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론(百字論)
제바보살(提婆菩薩) 지음
후위(後魏) 북인도(北印度)삼장 보리류지(菩提流支) 한역
김월운 번역
내 지금 총명과 예지를 갖추신 스승님께 귀의하노라.
스승님의 그 이름 제바이시니 크나큰 지혜를 지니셨도다.
스승님은 백 개의 글자로써 능히 진실한 법을 펼치시니 모든 삿된 견해 물리치고 법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셨도다.
‘무슨 까닭으로 이 논서를 짓는가?’라고 묻는다면, ‘온갖 법들은 제각기 스스로의 모습[自相]을 갖는다’는 아견(我見) 따위의 주장을 부수기 위함이라고 대답하겠다.
상가(僧佉 : 상캬)의 학자는 말한다.
“온갖 법은 하나의 모습[一切法一相]을 갖는다. 이것이 나의 ‘요긴한 맹서의 말[要誓說]’이다. 어떤 까닭으로 ‘온갖 법은 하나의 모습[一切法一相]’이라는 주장을 세우는가?. 모두가 하나[一]를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병이나 옷 따위의 물건이 모두 하나의 본성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온갖 법은 하나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라는 이치가 성립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內曰].
“하나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그대가 ‘요긴한 맹서의 말’로써 ‘하나의 모습이라는 주장’을 세운 것은 하나[一 : 같은 것]인가, 둘[二 : 다른 것]인가?. 만약에 이것도 하나라면 요긴한 맹서의 말만 있는 것이며, 하나의 모습이라는 주장은 없는 것이 된다. 이런 이치로 그대가 세운 하나라는 주장은 여기서 깨어진다.”
비사사(毘舍師 : 바이셰시카)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하나[一]의 이치’를 깨뜨린다고 하니, 나는 여기서 ‘다름[異]의 이치’를 세우겠다. 하나라는 주장의 허물[過]을 버리기 위함이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다름이라는 주장을 세운다면, 나는 오히려 하나라는 주장을 세우겠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에 그대가 ‘당한 근거[因] 없이 다름의 주장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타당한 근거 없이 하나라는 주장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비사사의 학자는 말한다.
“나는 반드시 다름이라는 주장을 세우겠다. 무슨 까닭인가?. 온갖 법은 차별이 있고 제각기 다른 모습[異相]을 갖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코끼리 낙타 사슴 말 따위의 종류가 그 모습이 제각기 다른 것과 같다. 이런 까닭으로 온갖 법의 모습은 모두 다르며, 온갖 법은 모두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다름의 이치가 성립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이것과 저것의 모습이 같지 않으므로, 다름의 이치가 성립된다고 말한다면, 모습의 다름에 있어서는 법은 모두 하나[一 :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세운 다름이라는 요긴한 맹서의 말이 무너졌다. 요긴한 맹서의 말이 무너졌기 때문에 다름이라는 법의 모습은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외도(外道))는 말한다.
“하나[一]와 다름[異]이라는 법의 모습[相]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나는이제 ‘있음[有]’이라는 법의 모습을 세우겠다. 법은 제각기 ‘있음의 모습’을 나타내므로, 있음의 모습과 이치[義]가 성립하는 줄 당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있음의 모습이 성립하기 때문에, 하나와 다름도 또한 성립하는 줄 당연히 알 수 있다. 하나도 있음의 모습이요, 다름도 있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지금 ‘있음’의 주장을 세우는 것은, 반드시 타당한 근거[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타당한 근거도 없이 있음의 주장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타당한 근거 없이도 없음[無] 주장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
“나는 ‘온갖 법의 있음’이라는 주장은 성립한다’고 간단하게 말하겠다. 무슨 까닭인가?. 드러나 보이는 온갖 법은 제각기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허공의 꽃’은 본체[體]의 모습이 없어서 얻을 수 없지만[不可得], 병이나 옷 따위의 물건은 눈앞에서 본체의 모습의 있음과 쓰임새[用]를 나타내기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 있음의 모습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으로 있음의 이치는 성립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있음의 주장을 세우는 것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있음이라는 그것은 모습이 없으므로, 이 두 가지(모습이 있음과 모습이 없음)가 함께 있다면 허물이 있다. 만약에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있음의 이치가 성립한다’고 한다면, 모습[相]을 나타내는 것이 있음이니, 있음도 또한 ‘이것(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있음의 이치(‘있음’의 모습이 따로 ‘있음’)’는 서로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에 있음이라는 것에는 모습이 없다고 말한다면, 요긴한 맹서의 말은 무너지게 된다. 있음[有]과 없음[無]이 함께 이루어진다면 ‘타당한 근거’가 되지 않으므로 ‘있음의 이치[義]’는 곧 무너진다.”
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내가 주장하는 있음을 깨뜨린다면, 그대는 곧 없음을 세우는 것이다. 없음의 이치가 성립된다면, 있음도 따라서 성립될 것이다. 비유하자면 세상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에 먼저 거친 것을 먹으면 맛난 것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가 나의 있음을 깨뜨린다면, 이것은 곧 없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없음을 세운다면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그대가 만약 타당한 근거 없이 없음을 세운다면, 나도 또한 타당한 근거 없이 있음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본체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더울 때의 불꽃과 같다. 스스로의 본체의 모습이 없는데 하물며 적은 물이라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온갖 법은 한 티끌의 모습조차도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주장하는 없음의 이치는 성립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세운 없음[無]은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타당한 근거가 없는가? 만약에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연히 ‘요긴한 맹서의 말’을 한 것이 된다. 만약에 타당한 근거가 있다고 말한다면, ‘요긴한 맹서의 말’은 곧 무너진다. 그대가 만약에 없음이라고 말한다면, 없음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외도는 말한다.
“온갖 법은 원인[因]이 있는데 그대가 있음과 없음 모두를 깨뜨리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무슨 까닭인가? 진흙, 실, 장포, 갈대 등이 있으므로 온갖 법은 모두 원인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원인은 없다. 그대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있음이다’라고 말하는데, 원인이 있다는 것은 곧 그것(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진흙 속에 먼저 병이 있다고 한다면 진흙 실 장포 따위는 모두 그것(병)의 원인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원인 속에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원인 속에 먼저 없었다고 한다면, 역시 그것의 원인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모래 속에 기름이 없으면 모래는 기름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다. 만약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하더라도 이치는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두 가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인이 있어도 역시 생하지 않고[不生], 원인이 없어도 역시 생하지 않는다. 만약에 원인 없이 생한다면, 원인을 다시 어디에 쓴다 하겠는가? 만약에 원인이 있어서 생한다면 요긴한 맹서의 말은 곧 무너진다. 그대는 앞에서 ‘온갖 법이 모두 원인이 있어서 생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외도는 말한다.
“눈앞에 병과 옷 따위의 쓰임[用]이 있으므로, 곧 온갖 법은 원인이 있어서 생한 것인 줄 안다. 모습이 갖추어져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는 ‘결과가 있기 때문에 원인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모습의 갖추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결과의 쓰임(用)이 있는 것을 보고서 원인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결과 역시 원인이 된다. 결과가 만약에 원인이라면, 곧 결과는 없는 것이 된다. 결과가 없기 때문에 원인도 없다. 그러므로 인과가 모두 무너진다. 만약에 의지 자재 시간 방위 등의 원인에서 생한다면 이것은 곧 모습이 갖추어진 원인이다. 또한 이것은 유위법이며, 유위이므로 곧 무상하다. 자재와 시간과 방위는 모습이 갖추어져서 있게 되므로, 곧 원인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외도는 말한다:”내가 말한 바는 진실하다. 예전의 모든 선인(仙人)들이 이와 같이 말했다. 이 법은 결정된 법이어서 끝내 다름이 없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그대는 ‘법이 그러하다[法爾]’고 하였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내가 말하는 바는 그대의 법과 다르다. 그대의 법에 있는 것이 내 법에는 없다. 내 법에 있는 것이 그대의 법에는 없다. 왜 그런가? 그대가 말하기를 ‘나의 법이 그렇다’고 하므로, 만약에 그대의 법이 그렇다면, 그것은 곧 자기만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만 인정하는 말은 곧 이치에 합당함이 없다. 이치에 합당함이 없다면 곧 아는 바가 없다. 만약에 아는 바가 있다면 곧 수승한 원인을 말할 것이다. 만약에 수승한 원인이 없이 ‘법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곧 아무런 이치가 없는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이것은 우리들의 법이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그대가 말하는 ‘우리들의 법’이라는 그 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의 법이 스스로 성립하지 않거늘, 어찌 다른 법을 성립시킬 수 있겠는가? 만약에 타당한 근거[因]가 없다면 끝내 주장을 이룰 수 없다. 자기만 옳다고 하는 그런 법은 바른 이치[正理]가 아니다.”
외도는 말한다:”원인 없이 생기는 법은 없다. 토끼의 뿔, 거북의 털, 석녀(石女)의 아이, 허공의 꽃 따위와 같이 없는 법은 끝내 얻을 수 없다. 인연이 있어야 생기기 때문이다. 기름을 짜려면 깨를 구하고 병(甁)을 만들려면 진흙을 구하는 것을 보듯이, 하나의 법이 원인이 되어서 여러 법을 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물은 제각기 원인이 있다. 진흙으로 병을 이루지만 방석의 원인이 되지는 않고, 실로서 방석을 이루지만 병의 원인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것들로써 다른 법을 구하여도 또한 그러하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그대는 ‘원인이 능히 생한다’고 하지만, 원인이 능히 생하지 못한다. 이 원인이 이루는 바가 있는가, 무너뜨리는 바가 있는가? 만약에 원인이 이루는 바가 있다면 그대를 이루고 또한 나를 이룰 것이다. 만약에 인연이 무너뜨리는 바가 있다면 나를 무너뜨리고 또한 그대를 무너뜨릴 것이다. 무엇으로 비유할까? 불이 능히 물건을 태우기 때문에 그대를 태우고 또한 나를 태우며, 만약에 저쪽이 뜨거우면 이쪽도 뜨거운 것과 같다. 다시 이 이치를 밝히리라. 만약에 원인이 있어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면 그대를 이루고 또한 나를 이룰 것이다. 원인이 비록 생하는 바가 있으나, 원인의 법이 모두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대는 ‘소리[聲]의 법이 항상하다’는 주장을 세워서 ‘요긴한 맹서의 말’을 삼는다.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몸이 없음[無身]을 근거로 한다. 어떤 비유를 하는가? 허공을 비유로 한다. 허공은 몸이 없이 항상하다. 이런 까닭으로 이름과 소리는 항상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이설(異說)을 말할 수 있다. 이름과 소리는 무상한 것이다. 왜 그러한가? 소리는 지어진 법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어떻게 비유할까? 병이 진흙과 돌림바퀴와 끈과 사람의 힘과 물 따위를 원인으로 병을 이루는데, 지음을 인연으로 생하기 때문에 병이 무상한 것과 같다. 소리가 입술과 이빨, 목구멍, 혀 따위를 연으로 하여 생하기 때문에 소리 역시 무상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원인이 이루는 바가 능히 있지는 않다. 그대가 진실을 말한다면 그 이치가 성립하겠지만, 헛된 근거를 허망하게 말한다면 이론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대가 요긴한 맹서의 말을 하는데, 요긴함이 있을 때는 맹서가 없고 맹서가 있을 때는 요긴함이 없다. 이 두 글자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요긴한 맹서는 곧 무너진다. 원인의 법이 생기기 전에는 원인이 되지 못하고, 멸하여도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이가 나기 전에는 생이라고 할 수 없고, 멸한 이후에도 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원인은 없다.”
외도는 말한다.:”그대는 비록 인과를 깨뜨리지만, 나는 ‘나[我]의 법이 있기 때문에, 인과가 성립한다’고 말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그대는 ‘나의 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무엇을 본체로 하는가? 만약에 지식(知識)을 나로 삼는다면 지식은 무상한 것이다. 병(甁)을 아는 지식이 멸하고서야 방석을 아는 지식이 생겨난다. 만약에 지식이 나[我]가 아니라면 나는 지각이 없다. 나가 지각이 없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 이러한 나는 본체도 모습도 없다. 만약에 나와 지각이 합하기 때문에 나에게 지각이 있다고 말한다면, 지각은 나와 합하기 때문에 지각은 지각이 아니다.”
외도는 말한다:”나는 있다. 왜인가? 병과 옷 등의 물건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을 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하나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병과 있음은 하나이다. 다르지 않기 때문에 하나가 있다. 만약에 병과 병 아닌 것’에 하나가 있다면 이것(병 아닌 것)도 역시 병이다. 그렇다면 곧 여러 병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병 아닌 것에도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병이 없는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
“하나의 병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이기 때문에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여기서 ‘다름’의 주장을 세우고자 한다. 하나의 허물을 버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가 말하는 다름은 없는 것이다. 병의 존재[有]가 없으면 병도 없다. 비유하자면 다른 비구 바라문이라고 할 때 비구 바라문은 여기에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병이 존재[有]와 다르다면 곧 이것은 없는 것이다. 마치 칼과 칼집은 그 존재의 다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병에도 하나와 다름이 있다면 응당 볼 수 있어야겠지만 지금 하나와 다름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름이라는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외도는 말한다.
“하나와 다름이 비록 무너졌지만 현실의 눈앞에는 병이 있음을 본다. 비유하자면 허공의 꽃은 존재가 없기 때문에 볼 수 없지만 병은 눈앞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병의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보는 것이 아닌가? 그대가 지금 본다고 말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인가, 식별로 보는 것인가? 만약에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죽은 사람도 눈이 있으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식별로 보는 것이라면 맹인에게도 식별이 있으므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인식기관과 식별작용이 각각 볼 수 없다면 둘이 화합하더라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한 맹인이 볼 수 없다면 무리의 맹인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외도는 말한다.
” 병은 있다. 보이는 실체[色]가 있으므로 병은 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는 보이는 실체가 있으므로 병이 있다고 말한다. 보이는 실체와 병은 하나[一]인가 다름인가? 만약에 병과 보이는 실체가 같은 것이라면 다른 보이는 실체를 볼 때도 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에 보이는 실체와 병이 다른 것이라면 병은 볼 수가 없는 것[非可見]이다. 그러므로 병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볼 수 있는 것을 병이라고 한다면 병이 가려진 곳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 없을 때에는 병은 병이 아닐 것이다. 만약에 보이는 실체와 병이 하나라면 병이 부서질 때에 다른 보이는 실체도 무너질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나의 법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보이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보이지 않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 하면 나의 법은 항상 있기 때문이다. 원인 중에는 결과가 있다. 미세하여 나타나지 않지만 이미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커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과가 있는 줄 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이미 있다면 따로 지을 필요가 없다. 진흙 속에 병이 있다면 도공이 필요 없는 것과 같다. 실 속에 비단이 이미 있다면 베 짜는 사람이 필요 없는 것과 같다. 병과 비단은 장인의 공을 기다려서야 이루어지므로 원인 안에 결과가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원인 안에 결과가 이미 있다면 미래의 법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미래의 법이 없다면 곧 생멸이 없다. 생멸이 없다면 선악도 없다. 선악이 없다면 업을 짓는 일도 없고 죄와 복의 과보도 없다. 그렇다면 일체의 법은 없는 것이다. 또 만약 원인 중에 미세한 과보가 이미 있고 거친 과보는 아직 없다고 한다면 이 거친 과보는 앞에는 없다가 나중에는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생멸이 되며 그대가 앞에서 말한 바와 다르다. 또 만약 미세한 법이 이미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생기는 법이 아니다. 생기는 법이 아니라면 삼세의 법칙이 무너지는 것이다. 삼세가 만약 없다면 일체의 법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원인 가운데 결과가 이미 있다면 우유 속에 이미 낙(酪)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앞에는 없다가 나중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지어진 법인 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이 원인 중에 이미 있다면 다시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원인 가운데 결과가 이미 있다’고 말하는 것이 허물이 있다면, 이제는 ‘원인 가운데는 없다가 나중에 결과가 생긴다’고 말하겠다. 그렇게 되면 생멸이 없는 것을 떠난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생함과 멸함이 있기 때문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생함이 없거나 생함이 있거나 일시(一時)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병이 진흙 가운데 있다면 돌림틀, 끈, 사람의 노력 등이 없이도 병이 이루어질 것이다. 만약에 진흙 가운데에 병이 없다면 거북의 털로써 옷감을 짜서 쓸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있어도 생함은 없고 원인 가운데에 결과가 없어도 생함은 없다. 그렇다면 몸을 받는 것[受身]은 스스로 생함[自生]인가, 다른 것에서 생함[他生]인가? 두 가지 다 허물이 있다. 만약에 스스로 생한다면 생한다는 말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생하는 자생의 몸은 없는 것이다. 만약에 스스로 생할 수 없다면 어찌 다른 것에서 생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자기와 남에게서 생한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허물이 있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생함이 없다.”
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몸이 없다면 생함[生]과 머무름[住]과 멸함[滅]이라는 유위의 세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없다. 만약에 유위가 있다면 무위도 있다. 유위와 무위가 성립한다면 온갖 법도 성립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유위의 법은 없다. 그대가 말하는 유위의 세 가지 모습은 차례로 생하는 것인가, 일시에 생하는 것인가? 차례로 생한다고 하여도 허물이 있고 일시에 생한다고 하여도 허물이 있다. 만약에 차례로 생한다고 하면 생할 때에는 머무름과 멸함이 없고 머무를 때에는 생함과 멸함이 없고 멸할 때에는 생함과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례로 생함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약 생함의 머무름이 있다면 생함 자체도 없는 데 머무름이 어디에 머무르겠는가? 생함의 본체가 스스로 없는 데 머무름이 어찌 있겠는가? 생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다면 석녀의 아이와 같다. 이것의 없음의 법이다. 만약에 생함과 머무름이 있었는데 멸에 의해 없어졌다고 한다면 생함과 머무름이 이미 없는 데 멸이 무엇을 없앨 수 있겠는가? 토끼의 뿔을 부순다고할 때에 부순다는 말은 비어있는 것과 같다.”
외도는 말한다.
“그대는 ‘생함과 머무름과 멸함은 차례로 얻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유위의 모습은 마치 두 머리와 세 팔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유위의 세 가지 모습도 얻을 수 없다. 유의의 세 가지 모습이 일시에 있다 하여도 얻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에 생함 가운데에 멸함이 있다면 생함은 곧 생함이 아니다. 멸함 가운데에 생함이 있다면 멸함은 곧 멸함이 아니다. 머무름 가운데에 있는 생함과 멸함을 파하는 것도 이와 같다. 생함과 멸함이 서로 다른데 어찌 일시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유위의 세 가지 모습은 차례로 생할 수도 없고 일시에 생할 수도 없다. 또 그대가 말하는 세 가지 모습이란 유위로써 모습을 짓는 것인가, 무위로써 모습을 짓는 것인가? 만약에 유위로써 모습을 짓는다면 생함도 유위이니 세 가지 모습이 있을 것이다. 머무름과 멸함도 또한 그러하다. 이와 같은 모습은 끝없이 많다. 만약에 모습이 끝없이 많다면 그대는 유위의 법이 다만 세 가지 모습만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요긴한 맹서의 말’이 무너진다. 만약에 모습이 무위를 나타낸다면 어찌 유위의 상으로써 무위의 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외도는 말한다.
“그대가 만약에 유위의 모습을 짓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무위의 모습을 지어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무위는 온갖 곳에 두루하여 방소(方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위에서 모습을 지어야 한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무위는 방소가 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묻는다. 허공은 방소가 있는가, 방소가 없는가? 허공이 만약에 방소가 있다면 허공은 응당 그대의 몸 곁에 있을 것이요, 그대의 몸은 허공의 곁에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부분이 있으며 부분이 있다면 끝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허공에 방소가 없다고 한다면 그대의 몸이 허공에 꽉 찼는가, 허공이 그대의 몸에 꽉 찼는가? 만약에 허공이 그대의 몸에 꽉 차고 그대의 몸에 허공이 꽉 찬다면 허공은 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이나 옷, 방석 등이 끝이 있기 때문에무상한 것과 같다. 허공도 끝이 있다면 그것도 무상하다. 그리고 항상한 원인이라야 항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만약에 원인이 무상하다면 결과가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진흙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병은 진흙이 무상하기 때문에 병도 또한 무상한 것과 같다. 방소가 있으므로 무상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대가 말하는 바 항상함이란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항상하기도 하고 원인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기도 하다. 둘 다 허물이 있다. 만약에 원인을 따라서 생하는 것이 항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병이나 옷 등의 물건과 같이 원인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모두 무상한 것이다. 그대가 만약에 원인 없이 생겨난 법을 항상하다고 한다면 나는 원인 없이 생겨난 법을 무상하다고 말한다. 만약에 원인 없이 생겨난 법이 반드시 있고 그것을 항상하다고 한다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치에 어긋난 말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분명히 그 타당한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
“원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작인(作因)과 요인(了因)이다. 작인으로 생겨난 것은 무상하다. 병이나 옷 등의 물건은 작인에서 생겼기 때문에 무상한 것과 같다. 요인에서 생긴 법은 항상하다. 등잔불이 어둠 속의 물건을 비출 때에 어둠이 사라지고 물건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지어진 법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하다. 그러므로 작인에서 생겨난 것은 무상하고 요인에서 생겨난 것은 항상하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병 따위의 물건은 눈앞에 보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무위는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무위는 본체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없는 법이다. 있음을 버리고 없음도 버리고 둘을 모두 버림으로써 아견을 능히 끊을 수 있고 아소의 견해를 능히 끊어서 열반을 얻게 된다. 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여여한 지혜의 경계에서 일체법의 공함을 본다면 식(識)은 취할 바가 없기 때문에 심식(心識)이 멸하고 종자도 멸한다.”
외도는 말한다.
“만약에 유위의 법이 본체와 형상이 없다면 무엇을 일러서 대상이 있다고 하는가?”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꿈과 같은 것이다. 세속의 법은 모두 꿈과 같다. 꿈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또한 원인이 없지도 않다. 마찬가지로 세속의 법은 모습이 있지도 않으며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며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마치 집과 같으니 만약에 본체와 형상이 있다면 집을 짓기 전에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없다고 한다면 집은 아예 볼 수 없을 것이다. 대들보와 서까래와 주춧돌과 벽 등에 의지하여 쓰임새를 나타내고 있음으로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법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꿈과 같은 것이다.”
외도는 말한다.
“만일 온갖 법이 꿈과 같다면 늙은이나 어린이나 젊은이가 병을 잡을 때에 어째서 방석 등을 잡을 수 없는가? 방석을 잡을 때에 어째서 병 등을 잡을 수 없는가? 현실에서 보건대 병을 잡을 때에 다른 물건을 잡을 수는 없다. 이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꿈과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이름은 본체가 아니다. 만약에 이름이 본체라면 병이라는 이름이 있을 때에 우유나 낙(酪) 등을 담을 수 있는 작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다만 병이라고 말함으로써 빈 이름만으로 쓰임새가 있는 것이라면 도공이 병을 만들거나 병을 시장에 내다 팔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몸에는 세 가지 이름이 있는 것과 같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것이다. 몸이라는 이름을 취하면 세 가지에 통한다. 그러나 이름으로써 이름을 구하면 세 가지가 서로 포섭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름과 본체는 다른 것이다. 병에 소리가 있다면 들을 수 있고 색이 있다면 볼 수가 있다. 병의 냄새와 촉감도 또한 그러하다. 그렇다면 여러 개의 병이 있게 된다. 또 병에는 주둥이 바닥, 배가 있다. 그 이름이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여러 개의 병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관찰하건대 이름이란 빈 것이니 실체가 없는 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씀하셨다.”
세간에는 거짓된 이름[假名]이 있나니
모습이란 더울 때의 불꽃과 같고
음성은 메아리와 같나니
세간의 모습은 꿈과 같도다.
외도는 말한다.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이 있다는 것을 파하지만 만약에 법이 있다고 말하면 그대의 말이 무너질 것이다.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없다는 것을 어찌 파할 수 있겠는가? ”
불교의 학자는 말한다.
“그대의 법이 본체와 형상이 있다고 하므로 내가 파하였는데 만약 본체가 없다면 내가 파할 것이 없다. 게송으로 말한다.”
크신 님의 평등한 모습
마음에는 물든 바가 없고
또한 물들지 않음도 없으니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구나.
본체와 형상이 있는 것들은
애욕이 있거나 애욕을 끊어야 하는데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성취하면
이런 사견(邪見)을 버리게 되리.
사견의 얽매임을 풀어버리고
온갖 더러움을 모두 없애어
3독(毒)의 상처를 모두 씻어서
바른 길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리.
이와 같은 법을 잘 관찰하여서
깊은 마음으로 믿음과 공경심을 내어
진심으로 진실한 법을 구하여
세 가지 존재[三有]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하리.
유와 무를 취하지 않고
적멸의 길 깨달으면
일체의 법은 같음이 없고
그러한 법은 또한 다름이 없다.
무엇이 존재의 참모습인가
원인의 법에는 본체가 없나니
모습 없이 이루어져 있게 된다면
이러한 법은 옳지 못하다.
그대의 법이 성립되지 않는 건
이와 같이 타당한 이유가 없는 탓이니
그대가 말하는 본체와 형상
그것이 하나라면 곧 허물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 본체가 없고
다섯 가지 감관은 대상을 취하지 않으리
물질적인 대상은 이름이 있어
볼 수는 있지만 본체는 없다.
있음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 법은 생함이 없나니
유위의 법은 본체가 없고
이와 같이 방소도 없다.
꿈과 같아 다름이 없고
모습도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백자론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