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6. 청정혜보살장
수행의 계위이에 청정혜보살(淸淨慧菩薩)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정례하며 오른쪽으로 세 번 돌고 무릎을 세워 꿇고 합장하고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비하신 세존께서 저희들을 위하시어 널리 이같은 불가사의한 일을 설해 주시니, 본래 보지 못한 바이며 본래 듣지 못한 바입니다. 저희들이 이제 부처님의 간곡하신 가르침을 받고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 큰 요익을 얻었습니다.
원하오니 이 법회에 온 일체 대중들을 위하여 법왕의 원만한 각성(覺性)을 거듭 말씀해주소서. 일체 중생과 모든 보살들과 여래 세존의 증득하는 바와 얻는 바가 어떻게 차별합니까? 말세 중생들로 하여금 이 성스러운 가르침을 듣고 수순 개오하여 점차 능히 들어가게 하소서.”
이렇게 말하고는 오체투지하며 이와 같이 세 번 거듭 청하였다.
그때에 세존께서 청정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재선재라, 선남자여.
그대들이 이에 모든 보살들과 말세 중생들을 위해서 여래에게 점차와 차별을 물으니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그대를 위하여 설하리라.” 이에 청정혜보살이 가르침을 받들어 기뻐하면서 대중들과 조용히 들었다.
“선남자여, 원각자성은 성(性)이 아닌 성으로 있어서 모든 성을 따라 일어나니 취함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지라, 실상 가운데에는 실제로 보살과 모든 중생들이 없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과 중생이 다 환화(幻化)이니, 환화가 멸하므로 취하고 증득할 자도 없느니라.
비유하면 안근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함과 같아서 성품이 스스로 평등하여 평등한 자가 없느니라. 중생이 미혹하고 전도되어 능히 일체 환화를 제하여 멸하지 못하니, 멸함과 멸하지 못함에 대한 허망한 공용(功用) 가운데 문득 차별을 나타내거니와, 만약 여래의 적멸에 수순함을 얻으면 진실로 적멸함과 적멸한 자도 없느니라.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옛부터 망상의 나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말미암아 일찍이 스스로 생각에 생하고 멸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미워하고 사랑함을 일으켜서 오욕에 탐착하느니라. 만약 선우(善友)가 청정한 원각의 성품을 가르쳐 깨닫게 함을 만나서 일어나고 멸함을 밝히면 곧 이 삶의 성(性)이 스스로 노고로운 줄 알게 되리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노고로움이 영원히 끊어져서 법계의 청정함을 얻으면 곧 그 청정하다는 견해가 자기의 장애가 되어서 원각에 자재하지 못하니, 이것을 범부가 원각의 성품에 수순하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일체 보살이 견해가 장애가 됨에 비록 견해의 장애[解碍]를 끊었으나 오히려 깨달음을 보려는데 머물러서 깨달으려는 장애[覺碍]가 걸림이 되어 자재하지 못하니, 이것을 보살로서 지(地)에 들어가지 못한 자가 원각의 성품에 수순하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선남자여, 비춤이 있고[有照] 각이 있음[有覺]을 모두 장애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깨달음에 머무르지 아니하여 비추는 것과 비추는 자가 동시에 적멸하느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그 머리를 끊음에 머리가 이미 끊어진 까닭에 능히 끊는 자마저 없는 것과 같다. 곧 장애가 되는 마음으로 스스로 모든 장애를 멸함에 장애가 이미 멸하면 장애를 멸하는 자도 없다.
수다라의 가르침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으니 만일 다시 달을 보면 가리킨 것은 필경 달이 아님을 분명히 아는 것과 같아서, 일체 여래의 갖가지 언설로 보살들에게 열어 보임도 이와 같다.
이것을 보살로서 이미 지(地)에 들어간 자가 원각의 성품에 수순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선남자여, 일체 장애가 곧 구경각이니 얻은 생각과 잃은 생각이 해탈 아님이 없으며, 이루어진 법과 파괴된 법이 모두 이름이 열반이며, 지혜와 어리석음이 통틀어 야가 되며,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한가지 보리며, 무명과 진여가 다른 경계가 없으며, 모든 계, 정, 혜와 음, 노, 치[淫怒癡)가 함께 범행이며,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며, 지옥과 천궁이 다 정토가 되며, 성품이 있는 이나 없는 이나 모두 불도를 이루며, 일체 번뇌가 필경 해탈이라, 법계 바다[法界海]의 지혜로 모든 상을 비추어 요달함이 마치 허공과 같으니, 이것을 여래가 원각에 수순하는 것이라 이름하느니라.
선남자여, 다만 모든 보살과 말세 중생이 일체시(一切時)에 머물러서 망념을 일으키지 말며, 또한 모든 망심을 쉬어 멸하려 하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알려고 하지도 말며, 요지할 것이 없음에 진실함을 분별하지도 말지니라. 저 중생들이 이 법문을 듣고서 믿고 이해하고 받아 지녀[信解受持] 두려움을 내지 않으면, 이것이 곧 원각의 성품을 수순함이니라.
선남자여, 그대들은 마땅히 알아라. 이러한 중생들은 이미 일찍이 백천만억 항하사 모든 부처님과 대보살들에게 공양하여 온갖 공덕의 근본을 심었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시되 이 사람은 이름이 일체 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함이라고 하시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청정혜여, 마땅히 알아라. 원만한 보리의 성품은 취할 것도 없고 증득할 것도 없으며 보살과 중생도 없으나 깨닫고 깨닫지 못할 때에 점차 차별이 있으니 중생은 견해가 장애 되고 보살은 깨달음을 여의지 못하며 지(地)에 들어간 이는 영원히 적멸하여 일체상에 머물지 않음이요 대각은 다 원만하여 이름이 두루 수순함이 되느니라.
말세의 중생들이 마음에 허망함을 내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이러한 사람은 현세에 곧 보살이라 항하사 부처님께 공양하여 공덕이 이미 원만했다고 하시니라.
비록 많은 방편이 있으나 다 수순하는 지혜[隨順智]라고 이름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