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 (惟政)

(1544~1610) 조선 스님.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또는 사명(四溟). 속성은 임(任)씨. 밀양에서 출생. 13세에 『맹자(孟子)』를 읽다가 출세할 뜻을 품었고, 뒤에 황악산 직지사 신묵(信?)에게 출가함. 18세에 선과(禪科)에 급제. 32세에 선종의 주지가 되었으나 굳이 사양. 묘향산에서 청허의 정법을 받음. 금강산 보덕사에서 3년을 지내고, 또 청량산 · 팔공산 · 태백산으로 다님. 43세에 옥천산 상동암에서 하룻밤 소낙비에, 뜰에 있는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을 절실히 깨달아 문도(門徒)들을 보내고 오랫동안 참선. 46세에 오대산 영감란야에 있다가 역옥(逆獄)에 잘못 걸렸으나 무죄 석방. 이듬해 금강산에서 3년을 지냄. 1592년 왜구(倭寇)가 침입함에 의병을 모집. 순안(順安)에 물러난 뒤 승군을 통솔. 명나라 장수와 협력하여 평양을 회복. 권율(權慄)을 따라 영남 의령에 주둔. 전공이 많았음. 1594년에는 명나라 총병 유정(劉綎)과 의논하여 왜장 청정을 울산 진중으로 세 번 방문하게 함. 그 때 청정이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라고 하자 스님이“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 하였다. 청정이 “무슨 말인가?”라고 묻자, 스님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생각하고 현상하였으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 아닌가?” 하였으니, 청정이 놀라 찬탄함. 선조가 스님을 내궐로 불러들여 평생의 일을 묻고 “지금 국세가 이러하니 대사가 만일 퇴속한다면 백 리(百里)의 책임을 맡기고 3군을 통솔하게 하리다” 하였으나 스님은 사양하였음. 영남으로 돌아가서 용기산성 · 팔공산성 · 금오산성 등을 쌓고 양곡과 무기를 저축한 후 인신(印信)과 전마를 도로 바치고 산으로 물러가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지 아니함. 1597년 명장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의 도산에 이르고, 이듬해 또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의 예교(曳橋)에 이르러 큰 공을 세웠음. 1604년 국서(國書)를 받들고 일본에 가서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보고 “두 나라 백성들이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렸으니 내가 그 고난을 구제하러 왔노라” 함. 가강도 신심을 내어 부처님같이 대우하여 강화를 맺고, 스님은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 3,500명을 찾아 데리고 이듬해 돌아옴. 선조는 가상(嘉賞)히 여겨 가의대부(嘉義大夫)를 시키고 어마(御馬)와 저사표리(紵絲表裏)를 하사. 그 때는 청허가 입적한 이듬해였음. 스님이 묘향산에 가서 상례를 치르고 1607년 치악산으로 갔다가 선조의 부고를 듣고 서울에 와서 배곡. 후에 병이 나서 해인사로 갔다가 광해주 2년 8월 26일에 나이 67세, 법랍 55년으로 입적함.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저서 :『분충서난록(奮忠?難錄)』 · 『사명집(四溟集)』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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