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암거사의 개안
혜암거사는 한국에 우수한 TV작가이다.
일찍이 가난하여 갖가지 장사로 식구연명을 하다가 천재적인 소질을 살려 문예작품 1편을 응모한 것이 당선되어 일약 TV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겨우 국민학교 졸업을 하고 중학 구경 한번 해보지 못한 처지라 남에게 지지 않기 위하여 부지런히 책을 보고 또 글을 썼다.
그런데 나이 40이 넘으면서부터는 점점 눈이 어두워지더니, 45세가 되어서는 아주 눈이 어두워 졌다. 공교롭게도 그 해에는 TV작가들이 남의 작품들을 자기화하여 도용하였다고 고소하여 거액 3백만원이나
되는 돈을 보상해 주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작가란 원래 머리와 손과 눈, 세 가지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눈이 어두워졌으니 손이 마비가 될 것은 정한 이치요, 손을 쓰지 못하게 되니 머리 또한 녹이 슬었다. 2,3년 계속해서 약을 쓰고 병을 치료했으나 오히려 병은 더욱 짙어만 가는 것 같았다.
하루는 친구 부인이 와서 말했다.
「여의도에 가면 약을 쓰지 않아도 병이 낫는 곳이 있답니다. 」
귀가 번득 뜨였다.
「약을 쓰지 않고 그냥 치료하는 곳입니다. 눈병이나 귓병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암 같은 것도 거짓말 같이 낫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번 가 보아야지요.」
하고 부인에게 이야기하였더니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하였다.
「거기 가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병이 나을 수도 없어요. 지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처지에 무엇을 가지고갑니까? 」
「하지만 한번 가서 구경이라도 합시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기와 같아지는 법이라 어린양 하듯이 졸라댔다. 작은 아들을 시켜 길을 인도하도록 하였다.
여의도 바람은 예상외로 거세다. 거리거리에서 할렐루야를 찾는 사람들이 길을 인도하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여, 주여」 하고 애원하듯 한숨 섞인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본당에 이르니 수 천 명의 환자들이 울면서 땅을 치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였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과연 인생길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돼서 왔다.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지구덩이라 해 봐야 우주에 비하면 마치 큰 한 알의 모래에 불과한 것인데 그 가운데서 태어나 살아가는 인생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인생은 그대로 연극이었다 전지전능한 신의 자손으로 태어나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인간의 조상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뒤집어쓴 죄인임이 틀림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지고 온 죄는 그만두더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지은 죄 또한 한이 없는 것 같았다. 거짓말하고, 꾸며대고, 이간질하고, 술 마시고, 간음하고, 그러한 일들을 장난삼아하고 행패를 부리고, TV작가로서 거드름을 피우며 남을 업신여기고, 뻐기던 일~어떤 것 하나 죄 아님이 없었다.
그런데 안수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죄인들아, 참회하라. 그리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반드시 그대의 머리위에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내리리라.」
벼락치듯 홍수처럼 쏟아지는 그의 웅변설교, 문답에 감동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말랐던 동공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였다.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마른 눈에 물기가 서리더니 눈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루 이틀이 아니고 계속해서 자기 죄와 원죄와 또 그 동안 온갖 죄를 짓고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니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집에 이르면 두 딸과 아내는 남의 집 가정부로 나가 돈을 벌어 나의 치료비와 자식들 학비를 대기에 바빴는데 이제는 약값이 문제가 아니었다.
약값은 계산이라도 하는데 여기서는 수입의 10분의 1을 바치고도 때를 따라 갖가지 명목으로 염출해 가는 돈은 한이 없었으며 -이건 또 그렇게 주고도 늘 부족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한데, 이렇게 3년을 연거푸 하고 나니 집안 살림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으면 천당에 가서 쓰지도 못할 걸 모아 두어서 뭘 하나 하고 애지중지 모아 두던 책들까지도 모두 팔아 염보돈으로 보시해 버렸다.
눈이 나아 다시 글을 쓰고, 원고료를 받아 또 자료를 모으고 또 그 자료에 의해서 시청자를 즐겁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희망이 되어 살아오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무너졌지만 차라리 그런 희망마저 아주 놓아버리니 마음이 평온한 것 같았다.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그저
「주여, 주여」
입에 주 이름이 연걸리 듯 하였다.
세월이 흘러 여의도 생활도 근 10년이 가까워졌다. 이젠 그의 마음은 피동자로서 구원을 청하는 자가 아니라 구원을 선전하는 목자의 입장으로 자꾸자꾸 변경되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마음의 눈이 뜨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자위하였다.
「내가 눈이 어두운 것도 결국 알고 보면 다 주님의 소관이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없는 것이다. 」
생각하기도 하고,
「그동안 민속신앙을 다룰 때는 무당이나 불교 같은 마귀종교를 추켜세워 마귀놀음을 조장하였으니 하느님께 벌을 받은 죄가 아닌가.」
자위하면서 그의 신앙생활을 차차 합리화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장님을 만났다.
그런데 그 장님은 전혀 자기 생각과는 달랐다
「이 세상의 모든 인과는 누가 명령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간사해서 이렇게 붙이면 여기가 닿는 것 같고 저렇게 붙이면 저기가 닿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눈도 멀어질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그것이 어찌 하느님께서 내린 벌이겠습니까.
나는 이미 어머니 배안에서부터 타고난 병신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당신은 놓아버리면 언젠간 치료될 것 같습니다. 」
「놓아버리다니요, 무엇을 놓아버립니까? 」
「자식에게 얽매이고, 마누라에게 얽매이고, 이름에 얽매이고, 돈에 얽매이고, 인생에 얽매이고, 신에게 얽매어 사는 그러한 생각을 통채로 놓아버리십시오. 놓아버리면 짊어지고 다닐 때보다는 가벼운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옳은 것 같았다. 자기의 눈이 멀어진 것은 그동안 지나치게 소모하고 근심 걱정하는데도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장님이 말했다.
「그 옳은 것 같다느니, 그른 것 같다느니 하는 저울대 마음도 놓아버려야 합니다. 」
「그렇지만 저는 너무 오랫동안 깊은 신앙에 젖다 보니까, 무엇인가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그렇다면 당신의 몸과 마음과 당신의 가족,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관하는 관세음, 또는 관자재를 해보시오, 관세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관찰하는 것이요, 관자재는 내 마음을 마음대로 주재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은 스스로 그 마음을 관하여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관하는 처지에까지 나아갔습니다. 」
같은 장님이라 하지만 아주 생각이 달랐다.
돌이켜보니 염보돈이 없어 걱정하던 마음, 주어도 늘 부족하다. 짜증내던 마음, 어서 나아 글을 써야지 하는 기다리던 마음, – 그 모든 마음이 싸악 가시는 것 같았다.
혜암거사는 그날로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말하였다.
「난, 이제부터 어느 절에나 가서 살았으면 좋겠소. 」
「절도 돈이 있어야 가지, 그냥 갈 수 있는 줄 아오. 그동안 기도한다고 나다니더니 이젠 정신까지 도셨군요.」
하고 툭 쏘아 붙였다.
「아니야, 나에게 10분의 1비만 준다면 죽든지 살든지, 내 그걸 가지고 가서 살아 보겠소. 」
그리하여 그는 단돈 1만 5천을 짊어지고 상계동 어느 암자에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 밤이나 낮이나 흐르는 물가에 앉아 관세음을 염창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 흐르는 물소리를 관하다가 한 소식을 얻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하늘에서 떨어진 물이 우물물이 되었다가 개울물이 되었다가 하늘로 올라가서 비가 되든지 안개가 되든지 구름이 되든지 그 습성(濕性)은 변하지 않는다. 형편 따라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하고 제 살길을 제가 잘해 가고 있다. 」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에서 보살님이 말했다.
「그렇소, 바로 그것이 마음의 작용이오. 그 작용에 제가 속으면 신이 들려 마귀가되 는 것이오. 」
혜암거사는 기뻐 날뛰며 곧장 집으로 내려왔다. 일터에 갔다 온 부인이 남편을 보고 물었다.
「눈이 뜨여서 오셨소? 」
「예, 마음의 눈이 뜨여서 왔소.」
「안되오, 우리집안이 이렇게 어려움에 처한 것은 모두가 당신 눈 하나 때문인데 이 눈을 제대로 뜨지 않고서는 집에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적어도 백일기도를 하겠다고나갔다면 끝을 마치고 나와야지, 이제 겨우60일 3분의 2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나온 것은, 또 돈 때문에 오셨지요? 」
마구 쏘아댔다.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10수 년 동안을 갖은 고생을 하면서 병 수발하고 애들 교육을 담당해 온 부인으로서는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안하오. 」
사과하였다. 그런데도 부인은 막무가내였다.
「나가시오. 어서 가서 백일을 채우고 오시오.」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혜암거사는 모처럼 집에 돌아와 차 한잔 마시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 약간은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그 원인을 생각해 보니 자기마음이 너무 당돌한 것 같았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쁜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히 관세음을 염창 하였다. 지난번 교회에서 하느님을 찾을 때는 죄인을 자처하므로 「이죄를 어찌할꼬.」 더욱 무거운 짐이 지켜졌으나 「관세음」을 하면서부터는 그런 걱정은 싸악 없어져서 좋았다.
그동안 정들었던 개울가 바위틈에 이르러 맑고 깨끗한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기도를 시작하였다.
「관세음 보살님, 이미 마음의 눈이 뜨였다면 몸의 눈까지 떠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듣건대 당신의 눈은 천수천안이요, 8만4천이라 하였으니 이제 그 눈 가운데 두 눈을 베푸시어 나에게 밝은 광명을 얻게 하옵소서. 」
발원하였다 92일이 되던 날 새벽, 열심히 기도를 드리던 순간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고 도를 깨쳤다는 샛별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감격에 어려 보광동 그에 집에까지 뛰어나왔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더욱 단호했다 문안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백일을 채우기로 했으면 백일을 채울 일이지 중간에서 성취했다고 나오면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기만한 것이 됩니다. 」
그리고,「지금 당신이 하늘에 샛별을 보았다고 해서 당신 자신을 분명히 스스로 볼 수 있겠소.」
하고 되질러 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관세음을 찾고 하느님을 찾고 나았다고 기뻐하고 병들었다고 슬퍼하던 이놈이 누구인가? 」
하는 마음이 가로질렀을 때는 눈은 떴어도 진짜 속 눈이 뜨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다시 그곳에 돌아가 백일을 채웠다.
「부처님, 이제 저도 당신과 같이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헐뜯지 않고 핑계하지 않으며, 떳떳이 태산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겠습니다.
내가 만든 이 세계, 이 몸, 이 가정을 그동안 다른 사람, 신들에게 돌리며 많은 세월을 원망스럽게 살아왔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가장 훌륭한 일을 하여, 두루 모르시는 바 없이 다 아시는 부처님처럼 나도 세계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는 그로부터 집에 돌아와 무슨 일이고, 무슨 음식이고, 무슨 의복이고 가림 없이 입고, 먹고, 자고 하면서 보살도를 실천하였다.
지금도 그의 글은 TV의 화면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쓴 글이 크게 칭찬을 받는다고 기쁨에 빠져 상을 내지도 않고 잘못 평가를 받았다고 슬퍼하지 않으며, 언제고 그의 마음을 8정도 위에 놓고 유유히 사바세계를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