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의 철학

수레바퀴의 철학

미란(彌蘭)은 서기전 2세기 중엽 희랍 식민지인 인도 영내 카이불왕으로 북인도 샤아가라성에 즉위한 왕이다. 당시 그 영토는 서북인도에 걸쳐 비상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선(那先)은 중인도 사람으로 북인도 샤아가라성에 와서 불교를 전번한 고승이다.

미란은 특별히 불교는 믿지 않았으나 불교에 깊은 관심이 있었으므로 나선스님이 그 성에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친히 찾아가 불교교리에 관한 여러 가지 문답을 주고받았는데, 그것을 모아 편집한 것이 나선비구경 흑은 미란타왕문경이다.

나선비구경은 한역으로 두 권이 있고 미란타왕문경은 파리어본으로 7권이 있는데 파리어본이 영국의 석학 T.W. Rhys Davids에 의하여 영역되었다.

『왕이 물었다.」

「존자여,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알려졌습니까?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왕이여, 나는 나의 부모님께서 나선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으므로 그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나선일 뿐 진짜 나선은 그 이름 가운데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나선은 어떤 것입니까? 당신의 머리카락입니까? 몸에 난 털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손톱이 나선입니까 ? 이가 나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피부, 근골, 뼈, 내장 내지 혈액이 나선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을 합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의식(意識)입니까 ? 지각(知覺)입니까? 아니면 그 모든 것을 합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 말고 또 나선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나선이란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필경 그것은 공허한 음성에 불과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기계시는 나선은 대체 무엇입니까? 암만해도 나는 존자의 말을 참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왕이여, 당신은 무엇을 타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대체 수레는 무엇을 가리켜서 수레라 합니까? 굴레(軸)를 말합니까? 바퀴(輪)를 말합니까? 아니면 멍에를 말합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살(輻)입니까 ?」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을 합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

「그러면 그것 말고 또 달리 수레란 것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

「그렇다면 당신이 먼저 나에게 말한 것같이 나에게도 수레란 것을 발견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필경 그것은 공허한 음성, 그것이라 하여 좋을까요? 도대체 대왕께서 타고 오신 수레는 어떤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왕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

「여러분, 지금 폐하께서는 분명 수레를 여기까지 타고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수레란 무엇이냐 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이 되었습니다. 이러고서야 어찌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

하고 빈정댔다.

종자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면서 왕을 향해,

「폐하, 저런 말을 듣고서도 좋은 답변을 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하고 왕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왕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수레는 굴레, 바퀴, 멍에, 살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인연을 통털어 방편상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에 불과하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대왕은 수레의 의미를 잘 체득했습니다. 먼저 대왕께서 저에게 물은 것도 꼭 그와 같습니다.」

「아, 참으로 기묘한 일입니다. 나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존자를 괴롭게 했으나 당신은 교묘한 대답을 하여 의심이 얼음같이 녹아 사라졌습니다. 만일 불타가 오셨다면 반드시 당신의 응답을 크게 칭찬 하셨을 것입니다.」하고 감사하였다.』<那先比丘經>

이것은 불교의 공, 무아사상을 교묘하게 드러내 보인 대화다.

고 김잉석 박사는 그의「불타와 불교문학」가운데서「천편의 논문보다도 백편의 소설보다도 나은 비근하고도 적절한 비유이다. 고 칭찬하였다. 실상은 이언이요 진리는 비동(非動)이다.

존재의 참 모습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땅에서 푹솟은 것도 아니다. 인과 연이 한데 모여 하나의 과를 형성한 데 이름을 붙인 것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공허한 이름에 집착하여 희노애락을 연출하고 호오염정(好惡染淨)을 일으킨다. 덕산봉(德山捧), 임제갈(臨濟喝)이 어째서 생겼겠는가?

부처님이 영산회상에서 가만히 꽃을 들어 보이고, 달마가 소림에서 9년을 면벽한 그 소이가 바로 여기 있었던 것이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