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와 실상

중도와 실상

불교를 한다는 것은 행에 있어서는 중도를 얻고 종교적으로는 실상을 증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 중도와 실상은 막연한 노력과 철저한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지혜의 눈이 트여야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억지로 마음 밖에 진리가 있는 것 마냥 진리를 구하고 찾다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나타나지 아니하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얻을 수 없다고 자포자기 하기도 하고 스스로 어리석음을 꾸짖어 인생을 저주하기도 한다.

부처님 당시 소나코티 칸나는 원래 부유한 집의 아들로 발을 땅에 딛지 않아 발에서 털이 머리카락처럼 자란 아인데, 나라의 임금이 그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서 데려왔다가 부처님을 뵙고 스님이 되었다.

그런데 스승이 가르치는 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해도 전혀 진도가 없고 또 가시밭 돌밭 길로 걸식을 하다 보니 그 부드러운 발이 모두 헤이고 터져 차마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칸나는 홀로 생각했다.

「내 재간으로는 부처님의 법을 감당할 수 없고 또 깨닫기도 어려우니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보시 공덕이나 닦는 것이 좋겠다.」

그때 붓다께서 칸나의 생각하는 바를 미리 아시고 그 곳에 나와 물었다.

「칸나야, 너는 집에서 무엇을 잘했느냐?」

「거문고를 잘 탔습니다.」

「그러면 그 거문고를 탈 때 거문고 줄이 너무 늘어지면 소리가 나더냐?」

「나지 않습니다.」

「너무 조이면?」

「너무 조여도 나지 않습니다. 너무 느리지도 않고 조이지도 않아야 소리가 잘납니다.」

「그렇다 칸나야, 불도를 닦는 것도 꼭 그렇다. 생각이 너무 급하면 초조한 마음이 생기고 느리면 해이해진다. 만일 중도를 정행하면 멀지 않아 속세의 미혹을 없애고 법의 실상을 얻을 것이니 열심히 하라.」

그는 부처님의 이 같은 가르침을 받고 깊이 반성한 뒤 그와 같이 공부하여 마침내는 속세의 미혹을 없애고 진리를 증득하였다.

레바타란 장자도 비록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중도를 얻고 붓다의 법을 잘 깨달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나 재가로부터 출가의 신분이 된 이래 야비하고 또한 그릇된 생각이 일어난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생명 있는 것들을 치고 죽이고 괴롭히려는 이 오랜 기간에 나에게 그런 생각이 생긴 일이 없노라.

한량없는 자비가 잘 수련되어 붓다의 가르치심을 따라 점차로 쌓아 모여진 것을 내 아노라.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어버이로 하고 벗으로 하고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불쌍히 여겨 언제나 성내는 마음 없기를 좋아하고 자비를 닦아 스스로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기뻐하노라.

나는 착한 사람들이 행한 밝고 깨끗한 행위를 본받아 닦으니 마치 바위산이 우뚝 솟아 동하지 않는 것 같이, 비구는 우치를 다 없애므로 더럽혀지지 않는 산과 같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삶을 즐겨하지도 않으며 생각을 바로 하여 또한 때가 옴을 기다린다. 내 스승을 받들어 섬기고 붓다의 가르침을 이룩하고 무거운 짐을 풀어 다시 태어나는 모든 원인을 없애노라. 집착 없이 항상 천정을 바라는 자에게는 티끌만한 사악도 허공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니 나는 죽음을 좋아하지 않고 또 삶을 싫어하지도 않아 마치 일을 끝낸 종처럼 때를 기다리노라.」

<佛本行集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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