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38~1715) 조선 스님 호는 월저(月渚). 속성은 유(劉). 평양 사람. 10세에 천신(天信)에게 승려가 되었다. 풍담(楓潭)에게 가서 서산(西山)의 밀전(密傳)을 받았다. 1664년 묘향산에 들어가 『화엄경』의 대의를 강구하였다. 종풍(宗風)을 드날릴 적에 청중이 많아서 그 당시에 처음 보는 법회라 하였다. 대승 경전을 간행하여 도속(道俗)에 펼쳤다. 1697년(숙종 23) 옥사(獄事)에 무고(誣告)를 입었으나 왕명으로 특사되었다. 78세에 입적하였다. 저서는 『월저집(月渚集)』. (2) (314~385) 불교 개척자. 중국의 상산(常山) 부류(扶柳) 사람. 성은 위(魏).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2세에 출가. 총명하였으나 용모가 너무 못생겨 스승에게서 귀염도 받지 못한 채, 논밭에서 일하기 3년. 어떤 날 밭일하던 여가에 『변의경(辯意經)』과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을 배운 뒤 곧 외워서 스승을 놀라게 하였다. 유학이 허락되어 불도징(佛圖澄)을 스승으로 섬기고, 법제(法濟) · 지담(支曇) 등에게 배웠다. 대법(大法)을 널리 펼치기 위하여 문인들을 양주 · 촉 · 나부산 등지에 보내고, 또 혜원(慧遠) 등 4백인을 거느리고 양양(襄陽)에서 전도하였다. 여러 경전 가운데 잘못된 곳을 개탄하여, 『반야경(般若經)』 · 『도행경(道行經)』 · 『밀적경(密跡經)』 · 『안반경(安般經)』 등의 문구를 비교하여 시작되고 끝나는 뜻을 밝혔다. 그때의 모든 경전이 역자와 번역 연대가 미상한 것을 상고하여 경연(經緣)을 작성하였다. 사방의 학자가 다투어 그 문으로 모였다. 그가 있는 백마사(白馬寺)로는 수용할 수 없어, 단계사(檀溪寺)를 새로 지었다. 진왕(秦王) 부견(符堅)은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군대로 양양을 포위하고 장안(長安)으로 초청하여 오중사(五重寺)에서 경전을 번역 · 강론케 하였다. 그의 학설은 반야(般若)의 공론(空論)을 주장하였다. 중국 초기의 불교는 주로 인도와 서역에서 온 승려에 의하여 개척되었는데, 도안 때부터 중국인에 의하여 중국 불교가 일어났다. 경전을 해석하는데 서분(序分) · 정종분(正宗分) · 유통분(流通分)의 3분과목을 창설하였고, 석(釋)을 승려의 성으로 하여야 옳다는 것 등을 주장하였다. 진(秦)의 건원 21년, 72세로 입적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인수보살(印手菩薩)이라 불렀다. 저서는 『반야절의략(般若折疑略)』 · 『대십이문주(大十二門註)』 · 『음지입주(陰持入註)』 · 『종리중경록(綜理衆經錄)』 · 『서역지(西域志)』 등 20여 부가 있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