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2~1633) 조선 스님. 호는 진묵(震?)으로 만경 불거촌 사람. 7세에 전주 서방산 봉서사에서 출가. 내전(內典)을 배울적에 한번 보기만 하면 외웠다고 함. 봉곡 김동준(金東準)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한 번은 봉곡이 『통감』 한 질을 빌려주고 동자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였더니, 스님이 길을 가다가 한권 씩 빼어 보고는 길에 던지는 것을 동자가 주어 모았다. 절까지 가는 동안에 한 질을 다 보았다 한다. 후에 봉곡이 책을 던진 일을 물으니 “고기를 잡고는 통발을 버리는 것 아닌가!” 하였고, 봉곡이 한 권씩 내어 시험하니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한다. 변산의 월명암, 전주 대원사, 원등암에 있었는데, 신중단(神衆壇)에 분수(焚修)하던 일, 창원 마산포의 아가씨가 죽어서 기춘(奇春)이가 되어 시봉하던 일, 늙은 어머니가 있던 왜막촌의 모기 쫓던 일, 술 걸르던 중이 금강신의 철퇴를 맞던 일, 월명암에서 시자를 속가에 보내고 능엄삼매에 들었던 일, 청량산 목부암의 인등불이 월명암에 비치던 일, 전주 아전이 공금을 흠포하고, 나한전에 재공(齋供)하고 빚 갚던 일, 라한이 사미로 화신하여 낙수천(樂水川)을 건너던 일, 소년들 천렵하는데 갔다가 고기죽을 먹고 배변하던 일, 부곡(婦谷)의 사냥군에게 소금 보내 주던 일, 쌀뜨물을 뿜어서 해인사의 불을 끄던 일, 대둔사 중의 발우에 밥을 담아 보내어 공양하던 일, 송광사 · 무량사 불사에 주장자와 염주를 보내어 증명하던 일 등 신기한 일이 많았다 한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만경 북면 유앙산에 묻었는데 그 분묘를 소제하고, 향화하면 그해 농사가 잘 된다고 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이 춘추로 와서 벌초하고, 보토하므로 지금까지도 향화가 끊지지 않는다고 함. 1929년 이순덕화(李順德華) 신도가 분묘 곁에 조사전(祖師殿)을 짓고, 비를 세웠다. 인조 11년에 나이 72세로 입적. 저서로는 『어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