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아들 처용
신라가 한창 성왕할 때 서울 서라벌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졌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으며 또 음악소리와 노래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과 비도 계절에 따라 순조로웠다. 그야말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어 느 날 왕이 동해로 나가 놀다가 궁으로 돌아오려고 물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를 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기를(이것은 동해의 용이 한 장난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 한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서 가는 곳에 절을 지으라 했다. 그러자마자 이내 구름이 개이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러자 동해의 용이 일곱 명의 아들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고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더니 그 아들 한 명은 임금을 따라 서울에 들어와 정치를 보좌토록 청을 했다.
왕은 이를 듣고 서울로 데리고와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하고 급간이라는 벼슬을 주었으며 오랫동안 그를 붙들어 두기 위하여 미녀로 하여금 처용의 아내가 되게 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너무 아름다워 역신이 이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남몰래 들어가 함께 잤다.
그때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두 사람이 자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갔다.
그 노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 달밝은 밤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보니 다리가 넷이어라,
둘은 내것이나 둘은 뉘것인고,
본디 내것이었으나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러자 역신은 본래의 모습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 앉아 <내가 그대의 아내를 사모하여 범하였으나 그대는 노여워하지 않으니 나는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컨대 이제부터는 그대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양을 문에 그려 붙여서 간사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아 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헌강왕이 또 포석정(錢石亭)에 갔었을 때 남산의 산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러나 좌우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만이 홀로 이를 보았다.
또 왕이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도 북악신(北嶽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이것을 옥도령(玉刀鈴)이라 했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벌였을 때에도 지신(地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