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13권

고승전 제13권

8. 흥복(興福)

01) 석혜달(釋慧達)

혜달의 성은 유(劉)씨며, 본래 이름은 살하(薩河)이다. 병주(幷州) 서하(西河)의 이석(離石)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나이 서른한 살 때 문득 잠시 죽었다가, 하루가 지나서 다시 소생하였다. 지옥의 고통스런 과보를 두루 보았다. 그 때 한 도인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전생의 스승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설법하고 훈화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단양(丹陽)과 회계(會稽)와 오군(吳郡)에 가서 아육왕(阿育王) 탑과 불상을 찾았다. 예배하고 허물을 뉘우쳐서, 전생에 지은 죄를 참회하게 하였다. 깨어나자 곧 출가하였다.

도를 배우며 이름을 혜달이라 고쳤다. 부지런히 복업을 짓기에 정진하면서, 오직 예참만을 우선으로 삼았다.

진(晋)의 영강(寧康) 연간(373~375)에 서울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간문황제(簡文皇帝)가 장간사(長干寺)에 삼층탑을 조성하였다. 탑이 이루어진 후로 저녁마다 방광하였다. 혜달은 월성(越城)에 올라가 사방을 돌아보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 당간 끝에 홀로 이상한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곧 그곳을 찾아가 예배드리며 공경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드렸다. 밤에 당간 아랫녘을 보니, 이 때 광명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이에 곧 사람들에게 알려서, 함께 그곳을 팠다. 한 길 가량 파내려 가니, 세 개의 돌 비석을 발견하였다.

중앙의 비석은 가운데가 덮여 있었다. 그곳에 쇠 상자가 있었다. 쇠 상자 속에 다시 은상자가 있고, 은상자 속에 금상자가 있었다. 금상자 속에는 세 과의 사리가 있었다. 또한 하나의 손톱과 하나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펴니 길이가 몇 자 가량 되었다. 그러나 말면 소라모양이 되었고, 눈부시게 빛이 났다.

이는 곧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기원전 541~498) 아육왕(阿育王)이 8만 4천 개의 탑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들은 신비함을 찬탄하였다. 옛 탑의 서쪽에 다시 당간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다. 진(晋)의 태원(太元) 16년(391) 효무황제(孝武皇帝)가 다시 3층의 탑을 더하였다.

또한 예전에 단양(丹陽) 수령 고회(高?)가 장후교(張候橋) 갯벌 안에서, 하나의 금불상을 캐냈다. 빛나는 받침대가 없었으나, 제작 상태는 매우 뛰어났다. 앞에는 범어로 쓰여있었다.

“이는 아육왕의 넷째 딸이 조성한 것이다.”

고회가 이것을 싣고 장간사 골목 입구에 이르렀다. 그러자 소가 다시 더 걸어가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는 몰 수 없었다. 이에 소가 가는 데로 맡기니, 곧바로 장간사로 달려갔다.

그 후 1년 가량 지나서 임해(臨海)의 고기잡이 장계세(張係世)가 바다 입구에서, 구리로 만든 연꽃 받침대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이를 건져서 고을로 보냈다. 고을에서는 표를 대각(臺閣)에 올렸고, 칙명으로 그것을 불상의 발 밑에 안치하였다. 그러자 맞추기나 한 듯이 서로 어울렸다.

그 후 서역의 다섯 승려가 고회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예전에 천축국에서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을 가져왔습니다. 업도(?都)에 이르러 난리를 만나 강가에 숨겨 두었습니다. 조정의 길이 다시 열리면서 찾아보아도 그 소재를 잃었던 차에, 근간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알려주었습니다. ‘불상은 이미 강남에서 나와 고회가 얻었다’고 하기에, 짐짓 멀리 산과 바다를 넘고 건너왔습니다. 한 번 보고 예배드리고자 할 따름입니다.”

고회는 곧 그들을 인도하여 장간사에 이르렀다. 다섯 승려는 불상을 보고 흑흑 흐느끼며 울었다. 그러자 불상에서는 곧 빛이 발하여, 법당 안을 비추었다.

다섯 승려가 말하였다.

“본래는 둥근 빛이 나는 광배가 있습니다. 지금은 먼 곳에 있으나, 역시 곧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진(晋)의 함안(咸安) 원년(371)에 교주(交州) 합포현(合蒲縣)에서, 진주를 캐는 동종지(董宗之)가 바다 밑에서 불상의 광배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곳 자사(刺史)가 표를 올렸다. 진(晋)의 간문제(簡文帝)가 칙명으로 이 불상에 베풀게 하였다. 구멍이 꼭 같고, 빛의 색깔도 똑같이 겹쳤다. 무릇 40여 년에 걸쳐 동서에서 상서로운 감응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빛나는 받침대가 비로소 갖추어졌다.

혜달은 당간의 성스런 불상이 신령하고 기이하기에, 발돋움하며 힘쓰기를 두 배나 더하였다. 그 후 동쪽 오(吳)현에 노닐며 돌 불상에 예배드렸다. 이 석상은 서진(西晋)이 끝날 무렵, 건흥(建興) 원년(313) 계유년(癸酉年)에 오송강(吳松江)의 호독(?瀆) 입구에 떠다니던 것이었다. 고기잡이가 바다의 신이 아닌가 의심하여, 무당을 불러 이를 영접하려 하였다.

이에 바람과 파도가 함께 성하여, 놀라고 두려워서 돌아갔다. 당시 도교(道敎)를 받드는 사람이 천사(天師)의 신이라 생각하였다. 다시 함께 가서 영접하려 하였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가 처음의 경우와 같았다.

그 후 불법을 받드는 거사로 있는, 오현(吳縣)의 백성 주응(朱應)이 이 소문을 들었다. 이에 찬탄하였다.

“혹 부처님께서 감응을 드리우신 것이 아니겠는가?”

곧 깨끗이 목욕재계하였다. 동운사(東雲寺)의 백(帛)비구니와 신자 몇 사람과 함께 호독의 입구에 이르렀다.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을 다하여, 범패로 지극한 덕을 노래하였다. 바람과 조수가 가라앉았다. 멀리 두 사람이 나타나, 강물 위에 떠서 그곳에 이르렀다. 곧 그것은 돌 불상으로, 등에 새김글이 있었다.

첫 번째는 ‘유위(惟衛)’라 이름하였다. 두 번째는 ‘가섭(迦葉)’이라 이름하였다. 곧 영접하여 통현사(通玄寺)에 안치하였다. 오현 안의 선비와 서민들이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감탄하여, 마음으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

혜달은 통현사에 머문, 전후 3년 동안 낮밤으로 경건하게 예배드렸다. 그러기를 잠시도 그만둔 일이 없었다. 얼마 후 회계(會稽)로 가서 등현(鄧縣)의 탑에 예배드렸다. 이 탑도 역시 아육왕이 조성한 탑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황량하게 거칠어져, 기단자리만 남은 것을 보았다.

혜달이 마음을 발돋움하고 생각을 한 곳에 모았다. 그러자 곧 신비한 광명의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인연하여 감실과 섬돌을 수축해서 세웠다. 뭇 새들이 감히 깃들어 둥지를 치지 않았으며, 절 근처에 사는 모든 사냥꾼이나 고기 잡는 사람들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도인과 속인들이 감응을 전해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군수인 맹의(孟?)가 다시 개척을 더하였다. 혜달은 동서로 찾아가서 예배드리는 가운데, 여러 번 징험이 나타났다. 이에 부지런히 정진하고 독실하게 힘써서,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았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2) 석혜원(釋慧元)

혜원은 하북(河北) 사람이다. 사람 됨됨이가 성품이 착하였다. 기쁨과 불만을 얼굴빛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항상 선(禪)을 익히면서 경을 외웠다. 복된 일을 권유하고 교화하는 것으로 늘상 일삼았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 초기에 무릉(武陵)의 평산(平山)에 절을 세웠다. 20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거친 음식을 먹고 깊이 숨어서 오랫동안 속세와 길이 끊었다.

태원 14년(389)에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 어떤 사람이 무당산(武當山) 아래에서 그를 보았다. 정신과 얼굴빛이 매우 화창하였다. 절의 승려들에게 말을 전하였다.

“절의 일을 폐지하지 않게 해달라.”

이 때부터 절 안에는 항상 때를 맞춰, 공중에서 경쇠[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의거하여 대중을 모으면, 한 번도 차질이 없었다.

축혜직(竺慧直)

사문 축혜직이 그곳에 살았다. 혜직은 고행 정진하며, 계를 지킴에 절조가 있었다. 후에는 곡식을 끊고,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 열매만을 먹었다. 그러다가 산에 올라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화하였다.

03) 석혜력(釋慧力)

혜력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진(晋)의 영화(永和) 연간(345~356)에 서울에 와서 노닐었다. 항상 걸식하며 푸성귀를 먹고, 고행을 하며 두타행으로 복을 닦았다. 진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도자기 굽던 터를 빌어 와관사(瓦官寺)를 열었다.

처음 탑의 터를 표시한 곳은 지금의 탑 서쪽이었다. 저녁마다 표시한 것이 동쪽으로 10여 걸음 옮겨졌다. 아침에 뽑아다 되돌려 놓아도 다시 옮겨졌다. 그러자 몰래 함께 이를 엿보았다. 붉은 옷을 입고 무인의 갓을 쓴 사람이 나타나서 표시를 뽑아 동쪽에 설치하였다. 이에 곧 그곳에 탑을 세웠다. 지금 탑이 있는 곳이 그 곳이다.

예언에 의하면, ‘절이 건립된 후 30년이 지나면, 하늘이 내린 불로 불탈 것’이라 하였다. 진(晋)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21년(396)에 7월 밤에 이르러, 저절로 불이 났다. 절의 승려 수십 명이 아무도 원인을 알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탑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다.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이는 나라에 상서롭지 않은 징조이다.”

곧 양법상(楊法尙)·이서(李緖) 등에게 명령하여, 속히 수복하게 하였다. 9월에 이르러 황제가 죽었다.

그곳에는 대안도(戴安道)가 제작한 다섯 구의 불상과, 대옹(戴?)이 주조(鑄造)한 1장 6척의 금불상이 있었다.

예전에 주조한 불상이 처음 이룩되자, 얼굴과 머리가 너무 여위게 보였다. 여러 장인들이 어찌할 수 없어서, 이에 대옹을 맞아 이를 보게 하였다. 대옹 이 말하였다.

“얼굴이 여윈 것이 아니라, 팔뚝과 어깻죽지가 살찐 것이다.”

줄로 갈아 팔뚝과 어깻죽지를 줄였더니, 얼굴상이 스스로 원만해졌다. 여러 장인들로서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이곳에는 사자국(師子國)에 있던, 4척 2촌의 옥으로 된 불상도 나란히 있었다. 예전에 사자국 왕이, ‘진의 효무제가 불법을 받드는 데 정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짐짓 사문 담마억(曇摩抑)을 멀리서 파견하여 헌납한 것이다. 이 불상은 전해지는 데 10여 년이 걸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진나라에 도달하였다.

사도(司徒)인 왕밀(王謐)이 어느 날 대부(臺府)로 들어갔다. 동액문(東掖門)의 입구에 절이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윷을 던져 윷놀이를 하였다. 그 윷가지가 닿는 곳에서 곧 광명이 비쳤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파보게 하니, 금불상 하나가 발견되었다. 빛나는 받침대와 합치면, 길이가 7척 2촌이나 되었다. 왕밀은 곧 전송의 고조(高祖)황제에게 알려, 이를 영접하여 대부로 들어가 공양하게 하였다.

그 후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 말기에 와관사(瓦官寺)로 보내졌다. 그러다가 지금은 용광사(龍光寺)로 옮겼다.

04) 석혜수(釋慧受)

혜수는 안락(安樂) 사람이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서울에 와서 노닐었다.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하여, 항상 복업을 닦았다. 어느 날 왕탄지(王坦之)의 장원을 지나다, 방문하였다.

꿈에 문득 장원 안에 절을 세우는 꿈을 꾸었다. 이와 같은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혜수는 왕탄지를 찾아가, 한 칸의 집을 지을 땅을 빌리려 하였다. 그러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전에 장원을 지키던 장원지기인 송기(松期)를 찾아가, 이를 말하였다. 송기가 말하였다.

“왕씨 집안의 장원은 아마도 도모하지 못할 것입니다.”

혜수가 말하였다.

“지성으로 감응하면, 무엇 때문에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곧 왕탄지를 찾아가 그의 뜻을 진술하였다. 그러자 왕탄지는 크게 기뻐하여 곧 허가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집을 한 채 세웠다. 저녁마다 다시 꿈에 푸른 용이 나타나, 남쪽에서 와서 당간으로 화하였다. 이에 혜수는 사미를 거느리고 시험 삼아 신정강(新亭江)에 이르러 찾아보았다. 그러니 긴 나무 하나가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혜수는 말하였다.

“반드시 내가 꿈에 본 나무일 것이다.”

이에 사람을 고용해서 끌어올려 바로 세워서, 당간으로 삼아 한 층으로 꾸몄다. 도인과 속인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모두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왕탄지는 곧 장원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혜수의 본고향 이름을 따서, 안락사(安樂寺)라 불렀다.

이 절의 동쪽에는 단양(丹陽) 수령 왕아(王雅)의 저택이 있고, 서쪽에는 동연(東燕) 태수 유투(劉鬪)의 저택이 있으며, 남쪽에는 예장(豫章) 태수 범영의 저택이 있었다. 모두 보시하여, 절을 이루었다. 그 후 사문 도정(道靖)과 도경(道敬) 등이 다시 보수하고 꾸미기를 더하여, 지금까지도 크게 아름답다.

05) 석승혜(釋僧慧)

승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복업을 닦기를 좋아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 사람 행장생(行長生)과 함께, 서울의 파오촌(破塢村) 안에 절을 세웠다.

처음에는 그 지역보다 먼 곳에 거처를 잡아, 초가 몇 칸을 세웠다. 곧 승려들을 모아 재(齋)를 마련하였다. 밤중에 이르자, 법당 안의 두 등불이 문득 자연적으로 앞으로 수십 걸음을 나아갔다. 기름종지가 전과 같아서, 기울어지고 엎질러지는 일은 없었다. 대중들은 놀라고 감탄하였다. 여러 나이 든 승려에게 물어보니, 모두 말하였다.

“등불이 옮겨간 곳은, 예전에 외국의 도인이 탑을 세운 곳이다.”

이에 함께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 등불이 옮겨간 상서로움을 표시하여, 숭명사(崇明寺)라 이름 지었다.

06) 석승익(釋僧翼)

승익은 본래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믿음과 슬기가 있어, 일찍이 티끌세상과 인연을 끊을 지조가 있었다. 처음 출가하여서는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며, 혜원(慧遠)에게서 수학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검소하게 고행의 절개를 지켜, 문인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만년에는 관중(關中)으로 갔다. 다시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여, 경장·율장·논리를 따지는 것을 나란히 모두 섭렵하였다. 또한 『법화경』 한 부를 외웠다.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에 도반인 담학(曇學)과 더불어 회계(會稽)에 노닐었다. 산천을 밟고 찾다가, 진망(秦望)의 서북쪽에 다섯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나란히 솟은 것을 보았다. 거기에 기사(耆?: 耆??山)의 기상이 어려 있었다. 이에 풀을 이어 암자를 짓고 법화정사(法華精舍)라 일컬었다.

태수(太守) 맹의(孟?)와 부자인 진재(陳載)가 나란히 마음을 기울여, 덕에 머리 숙이고 찬조하여 준공을 이루었다.

승익은 푸성귀를 먹고 개울물을 마시길, 30여 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원가(元嘉) 27년(45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산사에 비를 세워서, 그가 남긴 덕을 기렸다. 회계의 공관(孔?)이 비문을 지었다.

승익과 함께 노닌 사문 담학은 후에 진망령(秦望嶺)의 북쪽으로 옮겨 터를 잡아, 낙림정사(樂林精舍)라 이름 지었다. 소상(韶相)·관천(灌?) 모두가 동악(東岳)의 명망 있는 승려들로서, 다 함께 이곳에서 머물렀다.

도경(道敬)

당시 도경은 본래 낭야(瑯?)의 으뜸가는 족속이다. 진(晋)나라 때 우장군(右將軍)이었던 왕희지(王羲之)의 증손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피해 출가하였다. 심정이 산골짜기를 사랑하여, 약야산(若耶山)에 깃들어 현류정사(縣溜精舍)를 지었다. 도경은 그 후에 대중승려를 공양하기 위하여, 마침내 구족계를 버렸다. 오로지 10계(戒)에만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07) 석승홍(釋僧洪)

승홍은 예주(豫州) 사람이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반듯하고 깨끗하였다. 후에 교화에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녹여서 상을 주조하는 일은 비로소 마쳤지만, 아직 미처 모형을 열어보지는 못하였다. 당시는 진(晋)나라의 말기라, 구리의 사용을 매우 엄하게 금지하였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당시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다. 승홍이 죄에 연루되어, 재상의 관부에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염송하며, 한마음으로 불상에 귀의하였다. 밤 꿈에 자신이 주조한 불상이 찾아와, 손으로 승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섭느냐?”

승홍이 말하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불상이 말하였다.

“근심하지 말아라.”

불상의 가슴을 보니, 사방 한 자 가량 구리 빛이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곧 형을 집행할 때가 되었다. 재상 관부의 참군(參軍)이 죽이는 일을 감독하였다. 죄인을 실은 소가 달려 나가 수레가 허물어져, 이로 인하여 다시 하루를 연기하였다. 그 후 이어 명령이 내려, 팽성(彭城)에서 사자가 와서 말하였다.

“승홍이라는 사람을 아직 죽이지 않았다면, 놓아주어라.”

마침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돌아와 모형을 열어 불상을 보았다. 가슴 앞에 과연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그 후 승홍은 고행으로 세상을 마쳤다.

08) 석승량(釋僧亮)

승량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계율 있는 행실로 이름이 알려졌다.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용되는 구리가 적지 않았다. 미흡하기만 한 구걸로는 마련할 길이 없었다. 상주(湘州)와 경계를 접한 동계(銅溪)에 있는, 오자서(伍子胥)의 사당에 구리로 만든 기물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그 사당은 매우 위엄이 있어,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승량은 이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자사(刺史)인 장소(張邵)에게 고하여, 건장한 사람 백 명과 큰 배 열 척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장소가 말하였다.

“그 사당은 영험한 곳이어서,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한다. 또한 오랑캐들이 수호하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승량이 말하였다.

“복덕의 과보가 있다면 시주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다면 제가 몸소 당하겠습니다.”

장소는 곧 사람과 배를 공급하였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가서, 사당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러자 승량은 수하의 힘깨나 쓰는 이들과 더불어, 일시에 함께 나아갔다.

사당에서 20걸음 가량 되는 곳에, 두 개의 구리로 만든 가마솥이 있었다. 용량이 백 섬의 곡식을 담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거대한 뱀이, 길이가 10여 길이나 되는 것이 나와,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에 승량이 곧 위의를 바로 잡고,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는 수십 자의 주문을 외워 발원하니, 뱀이 문득 숨어버렸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서, 손에 대나무 홀을 잡고 말하였다.

“듣건대 법사께서는 도를 일삼음이 비범하시고 복을 경영하시는 일이 중하다 하오니, 지금 특히 기쁨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수레에 구리를 취하였다. 사당의 구리는 많아서, 열에 하나도 취하지 않았건만 배가 이미 가득했다. 신상(神床)의 머리에 하나의 타호(唾壺: 침·가래를 뱉는 그릇)가 있었다. 그 속에는 길이 두 자 가량의 도마뱀이 있어 나갔다간 들어오곤 하였다. 모두가 말하였다.

“신(神)이 이 물건을 가장 사랑한다.”

승량은 마침내 그것을 취하지 않고, 이에 그곳을 떠났다. 때마침 바람과 물결이 매우 이로울 때를 만났다. 가까이에 사는 뭇 오랑캐들이 서로 알려, 뒤따라 쫓아왔다. 그러나 배에 미칠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와 불상을 주조하여 이루었다. 그러나 오직 빛나는 불꽃 광배만은 미비하였다. 전송의 문제(文帝)가 이를 위하여, 금박의 둥근 빛 광배를 조성하여 팽성사에 안치하였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이르렀다. 명제가 불상을 상궁사(湘宮寺)로 옮겨, 지금도 그곳에 있다.

09) 석법의(釋法意)

법의는 강남 사람이다. 복된 일을 경영하기 좋아하여, 53개의 절을 세웠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종산(鍾山)의 좨주(祭酒)는 주응(朱應)의 아들이었다. 이에 앞서 손은(孫恩)이 법의를 따르는 무리를 만들어, 이 산에 숨어살았다. 그 바깥의 땅을 조금 나누어주어, 법의에게 주고 절을 짓게 하여 연현사(延賢寺)라 이름 지었다. 그 후 배도(杯度)가 이 절에 오가며, 말하였다.

“이곳에는 곧 여러 가지 변고가 있을 것이나, 나중에는 좋아질 것이다. 천당(天堂)과 마주보는 땅이어서, 복된 일을 하기 쉬우리라.”

갑자기 이 절이 들불 때문에 불타버렸다. 그 후 제해(齊諧)와 장인(張寅) 등이 배도의 말에 의지하니, 배도의 전기에 이 말이 실려 있다. 마침내 법의와 더불어 산의 땅으로 가서, 다시 수리하여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이에 법의는 배도의 말을 생각하였다. 곧 정성을 다하여 예참하면서, 서방의 못물을 빌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간절하고 측은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그러니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무엇인가가 때리는 듯 땅에 떨어졌다. 법의는 혹 그것이 금이나 비단이 아닌가 하여, 사람을 시켜 두 자 가량 파내려 갔다. 맑은 물 흐름이 솟아나와, 마침내 개울을 이루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그곳에 절을 세웠다. 그 후 법의가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0) 석혜경(釋慧敬)

혜경은 남해 사람이다. 어려서 형초(荊楚)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또한 경론에 널리 뛰어나고, 항상 복된 일을 짓기를 힘썼다. 그런 까닭에 교리를 이해하는 공부는 완전할 수 없었다. 무릇 가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탑과 불상을 일으켜 세워서 대중의 일을 도와 이루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다시 운봉사(雲峯寺)·영안사(永安寺) 등 여러 절을 수리하였다. 혜경은 이미 계율 있는 절개에 정밀하고, 지조가 엄숙하고 밝았다. 이 때문에 영외(嶺外)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여, 자문 받고 품수 받았다.

그 후 칙명을 받아 승주(僧主)가 되었다. 가르쳐 이끄는 데 공이 있었다. 혜경의 노비 하나가 사미가 되었을 때, 문득 귀신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산의 요정이 모습을 나타내서 혜경을 찾아왔다. 자세히 허물과 실수를 사과하면서 말하였다.

“부하 권속들이 알지 못하여, 엉뚱하게 법사의 권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얼마 후 모두가 평상대로 회복되었다. 모든 일으켜 세우는 복된 일을 모두 서방정토에 회향하였다. 임종하던 날에는, 방에 기이한 향기가 감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쳤다.

11) 석법헌(釋法獻)

법헌은 광주(廣州) 사람이다. 처음 북사(北寺)에 머물렀다. 절이 오래되어 조락하고 쇠해졌다. 그러자 법헌은 인연 있는 시주들을 거느리고, 다시 수리하고 지붕을 고쳤다. 이어 절 이름을 연상사(延祥寺)라 하였다.

그 후 장미산(藏薇山)에 들어가 절을 창건하였다. 절이 이룩된 후, 두 동자가 손을 잡고 찾아와 노래하였다.

장미산에 도와 덕이 있어
기쁨과 즐거움이
바야흐로 다하지 않네.

藏薇有道德 歡樂方未央

말이 끝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온 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모두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경탄하였다. 법헌이 그 후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경쇠줄이 끊어지려 하는데, 왜 고치지 않는가?”

법헌이 놀라 일어나서 가서 보니, 드리워진 줄이 곧 땅에 닿으려 하였다. 그가 손을 대어, 경쇠가 부러지고 손상된 것이 없었다.

법헌은 출가한 이래로 항상 복된 일로 시주하기를 권하였다. 마음을 선(禪)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절개를 이지러뜨린 일이 없었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2) 석법헌(釋法獻)

법헌의 성은 서(徐)씨며, 서해(西海)의 연수(延水) 사람이다. 아버지가 외삼촌을 따라 양주에 이르자 곧 출가하였다. 원가(元嘉) 16년(439)에 이르러, 비로소 서울로 내려와 정림상사(定林上寺)에 머물렀다. 경·율에 널리 뛰어났다. 뜻하는 일에 굳세고 날래서, 훌륭히 중생들을 구제하고, 절들을 수리하고 다듬었다.

앞서 도맹(道猛)이 서쪽에 노닐며, 두루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몸을 버릴 각오로 서원하여, 그곳에 가서 성인의 자취를 보려 하였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금릉(金陵)을 출발하여, 서쪽 파촉(巴蜀) 지방에 노닐었다. 길은 하남(河南)에서 출발하여 예예(芮芮)를 경유하였다. 우전국(于?國)에 도달한 후, 파미르 고원을 넘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벼랑에 가로놓인 다리가 끊어졌다. 마침내 우전국에서 되돌아왔다.

그 사이에 불치아[佛牙]한때, 사리 열다섯 과와 아울러 ?관세음멸죄주(觀世音滅罪呪)?및 ?조달품(調達品)?을 얻었다. 또 구자국(龜玆國)의 금퇴첩상(金槌?像)을 얻었다. 이에 돌아왔다. 그가 경유한 길은 위험하고 막혔음이 그의 별기(別記)에 보인다.

불치아는 본래 오전국(烏纏國)에 있었다. 오전국에서 예예(芮芮)로 왔고, 예예에서 다시 양(粱)나라 땅으로 왔다. 법헌을 불치아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15년 동안 비밀히 예배하고 섬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였다. 문선왕(文宣王)의 꿈에 감응하여, 비로소 도인과 속인들에게 이 사실이 전해졌다.

법헌은 계율의 행실이 맑고 순수하며, 덕이 남들의 모범이 되었다. 낭야(瑯?)의 왕숙(王肅)과 왕융(王融),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장권(張?), 사문 혜령(慧令)과 지장(智藏) 등이 모두 몸을 맡겨, 발을 이어 그의 훈계를 숭상하였다.

현창(玄暢)

법헌은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장간사(長干寺)의 현창과 더불어 승주(僧主)가 되었다. 양자강의 남북 양쪽 기슭을 나누어서 일을 맡았다.

현창은 본래 진주(秦州) 사람이다. 역시 계율을 지킴이 맑고 깨끗하였다. 문혜(文惠)태자가 받들어, 계율을 내려주는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법헌은 칙명을 받고, 삼오(三吳)에서 이부대중[二衆]을 가려내었다. 현창도 역시 동쪽으로 가서, 거듭 수계(受戒)의 법을 폈다.

당시 법헌과 현창 두 승려는 모두 어려서부터 계율의 금제를 익혀, 당세에 경합할 사람이 없었다. 전송(前宋)의 무제와 함께 이야기하면서도, 매번 이름을 일컬으며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 후 중흥사(中興寺)의 승종(僧鍾)이 건화전(乾和殿)에서 황제와 만났다. 황제가 승종에게 안부를 물었다. 승종이 대답하였다.

“빈도는 요즘 괴로운 기(氣)가 있습니다.”

황제가 빈도라는 말을 싫어하였다. 마침내 상서(尙書)인 왕검(王儉)에게 물었다.

“선배 사문들이 제왕과 이야기할 때, 무엇이라 자신을 칭했는가? 정전에 앉았는가? 앉지 않았는가?”

왕검이 대답하였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때는 불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때라서, 그에 관한 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위국(僞國: 北魏) 때부터 불법이 조금씩 성해 지면서, 모두가 빈도(貧道)라고 자신을 칭하고, 또한 앉기도 했습니다.

진(晋)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시대가 중간에 이르러 유빙(庾氷)과 환현(桓玄) 등이, 사문도 모두 제왕에게 공경을 다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일이 모두 그냥 가라앉았습니다. 전송의 중엽에도 역시 자못 예법을 갖추게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 자리에 앉으며, 빈도라 칭합니다.”

황제가 말하였다.

“현창과 법헌은 도의 일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스스로 이름을 칭하였다. 하물며 다른 승려에 있어서랴? 읍배(?拜)는 너무 심하나, 이름을 쓰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그 때부터 사문(沙門)은 모두 제왕에게 이름을 칭하였다. 이것은 현창과 법헌에게서 비롯되었다.

현창은 건무(建武) 초엽(494)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법헌은 건무 말엽(497)에 세상을 떠났다. 현창과 더불어, 종산(鍾山)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법헌의 제자 승우(僧祐)가 그를 위하여, 묘 옆에 비를 조성하였다. 단양(丹陽) 수령인 오흥(吳興)의 심약(沈約)이 비문을 지었다.

법헌이 서역에서 얻은 불치아와 불상은 모두 정림상사(定林上寺)에 있었다. 불치아는 보통(普通) 3년(522) 정월에, 문득 병장기를 잡은 몇 사람이 초저녁에 문을 두드리며 칭하였다.

“임천 전하의 노복이 반역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알렸다.

“불아각(不牙閣) 위에 있습니다.”

누각을 열어 검사해볼 것을 요청하였다. 절의 담당자가 곧 그들의 말에 따라 누각을 열어 주었다. 임천왕의 장수가 불아좌(不牙座) 앞에 이르러, 상자를 열고 불치아를 취하였다. 삼배(三拜)를 올리고, 비단수건에 불치아를 담아 산 동쪽을 돌아 떠났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끝내 그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13) 석승호(釋僧護)

승호는 본래 회계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 고행의 절개로 의지를 극복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숙하고 맑았다.

그 후 석성산(石城山)의 은악사(隱嶽寺)에 거주하였다. 절 북쪽에 푸른 절벽이 있어, 곧바로 수십여 길이나 솟았다. 그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부처님의 불꽃 광배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 위로 숲을 이룬 나무들이 있어, 굽은 나무줄기가 그늘을 드리웠다. 승호가 경행(經行) 때마다 절벽이 있는 곳에 이르면, 곧 빛나는 광명이 보였다.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춰, 노래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향로를 받쳐 들고 서원을 일으켰다. 널리 산에서 열 길의 돌부처를 새겨 조성함으로써, 미륵불의 천 자에 이르는 모습을 공경하는 것에 견주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용화회상[三會]에서 만나고자 하였다.

북제(北齊)의 건무(建武) 연간(494~497)에 도인과 속인들을 불러 결속하였다. 처음 조각하기 시작하여, 대충 바위를 뚫는 데 한 해를 보냈다. 겨우 대략의 얼굴 모습이 이룩되자, 얼마 후 승호가 병을 만나 죽었다. 임종 때 서원하였다.

“내가 조성하는 석상이 본래 한 생에 완성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두 번째 태어나서, 그 서원한 결과를 이루리라.”

그 후 사문 승숙이 그가 남긴 공사를 모아 이어갔다. 그러나 재원[資力]을 마련할 길이 없어 성취하지 못하였다.

양(梁)의 천감(天監) 6년(507)에 이르러 시풍(始豊) 현령인 오군(吳郡)의 육함(陸咸)이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에 섬계(剡溪)에서 유숙하던 중, 비바람을 만나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위태하고 두려워하다가 잠깐 눈을 부친 상태에 빠졌다. 문득 꿈에 세 도인들이 나타나서, 알려 주었다.

“그대는 앎과 믿음이 굳고 바르기 때문에, 자연히 안온해질 것이다. 건안(建安) 전하께서 환후가 아직 낫지 않으셨다. 그대가 만약 섬현을 다스리거든, 승호가 조성하던 돌부처를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을 얻는다면, 반드시 전하의 병이 나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라고 하여 허망한 것은 아니니, 잘 개발함이 좋으리라.”

육함은 서울로 돌아가서, 1년이 지나도록 전에 꿈꾼 일을 거의 잊었다. 후에 문을 나서다가 곧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말하였다.

“강론을 듣기 위해 기숙한다.”

이어 말하였다.

“지난해 섬현에서 부탁한, 건안왕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가?”

육함이 당시 두려운 생각이 들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니, 도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떠나갔다. 육함은 그가 비범함을 깨달았다. 곧 신발을 거꾸로 신고, 묻고 찾고자 뒤따랐다. 백 걸음 거리까지 미쳤으나,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육함은 탁 트이면서 그 뜻을 해득하였다. 전에 꾼 꿈을 모두 기억해보니, 그는 곧 섬계에서 꿈에 본 세 번째 승려였다.

육함은 곧 상계[啓]를 올려 건안왕에게 알렸다. 왕은 곧 이것을 주상에게 알려 칙명으로 승우(僧祐) 율사를 파견하여, 석상 조성의 일을 전임하였다. 왕은 곧 깊은 믿음이 더욱 더해, 뛸 듯한 기쁨이 두루 충만해졌다. 금패물을 뽑아 희사하여, 성스런 불상이 성취되기를 맹서하였다.

처음 승우 율사가 채 그곳에 이르지 못한 어느 날이다. 그 절의 승려인 혜정(慧逞)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큰 신(神)이 나타났다. 양쪽으로 따라온 시종의 행렬이 매우 웅장하였다. 그 신이 감실이 있는 곳에 서서 분수를 상략하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승우율사가 그곳에 이르렀으니, 그 신이한 응험이 이와 같았다.

승호가 과거에 뚫은 감실은 지나치게 얕았다. 곧 다섯 길을 깎아 들어가, 다시 정수리와 육계(肉?)를 시공하였다. 몸 모습이 이루어져서, 아름답게 닦는 일이 끝나려 하였다. 밤중에 문득 만자가 있는 곳에서 빛깔이 붉게 솟아나왔다. 지금 불상의 가슴 부분의 만자처(萬字處)는, 아직도 금박을 씌우지 않아서 붉은 빛깔이 남아 있다.

돌부처는 천감(天監) 12년(513) 봄에 착공하여 천감 15년(516) 봄에 끝났다. 앉은 분의 높이가 5장이고, 서 있는 분의 모습은 10장이다. 감실 앞에는 3층의 대를 가설하였다. 또한 문각과 전당을 조성하였다. 아울러 대중의 기업을 세워서 공양에 충당하게 하였다. 사방 먼 곳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향과 꽃을 들고, 만 리 밖에서 찾아와 모여, 공양하고 시주하노라 오갔다. 그들의 발자취가 골짜기를 메웠다.

돌부처가 조성된 후로, 건안왕이 고통 받던 병도 조금씩 치유되었다. 마침내는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 후 건안왕은 다시 봉작을 받았다. 지금의 남평왕(南平王)이 그 사람이다.

14) 석법열(釋法悅)

법열은 계율을 지키는 깨끗한 사문이다. 북제(北齊)의 말엽에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서울의 정각사(正覺寺)에 머물렀다. 돈독히 복된 일을 닦아 사부대중이 귀의하였다.

어느 날 법열은 팽성(彭城)의 송왕사(宋王寺)에 1장 8척의 금불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곧 전송의 거기(車騎)장군인 서주(徐州) 자사 왕중덕(王仲德)이 조성한 것이다. 빛나는 광배의 모습이 빼어나, 강남에서는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었다.

고을 경내에 혹 재난과 이변이 있거나, 승려나 비구니에게 허물이나 뒤틀린 일이 있을 경우, 불상에서는 곧 땀이 흘러내렸다. 그 땀의 많고 적은 것이, 곧 재앙이나 근심의 심하고 옅은 정도를 표시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 초기에 괭성의 북쪽 부족인 뭇 오랑캐들이 함께 불상을 옮겨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만 명이 끌어당겼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북제의 초기에 연주(?州)의 몇몇 고을에서 의거를 일으켜, 남방에 붙고자 하였다. 대중 승려들을 핍박하고 몰아세워, 그들을 도와 군영과 참호를 지키게 하였다. 당시 오랑캐의 장수 난릉공(蘭陵公)이 이 군영을 공격 함락시켜, 여러 승려들을 노획하였다. 이에 두 고을의 도인을 모두 잡아 포위망 속에 가두어두었다. 표(表)를 위대(僞臺: 北魏의 朝延)에 보내어, 난을 도운 사람들이라 무고하였다. 이 때 불상에서 땀이 흘러내려 온 불전이 모두 젖었다.

당시 위양왕(僞梁王: 北魏의 梁王) 원량(元諒)이 팽성에 주둔하였다. 다소 불교를 믿었기에, 친히 불상이 있는 곳에 가서 사람을 시켜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닦아내면 또 따라 나와서, 끝내 그칠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은 곧 향을 사르고 예배하며, 지심으로 서약하였다.

“대중 승려들은 무죄입니다. 제자가 스스로 그들을 보호하는 일을 맡아, 화를 입지 않게 하겠습니다. 만약 나의 보이지 않는 정성에 감응이 있다면, 땀을 닦거든 곧 멈춰 주십시오.”

이에 손수 땀을 닦아내니 곧 건조해졌다. 이에 왕이 표를 갖추어 그 일을 나라에 알리니, 모든 승려들이 다 사면되어 풀려났다.

법열은 이와 같은 불상의 신령하고 기이함에 기뻐서, 우러러 예배드리기를 서원하였다. 그러나 관문의 금지로 길이 막히고 격리되어, 소원을 이룰 길이 없었다.

또한 예전에 전송의 명제(明帝)가 1장 8척의 금불상 조성을 경영하였다. 네 번 주조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계획을 바꾸어 1장 4척의 금불상으로 조성하였다. 법열은 마침내 백마사(白馬寺)의 사문인 지정(智靖)과 더불어, 인연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힘을 모았다. 이를 1장 8척의 아미타불로 개조하고자, 그 뜻을 알리고 비로소 금동을 모았다.

당시 시대가 북제의 말기에 속하여, 세상의 도의가 짓밟히고 쇠약해졌다. 또다시 밀려 배척당하였다. 양(梁)나라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 일을 나라에 상계하였다. 그러자 칙명이 내려 이를 허가하였다. 아울러 빛나는 받침대의 조성을 돕게 하였다. 관에서 보내는 재료와 솜씨 있는 장인에게 필요한 대로 비용을 자급하여서, 양(梁)의 천감(天監) 8년(509) 5월 3일에 소장엄사(小莊嚴寺)에서 주조에 착수하였다.

장인(匠人)이 본래 헤아리기는, 부처의 몸에 4만 근의 구리가 필요하다고 계산하였다. 녹여서 쏟아 부은 것이 이미 다하였다. 그러나 아직 가슴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백성들이 보내오는 구리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구리를 용광로 안에 던져도, 모형 안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저절로 앞서의 상태와 같았다. 이에 다시 말을 달려 나라에 알렸다. 칙명으로 공덕으로 쓸 구리 3천 근을 공급하였다.

이 때 조정안에서 비로소 양을 헤아려 보내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불상을 주조하는 곳에 이미 양이 모는 수레로 조서가 전달되었다. 또한 구리를 실은 수레가 용광로 옆에 이르렀다. 이에 풀무를 날려 구리를 녹이니, 한 번 주조함에 곧 불상 안이 가득해졌다.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사람과 수레가 함께 없어졌다. 조정안에서 구리를 내온 시간과 비교해보니, 비로소 방금 보내온 구리는 참으로 신령한 감응의 소치임을 알았다. 장인들은 이에 뛸 듯이 기뻐하고, 도인과 속인들은 이를 칭찬하였다.

그 후 모형을 열어 측량하니, 예상보다 뛰어올라 1장 9척의 상이 되었다. 그러나 빛나는 광배의 모습에는 차이가 없었다. 또 거기에는 큰 엽전(葉錢) 두 개가 아직도 옷주름에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끝가지 불에 녹지 않은 그 연유를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어 예전에 헤아린 구리 4만 근은 쓰임에 기준해 볼 때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3천 근을 더하여도, 계산이 빠져 가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서로운 기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비밀히 저절로 꾀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의 이치로 그윽이 통하는 일은, 거의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처음 불상의 바탕이 이룩되자, 비구 도소(道昭)는 항상 밤중에 예참을 하였다. 문득 불상이 있는 곳을 보니 환하게 밝았다. 이 상서로움을 오래 보다가, 곧 그것이 신령스런 빛의 기이함임을 알았다.

주조한 지 사흘이 지나, 이직 미처 모형을 열지 않았다. 도도(道度) 선사는 자신의 칠조 가사를 희사하여, 비용에 보탰던 고결한 승려였다. 그런데 불상의 정수리 부분을 열자, 갑자기 멀리 두 승려가 무릎 꿇고는 불상의 육계를 여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려 하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당시 법열과 지정 두 승려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칙명으로 불상 조성의 일을 정림사(定林寺)의 승우(僧祐)에게 맡겼다. 그 해 9월 26일에 불상을 광택사(光宅寺)로 옮겼다.

이 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자못 먼지가 일었다. 내일이면 불상을 옮길 때의 밤에, 가벼운 구름이 생겨 위에 두루 퍼지더니, 가랑비가 촉촉이 적셨다. 승우는 불상이 있는 곳을 경행하면서, 날씨를 염두에 두었다.

멀리 불상 언저리에 빛나는 불꽃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등불과 같고 촛불과도 같았다. 아울러 추참(?懺: 망치 따위를 치며 참회하는 것)하고 예배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안에 들어가 자세히 보니, 가려진 듯 모두 없어졌다. 절을 방비하는 장효손(藏孝孫)도 역시 같은 것을 보았다.

이 날 밤 회하(淮河) 가운데서 장사꾼들이, 큰 배가 내려오면서 ‘다리를 고치라’고 독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배 안에는 몇 백 명의 사람이 있는 듯하였다. 곧 신령한 법기의 무거움을 알게 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소치겠는가?
그 후 다시 빛나는 받침대를 주조하였다. 모두 꽃향기가 나는 상서로움이 있었다. 총하(?河)의 왼편 지역에서, 금불상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오직 이 한 구가 있을 따름이다.

【論】예전에 우전국(優塡國)이 처음으로 전단(?檀)으로 조각하거나, 파사(波斯: 페르시아)에서 처음으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거나 할 때에는, 모두 현실적으로 부처의 얼굴을 묘사하였다. 솜씨 있게 미묘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 까닭에 광명이 흘러 상서로움이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여 경건함을 펼 수 있었다. 여기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봉안한 두 탑과, 옷과 그림자를 안치한 두 대(臺)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미 그 법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부처님께서 강가에서 자취를 거두어들이시어 숲 밖에서 화장하자, 여덟 임금이 청해서 사리를 나누어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물병과 재의 두 곳에 탑을 세웠다. 이에 열 곳에서 사찰이 일어났다. 태어난 곳, 득도한 곳, 설법한 곳, 열반한 곳과 육계(肉?)·이마뼈·네 어금니·발자국·발우와 지팡이·타호(唾壺)·니원승(泥洹僧) 등을 모신 곳에도, 모두 탑을 세우고 새김글을 새겨, 그 신령하고 기이함을 드러내었다.

그 후 백여 년이 지나서 아육왕(阿育王)이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에 띄웠다. 모든 탑을 허물고 철거하여 사리를 나누어 가지고 돌아오다가, 바다에서 바람과 조수를 만나 자못 잃고 떨어뜨린 것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바닷물로 살아나가는 종족 가운데는 이를 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 후 8만 4천의 탑을 이로부터 인연하여 세웠다. 아육왕의 딸들도 차례로 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나란히 돌에 새기고 금을 녹여 신비한 모습을 그리고 묘사하여, 강에 띄우고 바다에 띄우니, 그 그림자가 동쪽 중국을 교화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비록 신령한 자취는 몰래 통하나, 아직도 보고 들을 만큼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 후 채음(菜?)과 진경(秦景)이 서역에서 돌아오자, 비로소 모직물에 그린 석가모니 상을 전하였다. 이에 양대(凉臺)와 수릉(壽陵)에서 나란히 그 형상을 그렸다. 이 때부터 형상과 탑묘가 시대와 더불어 다투어 줄을 이었으며, 우리 큰 양(梁)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남긴 빛이 더욱 성해졌다.

무릇 법신은 형상이 없으나, 감응에 인연하기 때문에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감응이 나타나는 것은 들쑥날쑥 같지 않기 때문에, 형상 또한 당연히 다른 구별이 있다. 만약 마음의 길이 아득하다면, 창된 모습을 대하더라도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심정과 지조가 간절하다면, 나무나 돌덩어리라도 마음을 열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은(劉殷)의 지극한 정성으로 감응이 일어나 곡식그릇에 새김글이 생겨났으며, 정란(丁蘭)은 온화하고 맑아 정성을 다함으로써 매화나무가 색이 변했다. 노양(魯陽)은 창날을 돌림으로써 해가 바뀌었고, 기부(杞婦)가 눈물을 흘림으로써 성이 무너졌다.

이는 모두가 숨겨진 측은한 마음이 그들의 본성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상서로운 징험이 사람들의 이목을 비춘 것이다. 혜달(慧達)이 광명을 당간 끝에 불러들이고, 혜력(慧力)이 탑의 기단에서 상서로움에 감응하며, 혜수(慧受)가 물에 뜬 나무에 정성을 펴고, 승혜(僧慧)는 옮겨가는 등불에서 증명을 드러냈다. 승홍(僧洪)과 승량(僧亮)은 나란히 불상을 주조하느라 자기 몸을 잊었고, 법의(法意)와 법헌(法獻)도 모두 가람을 위해 명이 다하였다. 법헌이 부처의 어금니 뼈에 뜻을 오로지하니, 경릉(竟陵) 문선왕의 꿈에 감응이 나타나고, 승호(僧護)가 석성산에서 포부를 비축하여 남평(南平) 건안왕이 감응을 얻었다.

근간 광택사(光宅寺)의 1장 9척의 금불상이 경기 지방에 뚜렷이 빛나게 된 것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전송의 황제가 네 번 녹여도 이루지 못한 것을, 우리 양(梁)나라 황제는 한 번 녹여 형상이 갖추었다. 미묘한 형상이 뛰어나서 훼손된 곳이 없고, 상서로운 구리가 적었는데도 다시 충족되었다. 그런 까닭에 도는 사람의 힘을 빌려 넓어지고, 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감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어찌 허탄하다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신에게 제사드릴 때에 신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하면, 신의 도와 교접하는 것이다. 불상을 공경하기를 부처님을 대하듯 하면, 법신이 감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문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지혜는 반드시 복덕으로 기초를 삼아야 한다. 비유하면, 새가 두 날개를 갖추어야만 훌쩍 천 길 하늘 위로 올라가고, 수레는 두 수레바퀴가 충족되어야만 한 번에 천 리를 달리는 것과 같다. 어찌 부지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으리요? 찬하노라.

부처님의 빛나는 모습 사라졌으나
쇠와 돌이 빛남을 전하도다.


여기 탑과 불상 있으니
그리워하는 이들 의지하네.



기적이자 지극함으로
상서로움이자 위신력으로
바위에 숨거나 땅에서 솟거나
물 위에 뜨거나 공중을 날도다.


도탑도다, 마음의 길이여.


반드시 들어맞아 어김없으리.



眞儀?曜 金石傳暉
爰有塔像 懷戀者依
現奇表極 顯瑞?威
巖藏地踊 水泛空飛
篤矣心路 必契無違

9. 경사편(經師篇)

01) 백법교(帛法橋)

백법교는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을 돌려 읽기를 즐겼다. 그러나 소리가 모자라서 늘 유창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곡식 먹기를 끊고 7일을 밤낮으로 참회하면서, 관세음보살에게 과보가 일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동학들이 간절하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서원하여 고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7일째가 되자 목구멍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 생겼다. 곧 물을 찾아 씻고 양치질하고 나서 말하였다.

“나에게 감응이 있었다.”

이에 게송을 세 번씩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마을 가까이까지 사무쳤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놀라고 감탄하여, 모두 찾아와 보고 들었다.

그 후 수십만 글자의 경을 외우고, 밤낮으로 소리 높여 읊조렸다. 그 소리가 구슬프고 아름다워 신과 통하였다. 나이가 90에 이르러서도 소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진(晋)의 목제(穆帝)의 영화(永和) 연간(345~356) 하북(河北)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는 곧 석호(石虎)의 말기였다.

승부(僧扶)

제자인 승부도 계행이 맑고 높았다.

02) 지담약(支曇?)

지담약은 본래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임시 머물렀다. 어려서 출가하여, 맑은 고행으로 푸성귀를 먹었다.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머물렀다. 진(晋)나라 효무황제(孝武皇帝)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나왔다.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효무황제가 그로부터 5계를 받고, 스승의 예로 공경하였다.

담약은 특히 묘한 목소리를 타고났으며, 경을 돌려 읽기를 잘하였다. 어느날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그에게 소리법을 전수하였다. 꿈에서 깨어나자 새로운 목소리가 만들어졌다. 범패(梵唄)의 울림은 맑고 길게 늘어지며,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다가 문득 되돌려 꺾어지면서, 목구멍 안에서 다시 합쳐지면서 거듭 굴렀다.

비록 동아(東阿: 친근한 목소리)의 소리로 먼저 변하는 경우에도, 그 뒤에 강회(康會: 크게 찬미하는 소리)의 소리가 찾아왔다. 시종 순환하는 것이 이제껏 담약과 같이 묘한 목소리는 없었다. 후진들이 전수받아 흉내내는 소리는 그 법 아닌 것이 없었다. 그가 지은 육언범패(六言梵唄)는 그 울림이 지금까지 전한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03) 석법평(釋法平)

법평의 성은 강(康)씨며, 강거(康居)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임시 머물렀다. 아우인 법등(法等)과 함께 출가하여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담약(曇?)의 제자가 되어 함께 스승의 일을 전수받았다. 울리는 여운이 맑고 우아하며, 굴러 움직임에서 모난 곳이 없었다.

그 후 형제가 함께 기원사(祇洹寺)로 옮겼다. 아우는 모습이 작고 못생겼으나, 소리는 형을 넘어섰다. 전송(前宋)의 대장군이 동부(東府)에서 재를 마련하였다. 일단 그의 모습만 보고 그를 업신여겼다. 그러다가 책을 펴고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는, 곧 팔을 걷어 부치고 그 신비함에 탄복하였다. 이어 탄식하였다.

“공자께서 ‘모습만 보고 사람을 취하다가 제자 자우(子羽)를 잘못 보았다[以貌取人 失之子羽]’고 하신 말씀이 참말이구나.”

그 후 동안사(東安寺)에서 도엄(道嚴)이 강론을 열었다. 법등은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기를 마쳤다. 그러자 도엄 법사가 천천히 털이개를 움직이면서 말하였다.

“이와 같이 경을 읽는다면, 또한 강론을 일으키는 것만 못하지 않구나.”

마침내 강석을 해산하고, 이튿날 다시 범패를 열기로 하였다. 이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루어주는 도[相成之道]라 말하였다.

형제 모두 원가(元嘉) 연간(424~452)의 말기에 세상을 떠났다.

04) 석승요(釋僧饒)

승요는 건강(健康) 사람인데, 출가하여 백마사에 머물렀다. 편지를 잘 쓰고 잡기(雜技)에 빼어났다. 특히 음성으로 알려져서, 전송의 무제(武帝)·문제(文帝) 시대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메아리 가락은 넉넉하며 느긋하고, 우아한 화음[和雅]은 슬프고도 막힘이 없어[哀亮], 도종(道綜)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도종은 세 가지 본기(本起)와 대나(大拏)에 빼어났다. 한 번 맑은 범패를 들어올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을 기울였다.

이 절에는 반야대(般若臺)가 있었다. 승요는 항상 이 대를 돌면서 범패를 굴려, 이것으로 공양에 견주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가마를 멈추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손가락을 튀기며 부처님을 칭송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2년(458)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6세이다.

초명(超明)·명혜(明慧)

당시 같은 절의 초명과 명혜도 어려서부터 함께 범패를 하였다. 긴 재를 지낼 때에는 경을 돌려가며 읽어서, 역시 당시 세상에 유명하였다.

05) 석도혜(釋道慧)

도혜의 성은 장(張)씨며, 심양(尋陽)의 시상(柴桑) 사람이다. 나이 스물네 살 때 출가하여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렀다. 평소 행실이 맑고 깨끗하며, 널리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천연의 소리를 타고났다. 그런 까닭에 특히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어나는 음향에 기이함이 담겼다. 그러면서 소리를 짓는 데 일정한 기준이 없으면서도, 문장을 조목조목 나누었다. 구절을 꺾어, 소리가 곱고 아름다우며 분명하였다.

그 후 서울로 나가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경을 돌려가며 읽는 명성으로 크게 서울에서 성하였다.

만년에는 주방(朱方)의 죽림사(竹林寺)로 옮겼다. 수만 글자의 경을 외우고, 저녁마다 소리 내어 읊조렸다. 문득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튀기며, 보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송의 대명 2년(458)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1세이다.

06) 석지종(釋智宗)

지종의 성은 주(周)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사사(謝寺)에 머물렀다. 널리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았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 더욱 뛰어나, 소리가 지극히 맑고 상쾌하였다. 팔관재(八關齋)를 올리는 긴긴 밤이면, 흔히 사부대중들이 꾸벅거리며 졸음[睡蛇]이 수시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지종이 법석에 올라가 범패를 울려 구름까지 이르도록 하면, 모두 정신이 열리고 몸이 풀려 툭 트였다. 게다가 졸음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명(大明) 3년(45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31세이다.

혜보(慧寶)·도전(道詮)

당시 혜보와 도전(道詮)도 비록 같은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리 내는 법이 비슷하였다. 매우 성량이 풍부하고 가락이 높았으며, 짓고 부름에 더 취할 것이 없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문득 도전을 칭찬하니, 논의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가 때를 만났다[逢時]고 하였다.

07) 석담천(釋曇遷)

담천의 성은 지(支)씨며, 본래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건강(建康)에 임시 머물렀다. 독실하게 도교와 유교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불교의 이치에 노닐었다. 『장자』와 『노자』의 이야기를 잘하였다. 아울러 『십지론(十地論)』에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바르게 쓰는 글씨 쓰기에 솜씨가 있어, 항상 경전의 제목을 써서 보시하였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도 뛰어나, 소리의 운율이 끝이 없었다. 또한 범패를 짓는 것이 신기하기가 특히 고금에 뛰어났다. 팽성(彭城)의 왕의강(王義康)·범엽(范曄)·왕담수(王曇首)가 나란히 모두 친숙하게 교유하였다.

담천은 처음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다가, 후에 오의사(烏依寺)로 옮겼다. 범엽이 주살(誅殺)되자, 그의 문중에서 열두 사람의 상례를 치렀다. 그런데도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담천은 돈과 옷, 물건들을 거두어서 그들 여러 사람의 장례를 치렀다. 효무제(孝武帝)가 이 소식을 듣고 감탄하여 칭찬[歎賞]하면서, 서원(徐爰)에게 말하였다.

“경이 송나라 역사를 지을 때, 이 사람을 빼지 말라.”

왕승건(王僧虔)이 상주(湘州) 및 삼오(三吳)의 태수가 되었을 때, 손잡고 함께 노닐었다.

북제(北齊)의 건원(建元) 4년(48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99세이다.

법창(法暢)·도염(道琰)

당시 도량사(道場寺)에 법창, 와관사(瓦官寺)에 도염도 모두 소리가 풍부하고 애절하여 아름다웠다. 비록 담천과는 다툴 수 없었지만, 그 다음은 될 수 있었다.

08) 석담지(釋曇智)

담지의 성은 왕(王)씨며, 건강(健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풍류를 좋아하고 행동거지가 착하였다. 『노자』·『장자』의 담론에 뛰어나고, 대부분의 경론과 역사를 두루 섭렵하였다. 높고 밝은 목소리를 갖자, 자못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좋아하였다. 비록 전대의 종사들에 의거하여 모방하기는 하였지만, 홀로 빼어나게 새롭고 특이한 것이 있었다. 높은 가락은 맑게 사무쳐서 모방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와 소사화(蕭思話)·왕승건(王僧虔) 등이 모두 깊이 그를 알고 존중하였다.

왕승건이 상주(湘州) 태수로 부임할 때, 손잡고 함께 갔다. 소사화가 오군(吳郡)의 태수가 되자, 다시 불러 함께 들어갔다.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5년(487)에 오(吳)나라에서 죽었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도랑(道郞)·법인(法忍)·지흔(智欣)·혜광(慧光)

당시 또 도랑·법인·지흔·혜광이 모두가 달리 해득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 약간 뛰어났다. 도랑이 잡은 가락은 조금 느리고[小緩], 법인은 부딪쳐 끊어지는[擊切] 소리를 지니며, 지흔은 낮은 가락[側調]에 아주 뛰어나고, 혜광은 날아가는 소리[飛聲]를 좋아하였다.

09) 석승변(釋僧辯)

승변의 성은 오(吳)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경 읽기를 좋아하여, 담천(曇遷)과 법창(法暢) 두 스승에게서 수업하였다. 처음에는 비록 그들의 기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만년에는 다시 생각을 기울이고, 나름대로 짐작을 더하였다. 그리하여 애절하고 아름다운[哀婉] 소리를 절충하니, 북제의 초기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신정(新亭)의 유소(劉紹)의 집에 재(齋)가 있었다. 승변이 초저녁의 경 읽기에서 처음으로 한 번 가락을 바꾸자, 문득 무리를 이룬 학들이 내려왔다. 섬돌 아래에 모여들었다가, 승변이 책 한 권을 마치자 일시에 날라 떠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명성은 천하에 진동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 이름이 알려져, 후에 찾아온 배우는 이들이 그를 종사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명 7년(489) 7월 29일에 사도(司徒)인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꿈에 부처님 앞에서 『유마경』 한 가락을 읊조리다가, 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이에 곧 일어나 불당 안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문득 꿈속에서 본 법과 같기에, 다시 옛 『유마경』을 한 가락 읊조렸다. 문득 소리 운율의 흐름이 좋게 느껴지면서, 여느 때보다 솜씨가 났다.

이에 이튿날 아침에 곧 서울에서 좋은 소리를 지닌 사문들을 모았다. 용광사(龍光寺)의 보지(普智)·신안사(新安寺)의 도흥(道興)·다보사(多寶寺)의 혜인(慧忍)·천보사(天保寺)의 초승(超勝)과 승변 등이었다. 그들을 저택에 모아 소리를 짓게 하였다. 승변이 전한 옛 『유마경』 한 가락과 『서응경(瑞應經)』의 7언(言) 게송(偈頌) 한 가락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혹 때로 전하는 말은 모두 와전된 것으로, 그 큰 바탕을 잃은 말들이다.

승변은 복제의 영명(永明) 11년(493)에 세상을 떠났다.

승공(僧恭)

당시 중흥사(中興寺)의 승공이 승변과 명성을 나란히 하다가, 후에 도에서 물러났다[退道].

10) 석담빙(釋曇憑)

담빙의 성은 양(楊)씨며, 건위(?爲) 남안(南安) 사람이다. 어려서 서울에 노닐었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배우면서,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음성의 가락이 매우 공교로웠다. 아침이 지나도록 스스로 일을 맡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아직 그를 추대하지 않았다. 이에 오로지 규범과 법도에 정성을 쏟았다. 갈고 익히는 공부를 더하여, 만년에는 드디어 무리에서 빼어나니, 모두들 달리 보았다. 『삼본기경(三本起經)』을 외울 때는 그 소리가 더욱 좋았다.

그 후 촉(蜀)으로 돌아가서 용연사(龍淵寺)에 머물렀다. 파한(巴漢: 蜀)에서 소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가 그의 소리를 모범으로 숭상하였다. 범패 소리를 한 번 토해낼 때마다 새와 말이 슬피 울고, 길 가던 사람이 발길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동종(銅鍾)을 제조하여, 미래 세상에 항상 8음(音)1)과 4변(辯: 四無碍辯)이 있기를 원하였다. 용(庸)과 촉(蜀)에 구리로 만든 종이 있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도광(道光)

당시 촉 중에는 승령(僧令)인 도광도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약간 잘하였다.

11) 석혜인(釋慧忍)

혜인의 성은 궤(?)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북다보사(北多寶寺)에 머물렀다. 다른 행실이나 이해력은 없고, 오직 음성을 애호하였다. 처음 안락사의 승변(僧辯)에게서 수업하여, 그의 법을 갖추어 터득하였다. 그러나 구슬프고 아름다우며, 가늘고 미묘한 소리에서 특히 승변의 경지를 넘어서려 하였다.

북제의 문선왕이 꿈에 감응한 후에, 여러 경 잘 읽는 승려들을 모았다. 이에 혜인도 함께 옛 소리를 헤아리고 가려내었다. 새롭고 다른 소리를 품평하여, 『서응경(瑞應經)』에 42박자를 만들었다. 혜인이 터득한 소리가 가장 뛰어나고 미묘하였다.

이에 혜만(慧滿)·승업(僧業)·승상(僧尙)·초랑(超朗)·승기(僧期)·초유(超猷)·혜욱(慧旭)·법률(法律)·담혜(曇慧)·승윤(僧胤)·혜단(慧彖)·법자(法慈) 등 40명에게 명령하여, 모두 혜인에게 나아가 수업하게 하였다. 드디어 그 법이 지금까지 전한다.

혜인은 융창(隆昌) 1년(494)에 죽었다. 그 때 나이는 40여 세이다.

석법린(釋法隣)·석담변(釋曇辯)·석혜념(釋慧念)·석담간(釋曇幹)·석담진(釋曇進)·석혜초(釋慧超)·석도수(釋道首)·석담조(釋曇調)

석법린은 평조(平調)와 첩구(牒句)에서 궁(宮)·상(商) 음에 특이하였다. 석담변은 얼핏 보면 기특한 것이 없지만, 오래갈수록 더욱 뛰어났다. 석혜념은 기운찬 가락이 적으나, 가늘고 아름다운 소리가 특이하였다. 석담간은 상쾌한 소리가 잘게 부서지면서 부딪치고[爽快碎?], 옮겨 베끼는 듯한 법도가 있었다. 석담진도 뛰어난 부류에 들어가며, 특히 ?환국품(還國品)?을 잘 읽었다. 석혜초는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는 데 뛰어나지만, 후에는 일컬어지지 않았다. 석도수는 한 번 짧게 읽는 것은 겁을 내지만, 길게 말할 때는 볼 만하였다. 석담조는 있는 그대로 보내는 것이 맑고 우아하지만, 공부가 부족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북제시대에 이름이 알려졌다.

절좌(浙左)·강서(江西)·형주(荊州)·섬주(陜州)·용(庸)과 촉(蜀)에도 자못 경을 돌려가며 읽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당시에만 노래로 읊조려졌을 뿐, 높은 명성은 없었던 까닭에 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論】무릇 책이나 문장을 만드는 것은 가슴에 품은 회포를 유창하게 펴, 감정과 뜻을 드높여 진술하는 데 있다. 시와 노래를 짓는 것은 말의 맛을 막히지 않고 흐르게 하여, 말의 운치가 서로 이어지게 하는 데 있다. 그런 까닭에 『시전(詩傳)』의 서문에 말하였다.

“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여 말로 표현하는 것이며[情動於中而形於言], 말로는 모자라는 까닭에 읊조리고 노래하는 것이다[言之不足故詠歌之也].”

그러나 동쪽 나라의 노래는 운율을 맺어서 읊조림을 이루고, 서방의 찬(贊)은 게송을 지어서 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비록 노래와 찬의 게송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음[鍾律]과 일치하고 음계[宮商]와 부합되어야만, 비로소 오묘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쇠와 돌로 노래를 연주하면 이것을 악이라 하고, 관악기와 현악기로 찬탄을 마련하면 이것을 범패(梵唄)라 한다.

무릇 성인이 악을 만든 것에 그 공덕이 네 가지가 있다. 천지와 감응하고, 신명과 통하며, 만 백성을 인정시키고, 만물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다. 범패를 들었을 경우 이로움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 신체가 피로하지 않고, 기억한 것을 잊지 않으며, 마음이 귀찮거나 게으르지 않고, 음성이 허물어지지 않으며, 모든 천신(天神)들이 환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반차(般遮: 28 대야차의 하나)는 석실에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여, 감로법의 첫 문을 열어 주기를 청하였다. 정거천신[淨居]은 쌍림에서 춤추며 찬송하여, 일대 교화의 은덕을 받들어 갚으려 하였다.

그 사이에 때에 따라 찬탄하고 읊조린 것도 역시 곳곳에서 음악을 이루었다. 억이(億耳)가 깊은 밤중에 가늘게 소리 내고, 제바(提婆)가 범천의 궁전에서 소리를 드높인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혹 형상하려야 형상할 수 없는 가르침을 퉁소와 피리로써 천상에서 연주한 것이거니와, 혹 근본 행법의 소리를 거문고와 비파로써 하늘 아래에서 어울린 것이다.

모두가 음조의 억양으로 감응과 통하여 부처님께서도 칭찬하신 일이다. 그런 까닭에 함지(咸池)의 소무(韶武)도 그 솜씨가 짝이 될 수가 없고, 격초(激楚)의 양진(梁塵)도 그 미묘함에 비교할 수가 없다.

부처님의 교법이 동방으로 들어온 후 글을 번역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소리를 전한 사람은 적었다. 범패의 소리는 중복된 것이고, 중국어는 단순하지만 기이하기 때문이다. 만약 범패를 사용하여서 중국어를 읊는다면, 소리는 번거롭고 게송은 급박해질 것이다. 만약 중국의 곡조를 사용해서 범패의 글을 읊는다면, 운율은 짧고 말은 길어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한 것은 있으나, 범패의 소리는 전수되지 않은 것이다.

처음으로 위(魏)의 진사왕(陳思王) 조식(曺植)이 깊이 소리와 운율을 사랑하여 경의 소리에 뜻을 두었다. 이미 반차(般遮)의 상서로운 음향에 통한 다음, 다시 어산(魚山)의 신비한 지음에 감응하였다. 이에 『서응경(瑞應經)』의 본기(本起)를 줄이고 다듬어 배우는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 안에는 소리를 전한 것이 3천여 가지가 있고, 가락의 변조에 있어서는 마흔두 종류가 있다.

그 후 백법교(帛法橋)·지담약(支曇?)도 이 진사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음률을 애호해서 신령에 통하고 따로 신비한 지음에 감응하여 옛 소리를 마름질하여 변화시켰으나, 남겨진 것은 오직 열 가운데 한 가지에서 그칠 뿐이다.

석륵(石勒)이 집권한 건평(建平) 연간(330~333)에 천신(天神)이 안읍(安邑)의 청사(廳事)에 내려와, 불경을 크게 소리 내어 읊으면서 7일이 되어서야 끝냈다고 한다. 때로 이 일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나, 모두가 와전되고 버려진 소리다.

전송(前宋)·북제(北齊)시대 사이에 이르러, 담천(曇遷)·승변(僧辯)·태부(太傅) 문선왕(文宣王) 등도 모두 은근히 감탄하여 읊조렸다. 음률에 대한 뜻이 곡진하여 같고 다른 점을 모아, 엮고 분류하는 예를 짐작하여 예전 법을 본따서 보존한 것이, 바로 3백여 소리 가량 되었다.

이 때 이 후로는 소리가 많이 흩어지고 떨어져서 사람마다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보충하고 엮은 것이 같지 않다. 그런 까닭에 스승마다 법이 다르고 문중마다 지음이 각각이다. 모두가 소리의 취지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렇 지만 아무도 이를 마름질하여 바로잡지 못하였다.

무릇 음악에 의한 감동은 예전부터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그윽한 승려의 범패 소리에 붉은 기러기가 사랑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고, 비구에게서 흐르는 소리에 푸른 새가 기뻐서 날아 치솟는 일을 잊었다. 담빙(曇憑)의 운율이 움직이자 새와 말이 몸을 움츠렸고, 승변(僧辯)이 가락을 꺾으니 기러기와 학조차도 날기를 멈추었다.

사람을 헤아리면 비록 얕고 깊은 차이가 있지만, 그 감응을 헤아리면 또한 버금가는 바가 있다. 그런 까닭에 기(夔)라는 짐승이 돌을 치면, 돌을 치는 대로 모든 짐승들이 따라 춤을 추었다. 소소(簫韶: 文王 南巡 때의 음악)의 구성곡(九成曲)에는 봉황이 찾아와 춤추었다. 새와 짐승조차도 또한 감응을 이루거늘, 하물며 사람과 신(神)에 있어서랴?
다만 경을 돌려가며 읽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귀함이 소리와 글 두 가지를 모두 터득한 데 있다. 만약 오직 소리가 아름답고 글이 아름답지 않으면, 도의 마음이 생겨날 길이 없다. 만약 글만 오로지 아름답고 소리는 아름답지 않으면, 세속적 감정이 들어갈 길이 없어진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말한다.

“미묘한 음성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고 찬탄한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의 배우는 자들은 겨우 시작과 끝의 나머지 소리라도 얻기만 할라치면 말한다.

“당세에 이름을 날리노라.”

경문의 일어나서 다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는 일이 없다. 혹 구절을 허물어 소리에 합치시키기도 하고, 혹 글을 나누어 운율을 충족시키기도 하니, 이것이 어찌 오직 소리만 부족한 것이겠는가? 또한 곧 글이 표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는 오직 황홀한 기분만 불어날 뿐이어서, 듣노라면 다만 졸음만 더해진다.

무릇 이는 8진명주(珍明珠)로 하여금 가리지 않았는데도 빛남을 감추게 하고, 백 가지 맛을 갖춘 순유(淳乳)로 하여금 엷게 희석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맛을 엷게 하는 것이다. 슬프다.

만약 경의 본뜻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음률도 훤하게 밝다면, 세 자리[三位]의 일곱 가지 소리가 차례로 순서가 있어 어지러운 일이 없고, 오언사구(五言四句)의 게송이 일치하여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일으키고 던지며 휩쓸고 들어올리며, 평탄하고 꺾으며 내치고 줄이며, 노닐고 날며 물러서고 회전하며, 되돌리고 포개며 교태롭고 희롱한다. 운율이 움직이면 흐르고 쓸리는 것이 다함이 없고, 목구멍을 벌리면 변하는 흐름이 끝이 없다. 그런 까닭에 찬란히 8음을 펴고 빛나게 7선을 드날린다.

웅장하면서도 사납지 않으며, 엉키면서도 막히지 않고, 약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굳세면서도 날카롭지 않으며, 맑으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흐리면서도 가려지지 않는다. 참으로 미묘한 말씀을 자못 유창하게 일으키고, 정신과 본성을 느긋하게 길러낼 만하다. 그런 까닭에 소리를 들으면 귀가 즐거워질 수 있고, 말을 들으면 흉금을 열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범패 소리의 깊고도 미묘한 소리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할 수 있다고 말할 만하다.

천축국의 풍속은 불법의 말씀을 노래하고 읊조리면, 이것을 모두 범패(梵唄)라 한다. 그러나 이 땅에 이르러서는 경을 읊조리면 전독(轉讀)이라 하고, 노래하고 찬탄하면 범패라 부른다. 예전에 모든 천신(天神)들이 찬탄한 범패는 모두가 운율을 거문고 가락에 맞춘 것이다. 오부대중은 이미 속인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소리와 곡조로써 미묘함을 삼아야 한다.

근원적으로 말하면, 무릇 범패가 일어난 것도 진사왕(陳思王)에게서 조짐이 비롯하였다. 처음 태자송(太子頌)과 섬송(?頌) 등을 지어서, 이것을 위하여 소리를 만든 것이다. 뱉고 마시며 누르고 올림은 모두 신(神)이 전수한 것을 법삼았다. 지금의 ‘황황고유(皇皇顧惟)’는 아마도 그 기풍이 강하게 남은 것이리라.

그 후 거사(居士) 지겸(支謙)도 역시 범패 3계(契)를 전하였다. 그러나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서 남아 있지 않다. 세간에 있는 ‘공의(共議)’라는 1장(章)이 혹 지겸이 남긴 법칙인지 모른다. 오직 강승회(康僧會)가 만든 ‘열반범패(涅槃梵唄)’만은 지금까지도 전한다. 곧 경알(敬謁)이라는 한 계문(契文)이 두 권의 『열반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열반범패라 한다.

진(晋)나라 시대에 이르러 도생(道生) 법사가 처음으로 그 자취를 찾아 전수하였다. 지금의 ‘행지인문(行地印文)’이 곧 그 법이다. 담약(曇?)이 만든 육언(六言)범패는 곧 ‘대자애민일계(大慈哀愍一契)’며, 지금도 때로 이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근간 서량주(西凉州)의 범패는 근원이 관우(關右)지방에서 나와 진양(晋陽)지방에 흘러 들어온 것으로, 지금의 ‘면여만월(面如滿月)’이 그것이다. 무릇 이 모든 가락은 모두가 이름난 스승들이 제작하여 나온 것인데, 후세 사람들이 이어 부름에 대부분 와전되고 누락되었다. 때로는 사미나 어린아이들끼리 서로 전수하는 경우도 있어서, 예전에 이룩된 규칙은 거의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아쉽다. 이는 이미 다 같이 소리의 예로서 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끄트머리의 말미에 갖추어 둔다.

10. 창도편(唱導篇)

01) 석도조(釋道照)

도조의 성은 국(麴)씨며, 평서(平西)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편지를 잘 썼다. 아울러 경전과 역사에 널리 뛰어났다.

열여덟 살 때 출가하여 서울의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렀다. 뭇 경전을 열어 보았으며, 선창(宣唱)을 일삼았다. 토하는 음성은 맑고 밝아,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을 씻어 깨닫게 하였다. 일을 맡으면 때맞추어 하고 말만 앞세우지 않았다. 전송의 초기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어느 날 내전에서 재(齋)를 마련하였다. 도조는 초저녁에 간략히 말하였다.

“사람의 한평생, 백 년이란 세월은 빠르게 흘러 죽음은 갑자기 닥쳐오고, 그 사이 괴로움과 즐거움은 들쑥날쑥 고르지 않으나, 반드시 인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육도중생에 응하시듯, 폐하는 모든 백성을 쓰다듬어 어여삐 여기소서.”

황제는 말하였다.

“좋다.”

오랜 후에 재가 끝나자, 따로 3만 냥의 돈을 보시하였다. 임천왕(臨川王) 유도규(劉道規)는 그에게서 5계를 받고는, 받들어 가문의 스승으로 모셨다.

원가(元嘉) 30년(453)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6세이다.

혜명(慧明)

도조의 제자인 혜명은 성이 초(焦)씨며, 위군(魏郡) 사람이다. 마음이 뛰어나게 걸출하였다. 스승의 도풍을 그대로 이어 익혀서, 역시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02) 석담영(釋曇穎)

담영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의 행실에 삼갔다. 10여만 글자의 경을 외웠으며, 장간사(長干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오직 좋게 권유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짐짓 뜻을 선창(宣唱)에 두었다. 목소리가 천연적으로 유독 빼어났기 때문이다.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찾아갔다. 또한 빈부를 막론하고 같은 법에 따랐다. 장창(張暢)이 그의 소리를 듣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토해내는 말이 흐르듯 하여, 곧 머나먼 이치를 치솟게 할 만하다.”

담영은 어느 날 부스럼병[癬瘡]을 앓아 오래도록 치료하였다. 그러나 제거되지 않았다. 방안에서 항상 관세음보살상에 공양드리며,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면서 이 병이 낫기를 기원하였다.

훗날 갑자기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관음상 뒤에서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쥐 한 마리가 지붕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뱀이 묻힌 침으로 목욕한 것 같았으며, 모습은 이미 죽은 듯하였다.

담영이 살펴보니, 아직은 살릴 수 있을 듯하였다. 이에 곧 대나무를 갖고 와서 침을 제거하였다. 뱀이 삼킨 쥐는 부스럼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곧 뱀이 묻힌 침을 닦아내어 부스럼 부위에 발랐다. 바른 것이 두루 퍼지자 쥐도 다시 살아났다. 이틀 밤 사이에 부스럼이 완전히 없어졌다. 비로소 뱀과 쥐가 모두 관세음보살께 기원하여 요청한 덕분에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이에 부지런히 정진하며 교화하였다. 창도하여 굳센 절조가 더욱 굳어졌다. 전송의 태재(太宰)인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이 가장 알아주고 존중하였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03) 석혜거(釋慧?)

혜거는 단양(丹陽) 사람이며, 출가하여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읽고 열람하면서 역사를 섭렵하였다. 여러 잡기에도 대부분 능숙하였다. 하지만 더욱 창도(唱導)를 잘하여, 말이 나오면 문장을 이루고, 말이 움직이면 작품이 되었다. 시절에 맞게 다다르고 너르게 채택하였다. 그러니 모두 다 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전송의 태조와 문제(文帝)·거기(車騎)장군 장질(藏質)이 나란히 손잡고, 좋은 벗으로서 서로 숭상하고 사랑하였다. 그 후 초왕(?王)이 형주(荊州)에 주둔하자, 요청하여 더불어 동행하였다. 그 후 초왕은 반역하여 조정으로 돌아오다, 양산(梁山)에서 법회를 마련하였다. 얼마 후 초왕이 패배하자, 혜거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 후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재를 마련하였을 때, 혜거가 창도의 역을 맡았다. 황제가 혜거에게 물었다.

“오늘의 모임을 양산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혜거가 대답하였다.

“하늘의 도는 순리를 돕는 것인데, 하물며 반역을 위하겠습니까?”

황제는 기뻐하여 이튿날 아침 따로 1만 냥의 돈을 보시하였다. 그 후 칙명으로 서울의 도유나(都維那)직을 맡았다.

대명(大明) 말년(464)에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04) 석담종(釋曇宗)

담종의 성은 괵(?)씨며, 말릉(?陵) 사람이다. 출가하여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많은 경전에 두루 뛰어났다. 창설(唱說)의 공교함은 당시 세상에서 독보적이었다. 그의 구변은 시절에 알맞아, 변화에 응하는 재능이 끝이 없었다.

어느 날 효무제(孝武帝)를 위하여 창도의 소임을 맡아, 보살의 다섯 가지 법의 예를 행하여 마쳤다. 황제가 웃으면서 담종에게 말하였다.

“짐은 무슨 죄가 있기에, 참회를 해야 하는가?”

담종이 말하였다.

“예전에 우(虞)·순(舜)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오히려 ‘나는 그대를 보필하는 공을 어겼다’고 하였습니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도 역시 ‘만백성에게 죄가 있으면 그것은 나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왕이 허물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것은, 무릇 세상을 자신이 본받을 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덕은 지난 시대보다 뛰어나며, 성인인 우(虞)·은(殷)과 나란하십니다. 도를 실천하여 텅 비움을 생각함에서만, 어찌 홀로 예전의 성군과 다르겠습니까?”

황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 후 은숙의(殷叔儀)가 죽었을 때와 21일 동안 재 모임을 마련하였을 때에, 모두 담종을 초청하였다.

담종은 바야흐로 세상의 도는 부초와 같고 거짓되어, 은혜롭고 사랑스런 이와 반드시 헤어지게 됨을 탄식하였다. 은(殷)씨의 맑은 덕을 찬탄하고, 그 영화로움과 행복함을 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당년에 맺을 열매가 스러지고, 꽃다움을 오늘날 거두어들인 것을 아쉬워하였다.

하는 말이 지극히 처량하여, 황제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남다른 포상이 더욱 깊었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으며, 『경사탑사기(京師塔寺記)』 두 권을 지었다.

승의(僧意)

당시 영미사(靈味寺)의 승의도 창설을 잘하였다. ?섬경신성(?經新聲)?을 지었다. 애달프고도 밝은 소리가 차례가 있었다[哀亮有序].

05) 석담광(釋曇光)

담광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스승을 따라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성품과 생각이 5경(經)과 시부(詩賦)를 좋아하였다. 아울러 산수(算數)와 복서(卜筮)도 꿰뚫어,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곧 30세가 되려 하자,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종래에 익힌 것은 모두가 세속의 일이다. 불법의 깊은 진리에는 아직 털끝만치도 물들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머리를 깎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이겠는가?”

곧 예전에 일삼은 것과는 담을 쌓고, 여러 경론의 강의를 들었다. 식견과 깨달음이 보통 사람을 넘어서서, 한 번 들으면 곧 통달하였다.

전송[宋]형양(衡陽)의 문왕(文王) 유의계(劉義季)가 형주(荊州)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뜻과 논리에 뛰어난 사문을 찾아 함께 불법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경계 내에 알리니, 모두가 담광을 추천하여, 큰 임무를 맡을 만하다고 하였다. 담광이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몸소 그의 방을 찾아가 돈독하게 청하자, 마침내 명에 따랐다. 수레와 의복·인력을 공급하고 한 달에 1만 냥의 돈을 제공하였다.

당시 재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불경을 먼저 읽어주는 승려가 없었다. 왕이 담광에게 말하였다.

“중생들을 인도하려면 오직 덕이 근본이 되어야 하거늘, 상인께서 어찌 이 일을 사양하여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하시기 바라네.”

담광은 마침내 마음을 돌려 소리를 익히고, ?예참문(禮懺文)?을 지었다. 향로를 손에 잡고 대중 앞에 설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을 기울여 우러러보았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렀다. 의양왕(義陽王) 유욱(劉旭)이 외지로 나가 북쪽 서주(徐州)에 주둔하자, 담광과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유경화(劉景和)가 덕을 잃자, 의양왕이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담광이 앞일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여, 곧 7요(曜: 日·月과 水火金木土의 다섯 별)로써 담광에게 결택을 하게 하였다. 담광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일이 편안해져서 재난을 면하였다.

전송의 명제(明帝)는 상궁사(湘宮寺)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담광이 창도하는 소리를 듣고는 칭송하였다. 곧 칙명으로 옷 세 벌과 물병·발우를 하사하였다. 그 후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06) 석혜분(釋慧芬)

혜분의 성은 이(李)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특별한 지조
가 있었다. 나이 열두 살 때 출가하여, 곡숙현(穀熟縣)의 상산사(常山寺)에 머물렀다.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으며, 고행이 정밀하고 뛰어났다. 재 모임에 갈 때마다, 항상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양(梁)·초(楚) 사이에서는 모두가 그의 교화를 받들었다.

북위(北魏)가 불법을 훼멸하자, 곧 남쪽 서울로 돌아왔다. 오강(烏江)에 이르자, 추격하는 말이 곧 그에게 미쳤다. 강기슭에는 건네주는 배가 없었다. 혜분이 일심으로 염불하니, 갑자기 배 한 척이 문득 흘러와 이르렀다. 그것을 타고 재난을 면하였다. 서울에 이르러서는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당시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던 원민손(袁愍孫)이 항상 생각하였다.

‘도인은 편벽하고 고집이 있어, 더불어 논의할 만한 대상이 못된다.’

마침내 측근에게 명하여 승려들을 찾기를 기다려, 한 번 이야기해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혜분이 그곳에 이르렀기에, 원민손이 먼저 삼승사제(三乘四諦)의 논리를 물었다. 문득 노자·장자와 공자·묵자의 요점을 말하였다. 혜분은 평소에 이미 경서에 빼어났다. 또한 토해내는 음성이 물 흐르듯 편하여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도록 원민손이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이에 그를 공경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자제들 모두가 그에게서 계를 받게 하였다.

혜분은 또 신령한 주문에 뛰어나, 그가 다스리는 병은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그 후 병이 위독하여 환약을 복용할 적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셔보라고 권하였다. 혜분이 말하였다.

“오랜 세월 계율을 지켜왔거늘,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절개를 허물겠느냐?”

그리고는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떠난다.”

북제의 영명(永明) 3년(485) 흥복사(興福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임종 때, 훈계를 내린 유언장이 있다고 한다.

07) 석도유(釋道儒)

도유의 성은 석(石)씨며, 발해(渤海) 사람이다. 광릉(廣陵)에 임시 머물 렀다. 어려서부터 맑은 믿음을 품고, 출가하기를 그리워하며 즐겨하였다. 전송의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이 남쪽 연주(袞州)에 주둔하는 때를 만나, 도유가 이 일을 알렸다. 왕이 그의 뜻에 찬성하여, 출가의 길을 열어 도첩(度牒)을 내렸다.

출가한 후에는 푸성귀를 먹으면서 경을 읽고 외웠다. 가는 곳마다 모두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악한 마음을 고쳐 선한 길을 닦게 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를 종사로 받들어, 마침내 창도하는 승려가 되었다. 말할 때 미리 준비하는 일이 없고, 소리를 내면 그것이 문장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서울로 나와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장사왕(長沙王)이 청해서, 계율을 내려주는 스승으로 삼았다. 노승상(盧丞相)·백중손(伯仲孫) 등이 함께 장경아(張敬兒)의 옛 사당을 사서, 도유를 위하여 절을 세웠다. 지금의 제복사(齊福寺)가 그것이다.

도유는 복제의 영명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승희(僧憙)

당시 한심사(閑心寺)의 승희(僧憙)도 창설을 잘하였다. 전송 말기와 북제 초기에 명성을 떨쳤다.

08) 석혜중(釋慧重)

혜중의 성은 민(閔)씨며, 노국(魯國) 사람이다. 금릉(金陵)에 임시 머물렀다. 일찍부터 슬기로운 믿음을 품고 도를 따를 뜻이 있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래도록 재(齋)를 열고 채식을 하였다. 대중을 거느리고 재의 모임을 가질 때마다, 항상 스스로 창도를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거듭하니, 마침내 위로 전송의 효무제(孝武帝)에게 알려졌다. 대명(大明) 6년(462)에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에서 출가하였다. 이에 오로지 창도의 일을 담당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민첩하였다. 식견과 깨달음이 깊고 침착하여, 말을 미리 꾸미지 않았다. 때에 응하여 쏟아 붓는 듯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곳에 머물러, 이틀 밤을 자면서 더욱더 간곡히 찾아갔다.

그 후 자리를 옮겨 와관사(瓦官寺)의 선방에 머물다가, 영명(永明) 5년(48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법각(法覺)

당시 와관사의 법각도 혜중의 일을 도탑게 하였다. 역시 북제시대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09) 석법원(釋法願)

법원의 본래 성은 종(鍾)씨며, 이름은 무려(武慮)이다. 선조는 영천(穎川)의 장사(長社) 사람이다. 조부 대에 난을 피하여 오흥(吳興)의 장성(長城)에 옮겨 살았다. 법원은 항상 매근치감(梅根治監)이 되었는데, 시신민(施愼民)이 와서 교대하였다. 이에 앞서 문서를 교열하지 않아, 시신민이 마침내 홀로 그 책임을 졌다. 법원은 곧 소를 올려 죄를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상부에서 교지가 내려, 시신민은 죽음을 면하고, 법원은 신도(新道)의 수령이 되었다.

집에서 본래 신(神)을 섬겼기에, 몸소 북치고 춤추는 것을 익혔다. 세간의 잡기와 노장들이 하는 점치고 관상 보는 일[耆父占相]들을 모두 갖추어, 그 묘를 다하였다. 어느 날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보고 말하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아마도 천자(天子)를 만날 것이다.”

이에 서울로 나가 침교(沈橋)에 머물면서, 관상 보는 품을 팔아 일삼았다[庸相自業]. 종각(宗殼)과 심경(沈慶)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 지나다가, 법원에게 상을 보아달라고 청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종군(宗君)은 세 고을의 자사(刺史)가 될 것이고, 심군은 벼슬이 3공(公)까지 다할 것이오.”

이와 같이 돌아가며 많은 사람의 상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다. 징험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침내 전송의 태조(太祖)황제에게 알려져 태조가 그를 알현하였다. 동쪽 감옥에 있는 죄수와 얼굴이 아름다운 한 노비를 데려 와서, 의관으로 몸을 장식하게 하였다. 법원에게 관상을 보게 하였다. 법원은 죄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대는 위태하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계단만 내려서면 아마도 곧 쇠사슬을 찰 것이다.”

노비에게는 말하였다.

“너는 하천(下賤)한 사람이다. 이에 잠시 면하였구나.”

황제는 경이롭게 생각하였다. 곧 칙명을 내려 후당(後堂)에 머물면서, 음양비술(陰陽秘術)을 맡게 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 상계하여 출가하기를 구하였다. 세 번 상계하여 비로소 바람을 이루어, 상정림사(上定林寺) 승원(僧遠)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효무제(孝武帝)가 등극하자, 종각(宗殼)이 지방으로 나가서 광주(廣州)에 주둔하였다. 법원과 손잡고 함께 갔으며, 받들어 5계(戒)의 스승으로 삼았다.

때마침 초왕(?王)이 역모를 꾸며 영남 땅에 격문을 날려 보냈다. 종각이 이 일로 법원에게 물어보니, 법원이 말하였다.

“그대를 따라 왔다가 잘못하면 사람을 죽이겠다. 지금 태백성(太白星)이 남두성(南斗星)을 침범하니, 법으로 미루건대 아마도 대신을 죽일 것이다. 속히 계획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큰 공훈을 얻을 것이다.”

과연 법원의 예언과 같았다. 종각이 예주(豫州)자사로 자리를 옮길 때도, 다시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이 거사하려 할 때 법원이 간언(諫言)을 진술하니, 역시 그러하였다. 그 후 법원은 자사와 함께 승려들의 걸상 다리의 높이를 줄여서, 여덟 손가락 정도로 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문 승도(僧導)는 강서 지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법원이 함부로 승려들을 바로잡으려 한다고 생각하여 자못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던 터이다. 마침내 이 사실을 효무제에게 알렸다. 효무제는 곧 칙명을 내려 법원을 서울로 돌아오게 하고, 법원에게 물었다.

“왜 거짓으로 채식을 하는가?”

법원이 대답하였다.

“채식한 지는 이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직합(直閤) 심유지(沈攸之)를 시켜 강제로 핍박하여, 고기를 먹이 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앞니 두 개가 부러졌으나, 그의 지조를 돌리지는 못하였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칙명을 내렸다. 도를 그만두고 광무(廣武)장군이 되어 화림불전(華林佛殿)을 지키게 하였다.

법원은 비록 겉모습은 속인과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선(禪)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훼절한 일이 없었다. 얼마 후 황제가 죽자 소태후(昭太后)가 명령하여, 도문으로 돌아가는 일이 허용되었다.

태시(太始) 6년(470)에 교장생(?長生)이 자기의 저택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정승사(正勝寺)라 이름지어, 법원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북제(北齊)의 고조(高祖)황제가 황제 되기 전에 친히 어린 임금을 섬겼다. 그러면서 항상 헤아릴 수 없는 변고가 있을까 근심하여, 늘 법원에게 자문 받았다. 법원이 말하였다.

“일곱 달 뒤가 되면, 결정이 날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북제의 고조황제는 즉위하자 스승의 예로 섬겼다. 무제(武帝)가 이어받아 일어나서도, 역시 스승으로 공경을 다하였다.

영명(永明) 2년(484)에 형의 상(喪)을 만나, 나라에 상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고향에 이르러 얼마 되지 않았건만, 칙지(勅旨)가 중첩하였다.

그 후 법원은 서울로 나와 상궁사(湘宮寺)에서 쉬었다. 황제가 가마로 친히 납시어, 절로 내려와 문안하고 위로하려 하니, 법원이 말하였다.

“다리의 병이 없어지지 않아서, 만나는 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황제는 마침내 말머리를 되돌려 절을 떠났다. 어느 날 문혜(文惠)태자가 절에 가서 문안을 드렸다. 법원이 앉으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혜태자는 절을 하고 서서, 법원에게 말하였다.

“나팔을 성대하게 불며 바라를 맑게 쳐서 공양한다면, 그 복이 어떻습니까?”

법원이 말하였다.

“예전에 보살이 8만의 기악(伎樂)으로 부처님께 공양드려도, 오히려 지극한 마음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나무 관(管)을 불며 죽은 소가죽을 치는 것이야, 여기에서 어찌 말할 만하겠습니까?”

그의 덕을 지키고 시대에 초연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후·비·공주 및 사방 먼 곳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그에게서 계를 받고, 모두가 스승의 예를 따랐다. 법원은 길을 갈 때는 반드시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속인들과 사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여 하루에 수만 명씩 가득했다.

법원은 얻는 것에 따라 복업을 닦았다. 한 번도 저축하거나 모으는 일이 없었다. 혹 사람을 고용해서 예불하거나, 혹 사람을 빌려 재를 유지하거나, 혹 쌀과 곡식이 들어오면 물고기와 새들에게 흩어 먹거나, 혹 음식을 사들여와 죄수들의 무리에 베풀어 주었다. 공을 일으키고 덕을 세운 수효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법원은 또한 창도를 잘하고, 경에 근거하여 설법을 잘하였다. 마음 속 폐부로부터 우러나온 솔직한 음성으로 음률을 일삼지 않았다. 말은 잘못되고 뒤섞여도, 오직 기연에 맞는 것을 잣대로 삼았다. 그러니 “그 지혜에는 미칠 수 있어도[其智可及], 그 어리석음에는 미칠 수 없구나[其愚不可及]”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 후 사흘 동안 입정(入定)하다가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밥 소쿠리를 잃는구나.”

갑자기 병으로 누웠다. 이 때 절 가까이에서 화재가 났다. 절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연기와 화염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법원을 가마에 태워 절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불타게 된다면, 내가 어찌 살 수 있겠느냐?”

곧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이에 삼면이 모두 불탔으나, 오직 절만은 잿더미가 되지 않았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나이 87세로 세상을 마쳤다.

10) 석법경(釋法鏡)

법경의 성은 장(張)씨며, 오흥(吳興)의 오정(烏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즐겼다. 그러나 아직 도를 따르지는 못하였다.

혜익(慧益)이 몸을 불사르면서 황제에게 스무 사람에게 도첩을 내려 출가
시켜달라고 아뢰는 일을 만났다. 법경이 곧 그 중 한 사람에 들어서, 법원(法願)을 스승으로 삼았다.

이미 도에 들어서자, 그가 밟는 지조는 얼음과 서릿발 같았다. 어진 마음으로 베풀 생각을 품고, 널리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에 창도를 갈고 익히니 과거보다 뛰어남이 있었다. 북제의 경릉(竟陵) 문선왕이 후하게 예로 대접하였다.

법경은 도를 널리 펴기로 마음에 맹서하였다. 귀천을 가리지 않아, 초청하면 반드시 그 곳에 갔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았다. 사사로이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항상 복된 일을 일으켰다. 건무(建武) 연간(494~497) 초기에 신도의 보시로 제륭사(齊隆寺)를 세워, 그곳에 머물렀다.

법경은 성품이 도탑고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며 접대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도인과 속인들이 서로 알고, 그를 사랑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교리를 이해하는 공부는 얕았으나, 하지만 빼어난 깨달음이 자연스러웠다. 그를 비웃고 힐난하는 순간에도,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수작이 있었다.

그는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도친(道親)·보흥(寶興)·도등(道登)

후에 와관사(瓦官寺)의 도친·팽성사(彭城寺)의 보흥·기사사(耆?寺)의 도등이 나란히 모두 선창하는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고상한 운율과 화려한 말솜씨가, 이전의 예에다 덧붙여질 정도는 아니었다[非添前例]. 그러나 대중을 기울게 하고 남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는, 전대에 뒤진다고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이 말하였다[論者後之].

금상폐하께서는 장사(長沙)의 선무왕(宣武王)을 위해서, 법경이 머물던 절을 수리하였다. 이름을 바꾸어 선무사(宣武寺)라 하였다.

【論】창도(唱導)란 대개 불법의 논리를 먼저 읽어줌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열어 이끄는 일을 말한다. 예전에 불법이 처음 전래되자, 함께 모인 사람 들은 다만 부처님의 이름을 먼저 읽으면서 글에 의거하여 예를 드리다가, 밤중이 되면 극도로 피곤해져서 몽매함을 깨우쳐 이끌어 주는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로 노련하고 덕이 있는 이를 초청하여 법좌에 올라가 설법을 하게 하였다. 혹 인연을 뒤섞어서 서술하기도 하고, 혹 한편으로 비유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도업이 곧고 빛나며 재주 있는 풍모가 우뚝 빼어났다. 재(齋)모임에 이를 때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 몸소 도수(導首: 唱導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먼저 3세의 인과를 밝히고, 문득 재 모임의 큰 뜻을 말하였다. 후대가 전수받아 마침내 영원한 법칙을 이루었다. 그런 까닭에 도조(道照)와 담영(曇穎) 등 10여 명이 모두 나란히 차례대로 스승이 되어, 각기 당세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무릇 창도에서 귀중히 여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다. 즉 목소리와 말솜씨와 재능과 박식함이다[聲辯才博]. 목소리가 아니면 대중을 깨우칠 길이 없고, 말솜씨가 아니면 시절에 맞게 할 길이 없으며, 재능이 아니면 채택할 만한 말이 없고, 박식하지 않으면 말에 근거가 없다.

만약 울리는 운율이 종이나 북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 사부대중의 마음을 놀라게 한다면, 이것은 목소리의 작용이다. 토해낸 말이 나가서 시절에 적합하여 차질이 없다면, 말솜씨의 작용이다. 아름답게 만들고 빛나게 아로새겨 문장이 자유자재로 빼어나다면, 재능의 작용이다. 경론을 정확히 헤아리고 역사에서 요점을 채택한다면, 박식함의 작용이다. 만약 이 네 가지 일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면, 사람과 시대에 적절히 부합시킬 수 있다.

가령 출가한 오부대중을 위해서는, 모름지기 절실하게 덧없음을 말해 주어서, 간곡하게 참회를 베풀어야 한다. 만약 군왕과 장자(長者)들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세속의 고전까지 아울러 인용하여, 아름답게 말을 모아 문장을 이루어야 한다. 만약 아득히 먼 범부와 서민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사물을 지적하고 형태를 만들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만약 산중의 백성과 들판에 처한 농민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그에 해당하는 말로써 피부에 닿게 설하여, 죄를 배척하게 하여야 한다.

무릇 이러한 변화는 일과 더불어 일으켜야만, 시절을 알고 대중을 알아,
더욱더 훌륭하게 설법을 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짐짓 말이 간절함으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정성을 기울여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가장 상등급에 속한다.

예전 초창기의 고승들은 본래 여덟 개로 나누어 전기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이내 경사(經師)와 창도의 두 기능을 더 경영하였다. 비록 이것이 도에 있어서는 끝자리에 속하지만, 속인을 깨닫게 하는 데서는 숭상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두 조항을 더하여 열 가지로 전기를 충족시킨 것이다.

왜 그런가? 가령 팔관재(八關齋)의 첫날 저녁에 이르러, 선요(旋繞: 부처님의 주위를 도는 일)하여 두루 도는 것이 끝나고, 안개가 덮이며 분위기가 가라앉아 등불만이 홀로 고요히 빛나면, 사부대중이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두 손을 모으고 입을 다물어 말이 없어진다.

그 때 창도하는 이는 향로를 받쳐 들고, 강개한 목소리로 머금고 토하며 누르고 드러낸다. 말솜씨가 궁하지 않아야, 말이 마땅히 끝없이 나아간다. 그리하여 덧없음을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전율케 한다. 지옥을 말하면, 공포와 눈물이 바꾸어가며 떨어진다. 전생의 인연을 따지면, 마치 지난날의 일을 보듯 한다. 다가올 과보를 파헤치면, 이미 미래의 과보가 보인다. 느긋하고 즐거운 일을 이야기하면, 정과 포부가 화창하고 흐뭇해진다. 애처롭고 슬픈 일을 서술하면, 눈물을 뿌리며 시린 감정을 머금는다.

이에 모든 대중이 마음을 기울이고 온 법당 안이 측은한 슬픔에 잠기리라. 오체를 자리에다 던지면서 머리가 부서져라 슬픔을 말하고, 각각 손가락을 튀기며 사람마다 부처님을 부르리라.

그리하여 한밤중에서 새벽에 이르러 종루(鍾漏)가 곧 파하면, 별자리와 은하수가 바꾸어 회전하여 거룩한 모임도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하여서, 더욱더 사람들로 하여금 절박한 회포로 가득하여 연모의 정을 싣게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를 담당하는 것이 도사의 작용이다.

그 사이에 경사(經師)의 전독(轉讀)에 관한 일은 앞장에서 이미 보였다. 모두가 깨달음을 칭송하고, 시절에 때맞추어 사악한 마음을 뽑아내며, 믿음을 세워서 한 푼이라도 칭송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에, 『고승전』의 말미에 편입한 것이다.

무릇 모아 익힌 것이 아직 넓지 못하고, 외우고 연구한 시간이 길지 않아, 때에 다다라 민첩한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땅히 옛 것을 따라서 써야 한다.

그러나 재능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제작도 다른 사람에게서 이루어진 경우에는, 음률을 붙여서 토하고 들이쉬는 소리에 걸핏하면 허물과 잘못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는 전해서 베껴 쓰는 과정에서 와전되고 틀린 것도 모두 그것에 의거하여 부르고 익히게 된다. 마침내 어(魚) 글자와 노(魯) 글자처럼 잘못 읽어서 뒤섞여 어지러우니, 서박(鼠璞: 無用之物)이라 의심하게 만든다.

혹 때로는 예배드리는 중간에 예참하라는 소(疏)가 문득 이르면, 미리 준비하여 저축한 것이 없으므로, 부끄럽게 머리를 숙인다. 임시로 뽑아내 만든 말은 더듬거리고 껄끄러워 말하기 어렵다. 뜻과 생각이 거칠고 멍해져서,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나고 뒤틀린다. 앞에서 한 말이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뒤에 이을 말은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한다. 옷을 추스르고 기침을 하면서 때를 연장시키려는 태도를 보여, 자리에 줄지어 앉은 사람들이 한심해서 보는 도중에 이를 드러내어 웃는다.

시주는 시절에 응한 복을 잃고, 대중승려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어, 착함이 생기는 싹이 끊어진다. 오직 부질없는 의론의 의혹만이 불어나고, 비로소 함부로 나불거린다는 비난을 사므로, 끝내는 종사를 교대시키는 허물을 이루고야 만다.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고승이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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