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정사(精舍)
공양이 끝나자 빈비사라 왕은 속으로 생각했다. ‘세존께서 거처하실 곳으로는 어디가 알맞을까? 그곳은 도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왕래하는 데 편리하여서 법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기가 쉬워야 하겠다. 그리고 낮에는 번거롭지 않고 밤에도 시끄럽지 않아서, 한가히 있으면서 명상하기에 적당한 곳이라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왕은 저 베루바나(竹林園)가 그 조건에 들어맞음을 발견했다. 왕은 물병을 들어 세존의 손에 물을 부으면서 말했다.
“나는 세존을 비롯한 비구의 대중에게 베루바나를 기증하고 싶습니다. 원컨대 받아 주시옵소서.”붓다는 잠자코 이를 받으셨다. (南傳 [律藏] 大品 1. 漢譯, [四分律] 32)
붓다와 그 제자들의 일상생활을 될 수 있는 한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정사(精舍)에 대한 것을 약간 서술해 보고자 한다.
붓다와 그 제자들의 정사로서 맨 처음에 이룩된 것은 이른바 죽림정사이며, 그것을 기증한 사람은 마가다 국의 빈비사라 왕과 그 나라의 어느 부자였다. 빈비사라 왕과 붓다는 그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붓다가 라자가하 근처에서 수행하고 있던 무렵, 그 모습을 멀리서 본 왕은 붓다를 판다바 산 바위굴 속으로 찾아가서 벼슬하기를 권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자자한 소문에 의하건대 그 수행자는 최고의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붓다가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경은 그것을 이렇게 써놓았다.
“사문 고타마는 사캬 족의 아들로 출가하여 이 서울 교외에 살고 있다 한다. 명성이 매우 높아서,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應供),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五覺者), 인천의 스승(人天師)이라 일컬어지며, 그 설하는 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 조리와 표현을 아울러 갖추었으며, 원만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가르친다 한다. 이런 성자를 뵙는 사람은 참으로 다행이다.”
왕은 이리하여 곧 붓다를 찾아가서 설법을 듣고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을 초청해서 정성껏 공양하기를 잊지 않았다. 앞에 인용한 일절은 그 공양이 끝난 다음에 왕이 베루바나를 기증하겠다고 신청하는 장면을 서술한 글이다. 이렇게 왕이 기증한 땅에 라자가하의 부호가 집을 지어 바침으로써 불교 최초의 정사가 완성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그 일절을 인용한 것은 그것이 정사의 환경에 대한 기본적인 조건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 까닭이다.
그것은 첫째로 도시의 교외, 즉 거리로부터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것이 적당하다고 되어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기 쉽게 하여 주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붓다나 제자들이 고요히 살면서 명상하는 데 어울리는 곳이라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절이 산중 깊숙이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거리 속에 묻혀 있거나 한 오늘의 현실에서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것은 어쨌든 그런 장소란 그렇게 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하여 심사숙고한 끝에 베루바나가 왕 자신의 뜻에 의해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조성된 기원정사의 위치를 잡는 데에 사바티의 부호 아나타핀디카(給孤獨), 즉 스다타(須達多)가 매우 애썼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로서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 사람은 당시 중인도의 여러 도시 사이를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내왕하면서 무역에 종사하고 있던 큰 상인이었다. 그는 마침 상업상의 용무로 라자가하에 왔다가, 앞에 나온 그곳의 부호로부터 붓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는 곧 붓다를 찾아가 보았더니 아주 훌륭한 성자이었으므로, 내년의 우안거(雨安居)는 사바티에서 보내 주시소서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정사를 지을 필요가 생겨 그런 조건을 구비한 땅을 찾다가 보니, 제타(祇陀)라는 왕자가 갖고 있는 숲이 적당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왕자는 절대로 팔려고 들지 않았다.
“왕자님, 부디 그 숲을 저에게 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거기에 정사를 짓고자 합니다.”
“장자여, 그대가 황금을 그 위에 깔아 놓는다면 몰라도 그 토지는 넘겨 줄 수 없소.”
팔아라, 못 팔겠다하여 옥신각신한 끝에 아나타핀다카는 마침내 법정에 호소했다. 그만큼 그는 그 땅이 탐났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재판을 담당한 대신의 판결이었다.
“왕자께서는 이미 값을 말씀하셨습니다. 황금을 그 위에 깔아 놓으라고 값을 부르신 이상 팔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고대 인도의 상(商)도덕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나타핀디카는 황금을 수레로 싣고 와서 그것을 땅에 깔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번 실어 온 것으로는 모자랐으므로 계속해서 자꾸 황금을 날라 왔다. 이것을 보고 있던 왕자는 경탄하고 감동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원컨대 나에게도 일부의 땅을 남겨 달라. 나도 기증하겠으니.”
이리하여 이 정사는 ‘제타(祇陀) 왕자의 숲에 이룩된 아나타핀디카(給孤獨)의 정원에 있는 정사’, 즉 ‘기수급고독원 정사(祇樹給孤獨園精舍)’라 불리고, 줄여서 ‘기원정사’라고 하게 되었다.
붓다가 전도에 종사한 45년 동안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기증받은 정사의 수효는 꽤 많았던 것 같으나,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이 기원정사이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지금까지 전해오는 경전은 모두 그것이 어디에서 설해졌는지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 기원정사에서 설해졌다는 것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까닭이다. 그것을 한역대로 적어 보면 이렇게 된다.
“이같이 나는 듣자왔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정사에 계셨다.”
우리가 경전을 욀 때에 먼저 나오는 것은 이런 구절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이제 말한 바와 같이 제타 왕자의 숲을 사들인 경위가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를 이루고 있으므로, 그것이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조각이나 그림의 소재가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셋째로는 아마 이 정사가 붓다 시대의 정사로서는 가장 시설이 완비되어 있어서 대표적인 건물이었던 모양이다. 그 터는 근년에 이르러 발굴되어 거의 지난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위치는 사바티의 남쪽 교외 대략 1마일 남짓한 곳이다. 붓다나 비구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그 길을 걸어 사바티에 탁발하러 갔다. 겉옷을 오른 어깨에 걸치고 발은 왼손에 들어 위의를 갖추고 유유히 걸어가는 비구들의 모습이 아침 햇빛 아래 점점이 이어졌다. 오후가 되면 여러 사람들이 또 그 길을 거쳐, 이번에는 기원정사 쪽으로 걸어 왔다. 법을 듣고자 성 안 사람도 왔고, 질문하기 위해 다른 종교의 학자도 왔다. 코사라 국의 왕인 파세나디도 곧잘 마차를 달려 찾아오곤 하였다.
한 경([상응부 경전] 3:13, 대식. 한역 동본, [잡아함경] 42:6 천식)은 어느 날의 왕의 내방에 대해 이런 서술을 남겨 놓았다.
그 날 기원정사에 나타난 파세나디 왕은 붓다와 마주 앉은 다음에도 몹시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물어 보았더니 이 왕은 평소부터 과식하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 날도 역시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나서 곧 정사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왕을 위해 게(偈)를 설하여 타일렀다.
사람은 스스로 헤아리어서
양을 알아 음식을 들어야 하리.
그러면 괴로움도 훨씬 줄고
더디 늙어 수명도 보존하리라.
감동한 왕은 시중드는 아이를 시켜 그 게를 외게 하고, 그 후로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것을 낭송하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은 차차 음식의 양을 줄여 갔고, 비대하던 체구도 어느덧 날씬해졌으며 용모도 단정해졌다. 그리하여 어느 날 왕은 제 손으로 제 몸을 쓰다듬으면서 “참으로 세존께서는 두 가지 이익을 나에게 주셨다. 진실로 나는 세존으로 말미암아 현세의 이익과 미래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비근한 가르침이거니와, 그러한 경의 서술이 도리어 그 정사에서 벌어졌던 하루하루의 생활을 생생하게 우리의 가슴에 전해 주는 것 같다.
그러면 비구들은 거기에서 어떤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가? 그것에 관해서는 계율 속에 세세한 규정이 전해 온다. 그들은 일어날 때나, 누울 때나, 앉을 때나, 걸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목욕할 때나, 항상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그렇기는 해도 탁발에서 돌아왔을 때라든지, 밥을
다 먹고 여럿이 모여 있을 때면, 그들도 그만 속세 사람들과 비슷한 대화를 즐기는 수도 없지 않았다. 몇 개의 경이 그런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이것 또한 기원정사에서 일어난 일인데, 한 경([소부경전] 자설경 3:9)에 의하면, 어느 날 비구들이 모여 속세에 있을 때의 자랑을 서로 늘어놓다가 붓다의 눈에 띄어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집에 있을 때 코끼리를 참 잘 다루었지.”
“나는 집에 있을 때 말을 아주 잘 탔단 말이야.”
이런 이야기가 되면 갑자기 눈이 빛나는 것이 인간이거니와 비구들이라고 하여 예외일 수는 없었다. 다시 어떤 사람은 수레 달리는 것을 자랑했고, 어떤 사람은 궁술이나 검술을 뽐냈으며, 또 어떤 사람은 글씨나 시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즐거운 화제에 열중한 나머지 몸이 정사 안에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떠들썩하고 있던 참에, 소리도 없이 붓다가 나타나서 훈계한 말씀은 이러했다.
“비구들아, 너희가 모여 있을 때에는 오직 두 가지 할 일이 있느니라. 법을 이야기하든지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 다.”
법에 대한 이야기와 성스러운 침묵, 이것들은 붓다가 자주 비구들이 지켜야 할 오직 두 가지의 의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출가하여 사문이 된 이상에는 모든 것을 잊고 오직 자기완성만을 위해 힘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곁들여 말한다면 정사에서의 그들의 생활에는 성전을 독송해야 하는 의무조차 없었다. 신 앞에 예배의 의식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하물며 후세의 승려가 그 주요한 임무로 여기고 있는 불공을 드리느니 재를 올리느니 하는 따위의 일은 그들로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계도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간명, 엄숙한 수해의 과정에서도 꼭 지켜야 하는 두 가지의 의식이 있었다.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자세히 기술해 보고자 한다. 그것에 의해 그들의 생활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