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계셨던 부처님
석존께서 죽림정사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석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세상 사람들은 달이 안보이면 달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달 그 자체는 결코 없어지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안보일 때에는 다른 나라에 나타나서 그 나라 사람들은 달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달 그자체는 결코 나온다는 일이 없는 것이다.
달 그 자체에는 출몰(出沒)이었는데 출몰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은 수미산 이라는 큰 산이 있어서 달이 수미산 둘레를 돌고 있으니까 출몰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고 달 자체는 항상 세상을 비추고있다. 부처님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삼천 대천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자유자재로 출현해서 때로는 이 사바세계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셨다고 기뻐한다. 또 어떤 때에는 사바 세계에서 열반을 보이실 때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부처님이 열반하셨다고 슬퍼한다. 그러나 달에 출몰이 없는 것과 같이 부처님도 생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생멸이 있는 것같이 보이시는 것은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만월달을 다른 나라에서는 그 반만 보고 반달이라고 하지만 이 나라에서 반달일 때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만월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사바세계의 사람들이 상현달을 보면 초하루라 생각하고 만월달을 보면 보름이라고 하며, 달 그 자체가 둥글게 된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달 자신은 차는 것도 아니며 기우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는 것은 수미산에 가리워서 달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까닭이다. 부처님도 이와 같다. 이 사바세계에서 때로는 탄생하시고 때로는 열반을 하시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처음 세상에 나오면 사람들은 동자초생(童子初生)이라고 기뻐한다. 이윽고 이 아이가 일곱 발 걷게 되는 것은 초 이틀의 달에 비교 할 수 있다. 또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은 초사흘의 달 같은 것이다.
출가하는 것은 여드레째의 달과 비슷하다. 마침내 수도의 공을 쌓아서 대 지혜의 광명을 내며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는 것은 십오야(十五夜) 만월에 비할 수 있다.
그리고 서른 두 가지의 서상(瑞相), 여든 가지의 호상(好相)을 갖추고 스스로 열반에 드는 것은 월식(月蝕)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때로는 반달을 보고 만월을 보고 월식을 보는 것이지만 달 그 자체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는 것이여서 언제나 만월인 것이다. 부처님의 몸도 또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은 영원한 것이며 변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늘에 교교(皎皎)히 빛나는 만월의 달빛을 비추어도 도회지, 촌락도, 산도, 늪도, 개울도, 연못도 우물속이나 쟁반의 밑바닥까지도 골고루 빛을 받는다. 사람이 천리 길을 떠나도 달은 마냥 쫓아오고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제멋대로 억측을 해서 만월 달을 다른 곳에서는 마냥 쫓아오고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제멋대로 억측을 해서 만월 달을 다른 곳에서는 그 반만을 보고 반달이라고 하고 도 이곳에서는 반달인 때에,
<자기 집에서도 달을 보았는데 여기서도 달이 보인다. 대체 이 달과 집에서 본 달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만큼 달은 어느 곳이나 평등하게 비추고 있다. 또 달의 모양과 크기에 대하여도 어떤 사람은 가마솥의 아가리 같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수레바퀴 같다고 하며 혹은 아주 둥글다 혹은 쟁반 같다고 한다. 달 자체는 하나 뿐인데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보는 눈이 다른 것이다. 부처님도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은 현재 자기 눈앞에 계시다고 한다. 축생까지도 부처님은 자기 눈앞에 있다고 할 것이다. 또 귀머거리나 벙어리는 부처님에 대하여 자기는 귀머거리다. 벙어리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밖에 어떤 종류의 사람도 부처님의 말도 자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자기 집에서 자기의 공양을 받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불신은 무변 광대하다고 보지만 어떤 사람은 극히 미미한 존재하고 생각한다. 또 외도들은 부처님은 외도 중에서 출가하여 수도를 했다고 생각하며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은 다만 자기들만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처님의 실체(實體)는 꼭 달과 같다. 때로는 진실한 모습, 때로는 위장(僞裝)된 모습으로 세상의 인정(人情)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인연에 따라서 어떠한 곳에도 그것에 알맞은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은 마치 달과 똑같다. 기실 부처님은 항상 계시는 것이지 무슨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네명의 아수라왕 중의 하나인 우고우아수라왕은 가끔 큰 손을 벌려서 달을 가리울 때가 있다. 그것을 세상 사람은 월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수라왕이라 할지라도 달을 좀 먹을 수는 없다.
단지 달빛을 방해 할 뿐이다. 물론 달 자체가 기우는 법은 없는 것이다. 아수라왕이 손을 오므리면 세상사람은 월식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월식은 달이 고뇌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설사 백천만의 아수라왕이 나타나도 달을 괴롭힐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때로는 극악한 사람이 있어서 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이 있다. 또 오역죄(五逆罪)를 범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불신(佛身)에서 피가나게 하고 교단의 질서를 문란케 한다.
그 결과는 영구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일천리(一闡提)에 빠지는 길밖에 없다. 이것은 후세의 사람들을 위하여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전도(傳道)를 위하여서는 고난을 받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설사 백천만의 악마가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입히려고 해도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이유는 부처님의 육체에는 피도 살도 뼈도 없는 까닭에 상처가 생길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 사람들은 법도 승도 파기(破棄)할 수가 있고 부처님도 멸망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본성(本性)에는 하등의 변화도 파괴도 없는 것이다. 다만 세정(世情)에 따라서 이것이 있는 것같이 나타내 보일 뿐인 것이다.
두 사람이 칼을 가지고 서로 싸웠다고 하자. 그런데 한쪽이 부상을 해서 출혈(出血)이 심하여 죽은 경우 상대방이 원래는 살의(殺意)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응보는 가벼운 것이며 결코 무겁지는 않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몸에서 피가 나올만큼 난폭한 짓을 하였어도 원래 살의가 없었다면 그 응보는 무겁지 않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들을 위한 본보기로 일천리라는 무거운 업보를 지어주는 것이다.
명의(名醫)는 자기 자식에게 의약의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 주는 법이다. 약의 성질, 약의 효능의 작용 등을 상세히 가르쳐 준다. 그래서 그 자식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훌륭히 약가업을 계승할 수가 있다.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계율을 만들어서 오역죄를 범하는 자, 정법을 헐뜯는 자, 일천리의 죄를 범하는 자를 응징(膺懲)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제자들에게 경(經), 율(律), 논(論)의 본질과 그의 대한 모든 것을 알려 두는 것이다.
또 세상 사람들은 달이 반년에 한 번 월식이 되는 것을 보지만 천상계의 사람들은 그 순간에만 월식을 볼 뿐이고, 그 까닭은 천상계의 하루는 대단히 긴 시간이지만 인간계의 하루는 매우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그렇다.
천상계의 사람은 부처님은 단명하다고 한다. 월식을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신기(神奇)로운 양상(樣相)을 나타내지만 본래 부처님은 영원한 것이며 변함이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명월(明月) 보기를 바란다. 그래서 달을 낙견(樂見)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도둑이나 악인은 명월을 보기를 꺼려하므로 그들에게는 달이 불낙견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도 그러하다. 부처님의 본성은 온전히 착하고 깨끗하여 구슬 같으므로 낙견이라고 할 수 있다.
불법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부처님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불도를 모르는 악인일수록 부처님 보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이들 악인에서는 부처님은 불낙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부처님은 명월과 같다.
또 밤낮의 길이도 一년에 세 번 차이가 있다. 봄과 여름 그리고 겨울이다. 겨울에는 해가 짧고 봄은 중간이고 여름은 매우 길다. 부처님도 이와 같다. 이 삼천 대천 세계 중에서 단명한 자에 대하여는 부처님도 단명을 나타내신다. 그러면 단명한 자는 마치 겨울 해 모양으로 부처님의 수명도 자기 같이 짧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살을 위하여 봄날 같이 중간의 수명을 나타내시기도 한다. 그리고 부처님만이 부처님 본연의 수명을 알고 있다. 그 수명은 무한한 것이어서 마치 여름 해가 긴 것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법우(法雨)가 되어 천지지간 만물을 적셔 주신다. 먼 후세에도 이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그 경전(經典)을 해설해서 사람들의 교화에 힘쓰는 자는 참다운 보살인 것이다. 이 사람은 한 여름의 가뭄에 내리는 감로수에 비할 수 있다. 그리고 봄날에 꽃눈이 싹트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성문이나 연각 같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미묘한 가르침을 듣는다면 그것은 겨울날에 냉기(冷氣)에 몸을 스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본성은 시간적인 장단을 초월하고 있다. 다만 세상에 대하여 장단의 여러 가지 양생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또 하늘에 빛나는 별은 낮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그것을 세상 사람들은 낮에는 별들이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햇볕에게 그 빛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또한 그러하다. 때로는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게 된다. 세상사람들이 낮에 별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영구히 멸망해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영원하고 불변한 것과 같이 삼보의 본성도 또한 여하한 세정(世情)에도 좌우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칠흑 같은 밤에 혜성(彗星)이 나타나면 그 빛은 잠시 동안은 휘황찬란(輝煌燦爛)하지만 얼마 안되어서 사라져 버린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무슨 불길한 사건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생각할 것이다.
부처님이 안계신 세계에 연각이 나타나면 세상 사람은 부처님은 정말 없어졌는가 하고 근심을 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은 없다. 달이 멸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이. 또 아침 해가 동천(東天)에 솟아 오르면 구름과 안개는 모두 걷히어 밝은 세상이 된다.
이 대 열반경전(大涅槃經典)도 한 번 세상에 나타나서 사람의 이목(耳目)을 적시면 악이란 악은 모두 자취를 감춘다.
대열반의 경지는 부처님의 본성을 풀이한 것이므로 범부의 생각이 감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대단히 두터운 신앙을 가진 남녀는,
「석존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고 불변한 것이며 올바른 가르침은 멸하여 없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불법을 굳게 지키는 승단(僧團)은 영원한 것이다.」
라는 사실을 알고 불도를 닦는데 게으르지 않으므로 마침내는 깨달음의 경지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涅槃經第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