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그림자가 독룡과 나찰의 항복을 받다
고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만어산(萬魚山)은 옛날의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인데, 그 옆에 가라국(呵曝國)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었다. 이때 그 영토 안에 옥지(玉池)가 있었는데, 그 못 안에 독한 용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萬魚山)에 다섯 나찰녀(羅刹女)가 있었다. 그 독한 용과 서로 오가며 사귀였다.
그러므로 때때로 뇌우(雷雨)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되지 못했다.
왕은 주술(睍術)로써 이 일을 금하려 해도 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더니 그제야 나찰녀는 5계(戒)를 받아 그 후로 재해가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화하여 골속에 가득 찬 돌이 되에 각기 쇠북과 경쇠의 소리가 난다. -이상은 옛 기록이다. – ‘또 살펴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1180]는 고려 명종(明宗)11년인데 처음으로 만어사(萬魚寺)를 세웠다.
동량(棟梁) 보림(寶林)이 위에 글을 올렸다. 글에 이른바,
「이 산중의 기이한 자취가 북천축(北天竺) 가라국(迦羅國)의 부처의 영상에 관한 일과 서로 맞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그 첫째는 산 가까운 곳이 양주(梁州) 경지의 옥지(玉池)인데, 이 못 안에 또한 독한 용이 살고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때때로 강가에서 운기(雲氣)가 일어나 산꼭대기까지 이르는데, 그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난다는 것이 그것이요, 셋째는 부처 영상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어 늘 물이 고여 끊어지지 않는데 이것은 부처가 가사를 씻던 곳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
이상은 모두 보림(喪林)의 말민데 지금 친히 와서 예하고 보니, 분명히 믿을 만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는 골속의 돌이 거의 3분의 2는 모두 금(金) 옥(玉)의 소리를 냉이 그 하나요,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보이지 않아 혹은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아니하기도 함이 또 하나이다.
북천축의 글은 뒤에서 자세히 기록했다. -가자함(可字函)의 관불 삼매경 제 7권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부처가 야건가라국(耶乾迦羅國) 고선산(古仙山), 담복화림(膽福花林) 독룡(毒龍)의 옆, 청련화천(育蓮花泉)의 북쪽, 나찰혈(蘿刹穴) 가운데에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 남쪽에 이르나, 이때 그 구멍에 나찰 다섯이 있어 여룡(女龍)으로 화하여 용과 서로 사귀고 있었다.
독룡은 다시 우박을 내리고 나찰은 난폭한 행동은 하므로 기근과 질역(疾疫)이 4년이나 계속되었다.
왕은 놀라고 두려워서 천지 신명에게 기도하고 제사지냈으나 아무런 도움이 없었다.
그 때 총명하고 지혜가 많은 바라문(婆羅門)이 대왕에게 사뢰었다.
「가비라국 정반왕의 왕자가 지금 도를 이루어 호를 석가문(釋迦文=석가모니)이라 합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속으로 크게 기뻐하여 부처를 향해 예를 하면서 말했다.
「어째서 오늘날 불교가 이미 일어났다 하는데, 이 나라에는 오시지 않습니까?」
그 때 석가 여래는 여러 비구에게 영을 내려 여섯 신통력(神通力)을 얻은 이에게 자기의 뒤를 따르게 하고 나건가라왕(那乾迦羅王) 불파부제(弗婆浮提)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때 세존의 이마에서 광명이 나서 1만이나 되는 제천(諸天) 화불(化佛)을 만들어 그 나라로 갔다.
그 때 용왕과 나찰녀는 전신을 땅에 붙여 예배하면서 부처에게 계(戒)를 받기를 청했다.
부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삼귀 ·오계로서 설법했다.
용왕이 듣기를 마치자 끓어 앉아 합장하고 세촌이 이 곳에 항시 계시기를 권청했다.
「부처님께서 만약 이곳에 계시지 않으시면 저에게 또 몹쓸 마음의 병이 생길 것이므로 아뇩보리(阿辯菩提)가 될 길이 없습니다. 」
그 때 범천왕이 다시 와서 부처에게 예하고 청하였다.
「세존께서는 미래세(未來世)의 모든 중생을 위찬 것이며, 다만 이 작은 한 용만을 위해서는 안 됩니다.」
백 천의 범왕도 모두 이러한 청을 했다. 그 때 용왕이 칠보대(七寶臺)를 내어 여래에게 올리니 부처는 용왕에게 말했다.
「이 대(臺)는 필요 없으니, 너는 지금 다만 나찰이 있는 석굴을 가져다가 나에게 시주하라. 」
용왕은 기뻐했다고 한다. 그 때 여래는 용왕을 안위 했다.
「내가 네 청을 받아들여 네 굴속에 앉아1천 5백년을 지내겠다. 」부처가 몸을 솟구쳐 돌 속으로 들어가니, 돌은 밝은 거울과 같아졌으므로 사람들이 그 용모를 볼 수 있었다. 모든 용이 다 나타나고, 부처는 돌 속에 있으면서 밖으로 빛을 나타냈다.
그 때 모든 용은 합장하면서 기뻐했으니, 그 곳을 떠나지 않고도 언제나 부처님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세존이 결가부좌하여 석벽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중생들이 볼 때에는 멀리 바라보면 곧 나타나 있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제천이 부처의 영상을 공양하자부처의 영상도 또한 설법(說法)했다.
또 이르기를 부처가 바위의 위를 발로 밟으니 문득 금·옥의 소리가 났다고 한다.
고승전(高僧傳)에 이런 기록이 있다. 혜원(惠遠)이 들으니 천축국에 부처의 영상이 있는데, 그것은 옛날 용을 위해 남겼던 부처의 영상으로 북천축 월지국(月支國) 나갈라성(那竭羅城)의 남쪽 고선인(古仙人)의 석실 속에 있었다.
또 법현(法現)의 서역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나갈국(那竭國)의 경계에 이르면 나갈성(那竭城) 남쪽 반 유순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다. 그것은 박산(博山)의 서남쪽이며, 그 석실 속에 부처가 영상을 남겼었다.
10여보(步)을 떠나서 그것을 보면 부처의 참모습과 같이 광명이 환하나,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하게 보였다. 여러 나라의왕들이 화가들을 보내어 이것을 모사했으나, 비슷하게 그리지 못했다.
나랏사람들은 현겁(賢劫)의 1천불이 모두 마땅히 여기에 영상을 남길 것이므로, 그 부처의 영상의 서쪽 백보쯤 되는 곳에 부처가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머리를 깎고 손톱을 깎던 곳이 있다고 전한다.―‥‥
성자함(星子函)의 서역기(西域記) 제 2권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 여래가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이 용이 소먹이가 되어 왕에게 소젖을 공급했는데, 이것을 진상하다가 잘못된 점이 있어 꾸지람을 받게 되자 속으로 분하고 원한을 품어 금전으로서 꽃을 사서 부처에게 공양하고, 솔도파(率堵婆)에 수기(授記)하시어
「제발 악한 용이 되어 나라에 살면서‥‥」
대용왕(大龍王)의 악한 마음을 일으키자 여래가 이를 보고 신통력을 내어 이곳에 이르렀다.
용이 부처를 보고는 독한 마음이 드디어 그쳐져 불살계를 받고 이에 청했다.
「부처님께서 늘 이 굴에 계시면서 저의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
부처는 말했다.
「내가 장차 입적(入寂)할 것이다. 그러나 너를 위해 형상을 남길 것이니, 너에게 만약 독하고 분한 마음이 생기거든 그때마다 늘 나의 영상을 보면 독한 마음이 반드시 그쳐 질것이다. 」
부처는 정신을 가다듬어 홀로 석실에 들어갔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또 돌 위의 발자취로써 칠보(七寶)를 삼았다고 한다. 이상은 모두 경문(經戈)인데 대략이 이와 같다.
해동(海東) 사람들은 그 산을 이름해서 아나사(阿那斯)라 했으나 마땅히 마나사(摩那浙)라고 해야 될 것이다.
이것[摩那斯]을 번역하면 어(魚)가 되니, 대개 북친축(北天竺)의 기사를 취하여 산 이름을 일컬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