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도혜품(道慧品)

08. 도혜품(道慧品)

부처님께서는 다시 총교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보살의 업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나니, 왜냐 하면 마치 저 중생들의 탐욕과 다툼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이 업을 닦고 공을 쌓고 덕을 모으며 뭇 행을 모아 모든 법문에 도달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노라.

족성자야, 가령 항하사 같은 모든 불세계에 가득한 중생들로 하여금 다 성문·연각의 도를 성취하게 하고, 또 그러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다 착한 업을 성립하게 할지라도 보살이 발심하는 공훈이 그보다 백 배, 천 배, 만 배, 억만 배나 뛰어나고 도저히 비유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스스로 그 본 성품의 습기와 진욕(塵欲)을 끊음에 있어서 성문·연각은 인연의 화합에 머물고 보살 대사는 중생들이 인연의 화합에 머무는 그 모든 번뇌를 깨끗이 제거하였기 때문이니라.

족성자야, 모든 중생들이 지은 업과 성문·연각이 세운 덕의 근본도 보살의 업에 비할 수 없나니, 보살의 업은 가장 높고 뛰어나며 견줄 데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어리석은 범부는 뒤바뀐 생각과 순조롭지 못한 업을 따르고, 성문·연각은 인연의 습기를 따르지만, 보살 대사는 뒤바뀜이 없으며 공훈이 한량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 대사는 중생보다 뛰어나고 저 성문·연각을 휠씬 초월하느니라.”

때에 총교왕보살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며 착한 마음이 자라났다. 그는 전에 없는 일이라고 부처님의 연설을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여래께서 이제 보살의 장엄과 보살의 광명과 보살의 대비와 보살의 화업(化業)을 널리 설하셨습니다. 원컨대 여래 지진께옵서 거듭 은혜를 드리우셔서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소서. 여래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시며, 그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또 어떤 것이고, 그 일은 어떠한 서응(瑞應)이고, 어느 곳에 머무르는 것이며, 부처님들께서 지으시는 업은 어떤 것입니까?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지어진 업을 다 아시고 또 널리 보시고 환히 통달하셨으니, 저희들을 위해 분별하여 말씀하옵소서.”

부처님께서는 총교왕보살에게 대답하셨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여래는 너희들을 위해 여래의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여래가 짓는 업을 모두 다 선설하리라.

족성자야, 알아 두라. 불세존은 일부러 대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받들어 행하는 것도 아니나니, 왜냐 하면 불세존은 언제나 대비를 더하여 중생을 버리지 않고 무수한 겁으로부터 많은 공덕을 쌓아 이미 성취하였기 때문이니라. 이런 까닭에 물러나지 않고 중생을 버리지 않으니 이를 여래의 크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라 일컫는 것이며, 그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한량이 없고 일컬을 수 없으며 감당할 수 없고 용납할 곳도 없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왜냐 하면 여래는 도를 얻어 항상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을 살피기 때문이니, 그 불도와 같이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도 그와 같다.

또 무엇을 일러 여래가 얻은 불도라 하는가. 근본이 없고 머묾이 없이 큰 도를 이룩한 것이다. 그럼 무엇을 일러 근본에 머문다고 하는가. 중생들이 이미 몸의 근본부터 헤아리기 시작하여 성실하지 못한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가 수시로 도에 합치되어 이루는 것을 근본이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고 이름한다. 이로 말미암아 여래는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룩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모든 중생들을 머묾도 없고 근본도 없다고 통달해 알며, 그 중생들의 소처를 알아 이러한 이치를 널리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나니, 이 때문에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항상 크게 가여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족성자야, 도(道)란 것은 고요하고도 깨끗하나니, 고요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깨끗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안[內]이 고요하고 바깥이 깨끗함이라. 왜냐 하면 그 눈[眼]은 공(空)하므로 내가 없다고 관찰하며 또한 아무런 느낌이 없고, 귀·코·입·몸·마음도 공할 뿐이어서 내가 없다고 관찰하며 느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리고 이 눈이 공하여 모든 식별(識別)을 제거함에 따라 빛깔에 집착되지 않는 것을 고요하다 하고, 또 귀·코·입·몸·뜻도 공하여 모든 식별을 제거함에 따라 여러 법들에 부림을 당하지 않는 것을 깨끗하다고 한다. 중생들은 이 고요하고도 깨끗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여래가 이것을 중생들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하여 대비를 베푸느니라.

또 족성자야, 도(道)란 것은 본래 깨끗하고 또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니, 깨끗하다는 것은 마음이 본래 깨끗함을 말한다. 무엇을 가리켜 본래 깨끗하고도 또한 찬란하게 빛난다고 하는가. 깨끗함이란 아무런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범하는 것도 없으며 허공과 같음이니, 공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에 공과 아주 똑같으며, 허공과 똑같은 까닭에 마침내 허공과 합동되어 평등을 나타냄이라. 그러므로 본래 깨끗하고 찬란하게 빛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리 석은 범부들은 그 진실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객진번뇌에 물들고 마니, 나는 그들에게 이 본래 깨끗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알리고자 하니,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야, 도(道)란 것은 정진도 없고 정진 아닌 것도 없느니라. 무엇을 가리켜 정진도 없고 정진 아닌 것도 없는 것이라 하는가. 모든 법을 포섭하므로 정진이 없다 하며, 모든 법을 이미 받아 익혔으므로 여래는 그 도에 정진도 없고 정진 아닌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혼탁한 흐름을 건넜기 때문이니라.

뿐만 아니라 여래는 저 혼탁한 흐름에서 이것저것을 보지 않으므로 이것저것에서 벗어났으며, 또 여래 지진은 모든 법을 다 알았으므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니, 이 때문에 여래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 정진도 없고 정진 아님도 없는 바로 이것을 어리석은 범부들은 깨닫지 못하기에 나는 이제 그 뜻을 선포하여 알게 하려는 것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족성자야, 또 도(道)라는 것은 생각[想]도 없고 인연도 없는 것이니, 왜 생각도 없고 인연도 없느냐 하면, 그 눈이 식별[識]에 대하여 얻는 것이 없으므로 생각이 없고, 모든 색을 보지 않으므로 인연이 없으며, 귀·코·입·몸·뜻도 다 그와 같아서 얻는 것이 없고 생각이 없으며, 모든 법을 보지 않으므로 인연이 없다는 것이다. 이 생각 없고 인연 없는 것이 바로 성현의 행이니, 이른바 성현의 행은 그 3계(界)에서 행하는 바가 없는 것이 곧 성현의 행이다. 행함이 없는 것이 성현의 행인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 성현의 행을 알지 못하므로 나 이제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분별하여 깨닫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항상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야, 도(道)란 것은 과거가 없고 미래와 현재가 없으니 3세(世)에 똑같이 세 가지의 경우를 끊나니, 이른바 그 세 가지란 과거에 대하여 마음이 해이하거나 산란하지 않고, 미래의 지혜에 물러나는 생각을 하지 않고, 현재의 일에서 마음과 뜻과 식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또 과거를 소급하여 기억하지 않고 미래를 예측하여 생각하지 않고 현재를 희롱하지 않는 것이니, 이 3세에 평등하면 세 가지 경우가 자연히 청정하거늘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성현의 행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분별하여 깨닫게 하리라.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은 것이다.

또 족성자야, 도(道)란 것은 몸이 없고 수(數)가 없으며, 눈의 식별[眼識]이 없고, 귀·코·입·몸·뜻의 식별도 없다. 이것이 곧 함이 없고[無爲] 수가 없음이니, 이른바 함이 없음은 일어남이 없고 무너짐이 없으며 또한 어떠한 처소도 없는 것이니, 이를 이르되 세 모양[三相]을 떠났다고 하며, 함이 없음이라 한다. 그 함이 없음과 같이 함이 있음[有爲]도 다 그러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은 다 자연 그대로여서 아무것도 없으며, 만약 아무것도 없다면 이것저것이 다 하나요, 둘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몸이 없고 또 함이 없다 하거늘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분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리라.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은 것이다.

또 족성자야, 도(道)란 것은 파괴할 수 없는 자취[無所壞跡]이니, 무엇을 자취라 하고 무엇을 파괴할 수 없다 하는가. 근본 없음이 자취라면 머무는 바 없는 것을 파괴할 수 없음이라고 한다. 계(界)가 자취라면 나 없는 것이 파괴할 수 없음이요, 본래의 경지[本際]가 자취라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파괴할 수 없음이요, 공이 자취라면 얻을 것 없는 것이 파괴할 수 없음이요, 형상 없음[無相]이 자취라면 기억 없는 것이 파괴할 수 없음이요, 원 없음[無願]이 자취라면 처소 없는 것이 파괴할 수 없음이요, 열반이 자취라면 헐[毁] 수 없는 것이 파괴할 수 없음인 것이다. 이것이 파괴할 수 없는 자취인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하므로 내가 이를 분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리니,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야, 도(道)란 것은 몸을 따르지 않고서 바른 깨달음을 이룩함이고, 마음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왜냐 하면 몸이란 어리석은 것이어서 마치 풀·나무·장벽·기와·돌·그림자와 같으며, 마음이란 요술[幻]과 같기 때문이다. 그 몸과 마음이 이러한 줄 깨달으면 이를 도(道)라 하며, 다만 그 언사(言辭)를 빌려 도의 흥성(興盛)을 말할 뿐이다. 또 그 도(道)란 것은 언사가 없는 한편 몸과 마음이나 법과 법 아닌 것이 없고, 나아가서는 도와 도 아닌 것도 없고 성실과 거짓도 없나니, 왜냐 하면 도(道)란 것은 말이 없으므로 모든 법에 있어서 말할 것이 없고 아무런 처소가 없으며, 도(道)란 그 언사까지도 말할 수 없어서 마치 허공이 처소 없고 머묾 없고 말 없음과 같은 것이다. 도(道)도 이와 같아서 머묾 없고 문사(文辭)가 없으니, 이와 같이 그 모든 법에 진실로 도를 구하려 하면 문사도 없고 그 법 또한 말이 없다. 만약 모든 법의 말 없음을 깨닫는다면 이것이 곧 모든 법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하므로 내가 나이를 분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리니, 이 때문에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항상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여, 도(道)란 것은 가질 수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다. 무엇을 가리켜 가질 수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다고 하는가. 이른바 눈의 식별[眼識]을 끊어서 색을 느끼지 않으며 또한 얻는 바도 없는 것이다. 귀·코·몸·입·뜻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식별을 끊어 느끼지 않고 얻는 바도 없는 것이다. 모든 법에 얻는 것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의지할 곳 없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는 이 느낌 없고 의지할 곳 없는 그것으로써 도를 생각하여 가장 바른 깨달음을 이룩하였다. 눈이 색을 느끼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므로 식별이 따르거나 물러나지 않고 또 귀는 소리에, 코는 냄새에, 입은 맛에, 몸은 감촉에, 뜻은 법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식별이 따르거나 물러나지 않나니, 이미 식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중생들 마음이 머무는 곳을 분별할 수 있다. 중생들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란 무엇인가 하면, 중생들 마음이 머무는 곳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색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소처요, 둘째는 통양(痛癢)의 소처요, 셋째는 생각[思想]의 소처요, 넷째는 생사의 소처가 그것이다. 그러한 곳에 머물지 말아야 하므로 여래는 그 머물지 않는 경지를 중생에게 밝혀 주지만 어리석은 범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분별하여 깨닫게 하려 하니, 이 때문에 여래는 중생들에게 항상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여, 도(道)란 것은 공한 것이다. 이른바 공이란 것은 도가 공하므로 모든 법이 다 공하나니, 여래가 거기에서 근본 없는 공을 통달하고 모든 법을 이해하고서 바른 깨달음에 이르렀고, 또 공이란 그 자체도 다시 공한 것임을 알아 마침내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이 한 가지 지혜로써 공의 일을 분별하니 그 모두는 다름이 없다. 다름이 없다는 것은 그 공과 도의 지혜가 다름이 없음이다. 이미 다름없을진대 법이 또한 다름없고, 법이 다름없을진대 아무런 명칭도 없고 모양[相]도 없고 끝도 없고 행도 없고 유포할 것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의지하거나 느낀다는 것은 어디로 귀취(歸趣)하는 것이고 진리가 아니며, 또 어떤 법이 있어서 색을 얻는 것이 아니다. 공이란 허공과 같으니, 허공이란 말이 없으므로 공하고, 공 또한 말 없는 까닭에 역시 공하나니, 모든 법의 소위가 이러한 까닭에 명칭이 없다 함은 명칭을 말할 수 없음이요, 이와 같이 명칭을 말할 수 없을진대 처소가 없고, 처소가 없을진대 처소 없다는 그 말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설법이 이미 이 법을 설하면 저 법을 계교하는 것이어서 말은 가르침이 되지 않는 한편 가르치지 않는 것도 아니니, 모든 법이 다 그러하며, 생겨남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바르거나 그릇됨이 없다. 여래는 생겨남이 없으니 근본 없음을 깨달은 분이다. 여래는 모든 것을 알고 해탈한 이라 하지만 해탈도 아니고 속박도 아니니, 이것이 바로 평등인데 저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분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 하니, 이 때문에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항상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여, 도(道)란 것은 허공처럼 평등하니, 그 허공이란 것은 평등도 없고 그릇됨도 없으며, 도 역시 이와 같아 평등도 없고 그릇됨도 없다. 만약 그 평등을 계교한다면 도를 이룩할 수 없기 때문에 도는 허공처럼 평등도 없고 그릇됨도 없기 마련이다. 여래는 이 평등 없고 그릇됨 없는 것으로써 모든 법의 다 근본 없음을 알아 가장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또 모든 법에 있어서 바르다고 느끼거나 그릇되다고 느끼지 않나니, 그 법수(法數)와 같이 혜수(慧數)도 그러하므로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을 이어받아야 한다.

이른바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이란 무엇일까. 법이 만약 느끼는 것이 있다면 함이 있는[有爲] 법이므로 이러한 법은 함이 없는 것에 돌아가야 하나니, 이 아무것도 없음이야말로 곧 주장 없는 것인 동시에 이것으로 자연을 얻게 되며, 나아가서는 그 자연까지 여의어야만 흔들림이 없고 진보와 퇴보가 없나니, 이 진보도 퇴보도 없는 그것이 바로 진행(進行)이고 또 함이 있는 것을 제거함이라. 여래의 설법은 이러한 함이 있는 행을 제거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이것을 분별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려 하니,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여, 도(道)란 것은 참된 자취[眞跡]와 같다. 어떤 것이 참된 자취냐 하면 그 도가 근본 없고 물러나지 않는 것처럼 색 또한 그러하며, 또 느낌과 생각과 결합과 식별 또한 그와 같이 근본 없고 물러나지 않으며, 또 땅·물·불·바람의 그 요소도 그와 같이 근본 없고 물러나지 않는다. 또 그 도와 같이 눈의 요소와 색의 요소, 눈의 식별의 요소와 귀·코·몸·입·뜻·법의 모든 요소들이 근본 없고 물러나지 않나니, 모든 법이 다 끊어지므로 3계의 온갖 느낌을 알게 된다.

여래는 거기에서 진리를 통하여 바른 깨달음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그 깨달음이 뒤바뀜을 따르지 않고, 또 과거와 같이 미래·현재도 그러하여 근본이 없고 물러나지 않는다. 그 근본이란 나는[生] 것이 없고 근본이 아닌 다른 것도 다함이 없으므로 오직 그 중도(中道)의 담박한 것을 참된 자취라 한다. 또 한 가지 일과 같이 모든 일이 그러하고, 모든 일과 같이 한 가지 일도 그러하며, 한 가지 일과 같이 모든 것들이 또한 그러하며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을 진리라 하는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하기에 나는 그들을 깨우쳐 이것을 분별하여 알게 하고자 하니,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여, 도(道)란 것은 방[室]에 들어가는 것이면서 방 없는 데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방이고 어떤 것이 방 없는 것인가 하면, 모든 덕과 착한 법을 수행하는 것은 방이라 하고, 모든 법에 얻는 것이 없음을 방 없는 것이라 한다. 방이 없으므로 마음이 머물 처소가 없으니 이것을 방 없는 것이라 한다. 또 무상(無相) 삼매로부터 해탈 삼매에 이르는 것을 방 없는 것이라 하며, 어떤 사물에 대하여 관찰하고 생각하고 헤아리고 이름 부르는 것을 방 있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에 식별[識]이 없는 것을 방 없는 것이라 하며, 함이 있는[有爲] 법으로 관찰하는 것을 방 있는 것이라 하고 함이 없는 법으로 관찰하는 것을 방 없는 것이라 한다. 방 없는 데에 들어가는 것을 도(道)라 하는데,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하므로 나는 그들을 깨우쳐 이것을 분별하게 하려 하니,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여, 도(道)란 것은 번뇌[漏]가 없고 느낌도 없는 것이다. 어떤 것이 번뇌가 없고 느낌도 없는 것인가. 네 가지 번뇌를 여의는 것이 번뇌가 없는 것이니, 첫째는 애욕의 번뇌, 둘째는 존재[有]의 번뇌, 셋째는 어리석음의 번뇌, 넷째는 소견의 번뇌니, 이 네 가지 번뇌를 여의어야만 한다. 이른바 느낌이 없는 것이란, 네 가지 일의 느낌을 여의는 것이니, 첫째는 애욕에 대한 느낌, 둘째는 존재에 대한 느낌, 셋째는 소견에 대한 느낌, 넷째는 계율에 의지하는 느낌이다. 이 네 가지가 느낌을 여의는 것이니라.

이 네 가지 번뇌와 네 가지 느낌은 다 무명에 돌아가고 은애(恩愛)에 얽매이고 마음에 집착되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여래는 이 마음의 느낌을 제거하되 마음에서 자라나는 근본을 먼저 청정하게 한 뒤에 모든 중생들까지 청정에 돌아가게 한다. 그 마음의 청정이란 아무런 상념(想念)이 없고 상념이 없으면 뒤바뀜을 벗어나며, 나아가서는 그 상념이 진리를 잘 따르므로 무명에 머물지 않고, 무명에 머물지 않는다면 다시 12연기에 머물지 않으며, 12연기에 머물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을 것이요,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고요한[寂然] 것이다. 그 고요함이란 무(無)의 이치요, 무의 이치란 제1의 이치이며, 그 제1의 이치는 곧 구경(究竟)의 이치요, 구경의 이치는 사람이 없는 이치요[無人義], 사람이 없는 이치란 얻을 것이 없는 이치며, 얻을 것이 없는 이치가 바로 여래의 도(道)이다. 이는 또 12연기가 다된 것이므로 12연기를 깨달으면 법의 이치이고, 그 법의 이치를 바로 연기를 환히 보는 것이라 한다. 연기를 본다면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본다면 마침내 여래를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야말로 근본이 없음이니, 본말(本末)을 다하였는데 무슨 상념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상념에 인연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상념에 인연 없음이라 하나니, 이렇게 관찰하는 자라야 곧 여래의 바른 깨달음을 알 수 있고 이 상법(像法)에 따라 널리 평등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은 치우침과 그릇됨이 없으며, 이와 같이 평등하고 온갖 번뇌가 없으면 또한 느낌도 없는 것이어늘 어리석은 범부들은 알지 못하므로 나는 그들을 깨우쳐 이것을 분별하게 하려 하니, 이 때문에 여래는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는 것이다.

또 족성자여, 도(道)란 것은 청정하여 때[垢]가 없고 물들지 않는다. 어떤 것이 청정하고 때 없고 물들지 않는 것이냐 하면, 공하므로 청정하고, 형상 없으므로[無相] 때를 여의고, 원 없으므로[無願] 물들지 않는 것이다. 생기지 않으므로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으므로 때를 여의고, 일어나지 않으므로 물듦이 없다. 본성(本性) 그대로이기 때문에 청정하고 해탈하기 때문에 물들지 않으며, 방일하지 않으므로 청정하고 가볍거나 헛되지 않으므로 때를 여의고 고요하므로 물들지 않는 것이다. 근본이 없으므로 청정하고, 법계를 밝게 비추되 본제(本際)에 따르므로 물들지 않으며, 허공 같으므로 청정하고 텅 비었으므로 때가 없고 황홀하므로 물들지 않으며, 안[內]을 청정케 하므로 바깥도 청정함을 때가 없다고 하고 안팎 행이 없으므로 때가 없다고 하고 모든 감각 기관[入]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물듦이 없다고 하며, 과거가 청정하므로 미래도 청정하고 아무것도 일으키지 않으므로 때가 없고 현재를 분별하여 법계에 머무르되 물듦이 없나니, 이것을 가리켜 청정하고 때 없고 물듦이 없으면서 평등하게 한 가지 법으로써 고요한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또 그 고요함이란 담박한 것이어서 담박하고도 고요한 것을 인화(仁和)라 한다.

족성자야, 마치 저 허공처럼 도(道)가 그러하고 그 도와 같이 법도 그러하고 모든 법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며 또 중생과 같이 국토도 그러하고 그 국토와 같이 열반도 그러하며, 열반과 같이 모든 법을 볼 때 마침내 고요하여 모든 것이 이미 끝나는 한편 온갖 부류와 무리에 있어서도 그 부류와 무리 지음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고 때 없고 물듦이 없는 것이다. 여래는 또 모든 색과 형상에 대하여 일체의 법에서 색과 형상이 없음을 환히 알아 드디어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였으며, 모든 중생계에는 청정도 없고 더러움도 없음을 살펴보시니, 이것이 바로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여래께서 곧 선한 방편으로 범천(梵天)들을 감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권청을 기다리지 않고 법 바퀴를 굴리시니, 때마침 6만 8천의 범천들이 그 천궁(天宮)으로부터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는 바라나의 녹야원에 이르러 세존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고 세존께 법 바퀴 굴리시기를 권청하면서 이와 같이 말하였다.

“큰 성인께서는 경도(經道)를 널리 설해 주소서. 설해 주신다면 저희들이 많은 구제를 받겠나이다.”

그리고 범천들은 게송을 읊어 찬탄하였다.

정말 모든 법으로 하여금
적연하면서 담박하고
청정하고도 선명하며
때 없고 물듦 없으며

이미 얻을 것 없고
음성도 지음도 없다면
도(道)의 지혜로써만
가장 수승함을 알 수 있으리.





그 무수한 겁에서
항상 자비를 베푸시고
한량없는 공덕 닦아
오랫동안 부지런히 행하셨으니

이 모두가 미혹하여
오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큰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중생을
개화하시려는 때문이네.





저 많은 중생들도
쌓으신 공덕을 깨닫기만 한다면
수승한 분께 나아가서
반드시 높은 법을 식별하게 되리니
원컨대 여래시여,
수시로 법 바퀴 굴리셔서
저 마군들의 처소를
다 포섭하여 굴복시키고

또 감로(甘露)의 문을
수시로 개방하셔서
성현의 말씀의 자취를
널리 중생 위해 연설하소서.





원컨대 도사시여,
나아갈 길을 나타내 보이셔서
바르게 깨달으신 그 자비로
이 뭇 사람들 위해
부사의한 법 바퀴를 굴리옵소서.





저희들이 오늘날
지존(至尊)께 권청하는 것은
오직 최상의 그 도법(道法)을
듣기 위한 때문이니

거룩하신 큰 성인이시여,
은애로운 자비를 품으셔서
마치 구나함(拘那含)부처님처럼
가르침을 베풀어 주시고
또 가섭(迦葉)부처님처럼
법 바퀴를 굴려 주소서.





원하오니 세존이시여,
경도(經道)를 널리 선포하셔서
마치 하늘의 비가
만물을 윤택케 하며
약초를 자라게 하고
오곡을 무성하게 하듯이

대비의 구름을
세간에 두루 덮으시고
여래께서는 비가 되셔서
바른 법의 물을 내려 주소서.





큰 성인께서 세간에 출현하사
처음부터 끝까지
미묘한 진리를 널리 베푸심은
이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함이시네.





이제 뭇 중생들 여기에 모여
기갈에 허덕이듯 우러러 원하오니
원컨대 법 맛[法味]의 물로써
모든 갈증을 제거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범천왕들이 이렇게 여래에게 정성껏 권청한 것이 이와 같았으며 또 바르게 깨달은 부처는 크게 가엾은 마음으로 그를 버리지 않아 그 때 바라나의 선인(仙人)들이 머물던 녹야원에 머무시어 곧 더없는 법 바퀴를 굴렸으니, 그 법 바퀴는 사문·범지와 마신(魔神)·범천왕·세간 사람들로서는 제어할 수 없었다. 경도(經道)를 강설하시는 비상한 음성이 삼천대천세계에 들리자 비구 교진여[拘輪 : 晋나라 말로는 本際임]가 맨 먼저 그 법을 해득하였다.”

때에 세존께서는 또 게송을 선설하시었다.

깊고 묘하여 얻을 수 없고
조작 없는 제1의 법을
교진여가 먼저 그 이치 깨달아
아무런 번뇌를 품지 않았네.

여래께서 이 법 바퀴의 경전을 말씀하시자,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중생들이 그 가르침을 받고 계율을 따라 여래를 뵙게 되며, 또 여래께서 일으키시는 대비로 말미암아 한량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무리들이 모두 더 없는 바르고 참된 도(道)에 발심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모든 부처님께서는 앞서 말한 열다섯 가지 일로 중생을 가엾이 여겨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으시고 항상 그 자비로써 조금도 잊어버리지 않으시므로 이러한 자비에 따라 저 중생들 역시 나쁜 업이 없어 두려움을 느끼지 않나니, 그러므로 여래께서 닦으신 끝없는 대비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낱낱 사람들을 위해 고행하시되 항하사 같은 겁 동안 지옥에서 참고 지내시더라도 처음부터 물러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나아가서는 이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성현의 법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계율에 따르게 하시며, 또 이러한 비상(比像)으로 여래 지진께서는 형벌의 목숨을 받은 중생 하나하나를 위해서나 낱낱 사람들을 위해서는 항하사 같은 겁 동안 지옥의 고통을 받더라도 그것을 참아가면서 뭇 사람들로 하여금 계율에 따르고 가르침을 받아 성현의 법에 들어가게 하려고 함으로써 여래께서는 그것을 게을리 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시고 대비를 어기지도 않으신다.

족성자는 알아 두라.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을 가엾이 여기사 항상 대비를 베푸심이 이렇게도 거룩한 것이다.

또 족성자야, 모든 제자들 중에 성문의 종류는 그 뜻이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는 하지만 마치 공포에 사로잡힌 물고기처럼 그의 인자한 마음은 피부와 같고, 보살의 인자한 마음은 골수와 같다. 부처님께서는 가없는 대비를 품고서 항상 부처님의 지혜 구하기를 권하고 성문의 자비를 진화하고 보살의 자비를 받들어 도심(道心)에 들어가게 하시니, 부처님께는 도(道)의 지혜를 결정하므로 이러한 대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문의 자비는 그 자비한 마음을 나타내려 하고 보살의 자비는 중생을 개화하려 하고 부처님의 대비는 마침내 그 계도(啓導)를 다하며, 또 성문의 자비는 행(行)을 세우려 하고 보살의 자비는 더욱 정근하려 하고 부처님의 대비는 모든 행을 초월하나니, 족성자야, 모든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중생들에게 대비를 베푸시므로 다만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1겁, 백 겁, 천억만 겁 동안에 세간에 머무신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 동안에도 열반하시더라도 아주 멸도(滅度)하지 않으시니, 반드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함이다.

족성자야, 알아 두라. 이 큰 성인이신 여래·지진들께서는 어떤 중생에게라도 이와 같이 크게 가엾은 마음을 품으시는 것이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