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 (調信)

신라 스님. 세달사(뒤의 흥교사) 승려 명주 날리군에 있는 농장의 지장(知莊)으로 갔다가, 군수 김흔(金昕)의 딸을 보고 반하여 낙산사 대비상(大悲像) 앞에 가서 만나게 되기를 수년 동안 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출가하여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을 원망하며 불당 앞에서 울며 호소하다가 날이 저물고 지쳐서 잠깐 졸았다. 뜻밖에 그녀가 와서 “스님을 뵙고 항상 그리워 하였으나 부모의 명으로 할 수 없이 시집갔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스님과 함께 살고자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조신은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서 40여 년을 살면서 다섯 남매를 낳았다. 살림이 구차하여져서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10년 동안 걸식하다가 명주 해현령에서 15세 된 큰 아들이 굶어 죽자 길가에 묻고, 우곡현에 가서 큰 길가에 오막살이를 짓고 머물렀다. 두 부부가 늙고 병들어 걸식도 할 수 없어지자, 10세 되는 딸이 밥을 빌러 다니다가 개에게 물려 돌아와 앞에 쓰러져 운다. 부부도 함께 통곡하다가 마침내 아내가 눈물을 씻고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이 젊고 얼굴도 아름다웠으며 오십년 동안 고락을 같이하였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빌어 먹기도 어렵고 자식들도 헐벗고 굶주려 어찌할 수 없으니, 부부가 함께 다니면서 고생하는 것 보다는 따로 헤어져서 살아 나갈 길을 찾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부부가 아이를 둘씩 나누어 데리고 남북으로 길을 떠나려 하다가, 문득 깨어보니 한 동안의 꿈이었다. 하루 밤 사이에 머리가 희고, 세상 생각이 허망하게 사라지자 대비 성상 앞에 무수히 참회하고 해현령에 묻은 아이를 파 보니 석미륵상(石彌勒像)이 나왔다. 근처의 절에 모시고, 돌아가서 지장(知莊)의 책임을 사퇴하고, 정토사를 짓고 정업(淨業)을 부지런히 닦았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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