 식[異熟識]이 흘러들 때의 한도는 거두어 끌어들인 정도와 같고, 일도 그만큼 곧바로 굴러 변한다. 저 한 업이 불러들인 연속적 동분의 과보[同分報]로 하여금, 단절(斷絶)되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일체의 흐름이 모두 단절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정한 대로, 그 6처(處)에서 똑같은 성분[同分]이 끊어짐을 근거로, 절(絶)이라 이름하고, 식이 명(命)과 함께 떠남을 가정해서 단(斷)이라 말한다. 단지 자타(自他)의 두 식만이 연(緣)의 소유한 작용이 되기 때문에, 목숨[命根]이 끊어져 없어졌다고 할 뿐이다.

마치 세속을 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 뛰어난 선정(禪定)을 얻은 것과 같이, 작용의 힘 때문에 차별의 공능이 이뤄졌다고 한다면, 변하여 특이함을 일으킨 것은 단지 내부 마음의 차별성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비록 몸과 말의 두 업이 없을지라도, 살생(殺生)과 투도(偸盜) 등의 일은, 이치가 잘 성립될 수 있다.24)
저 경 가운데 확실하게 세속을 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 마음에 분노의 불을 일으켰다고 말한 것은 이 힘을 인연하였기 때문이다.25)
따라서 곧바로 저 한량없는 유정을 죽인 것이다. 이 역시 마음을 근거로, 저들의 목숨이 끊어지도록 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앞의 이치와 같다.

마땅히 미루어 따져보리라. 세상을 피하여 숨어사는 사람이 의지의 욕망으로 해치는 힘을 성취하여, 한량없는 생명이 다 목숨이 끊어지게 하였다는 것을 결정해서 인정하기를 바라는가.

만일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의지의 욕망이 바로 뜻으로 해치는 큰 죄이지만,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분명히 ‘뜻의 죄가 크다’고 성립시켰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또 사람들이 당시에 저가 의지[意趣]로 살해(殺害)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이 역시 곧 몸의 업이 죄 가운데 가장 크다는 것이 분명게 밝혀진다. 어떤 때는 그 외 다른 상속(相續)의 식을 빌리지 않고도, 문득 돌이 떨어지고 연기와 숯이 비 오듯 내리는 등으로 유정이 손해(損害)를 당하기도 한다. 누구의 더욱 뛰어난 힘이기에, 몸과 목숨이 단절되도록 하는가. 참으로 이 식이 이런 모양을 나타내지 않았음에도 되려 살해되었으니, 곧 자신이 서로 어기는 과오에 묶이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다. 곧 이 식의 상속으로 인해서 이 목숨을 끊어지게 할 수 없으니, 따르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마치 의심의 독이 마음을 답답하고 어지럽게 함과 같다. 단지 자기 내부의 상속(相續)만을 따라서, 식에 힘의 작용이 없을 뿐, 다시 연이어 머물게 되지만 이를 근거로 ‘수명의 끊어짐’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돌등의 모양이 나타남도, 또한 어긋남이 성립되지 않음을 인정하리라.

단지 더욱 뛰어난 식[增上識]뿐이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죽게 했다면, 다음으로 이어진 뒤에 어째서 목숨이 끝나지 않는가. 그 죽을 때에 이르면, 저들은 곧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눈앞에 있지 않는데 어째서 죄가 성립되겠는가. 그리고 끊어진 목숨에 무슨 원인의 성질이 있다는 말인가.

비록 바른 논란을 내놓았다 할지라도, 마땅히 이를 되 물어 보리라. 저가 살생을 행할 때, 불러들인 업도(業道)가 만일 당시에 업도를 맺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그 때 당장 목숨이 죽지 아니하는가. 만일 인연할 때에 저 죽음이 비로소 맺어진다면, 어째서 이것이 살생의 죄과(罪過)를 범한 것인가. 만일 서로 합쳐서 살생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 둘의 다른 때는 있고 없는 체(體)가 달라지리니, 어떻게 함께 합친 일이 이뤄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일에 논란을 일으킨 존자(尊者)께서, 이미 자상하게 해치는 자가 자기의 상속(相續) 가운데에, 그 차별이 있어서 업의 성질이 흘러서 집중되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살생자의 더욱 뛰어난 식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저 상속이 번갈아 끊임없이 이어지는 원인[相因]을 끊는다. 이를 근거로 다른 일을 빌리지 않는다고 결정한다. 나중에 결국 죽게 되었으니 당연히 해침을 당할 때, 그 살생의 업이 성립되어야 한다. 다른 생명을 끊음은 그 공능(功能)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죽음을 취했기 때문이라고 결정한다.

그러나 해치는 자는 단지 이 힘만 있어서, 저 생명을 죽이는 데 전적으로 직접 원인[親因]이 되었을 뿐이니, 어떤 때는 당장 죽기도 하고, 혹은 또 뒤에 죽기도 한다. 더욱 뛰어난 식은 다른 식과 함께 잇달아 구르면서 해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뒤의 식은 찰나에 장애를 받아 더 이상 상속하지 않게 된다.

또한 해치는 자가 단지 오직 뜻만을 가지고, 살생의 업을 성립시킬 뿐만 아니라고 한다면.

이로 인하여 그 뒤로 물러선 뜻이 있어서 저가 행한 해침과 일이 어그러지며 동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게 이것을 말한다면, 다른 것이 다시 그 외 다른 연(緣)을 빌려서 죽음에 이르지 않으나, 이 필연적 결정 때문에 생명의 종말을 취하게 된다. 이를 편승하여 원인이 되면, 목숨이 결국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곧 살생의 업도[殺生業道]를 세웠으니, 이 성립은 잘못이 없다. 이와 같이 도둑질 등도 일을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이 길과 다르다면, 저 해치는 자는 저 다음 시기에 어떠한 힘의 작용이 있겠는가. 다른 것이 죽을 때, 비로소 살생죄를 불러들인다면.

다시 또 이치에 벗어난 과실의 성립을 용납해야 한다. 해칠 수 있는 자신 가운데 그 차별이 있음을 빌리지 않으면서, 단지 저 해침을 당하는 상대의 몸에 특별히 다른 점이 있음을 의지할 뿐이기 때문이다.

뒤에 죽을 때 비로소 죄가 성립한다면.

이 증가한 공력(功力)으로 저 목숨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이 때에 어찌 죽지 않은가 등에서 이미 말하였다. 모두 당시 방편의 살생 업이기때문에, 당시에 곧 살생죄를 받는다. 죽음이 저것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시기에 다시 별다른 현상이 있을 수 없으므로, 되려 이 이치를 가지고, 그 외 다른 의심을 버리도록 하리라.

그렇다면 오히려 꿈속에서 해치거나 해침을 당하는 일과 같다고 하리라.

몸에 아무 탈이 없으니, 이는 이에 곧 업도(業道)가 없는 잘못이 성립한다. 이것은 꿈속이므로 식 또한 다른 상속(相續)을 해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업도(業道)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깨어 있을 때, 곧바로 업(業)에서 이뤄짐은 이미 널리 성립시켰다. 단지 오직 이 마음일 뿐 그 속에 빈틈이 없는 일이면, 해치는 업이 성립될 수 있다.26)
또 비록 이와 같이 널리 특이한 견해를 늘어놓았을지라도, 이에 반드시 이치를 잡아, 다시 특별한 단서를 들어 따져 보리라.27)
만일 오직 식만이 있을 뿐이라면, 저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28)는, 남의 마음을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 만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남의 마음을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이름이 ‘지혜를 근거로 남의 마음을 분명히 앎’이기 때문이다. 만일 알지 못한다면, 곧바로 속이는 거짓이 성립하여, 당장 이 밝힘의 주체[能詮]가 모르는 사이에 실수가 있을 것이요, 만일 안다고 한다면, 식을 떠난 경계에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성립시킨 유식(唯識)은 이치가 결국 어긋나고 만다. 두 일이 서로 어긋나니 어떻게 논란을 물리치겠는가.

왜냐 하면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어째서 경계를 참답게 알지 못하는가라고 한 것은, 매우 깊게 깨달아 아는 경계를 취하려는 뜻이다.

저들이 말하기를 남의 마음이 만일 있다고 한다면, 식이 곧바로 손상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요, 남을 아는 지혜가 만일 없다고 한다면, 참으로 자기의 교리를 어기리라. 만일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가 바깥 경계를 인연한다면, 마치 마음 밖에 존재한 경계가 인연이 된다고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허물을 피하기 어렵다. 경계가 참답지 않음을 분명히 알아야만, 참으로 허물이 없으리라. 어찌 경계를 앎이 그 진실과 부합되지 않으면서,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이 속뜻을 말하리라. 만일 깨달은 일 그대로라면, 앞 경계가 비지 않아야 한다. 이를 따라야만 비로소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라고 이름한다.

그렇다면 앞 경계를 앎이 이미 참답지 못한데, 여기에 어찌 남의 마음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이치가 이와 같지 않다. 아직 본뜻을 익숙하게 알지 못해서다.

비록 남의 마음에서 인연하여 경계를 삼지 않을지라도, 저와 유사한 모양의 상태가 식상(識上)에 나타난다는 것인가.

그러기 때문에 마음을 떠나서는 경계를 얻을 수 없으나, 저와 유사한 모양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계와 같지 않을지라도, 여기 본뜻을 성립시켜 남의 마음이라고 주장한 것인가.

이 가운데서는 단지 저 유사한 모양만 받아들일 뿐이니, 이를 근거로 ‘참답지 못한 성질’이라고 이름한다. 비록 저와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저와 유사한 모양이 생겼으니, 마음을 떠나서는 경계가 없다. 이미 함께 성립되었으므로 이것을 알 수 있음은, 경계의 모양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아는 지혜와 같다고 한다면, 두 마음29)이 똑같은 때에 함께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현재가 아니니, 결정해서 마땅히 이미 사라져서 아직 생기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단지 하나만을 얻어서 경계로 삼을 수 있을 뿐이요. 자체도 또 없다. 단지 오직 자기의 식만이 되려 과거와 현재의 마음이 모인 온갖 법을 인연하여, 분명하게 드러난 모양이 되었을 뿐이다. 자기의 마음을 이 일 가운데서 받아들임은, 세상이 다 함께 인정한다. 남의 마음을 분명히 아는 일도, 그 이치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만일 자기의 마음에서 직접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어째서 또 ‘참답게 알지 못함’이라고 설하는가.

경계에 대해서 진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참답지 않음’이라고 이름한다. 이 없는 일이 장차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되면, ‘진실에 부합한 앎’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그 경계와 같지 않으며, 온갖 받아들임도 모두 없으니, 저로 인해서 참다운 경계를 분명히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할 수 있는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알지 못함이 부처님의 경계와 같다는 것이, 바로 다른 마음을 아는 지혜이다.

다른 것은 푸른 색 등을 인연하여 저 인식의 대상[所緣]을 분명히 알며, 곧 실제와도 꼭 들어맞는데, 무엇 때문에 대뜸 부처님이 아시는 ‘마음 자체의 청정(淸淨)함’을 들어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일반적으로 다른 마음을 분명히 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마음을 연(緣)으로 삼아서 자기 마음의 모양을 분명하게 앎을 가정해서 다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면 저 다른 마음의 참다운 자성의 체는 어떤 경계인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부처님은 다른 마음의 자성을 아는가.

당장 마음을 떠나서 있는 줄을 아시니, 가령 마음을 떠난 색이 있을지라도 부처님이 분명히 아시는데 무엇이 상하랴.

그러면 곧 마음이 실제로 있어서 둘이 함께 성립을 인정하는 격이니, 마음을 떠난 실제의 색[實色]은 이치에 위배된다. 때문에 똑같지 않으리라.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다른 마음은 분명히 알지만, 마땅히 경계는 알지 못해야 하리라. 경계는 허망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허망함에 의지하여 알았다고 한들 또한 무엇이 손상되랴. 만일 사람이 환술(幻術)을 본다면, 어찌 허망한 줄 모르랴. 부처님도 그와 똑같이 허망한 줄 아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어떠한 모양의 상태를 지녔는가.

모든 부처님의 경계는 부처님 외에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만일 부처님이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일체를 다 아는 지혜라고 이름하랴. 곧 저 뒤바뀜이 없이 지니고 계신 자체의 성품은, 무지의 어둠[無知睡]30)을 다 없애고. 분명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마침 밝게 깨우칠 때, 모두가 ‘나와 남의 마음’을 깨달아 아셨다고 한다면, 저들의 진실한 성품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지혜는 ‘경계와 부합한 앎’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떻게 해야 통달할 수 있는가.

어둠이 다 없어진 지혜는 올바르게 이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서 말이 없는 경계의 성질을 깨달아 안다. 언어의 길을 뛰어넘었으니. 단지 스스로 깨달아 알뿐이다. 그러므로 말로 밝혀 미칠 수 없다. 그러니 이 식이 소유한 자체의 성품은, 그 외 다른 식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미 알 대상이 아니니, 말이 미칠 수 없다. 저들은 단지 총체적 양상[摠相]만으로, 그 경계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은 오직 허망하게 짜여진 성질만 있을 뿐이다. 곧 이 허망한 짜임은 스스로 깨닫는 성품인 식의 참 모습과 너무나 멀기 때문에, 오직 식의 경계에서만, 참 모습이 아님을 분명히 알 뿐이다. 이 둘은 다 참다움과 부합한 경계가 아님이 성립한다. 왜냐 하면 실제의 일이 아닌 데서 실제의 일이라는 견해를 내고 결단을 내렸으나, 저들의 식에서 허망한 모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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