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제3권
8. 십팔불공법품(十八不共法品)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길을 잃어버린 중생들에게 항상 그 길을 일러 주고 인도해 준다. 그리고 위험한 개천이나 구덩이 높고 낮은 비탈길을 평탄하게 만들어 거기에 다리를 만드는가 하면 인적이 끊긴 처소와 외진 변두리 땅에 높고도 넓은 사찰을 세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짓거나 의심에 사로잡히면 그 무수한 중생으로 하여금 망설이는 마음을 없애고 죄에 떨어지지 않으며 제나름의 처소를 갖게 하며, 또 다른 사람에 대해 망설이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남의 단점을 들추거나, 누구는 무슨 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무수한 중생들의 뜻을 알아 일체의 원행(願行)을 없애고 경전의 법을 연설하여 그들의 망설임과 주저함을 없애 주기 위해 법의 넓은 광명을 나타내며, 또 지혜의 큰 광명을 베풀어 주고 불법을 권하기 위해 일체의 보살로 하여금 경전을 강설한다. 법시(法施)의 은혜를 베풀되 아첨하지 않고 오직 착한 업을 세우기 위해 서로가 권하고 교화하는 한편, 아예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조롱하거나 변동을 일으키지 않고 해치거나 헐뜯지 않고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지도 않는다. 일체의 언사(言辭)에 있어서 부처님 말씀만 믿고 문자(文字)의 가르침에 따르되 자재로움을 얻어 문자가 공한 것임을 알아서 모든 언사와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결함이나 더러움이 없고 그 단점을 볼 수 없어야 하나니, 보살이 이러한 법을 행하여 불도를 성취한다면 이것을 결함 없음이라고 이름한다.
여래는 이 결함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지혜를 구족하여 누군가 무슨 일을 묻더라도 다 분별 해설해 주어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이 널리 밝게 비추어 주는 것이다. 또 삼매를 잘 닦음으로써 일체의 음성에 들어가는 다라니를 깨달아 항상 그 결함 없는 언사로 경전의 법을 연설하되 어떤 문자에도 조작이 없으니, 보녀야, 이것을 여래의 첫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입으로 짓는 모든 악한 말을 버리고 지극히 성실한 말을 하되 법과 이치를 근본으로 삼고 교화를 업으로 삼으며, 허망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며 성현의 말씀이 아닌 것은 다 버린다. 또 성현의 고요한 행을 닦아 다투지 않고 사문(沙門)에게 순종하여 그 법을 세운다. 경전의 법을 듣고는 그 이치를 얻어 다른 사람에게 연설하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다 이롭게 하며, 생각이 끊어진 선정을 세밀하게 닦고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원한을 맺지 않고 구설(口舌)을 일으키거나 공한 이치에 집착하지 않고 다만 공의 행을 믿고 깨닫되 집착하지 않는다.
여래의 명호를 본받고 여래의 한량없는 업도(業道)에 대한 지혜를 독하게 믿되 다른 사람과 그 밖의 중생들까지 권유하여 이 법에 들어가게 하는 한편 다시 이 법을 닦아 불도를 성취해야 하나니, 이것을 다툼이 없다고 부른다.
여래는 음성이 없고 어떤 문자로도 언사를 가지지 않고 또 말이 없고 어떤 업에도 처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권화하여 이 바른 법을 닦게 하나니, 여래가 바로 이 법을 닦아 불도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음성과 언사가 없고, 어떤 문자로써 연설하지도 않고 속된 업에 처하지도 않으면서 모든 모임의 대중을 위해 그 이치를 널리 설하되 뭇 사람들의 뜻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또 말씀의 음성이 온화하여 그 때마다 온 국토를 감동시키며, 또 삼매를 잘 닦아서 한량없는 행의 다라니문을 깨달아 분별하고 여래의 모든 절차에 수순한다. 모든 상호(相好)를 다 갖추고 그 낱낱의 털구멍으로부터 한량없고 부사의한 불법의 음성을 펼치되 털구멍 하나에서 나오는 음성으로도 능히 모든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며, 나아가서는 한량없는 법문을 강설하는 자연스러운 음성을 연출하니, 이것은 바로 옛날 본원(本願)을 세운 그 힘으로 이룬 것이요, 여래는 거기에 아무런 생각이 없고 언제나 고요하여 구하는 법도 없으니, 이것을 바로 여래의 두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부처님을 기억하고 법을 기억하고 승가를 기억하고 하늘을 기억하고 보시하기를 기억하고 지혜 행하기를 기억하여 이 여섯 가지 기억을 스스로 어기거나 잃어버리지 않음은 물론 나아가 다른 사람을 권유하여 여섯 가지 기억을 행하게 해야 한다. 여래도 이 법을 행하며 불도를 성취한 것이며, 항상 중생 구제하기를 잊지 않는 동시에 일체의 법에서 자유를 얻고 삼매를 잘 닦아서 그 법정(法錠) 다라니를 깨달아 분별한 것이다. 또 여래는 그 모든 법을 언제나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가장 뛰어난 행으로 일체 중생들의 생각을 관찰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일을 묻더라도 여래는 그 법을 다시 기억할 필요 없이 물음에 따라 다 해설한다. 이와 같이 마음의 근본이 밝게 통달하였기 때문에 그 말씀이 또한 걸림없이 뭇 사람들의 마음을 다 즐겁게 하고 한 가지 문자로 잠깐 동안 연설하여도 그 연설은 두루 널리 퍼지게 마련이니, 이것을 이른바 여래의 세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마음을 옹호하여 성냄과 원망으로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그 마음이 괴롭거나 근심하게 하지도 않으며, 또 다른 사람의 공덕의 근본을 방해하지 않고 신심을 내어 법을 끊지 않게 한다. 마치 환술처럼 아무런 상념(想念)이 없어 스스로가 방자하지 않고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의 중생계에 들어가 모든 법을 평등히 관찰하되 어떤 법계에 머물러도 파괴함이 없어야 한다.
여래도 이 법을 행하여 불도를 성취함으로써 마음이 항상 고요하여 잠시라도 선정에 들지 않을 때가 없고 일체법을 다 자연 그대로 관찰하여 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 등적(等積)삼매를 닦음에 따라 그 보문(普門) 다라니를 잘 분별하게 되며, 또 여래는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요, 밖에 다른 업이 있지 않다. 이것을 곧 여래의 네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뒤바뀐 생각을 없애고 마음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그릇된 소견을 일으키지 않고 허망한 일을 하지 않으며, 나라는 생각을 없애고 몸이란 생각을 없애고 수(壽)라는 생각, 명(命)이라는 생각을 없애고 사람이란 생각을 없애며, 배운 이와 배우지 못한 이에대한 차별의 생각을 없애고, 단견(斷見)·상견(常見)을 없애고 모든 견해의 생각을 없애고 3처(處 : 몸·입·뜻의 세 가지 업)에 집착하는 생각을 없애고 3처를 여읜 생각은 없애며, 착한 것이라는 생각과 착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도 없애고, 죄가 있다, 죄가 없다는 생각도 없애고, 번뇌가 있다거나 번뇌가 없다는 생각도 없애고 세속이라는 생각과 세속을 제도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없애며, 나아가서는 번뇌의 근본을 제거한다는 생각도 없애고, 생사라는 생각과 열반이라는 생각도 없애고, 중생의 지성(志性)은 모두 뒤바뀐 생각이라는 그 일체의 생각을 다 깨끗이 없앤다. 그리하여 뭇 착한 일을 닦되 범부의 생각을 벗어나고 일체의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오직 그 중간에 처하여 아무 데도 치우치지 않고 평등하게 법을 관찰해야 한다.
여래도 이 법을 행하여 불도를 성취하였으므로 어떤 그릇된 생각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여래는 무상(無想)삼매를 잘 닦아 무진장(無盡藏) 다라니문을 깨달았다. 또 여래는 어느 곳에서 노닐어도 아무런 생각 없이 대비심을 일으키며 중생들 중에 망상을 지닌 자와 어떤 행에 속박된 자를 가엾이 여겨 그들을 권유하여 교화하기 위해 설법하되 시기를 잃지 않는다. 이것을 이른바 여래의 다섯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마음으로 생사를 관찰하여 그 모든 고뇌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점차 안락한 경지에 이끌어 가고 법에 대한 관찰을 확립하여 일체의 고뇌를 없애 근심하지 않게 한다. 어떤 이익의 욕구에 급급하지 않아 그것을 연모(戀慕)하는 번뇌를 깨끗이 제거하고, 또 일체의 공양으로 얻는 이익을 탐하지 않는 한편 이익되는 일을 잊어버리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모든 만물이 전부 덧없고 괴로운 것임을 관찰하며, 내지 자신의 몸까지 덧없음을 관찰하고 고요한 열반을 믿어 이러한 방편으로 일체의 중생과 모든 법을 다 관찰해야 한다.
여래도 이 법을 닦아 통달하여 마침내 불도를 성취하였으므로 걸림 없음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헤아릴 수 없는 모든 관찰을 다 모아 널리 펼치고 이른바 두 가지 관찰을 여읜다는 이름의 삼매를 잘 닦아 무수한 해인(海印) 다라니를 깨달은 것이다. 또 여래는 저 천·용·귀신·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와 제석·범천·사천왕과 사람인 듯 아닌 듯한 무리들 [人非人]로부터 공양 받고 공경 받아도 그것을 싫어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일체의 이학(異學)·외도(外道)와 기이한 술법을 지닌 자와 계율을 범한 중생들이 모여와서 어지럽히려 해도 그로 인해 근심하지 않음은 물론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존재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안다. 그 마음이 평등하기란 마치 땅과 같아서 참지 못하는 것이 없고, 물과 같아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불과 같아서 태우지 않는 것이 없고, 바람과 같아서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연모하는 것이 없고, 허공과 같아서 아무런 원한이 없다. 또 이 평등한 마음은 모든 중생을 치료하되 고요한 행을 관찰하는 그 법으로 뭇 사람들의 소행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더욱 구족하게 하기 위해 널리 중생계에 들어가 제도하지 못한 자를 제도하며, 다시 그 중생들을 교화하되 시기를 어기지 않고 각자의 본행(本行)에 따라 설법하되 동요하거나 게으르지도 않다. 이것을 이른바 여래의 여섯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온갖 악을 제거하고 정성껏 수행하여 일체 착한 공덕의 근본을 구하고, 미묘한 이치와 끝없는 도를 즐겨하여 그 깊고 깊은 갖가지 착한 근본에 뜻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성문·연각의 일을 벗어나 대승을 구하되 퇴전하지 않고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가엾게 여기되 바른 이치만을 생각하여 언제나 잊어버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모아야 한다.
여래도 이러한 법을 끊임없이 좋아하여 불도를 구하였기 때문에 모든 마군의 무리가 뒤바뀐 소견에 치우침을 보고는 그들의 그릇된 소견을 바로잡고 또 이러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바른 법을 쌓아 불도를 성취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가 바른 업을 잃지 않는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좋아하는 삼매를 잘 닦음으로써 금강(金剛) 다라니를 깨달아 모든 법에 자유를 얻었으니, 그러므로 중생들의 응함에 따라 설법하되 잠시라도 그 시기를 잃지 않고 법기(法器) 그대로 중생들의 성품과 소행에 맞추어 경전의 법을 연설하여 항상 올바른 삼매를 잃거나 어긋나지 않으니, 이것을 여래의 일곱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정진을 행하되, 착한 근본을 멀리하거나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그 착한 근본에 걸맞는 공덕을 모아 어긋나거나 없애 버리지 않으며, 모든 스승에게 공경을 다하고 착한 벗을 존경하고 모든 법사와 불·보살에게 나아가 친히 그 경전의 설법을 받아 듣고는 받들어 섬겨야 한다. 그리고 한량없이 정진하며 무수한 국토에 다니면서 중생들의 생사를 거둬 옹호하여 그 한량없는 불국토를 장엄 청정케 하고 바르게 깨달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되, 한량없는 그 부처님들의 법을 받아 지니는 한편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를 통달하며, 한량없는 중생의 행에 들어가 그 모든 법문을 강설해야 한다.
여래도 이러한 법으로 권유하고 교화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그 법을 구족하여 불도를 성취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정진을 잃어버리지 않음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또 여래의 정진은 모든 것을 잊지 않고 이 정진의 행을 잘 닦아서 삼매에 들어 신족(神足)의 변화를 일으키며, 나아가서는 그 신족의 변화로 한량없는 국토의 인민들을 감동시킨다. 또 특수함을 나타내어 우수한 중생을 일깨우고 교화하여 해탈하려 하고, 정성이 견고하여 어떠한 쌓임과 덮임에도 거리낌이 없고 모든 불국토에 노닐어도 부족한 소행이 없이 두루 허공에 이르나니, 이것을 바로 여래의 여덟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그 뜻을 한결같게 하고 조용히 진리를 구족하려는 마음을 굳게 내며, 세속과 세속 제도하는 법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네 가지의 생각 두는 곳[四念處]을 닦아야 한다. 말하자면 스스로가 안 몸[內身]의 소행을 관찰하여 그 덧없음과 괴로움과 공한 것의 몸 아닌 일을 생각하고, 바깥 몸[外身]의 소행을 관찰하여 그 덧없음과 괴로움과 공한 것의 몸 아닌 일을 생각하고, 안팎 몸의 덧없음과 괴로움과 공한 것의 몸 아닌 일을 관찰하는 것이다. 또 안의 느낌[痛痒]을 관찰하여 그 느낌의 공함을 보고 바깥의 느낌을 관찰하여 그 느낌의 공함을 보고 안팎의 느낌을 한꺼번에 관찰하여 그 느낌의 공함을 봄으로써 그 공을 알아 공을 닦는다. 또 안의 마음을 관찰하여 그 안 마음의 상(相) 없음을 보고 바깥 마음을 관찰하여 그 바깥 마음의 상 없음을 보고 안팎 마음을 한꺼번에 관찰하여 그 안팎 마음의 상 없음을 봄으로써 그 상 없음을 알아 상 없음을 생각한다. 또 안의 법을 관찰하여 그 안 법의 원(願) 없음을 보고 바깥 법을 관찰하여 그 바깥 법의 원 없음을 보고 안팎 법을 한꺼번에 관찰하여 그 안팎 법의원 없음을 봄으로써 그 원 없음을 알아 원 없음을 행한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생각 두는 곳을 얻어 덧없음과 괴로움과 공한 것의 봄 아님을 관찰하여야만 여래의 몸을 구족히 성취하여 그 몸의 착한 덕을 끊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 느낌을 깨닫는 것을 생각 두는 곳을 얻는다 하며, 공한 행을 관찰하여 모든 중생의 나아가는 갈래를 알아 그들의 나쁜 갈래를 쉬게 하고 대비심을 일으켜 그 고통과 환란을 제거한다. 마음을 깨닫고 통달함을 생각 두는 곳을 얻는다 하니, 상(相) 없음을 닦아 보살심을 잃지 않고 대승을 행하되 게으르지 않고 마음이 법에 나아가기 때문에 생각 두는 곳을 얻는다 하는 것이다. 원 없음을 닦되 욕심 없는 법에 집착하지 않고 불법을 관찰하여 한량없는 법계에 평등히 들어간다. 여래는 이 법을 닦아 마침내 불도를 성취하였으므로 도심을 잃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는 항상 선정에 들어 이 모든 뜻을 잠시라도 잊지 않고 삼매를 잘 닦아 뭇 행을 깨끗이 제거하며, 또 여래는 변화하는 일을 강설하여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중생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믿는 근기를 봄으로써 그들의 번뇌와 애욕의 행을 건너고 벗어나게 하는 한편, 인연에 얽매이는 집착과 불선한 업에 따른 보응과 생사와 화복의 그 시종(始終)을 깨우친다. 모든 불토의 성문들이 모여 보살행을 체득하고 이해하며 수결(受決:受記)을 행할 때엔 여래가 그 때를 알아서 친히 그들의 부모·친척과 스승·벗의 관계를 강설하여 심근(心根)을 밝게 통달시켜 잊지 않게 하고 모든 위치를 분별하여 말하되 그 말이 조금도 헛되지 않나니, 이것을 이른바 여래의 아홉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지혜를 닦아 그 지혜의 광명과 지혜의 위신과 지혜의 식견으로 빛나는 지혜를 연출하고 성스러운 지혜를 통달하며, 깊고 미묘하여 욕심을 벗어난 지혜, 모든 것을 통달한 비유할 곳 없는 지혜, 성문이나 연각들로는 미칠 수 없는 지혜와 전에 없는 지혜로서 아주 끝없이 그윽한 지혜와 모든 갈래의 지혜를 통달하여 마침내 생각이 끊어진 선정의 지혜에 들어가 그 기억하는 것이 머무는 곳 없고 집착이 없으며, 널리 구하고 많이 들어도 만족하게 여김이 없고 성달(聖達)에 뜻을 두어 지혜에 귀착하려고 해야 한다. 세간을 보되 마치 머리에 불이 붙은 듯 보고 정성껏 대승을 구하되 마치 큰 바다처럼 견문을 넓히면서 그 견문을 다 분별하며, 경전을 좋아하고 법의 즐거움을 기꺼워해야 한다.
이와 같이 법을 구하기 위해 정진을 행하되 이 법의 즐거움으로 누구에게든 안팎에 걸쳐 아낌없이 모두 다 내어 주고 베풀며, 어른과 덕 있는 이를 공순히 받들어 항상 그 훈계를 듣고 다섯 쌓임의 고뇌를 모두 참는 동시에 모든 안일함과 오락(娛樂)을 버린다. 그는 이 법을 좋아하여 쉬지 않고 즐겨 듣되 4분의 1의 게송만 듣더라도 천금의 보배를 구족하는 것보다 이 게송의 법 듣기를 좋아하고 전륜성왕이 되는 것보다 바라밀 듣기를 원하고, 제석·범천이 되기를 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네 글귀의 게송을 외워 법으로 보시하기를 즐겨 하고, 항하사처럼 그 많은 공양을 받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권유하여 도에 발심하게 하기를 좋아하고, 전륜성왕처럼 그 많은 재보를 갖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경전 강설하기를 기뻐하고, 제석·범천처럼 그 많은 안락을 얻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바라밀 연설하기를 좋아하며, 이러한 성행(性行)을 이같이 성취하되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기가 들은 경전을 다른 사람에게 널리 설하고, 이같이 정진하여 따를 이가 없을 만큼 받들어 행함에 따라 모든 부처님의 가호를 힘입고 모든 하늘의 존경과 옹호를 받는 한편 세간의 전적(典籍)과 세속 제도하는 바른 경전을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다 통달하여 능히 감당하게 되고 마침내 다함이 없는 지혜의 광명을 이룩하게 되니, 여래도 이 법을 행하여 불도를 원만히 성취하였기에 여래라 일컫는 것이다.
여래의 공통되지 않은 지혜가 이같이 진리를 통달하여 그 거룩한 광명이 거리낌 없고 쌓임과 덮임[陰蓋]이 없으므로 일체 중생들의 생각과 선악의 갈래와 말의 있고 없음과 죄의 있고 없음을 다 알아 세속에 계시면서 세속을 제도하기 위해 그 번뇌와 성냄,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말씀하신다. 또 모든 법문을 강설하사 그 모든 불국토에 가득한 티끌 수처럼 많은 중생들을 깨우쳐 성인의 깨달음에 들게 하며, 그러한 지혜로 다시 과거·미래·현재의 일을 분명히 알아 아무런 거리낌 없고 장애도 없이 무수한 겁(劫)에 걸쳐 중생들의 끝없는 행을 관찰하는 동시에 삼매를 잘 닦아 변화하는 일을 가르치고, 한 가지 법문으로 모든 법문을 분별하여 한 가지 법문을 말미암아 모든 법문에 들어가게 하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속가에 있기를 조금도 그리워하지 않고 집을 버리는 것도 즐겨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출가하여 사문이 되어 담박함을 좋아하고 고요함을 으뜸으로 삼고 법다운 침묵을 업으로 삼아 깊고도 미묘한 법을 닦는다. 다시 공(空)하고 상(相) 없고 원(願) 없는 이 3해탈문(解脫門)을 받들어 행함으로써 일체의 마군과 원수의 적을 물리치고 온갖 뒤바뀜과 삿된 소견을 벗어나서 저 모든 생각에 집착된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3해탈문을 오로지 닦아 곧 덮임 없는 해탈문을 이룩하여 자연히 걸림없는 지혜를 일으키고 마군의 경계를 제도하고 성인의 경계를 구족한다. 그리고 다시는 일체의 쌓임과 덮임과 뒤바뀜을 없애고 온갖 그릇된 소견과 번뇌의 생각을 되풀이하지 않음으로써 곧 쌓임과 덮임 없는 문을 깨달아 그 3해탈문을 스스로 즐겨 하여 깊고 깊은 법을 분별 해설한다. 그리하여 이치에 귀결될 뿐 형식에 귀결하지 않고 지혜에 귀결될 뿐 알음알이에 귀결하지 않고 요지를 분별할 뿐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법에 귀결될 뿐 사람에 귀결하지 않는다.
그는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이끌어 가되 아름다운 말씨와 장엄한 꾸밈보다 그 실지에 있어서 모든 생각을 떠나 중요한 이치를 강설 분별하여 해탈하게 하고, 모든 물질을 떠나 중요한 지혜를 강설 분별하여 해탈하게 하고, 많은 말씨를 떠나 바른 말씨를 강설 분별하여 해탈하게 하고, 사람을 떠나 법을 강설 분별하여 해탈하게 한다. 만일 어떤 중생이 62가지 그릇된 견해에 얽매여 있으면 그 허무한 요지를 강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일체의 상(相)과 인연의 미혹에 사로잡혀 있을 때엔 그 상(相) 없음을 강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삼계(三界)에 집착되어 있을 때엔 그 원(願) 없음을 분별하여 벗어나게 한다. 탐욕에 싸여 있을 때엔 허공의 청정함을 강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성내거나 미워함에 싸여 있을 때엔 인자한 마음을 베풀어 벗어나게 하고, 어리석은 행에 휩쓸려 있을 때엔 12연기가 서로 이어져 있음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한다. 탐내는 마음에 빠져 있는 중생들에겐 보시바라밀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금계를 범하는 중생들에겐 계율바라밀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성냄에 쌓여 있는 중생들에겐 인욕바라밀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하며, 게으름에 빠져 있는 중생들에겐 정진바라밀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며, 산란한 생각을 일으키는 중생들에겐 선정바라밀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그릇된 지혜를 지닌 중생들에겐 지혜바라밀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한다.
범부의 행을 주장하는 중생들에겐 성인의 진리를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네 가지 뒤바뀜에 집착하는 중생들에겐 덧없음과 괴로움과 공함과 몸 아닌 법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일체의 쌓임과 덮임과 뒤바뀜의 그릇된 소견에 미혹하는 중생들에겐 덮임 없는 해탈문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고, 온갖 번뇌에 얽매이는 중생들에겐 시방 부처님들의 도품(道品)의 법을 분별 해설하여 벗어나게 하니, 여래도 이러한 법을 행하여 마침내 불도를 원만히 성취하였기에 여래라 한다.
이와 같이 여래는 모든 중생을 벗어나게 하면서도 그 해탈을 잃지 않음으로써 누구에게도 성내거나 미워함이 없고 아무런 결함이 없음은 물론 본말이 청정하여 깊고도 미묘한 모든 갈래에 들어가 그 어떤 이도 당할 수 없는 신통의 지혜를 얻고 성문승과 연각승을 벗어나 모든 불도에 홀로 뛰어나며, 더러움 없이 끝까지 청정하여 모든 장엄을 갖춘다. 고요한 뜻으로 업에 따라 말하되 그 말이 한량없고 그지없으며, 또 함이 없고 거리낌 없으면서도 함이 없고 거리낌 없는 수행의 평등함이 마치 허공과 같으며, 이구장(離垢藏)삼매를 잘 닦아서 일체의 법을 빛내고 다라니를 깨달아 모든 상(想)을 해탈하여 설법하므로 여래에게 귀의하여 친근하는 자라면 누구나 그 광명을 힘입어 함이 없는 법과 열반의 경지를 향해 구경(究竟)의 경지를 갖춘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한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라 한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지혜를 존중하고 지혜를 세력으로 삼아 지혜에 귀결하되, 그 지혜를 강론하는 보살로서는 모든 지혜의 갈래를 초월하여 성스러운 도를 닦고 그에 대한 행을 일으켜 초월하기를 구하며, 깨끗이 신통을 닦아 일체의 지혜를 이루고 도의 뜻을 수행하여 마침내 모든 신통의 지혜를 구족히 통달해야 한다.
말하자면 욕심이 있을 때엔 그 욕심이 일어남을 알고 욕심이 없을 때엔 그 욕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성내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성내는 마음이 일 어남을 알고 성내는 마음이 없을 때엔 그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어리석은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어리석은 마음이 없을 때엔 그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번뇌의 마음이 있을 때엔 그 번뇌로 인한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번뇌의 마음을 여읠 때엔 그 번뇌로 인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수면(睡眠)의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수면으로 인한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수면의 마음을 여읠 때엔 그 수면으로 인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회합(會合)하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회합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회합하는 마음을 여읠 때엔 그 회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공양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공양을 바라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공양을 바라는 마음이 없을 때엔 그 공양을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다른 것을 탐내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다른 것을 탐내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다른 것을 탐내는 마음이 없을 때엔 그 다른 것을 탐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교만한 마음이 있을 때엔 그 교만한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교만한 마음이 없을 때엔 그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 쌓임과 덮임의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쌓임과 덮임의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쌓임과 덮임의 마음이 없을 때엔 그 쌓임과 덮임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결심이 없을 때엔 그 결심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고, 결심이 있을 때엔 그 결심이 일어남을 안다.
나쁜 마음이 있을 때엔 그 나쁜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착한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착한 마음이 일어남을 알며, 죄의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죄의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죄의 마음을 여읠 때엔 그 죄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번뇌[漏] 있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번뇌 있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번뇌 없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번뇌 없는 마음이 일어남을 안다. 세속의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세속의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세속을 제도하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세속을 제도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며, 집착하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을 때엔 그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청정한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청정한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청정한 마음이 없을 때엔 그 청정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안다. 좁고 작은 마음일 때엔 좁고 작은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어지러운 마음일 때엔 어지러운 마음이 일어남을 알며, 감촉하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감촉하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감촉하는 마음이 없을 때엔 그 감촉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며, 치우치는 마음이 있을 때엔 그 치우치는 마음이 일어남을 알고 치우치는 마음이 없을 때엔 그 치우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아야 안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그 간탐하는 마음과 보시하는 마음, 계율을 범하는 마음과 계율을 받드는 마음, 성내고 미워하는 마음과 인욕하는 마음, 게으른 마음과 정진하는 마음, 산란한 마음과 선정의 마음, 그릇된 지혜의 마음과 바른 지혜의 마음, 또는 범부의 마음과 성현의 마음, 그릇된 소견에 나아가는 마음과 바른 소견에 나아가는 마음, 성문승의 마음과 연각승의 마음과 대승의 마음과 다시 큰 도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또 고제(苦諦)는 원인이 있어 생긴 것임을 아니 그것이 습제(習諦:集諦)이고, 괴로움이 다함을 깨닫는 것이 진제(盡諦)요, 도에 나아가는 사람은 고제를 있는 그대로 깨달으면 본래의 청정한 지혜에 돌아가 일어나는 곳이 없고 본말이 아무것도 없고 닦아야 할 지혜도 없음을 안다. 그리하여 끊음도 없고 믿음도 없는 그 멸제(滅諦)를 알고 또다시 모든 것에 널리 들어가는 도제(道諦)의 평등함이 마치 허공 같아서 나 없고 애착할 것도 없게 된다.
또한 그 본래 청정한 것임을 알고 마침내 이 네 가지 진리를 다 깨달아서 진리 그대로를 따라 짓거나 증득함이 없으며 중생들을 일깨움에 있어 그 증명을 나타내 보인다. 또 중생을 위해 경전의 법을 강설할 때는 그 순서를 잘 따라 설법하여 그들로 하여금 연기(緣起)에 미혹하지 않아 일체의 그릇된 소견을 버리고 중정(中正)에 처하여 인연의 법을 관찰하게 한다. 그리하면 모든 법의 보응(報應)을 깨달아서 나라는 생각과 사람이란 생각과 수명(壽命)과 생각과 중생이란 생각을 갖지 않게 하며, 다시 중생들이 무명(無明)을 따라 행(行)을 일으킴과 행을 따라 식(識)을 일으킴과 식을 따라 명색(名色)을 일으킴과 명색을 따라 6입(入)을 일으킴과 6입을 따라 습갱(習更 : 觸)을 일으킴과 습갱을 따라 통양(痛痒 : 受)을 일으킴과 통양을 따라 은애(恩愛)를 일으킴과 은애를 따라 수(受 : 取)를 일으킴과 수를 따라 유(有)를 일으킴과유를 따라 나고 늙고 죽음의 그 슬픔과 고통을 일으키게 됨을 알고, 이러한 인연으로 마침내 큰 온(蘊 : 陰)의 덩어리를 일으키게 됨을 알게 한다.
나아가서는 이 모든 것을 공하다고 깨달아 무명이 다 되어야만 행과 식과 명색과 6입과 습갱과 통상과 은애와 수와 유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의 그 슬픔·고통과 큰 쌓임의 덩어리가 곧 길이 다되는 것임을 알게 하고, 또 그 무명의 인연이란 나의 인연도 아니고 사람의 인연도 아니고 수명의 인연도 없고 중생의 인연도 없는 것임을 관찰해야 한다. 만일 나[我] 없고 사람[人]도 없고 수명(壽命)도 없고 중생도 없다면 이는 곧 공한 것이며, 이미 공한 것임을 안다면 덧 있다거나 덧없다며 단멸(斷滅)에 빠지지 않는다. 단멸이란 과거 때부터 생한 바도 일어난 바도 없는 것이요, 과거 때부터 생하거나 일어난 것이 없다면 3세에 집착할 것이 없다. 3세에 집착할 것이 없다면 얻을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다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이미 아무것도 없다면 곧 저절로 고요한 것이어서 과거·미래의 길을 초월하였으며, 이미 과거·미래의 길을 초월하였다면 이는 곧 제일가는 이치이고, 제일가는 이치라면 바른 진리이고, 바른 진리라면 이는 부처님의 참된 말씀이고, 부처님의 참된 말씀이라면 다툴 것이 없고 다툴 것이 없음은 곧 고요한 이치의 법이다. 고요한 이치의 법이라면 그 자연스러움이 허공과 같으며, 이러한 지혜를 따라 행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에 수순하지 않는다면 곧 무명(無明)을 일으키니 그 무명을 말미암아 행과 식과 명색과 6입과 습갱과 통상과 은애와 수와 유와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의 슬픔과 고통과 큰 쌓임의 덩어리를 일으키고 그 치우친 모든 소견을 제거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인연의 보응을 죄다 하나로 뭉쳐 통달하고 나 없고 사람 없고 수명 없음을 분별하여야만 모든 법이 자연스러워 아무런 변제(邊際)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근원도 없어서 그 중정(中正)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법의 근원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중정을 잡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중정이란 한량없는 바른 법을 초월하고 이런 법, 저런 법과 중간의 법까지도 여의므로 곧 한량없는 경전의 중정한 법을 강설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도 이러한 법을 행하며 마침내 불도를 원만히 성취하였기에 여래·지진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는 끝까지 도지견(度知見)의 지혜를 잃지 않기 때문에 그 도지견의 지혜로써 곧 역진(力進)삼매를 닦아 한량없는 자재 다라니를 얻어 중정한 법계에 평등하게 들어간다. 그러므로 허공처럼 아무런 상념(想念) 없이 무형(無形)한 업의 지혜를 강설하고 보응(報應)을 분별하되 잊거나 잃어버림이 없으며, 과거·미래·현재의 일을 평등히 연설하여 일체 중생이 근기를 직접 관찰함으로써 그 정진해야 할 지혜를 보이고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몸을 분별하되 세간의 모든 행을 풀이하여 그 다함 없는 일을 잘 건립(建立)한다. 나아가서는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믿음과 갖가지의 믿음을 선포하고 일체의 방면과 모든 부분을 분별하여 그 한량없는 고난을 두루 해결해 주는 한편 다니는 처소마다 진퇴(進退)의 지혜를 널리 설하고 또 한량없는 법문과 일체의 선정·해탈문을 선포하여 그 욕심과 성내고 미워하는 번뇌의 마음을 없애 준다.
다시 그 중생들의 시종(始終) 나아가는 선악과 중간을 관찰하여 과거세의 쌓임과 덮임 없는 무수한 지혜를 들어 깨우치고 한량없는 변화와 과거세의 일을 다 기억하는 동시에 그 하늘 눈[天眼]으로 두루 관찰하여 거리낌 없이 선설하며, 만일 중생들 중에 조그마한 지혜를 갖춘 자 있으면 그 모든 거리낌을 제거하기 위해 일체의 번뇌 다한 지혜[一切漏盡慧]와 두려움 없는 지혜[無畏慧]를 강설하여 차별 없이 평등을 얻게 한다. 항상 끊임없이 불사를 일으켜 대비의 세력을 갖추는 지혜를 강설하며, 사람마다의 본행(本行)에 따라 설법하되 모든 법을 찬양하여도 머무는 곳이 없고 낱낱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법 바퀴를 굴리되 조금도 게으름이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뛰어난 지혜로 심오한 이치와 갖가지 수승한 일을 선포하는 한편, 일체 성문승이나 연각승들로서는 미칠 수 없는 지혜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감동시키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두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성업(聖業)을 일으키고 명예를 구하지 않으며, 몸소 지혜의 업을 일으키고 일체의 더럽거나 아첨하거나 간사한 업을 일으키지 않으며, 남을 해치려는 행과 간탐하는 행을 떠나 항상 범행(梵行)을 닦되 몸소 모든 일에 정진하여 도행(道行)에 수순하고 자신을 위해 걱정하거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며, 바라밀에 의지하여 대비심을 행하되 항상 중생을 위해 몸소 실천해야 하니, 여래도 이와 같은 모든 법을 원만히 받들어 행하였기에 불도를 성취한 것이다.
이른바 여래가 몸소 행하는 일이란, 그 덕과 지혜가 자재하여 일체의 이치를 깨닫고 일체의 형태를 본 뒤에 삼매의 힘으로 모든 빛깔을 나타내 보이고 널리 다라니에 들어가는 법을 요달함이니, 여래가 이 무수한 형태와 갖가지 종류의 모습을 나타내면 일체의 천·용·귀신·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와 제석·범천·사천왕과 범지·군자·장자와 농부·공사(工師)·세민(細民)과 비구·비구니·청신사·청신녀와 그 밖의 무수한 사람과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무리들이 모두 모여와서 자리에 앉는다. 여래는 거기에서 한량없는 위의와 예절과 거룩한 대인의 모습으로 그 모임의 대중을 위해 한량없는 경전의 바른 법을 강설하여 그들을 모두 권하여 나아가게 한다. 또한 다시 방편의 하나로서 홀연히 중간에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으니, 모임의 대중이 각각 서로 찬탄하면서 그 지혜의 고요한 연출에 따라 환희심을 낸다. 그 가운데서 직접 이 광명을 보는 자는 아무리 보아도 싫증을 내지 않고, 말하는 자는 더욱 크게 기쁨에 겨워하며 다시는 세간의 일체 욕락과 재물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만일 여래가 숨긴 몸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중생들은 한결같이 안타깝게 우러르면서 경전의 설법을 듣고자 하고, 여래의 몸을 보게 되면 모두가 탐욕의 집착과 은애(恩愛)에 얽힌 견해를 벗어나 그 설법 듣기를 좋아하며 이 보응(報應)을 인하여 마침내 번뇌 없는 경지에 이르러 몸과 입과 마음이 결함 없는 청정한 업을 얻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세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성스러운 지혜의 업을 일으키고 명예와 소문을 구하지 않으며, 그 하는 말에 있어서도 지혜로운 일만을 일으키고, 일체의 추악하거나 아첨하거나 삿된 것에 미혹하지 않는다. 또 그 말이 성실하여 이간하는 말을 하지 않으며 거친 말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도 않으며, 말이 부드럽고 난폭하지 않으므로 말마다 법을 설하게 된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열뇌(熱惱)를 일으키지 않게 말하고 부처님의 교법에 따라 착한 일만 말하므로 그 말씀이 중생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뿐 전혀 모함하지 않으며, 그 고요하고 편안한 지혜로 구족하게 말하되 명예를 탐하지 않아야 하나니, 여래도 이러한 법을 행하였기에 마침내 불도를 원만히 성취한 것이다.
이른바 여래의 말씀이란 바로 평등한 지혜이고 자재로운 덕이다. 이 평등한 지혜와 자재로운 덕으로 실사(實事)삼매를 잘 닦아서 3해탈품을 얻고 모든 다라니를 깨달았기에 여래는 한 번의 말과 한 마디 법의 말로 모든 것에 널리 들어가고 그 펼치는 음성이 또한 모든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나아가서는 여래가 연출하는 그 일체의 음성이 이치에 맞고 법에 어긋나지 않는 동시에 성실하고 유순하여 인연의 법을 관찰함으로써 모든 더러움과 애욕을 제거하고 마침내 고요한 선정에 들어 그 지성의 과보를 얻는 한편 내지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되나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네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항상 지혜의 업을 닦되 명예와 물질을 그리워하지 않고 마음껏 그 성스러운 지혜의 업 일으키기를 생각해야 한다. 또 중생들로 하여금 나쁘고 그릇된 그들의 집착과 무명에서 일어나는 성내고 미워하는 뒤바뀐 소견을 벗어나 바른 소견을 닦아서 자비를 행하게 하며, 또 중생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베풀되 도의 뜻을 버리지 않고 지혜를 닦아 그 지혜를 끝까지 구족케 하는 한편, 스스로가 훌륭한 체하지 않고 거만하거나 방자함이 없어야 하나니, 여래도 이 법을 행하고 나서 불도를 성취하였다.
이른바 여래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 성스러운 지혜란 이미 지혜를 닦고 널리 펼쳐 그 지혜에 대한 평등과 자유를 얻는 것이니, 그러므로 일체의 지혜가 평등한 마음을 따라 자유로워서 현재제불목전현립(現在諸佛目前顯立)이란 삼매를 잘 닦아 청정한 생각으로 맑고 깨끗한 다라니를 얻었다. 여래는 이와 같이 한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널리 들어가고 또 자신의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에 중생들의 마음도 평등하게끔 권한다. 그 권함에 있어서도 마음은 마치 환술 같고 본 성품이 청정하므로 일체의 마음이 자연 허공 같아서 도법(道法)에 따라 모든 중생의 몸·입·마음의 행을 평등히 이끌어 가되 그 중생들의 몸을 자기 몸에 넣어 그림자처럼 나타내기도 하고, 한편으론 지혜로써 그 모든 몸을 평등히 이끌어 가되 자기 몸에 넣은 일체 중생들의 몸을 한 찰나에 부처님 몸으로 변화시켜 내기도 한다. 이러한 건립(建立)은 아무도 헐거나 움직이거나 옮길 수 없으며, 천상·세간의 하늘·사람과 모든 마왕·범지·사문·범천들도 함부로 할 수 없나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다섯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거의 여래·지진·등정각들이 그 거리낌 없는 지혜로 일체의 세계에 두루하되 거리낌 없고 쌓임과 덮임도 없이 몸소 업을 행한 그 위의와 법식을 듣고서 독실히 믿어야 한다. 또 일체 세계의 음성에 두루 들어가 한량없는 법문을 분별 연설하신 부처님들의 그 한량없고 다함 없고 부사의한 음성을 듣되 과거 여래의 말씀이 두 가지가 없는 것처럼 현재 시방 국토의 부처님 말씀과 뭇 경전의 이치와 일체 보살들의 음성이 또한 그러한 줄을 믿어 모든 성문·연각과 일체 인민들의 그 인연에 따른 죄복을 통달하며, 다시 그 염(念)하는 행에 있어서 과거 여래들의 마음으로 행한 그 빛나는 광명이 청정하기 한량없고 아무런 쌓임과 덮임 없음을 믿어야 한다. 과거의 여래를 믿는 자라야만 의심을 갖지 않고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부처님들의 그 부사의한 경계를 따라 중생의 경계를 깨닫게 되며, 이러한 방편으로 모든 법을 즐겨 하여 곧 권하게 되며, 여래도 이 법을 행함으로써 마침내 완전하게 성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 여래들의 한량없고 손실 없는 지혜는 그 자유로운 지혜를 나타낸 것이므로 여래도 그 자유로운 지혜를 바탕 삼아서 다시 용맹복(勇猛伏)이란 삼매를 닦고 위신을 빛내는 그 다라니를 깨달음으로써 과거 여래들의 각각 다른 명호와 수명과 한없는 지혜를 알아 그 근원을 끝까지 탐구하였다. 또한 과거의 보살·성문·연각에 대해서도 그러하고, 내지 중생들의 그 모든 행과 선악·화복의 업을 알며, 나아가서는 과거 일체의 겁수(劫數)에 걸쳐 누가 어느 겁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룩하고 이룩하지 못하였는지를 알고, 몇 분의 여래·지진·등정각이 계셔서 그 한량없고 걸림없고 다함 없는 법문을 설했음을 안다.
또 과거 불세계의 각각 다른 명호와 국토의 더럽고 청정함과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음과 가늘고 미묘함을 알고 중생들의 번뇌의 숫자와 그 느끼는 것도 안다. 내지 시방 처소에 순응하되 그 처소의 금강처럼 견고함과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나아가서는 경계가 없는 모든 불국토를 빠짐없이 죄다 안다. 여래는 다시 여기에서 과거의 모든 일을 널리 설하되 잊어버리지 않고 모두가 알아채니, 그 지혜가 마치 사람들이 손바닥을 바라보며 다섯 손가락을 관찰하는 것처럼 쉽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여섯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여래·지진·등정각들이 그 거리낌 없는 지혜로 일체의 세계를 두루하되 쌓임 없고 덮임도 없이 몸소 행한 그들의 위의와 예절을 듣고서 다 독실히 믿어야 한다. 또 음성을 널리 펼쳐 들리지 않은 곳이 없고 모든 불국토가 가르침을 모두 듣고서 그대로 곧 한량없는 법문에 들어가 미래 여래들의 말씀과 시방 국토의 부처님과 모든 법다운 중생과 일체의 보살·성문·연각·범부들의 선악에 대한 죄복의 과보를 믿고 다시 미래 부처님들의 그 마음이 향하는 곳을 따라 위신의 광명이 한없이 청정하여 숨김과 덮임 없음을 진실로 믿어야 한다. 이 미래 부처님들의 행을 믿는 자라야만 의심을 갖지 않고 주저하지도 않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부사의한 그 부처님들의 경계를 독실히 믿고 다시 이 중생들을 위해 권하며, 이러한 방편으로 더욱 그 법의 즐거움을 믿어 즐겨 하리니, 여래도 이 법을 행함으로써 마침내 불도를 완전히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이 미래의 무수한 여래가 아무런 소실이 없음은 그 지혜의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여래가 미래의 지혜를 소실 없이 자유롭게 나타내기 위해 대비의 힘을 일으키는 삼매를 닦고 사자뢰음(師子雷音)이란 다라니를 깨닫는 것이다. 곧 미래 부처님들의 각각 다른 명호와 수명과 지혜의 그지없음을 알아 그 근원을 얻음과 동시에 미래의 보살·성문·연각·중생들의 행을 알고 다시 중생들의 그 행하는 업에 따라 화복의 보응을 받게 됨을 안다. 나아가서는 미래의 모든 겁(劫)에 걸쳐 누가 어느 겁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룩하고 이룩하지 못할지를 알고, 그 중간 어느 겁에 누가 한량없고 다함 없는 설법을 할 것인지를 알며, 또 미래 세계의 각각 다른 명호와 국토의 더럽고 청정함과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음과 가늘고 부드럽고 미묘함을 알고 티끌 같은 그 중생들의 수효를 안다. 다시 여래는 그 모든 것을 잊음 없이 유순하게 시방 처소를 다니면서 중생들의 번뇌에 대한 근원과 부분을 알므로 그 무수 한 불세계에 널리 들어가 이 모든 것을 분별 해설하되, 마치 손바닥을 바라보며 다섯 손가락을 관찰하듯 쉽게 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일곱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기 위해서는 모든 현재의 여래·지진이 그 거리낌 없은 지혜로 쌓임과 덮임 없이 모든 부처님 경계를 두루하면서 몸소 업을 행한 그 위의와 예절을 듣고 독실히 믿어야 한다. 또 그 음성을 통달하여 모든 국토에 두루하되, 거리낌 없고 덮임 없이 그 부사의한 부처님의 음성을 본받아 한량없는 법문을 설하는 동시에 현재 여래들의 말씀을 믿어 즐겨 하고, 한편으론 시방 정각들의 말과 뭇 경전의 이치와 일체의 보살·성문·연각·인민들의 업을 분별하며, 다시 여래들의 마음으로 행하는 그 업의 청정한 광명이 헤아릴 수 없고 쌓임과 덮임 없음을 다 믿어야 한다. 이 현재의 여래를 믿는 자라야만 의심을 갖지 않고 막힘도 없고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경계에 들어가고 나아가 다른 중생들을 권하여 경전의 법을 믿어 즐겨 하게 되나니, 여래도 이러한 법을 행함으로써 마침내 불도를 완전히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의 무수한 여래가 아무런 손실이 없음은 그 지혜의 자유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여래가 현재 손실 없는 지혜를 자유롭게 나타내기 위해 이구조인(離垢照印)이란 삼매를 닦고 금강도량(金剛道場)이란 다라니를 깨달아서 곧 현재 여래들의 서로 다른 명호와 수명의 한계와 지혜의 끝없음을 알아 그 근원을 얻는 동시에 현재의 일체 보살·성문·연각·중생들의 행을 알고 다시 중생들의 사업에 대한 죄복의 보응을 안다. 나아가서는 현재의 겁(劫)에서 누가 바른 깨달음을 이룩하였는지를 알고 그 원인을 설한다. 또 현재 시방 국토의 서로 다른 이름과 그 국토의 더럽고 청정함과 많고 적음과 크고 작음과 가늘고 부드럽고 미묘함을 아는 한편 그 국토에 널리 들어가 티끌 같은 중생들의 소원에 수순하며, 내지 현재 시방세계 중생들의 한량없고 끝없는 근기를 알아 그 근원을 분별 해설하되 그 지혜는 아무런 손실이 없으니, 마치 손바닥을 바라보며 다섯 손가락을 관찰하듯 쉽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여래의 열여덟 번째 공통되지 않은 법이다.
이 열여덟 가지의 공통되지 않은 일체의 부처님 법을 얻게 되나니, 무엇을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라 하는가? 여래의 정수리 모습은 볼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그 몸이 한없으므로 여래는 모든 형체를 훌쩍 벗어나 있는 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하므로 중생들이 부처님을 보면 자신의 더러움을 소멸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여래의 몸은 약(藥)과 같아서 그 행동이 영특하고 미묘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여래는 아무런 허물이 없으므로 두려워할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여래는 두려움 없는 힘을 지니므로 홀로 뛰어나 자유롭고 번뇌가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평등하게 행하므로 여래의 심행(心行)은 무너지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성현의 교훈을 요달하므로 여래는 언제나 온화한 성품을 나타내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자신의 행을 굳게 건립(建立)하므로 여래의 변재는 때를 따라 응대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경전을 강설하되 말로만 가르치지 않고 모든 중생들이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아 즐겁게 해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여래의 음성은 안에 머물지도 않고 바깥으로 넘치지도 않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경전의 법을 강설하되 허망하지 않아 중생들의 근기를 깨끗하고 맑게 하여 이끌고 교화하며, 일체의 대중이 도량에서 여래의 모습을 친견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부사의한 변화를 일으켜 감동시켜서 여래를 더욱 우러러보고 싶어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큰 성인의 몸은 마치 대덕무극수(大德無極樹)의 보배 기둥[寶柱] 같으므로 여래의 설법을 누구도 침범하거나 굽힐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여래의 몸은 평등을 깨달은 몸이므로 어디에도 비교하여 볼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여래의 몸은 사자 걸음과 같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어떠한 대중 속에서도 장애가 없으므로 여래가 노니는 것에는 허망하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지혜를 근본 삼아 몸소 수행하므로 여래의 음성은 곧 진리에서 우러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지혜를 으뜸 삼고 진리를 말하므로 여래의 눈은 널리 끝없는 경계를 바라보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성스러운 지혜를 닦아 마음이 밝게 통달하므로 여래가 설하는 말은 빛을 나타내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변재가 걸림없으므로 여래의 명성이 흘러 넘치는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더없는 바른 진리가 다함이 없으므로 여래의 복덕도 다함 없고 끝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모든 거리낌을 먼저 분별하여 요달하므로 아무도 여래를 당할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큰 갈고리[鉤鎖]를 지닌 장수같은 몸으로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갖춤과 함께 최상의 바라밀을 닦음으로써 여래는 항상 퇴전하지 않고 설법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모든 중생의 근기를 환히 꿰뚫어 여래는 무수한 법에 있어 성스러운 도사가 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모든 세간에 걸쳐 홀로 높은 도사이므로 수명이 또한 한량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법의 몸[法身]을 나타내므로 여래의 모습을 보거나 여래의 음성을 듣는 자라면 누구나 여래에게 친근하여 머리 조아리되 거짓이 섞여 있지 않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여래의 지혜에는 원한이 없으므로 본말(本末)을 탐구하기 위해 예배하는 중생들로 하여금 크게 안락케 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3세를 평등하게 깨달았으므로 여래의 강설은 어떤 중간이나 치우침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법의 근본에 수순하므로 여래는 모든 거리낌을 제거하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여래는 스승 없이 깨달았으므로 어떤 불선한 법이란 있을 수 없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요, 이미 모든 법을 자연스럽게 깨달았으므로 여래는 넓은 지혜를 얻었으니 그것이 바로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다. 이와 같이 여래는 모든 이치를 분별하여 깨닫고 큰 도를 남김없이 요달하여 공통되지 않은 모든 부처님 법을 다 얻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