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기 스님. 당나라에 가서 법을 배우고 오는 길에 서해(西海)를 건널 때, 용왕이 용궁으로 청하여 경을 읽히고 금라(金?)가사를 보시하며, 이목이란 아들을 시봉으로 따라 보내면서 “3국(國)이 소란하여 아직 불법에 귀의할 임금이 없으니, 내 아들을 데리고 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짓고 있으면 난리도 피하고 몇 해 안으로 불법을 보호할 임금이 나와 3국을 정(定)하리라”하였다. 본국에 돌아와서 한곳에 이르니 어떤 노승이 원광이라 자칭하면서 인궤(印櫃)를 주고 없어졌다. 그는 폐사된 절을 다시 지으려고, 북령(北嶺)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 가운데 5층 황탑(黃塔)이 보였다. 내려와 찾아 본즉 흔적이 없어 다시 올라가 본즉 까치 떼가 땅을 쫓고 있었다. 용왕이 “작갑”이라 하던 말을 생각하고 내려와 땅을 파니 벽돌이 나온다. 옛날 절터인 줄 알고 절을 짓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미구에 고려 태조가 3국을 통일한 뒤 작갑사를 지었다는 말을 듣고, 오갑(五岬) 의 지세 500결(結)을 보시하고, 937년(태조 20)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 고치다. 이목은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았는데 어느 해 크게 가물어 곡식이 타게 되므로 이목을 시켜 비를 내기게 하였더니, 하느님이 노하여 이목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목이 스님께 애걸하므로 상 밑에 숨겨 두었다. 천사가 내려와 이목을 내어달라 함에 뜰 가운데 있는 배나무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이목(梨木)”이라 하니 천사가 배나무를 벼락치고 올라갔다 한다.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추화(推火;지금 밀양) 의 봉성사(奉聖寺) 에 있을 적에 고려 태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청도(淸道)에 이르니 산적(山賊)들이 견성(犬城)에 모여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스님에게 항복받을 도리를 물었더니, “개는 밤만 지키고 낮은 지키지 않으며, 앞만 지키고 뒤는 지키지 못하나니 낮에 북쪽을 치라”고 일러 주었다. 태조가 이 말대로 하여 산적을 항복받았다 한다. 이 때부터 태조가 해마다 벼 50석씩 이 절에 올렸다. 작갑사에서 입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