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양스님의 용궁설법
석 보양(釋寶壤) 의 전기에는 그의 향리(鄕里)와 씨족을 싣지 않았다.
청도(淸道) 군청의 문적(文籍)을 살펴보면 이렇게 실려 있다.
천복(天福) 8년 계모[943]― 고려 태조 즉위 제 26년이다. ― 정월 일의 청도군(界里) 심사(審使) 순영(順英) 대내말수문(大乃末水文) 등의 주첩(柱貼)공문에 운문산 선원(雲門山禪院) 장생표(長生慓)는 남쪽은 아니점(阿尼岾), 동쪽은 가서현(嘉西峴) ― 운운(云云)했다.―하며 사원의 삼강(三綱)의 전주인(典主人)은 보양화상(宝壤和尙)이요, 원주(阮主)에 현량상좌(玄兩上座) 직세(直歲)에 신원선사(信元禪師) ― 위의 공문은 청도군의 도전장부(都田帳傅)에 쫓았다.― 라 했다.
또 개운(開運) 3년 병진(646)의 운문산 선원 장생표탑(長生標塔)에 관한 공문 1통에는 장승(長丞)이 11이니, 아니점(阿尼岾) ․ 가서현(嘉西峴) ․ 묘현(墓峴) ․ 서북매현(西北買峴)―혹은 면지촌(面知村)이러고도 쓴다.― 북저족문(北猪足門) 등이라 했고, 또 경인년의 진양부첩(晋陽府貼)에는 5도 안찰사(按察使)가 각 도의 선종과 교종의 사원이 창건된 연월과 그 실제의 상황을 자세히 조사해서 장적(帳籍=대장)을 만들 때에 차사원(差使員) 동경 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이 자세히 조사하여 기재했다고 했다.
정풍(正豊) 6년 신사[1161]―대금의 연호이니 본조 의종 즉위 16년이다.― 9월의 군중 고적 비보기(郡中古籍緋補記)에 따르면 이렇다.
청도군 전 부호장(副戶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禎)의 집에 있는 옛사람의 소식과 우리말로 기록해 오는 기재에 치사(致仕) 한 상호장(上戶長) 김양신(金亮莘), 치사한 호장(戶長) 민육(旻育), 호장동정(戶長同正) 윤응전(尹應前) 기인(其人) 진기(珍奇) 등과 당시 상호장(上戶長) 용성(用成) 등의 말이 적혀 있는데 그때 태수 이사로(李思老)와 호장 김양신은 나이 89세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나이 70세 이상이었으며, 용성(用成)만이 나이 60세 이상― 云云한 것은 다음부터는 따르지 아니한다― 이었다.
신라 시대 이래로 이[청도]군의 절로서 작갑사(鵲岬寺)등 5갑사가 없어져 그 기둥만 대작갑사(大鵲岬寺=운문사)에 모아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 윗글에는 모양이라 했다.―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시다가, 서해(西海) 중간에 이르자 용이 그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염송(念誦)케 하고, 금라(金鑼)가사 한 벌을 베풀어 주고, 또한 아들 이목을 주어 조사를 돌아가게 하고는 부탁했다.
「지금, 삼국[후삼국]이 요란하여 아직은 불법에 귀의 하는 임금이 있지 않지만,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서 작갑(鵲岬)에다가 절을 짓고 있으면, 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몇 년 안에 반드시 불법을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서 삼국을 평정할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서로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문득 한 노승이 나타나 스스로 원광(圓光)이라 하면서 인궤(印櫃)를 안고 나와서 조사에게 주고 없어졌다.― 살펴보건대, 원광은 진(陣)의 말기에 중국에 들어갔다가 수의 개황(開皇)년간에 본국으로 돌아왔으며, 가서갑에서 살다가 황륭사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연수를 계산하면 후왕폐제의 청태(淸泰) 초년까지 장차 절이 일어날 것을 즐겁게 보고 아뢰었을 것이다.
이에 보양(寶壤) 스님은 허물어진 절을 장차 일으키려 하여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와서 찾아보니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까치떼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제야 서해(西海)의 용이 작갑(鵲岬)이라 하던 말이 생각나서, 그곳을 찾아가서 파 보니 과연 예전 벽돌이 무수히 있었다. 이것을 모아 쌓아 올리니 탑이 되었으며, 남은 벽돌이 없었으므로 이 곳을 전대의 절터임을 알았다.
절 세우기를 마치고 거기에 거주하며 절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 했다.
얼마 후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했는데 보양스님이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밭 5백결을 합해서 이 절에 바쳤다.
청태(淸泰) 4년 정유(937)에는 임금이 절 이름을 내리어 운문선사(雲門禪寺)라 하고 가사의 영음(靈蔭)을 받들게 했다.
이목은 늘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바른 교화를 남몰래 도왔는데, 문득 어느 해 크게 가물어 야채가 타고 말랐다. 보양은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더니 한 지방에 비가 흡족했다.
천제(天帝)는 이목이 그 직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월권했다고)하여 죽이려 하니 이목은 생명의 위급함을 보양스님에게 알렸다.
스님이 뜰 앞에 있는 이목(梨木=배나무)을 가리키니 곧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꺾이자 용이 그것을 어루만지니 곧 살아났다. ―일성에는 스님이 주문을 읽어서 살아났다고 한다.―그 나무가 근년에 와서 땅에 넘어지니 어느 사람이 빗장 뭉치를 만들어서 선법당(善法堂)과 식당에 두웠는데, 그 뭉치 자루에는 명(銘)이 있었다.
처음 보양스님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화군(推火郡=지금의 밀양)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때마침 고려 태조가 동방을 정벌하여 청도(淸道) 지경에 이르렀는데, 산적이 견성(犬城)―산 봉우리가 물을 굽어보고 뾰족하게 섰으므로, 오늘날 민간에게 그것을 미워하여 그 이름을 고쳐 견성(犬城)이라 했다고 한다 ― 에 모여 교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산밑에 이르러 스님에게 적을 쉽사리 제어(制御)할 술책을 물으니, 스님은 대답했다.
「대게 개(犬)란 짐승은 밤만 맡고 낮은 맡지 않으며, 앞만 지키고 그 뒤는 잊고 있으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태조가 그말에 따랐으니 적이 과연 패하여 항복했다. 태조는 그 신통한 꾀를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고을의 조(祖) 50석을 주어 향화(香火)를 받들게 했다. 이로써 2성(聖=보양스님 ․ 그려태조)의 진용(眞容)을 모시고 그로 인해 절 이름을 봉성사(奉聖寺)라 한다.
스님은 후에 작갑사로 옮겨가서 크게 법을 펴다가 세상을 마치었다.
스님의 행상(行狀)은 고전(古傳)에는 실리지 않았다. 민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석굴사(石窟寺)의 비허사(備墟師) ― 혹은 봉성 ․ 석굴(石窟) ․ 운문의 세 절이 연접된 산봉우리에 늘어 서 있었으므로 서로 왕래했다.」
뒷사람이 신라 수이전(新羅殊異專)을 고쳐 지으면서 작탑(鵲塔= 작갑사의 탑)과 이목의 사실을 원광의 전기 속에 잘못 기록하고 견성(犬城)의 사실을 비허의 전기에 넣은 것이 벌써 잘못인데 또 해동 고승전(海東高僧專)을 지은 이도 이에 따라 글을 윤색(潤色)했으므로 보양에게는 전(專)이 없어 후인에게 의심내고 그르치게 했으니 이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