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함경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경전이 아니라 석가모니가 실제로 설했다고 생각되는 말씀들로 이루어진 수많은 경들의 총칭으로 경장 을 가리키며, 4아함으로 분류된다. 4아함은 경전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 장아함(長阿含)과 증아함(增阿含), 취급하는 주제나 대화자의 종류 등에 따라 집성한 잡아함(雜阿含), 법수(法數)에 따라 분류한 증일아함(增一阿含)을 말한다. 아함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아가마의 음사이며, 그 원래의 뜻인 ‘오는 것’에서 유래하여 ‘예로부터 전해온 가르침’, 즉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전하는 경전을 의미한다. 유사한 가르침이 남방불교에서는 팔리어로 전수되어 니카야(Nikāya 部)라는 명칭으로 불린 데 대해 북방불교에서는 산스크리트로 ‘아가마’라는 명칭이 전수되었고, 이것을 중국에서 번역한 것이 아함경이다. 그러나 아함경에는 다섯 니카야 중의 마지막 소부(小部)에 상당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내용적으로 양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상응한다. ① 장아함경은 디가니카야(Dῑgha-nikāya 長部)에 대응되며 내용이 긴 30개의 경을 포함한다. ② 중아함경은 마지마니카야(Majjhima-nikāya 中部)에 대응한다. 중간 길이의 222개 경을 포함한다. ③ 증일아함경은 앙구타라니카야(Aṅguttara-nikāya 增支部)에 대응되며 교리에서 구사되는 숫자(法數)에 따라 472개의 경을 1~10법으로 집합·정리했다. ④ 잡아함경은 상유타니카야(Saῑṁyutta-nikāya 相應部)에 대응되며 다른 아함에 수록되지 않은 1,362개의 짧은 경들을 모은 것이다. 이밖에 별역(別譯) 잡아함과 단권(單卷) 잡아함을 포함한다.
아함경의 기원은 BC 4~3세기로 추정된다. 석가모니 입멸(入滅) 뒤 100년 무렵부터 교단이 양분되면서 시작된 부파불교시대에 각 부파는 과거의 전승에 입각하여 자파의 독자적인 경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중 한 부파의 경장이 온전히 보존되어 현재까지 유일하게 전해지는 것이 팔리어의 5니카야이다. 이에 비해 현존하는 아함경은 부파에서 전해온 것들을 끌어모아 중국에서 4아함의 체재로 정리한 것이다. 각 아함에는 신층과 고층이 뒤섞여 있어 4아함 사이의 시간적 선후관계를 확정짓기 어렵다. 다만 증일아함에 신층이 많이 실려 있는 편이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아함에도 후세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아함을 아함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에서 시작된 관례이다. 서력 기원을 전후로 대승불교가 흥기하여 대승경전이 제작되기에 이르자 아함·아함경은 소승불교·소승경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아함경은 대체로 석가모니가 직접 설한 것으로서 불교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신앙적 입장으로도 중요한 것인데 소승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승불교의 한자문화권에서는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합리적이고 명쾌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서양에 대한 영향이 대승경전보다 훨씬 커서 근래에는 중시되고 있다.
아함경(阿含經)은 아함부(阿含部)에 속하는 4아함 또는 5아함의 총칭이다.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이 있다. 남방불교에서는 장부(Digha-nika-ya), 중부(Majjhima-nika-ya), 상응부(Samyutta-nika-ya), 중지부(Anguttara-nika-ya), 소부(Khuddaka-nika-ya)의 5부로 구별하며, 북방불교에서는 장아함, 중아함, 증일아함, 잡아함으로 일컬어지는 4부 아함을 말한다. 아함은 팔리어 ‘a-gama’의 중국어 음역이다. ‘a-gama’는 ‘오는 것’이란 뜻으로 전승(傳承)된 가르침, 예부터 전해져 온 가르침이란 뜻이다. 여기서 예부터 가르쳐 온 가르침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따라서 아함경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에 가장 가깝다고 해, 불교의 근본 경전 또는 원시불교의 경전이라 말한다. 그러나 아함경은 다른 경전과는 달리 하나의 경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000여개의 짤막한 경전들이 각기 모여 있는 작은 경전들을 집대성한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아함경(阿含經)이란 말보다는 아함부(阿含部)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말한다. 경전의 내용들은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교훈을 알기 쉬운 비유나 문답 형식으로 담아 이해하기 쉽도록 되어 있다. 또한 사성제, 연기 등 불교의 기본 교리도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세계의 성립과 괴공(壞空), 외도에 관한 논란, 제자의 언행 등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도 자세히 알 수 있다.
반야바라밀과의 인연
제가 처음 불교를 접하게 된 인연은 반야바라밀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의 5년 동안이나 병고에 시달리면서 인생의 어두운 면 무상함 학문 부귀 또 건강 등의 우리 인간들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것들이 끝내는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퇴원하고 어머님께서 가끔 나가시던 한적한 암자에 눌러 앉게 되었습니다. 그 작은 암자에서 처음 대한 경전이 「반야심경」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반야심경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이라는 대목이었습니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혀도, 몸도, 마음도, 없나니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없나니라. 그러니까 공속에는 오음도 없고 육근 육경도 없나니라.」
이것이 제가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제게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분명히 눈이 있고 색이 있는 속에서 저는 살고 있으며 그 속에서 내가 세상에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병원에서 5년이라는 그러한 덧없음 속에서 절실하게 느꼈던 문제가 결국은 눈이 있는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계가 없다는 반야심경은 대했을 때 제가 받았던 충격은 정말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쯤 지나니까 저도 이제는 「아! 부처님께서 왜 눈이 없다고 말씀하셨는가?」하는 것을 제 나름대로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눈이 있다는 세계와 눈이 없다는 세계는 서로 조정해 나갈 수 없는 세계이면서도 그 세계가 하나인 세계 그러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다」라는 말로 전해주는 세계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함의 구성
아함경은 크게 네 가지로 갈라집니다. 장아함 중아함 잡아함 증일아함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장아함경은 긴 경전들을 한 30개가량 모야 놓은 경전들입니다. 그리고 중아함은 중간 길이의 경전을 222개를 모아 놓은 것으로써 권수로는 60권에 이르는 상당히 긴 경전입니다. 잡아함은 좀 더 짧은 경전들인데 1362경을 62권에 모아 놓은 경전의 모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증일아함은 471경을 51권속에 모아 놓은 문헌들입니다.
그런데 아함경의 총 권수를 우리들이 보게 되면 183권이 되는 상당히 큰 문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문헌 속에 들어 있는 교리에 많은 다른 교리가 섞여 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거기에서 핵심적인 법문을 골라봐라 하면 네 가지 법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야심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야경의 핵심은 반야심경이고 반야심경의 가장 핵심은 「오온이 공하다<五蘊皆空>」는 것이고 그런 오온이 공하다는 입장에서 반야바라밀다를 해설하는 것입니다. 그 두 마디입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법문을 하나씩 하나씩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법문을 네 가지 아함으로 부처님의 제자들이 네 가지 아함으로 갈라놨느냐 하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교설이 제자들에 의해 구전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구전되어 가려면 스승이 제자들에게 암송시키는 일정한 틀이 있어야 된다는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긴 경전들을 모은 것이 장아함이고 중간 길이의 경전을 모아 놓은 것이 중아함이고 그 다음에 아주 짧은 경전들을 모아놓은 것이 잡아함이고 그 다음에 증일아함은 하나씩 하나씩 불어놨다 하는 뜻입니다.
결국 지성의 편의를 위해 모아놓은 것이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아함에 들어 잇는 경전들은 전부가 당시에 외도를 비판하는 그런 경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대단히 많이 나눈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데서부터 불교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 경전에는 많은 외도(불교외의 종교)들이 등장합니다. 그러한 외도의 사상가들 또는 행자들이 아함경에 숱하게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부처님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눕니다. 또 저희들이 아함경을 보면서 더욱 놀라운 것은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와서 이야기할 때에 부처님께 일단 설복 당하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풍토가 2500년 전의 인도사회에서 가능했던 그 사상적 또는 사회적 배경이 무얼까 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막스 웨버라는 사회학자에 의하면 대략 B.C. 5세기 그러니까 2500년 전입니다. 그 때에 인도사회처럼 세계에서 가장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누렸던 적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자유스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항상 어떠한 교리에 입각해서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이블에 쓰여 있으니까 진리다.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니까 진리다. 이런 입장이 아니고 각각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를 떠나서 과연 우리들이 구해야 할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풍토가 그 당시에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 나누니까 장아함경은 자연히 긴 행태를 띨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중아함에는 짧은 경전인데 외도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만 핵심적인 내용이 어디로 옮겨지고 있느냐 하는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부처님과 제자 또는 제자와 제자사이에 아주 열띤 토론이 오고가는 그러한 경전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세미나 같은 그런 내용을 기록한 문헌들입니다.
잡아함에는 아주 짧은 경전들이 들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가장 짧은 경전 반야심경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경전들이 잡아함에는 수도 없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5줄로 된 경들이 있습니다.
「여시아문은 일시에 불이 어디에 계셨나니 이때 부처님이 비구에게 이르시기를 사제가 있으니 잘 생각해라.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 신수봉행 했더라.」
이 정도 다섯줄로 끝나버린 경전들이 잡아함에는 수없이 들어 있어 1362경을 헤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무엇이 설해지고 있느냐 하면 외도들과의 대화도 없고 중아함에서 볼 수 있는 대화도 없고 여기서는 부처님의 법이 그대로 직접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경전들이 이 곳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정말로 제시한 불교의 근본 교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알고 싶거든 잡아함부터 공부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증일아함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느냐 하면 이 증일아함은 아까 말씀대로 법수별로 나열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되겠기에 「1법은 무엇이냐.」 「2법은 무엇이지.」 「3법은 무엇이냐.」 이렇게 해서 초등학생들이 국어 외우듯 이 법수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매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바로 증일아함입니다.
이러한 아함경을 이제 저희들이 보게 될 때에 대승경전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아함경을 보면서 정말 어쩔 때는 너무나 감동스러워서 소년 같은 그런 감상에 젖을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아함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배가 고프면 발우를 들고 나가 탁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곱 집 이상을 가시지 않습니다. 첫 집 가서 배가 부르시면 돌아가시고 모자라시면 두 집 그렇다고 해서 일곱 집 이상 가시지 않는 그러한 부처님, 아함에 등장하는 불제자들은 진지하고 정말로 저런 사람이면 나도 친구로 삼고 싶고 그런 모임이 사회에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나도 그 모임에 들어가서 친구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히 아난이 그 당시에 하는 행동을 보게 되면 어떨 땐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려 할 때에 다른 제자들은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다 얻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그 열반에 드시는 그 모습을 대하면서도 슬픔을 초월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난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복받치는 눈물을 부처님 앞에서 보일 수 없었던 아난은 할 수 없이 혼자 몰래 빠져나와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부처님 앞에 돌아와서 눈물을 씻고는 울지 않은 척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아난을 부처님이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난에게 그러십니다.
「참으로 아난아 너는 정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는 희유한 믿음을 가지고 있나니라. 네가 대중 속에 들어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너와 이야기를 하고자 하고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칭찬하시는 그러한 모습입니다.
불교문헌 중에서 저는 이 아함경의 세계 거기에 펼쳐지고 있는 그러한 교단의 모습은 차라리 불교의 원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또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그러한 불교 보임 법회의 모습이 아닐까 저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함의 네 가지 법
이제 그러한 아함이 가지고 있는 교리 내용이 네 가지라 그랬는데 그 네 가지의 첫째는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선업을 지으라는 업설(業說)입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육육법(六六法)으로 대단히 까다롭고 중요한 법문입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법문입니다. 그 다음이 바로 오온·사제(五蘊·四諦) 설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원시불교의 대표적인 교리 그러면은 오온·사제설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이 일어남과 괴로움이 사라짐과 괴로움의 사라짐에 이르는 여덟 가지 길을 설하시는 사제 8정도라고 부르는 법문입니다. 그 다음이 12연기설입니다.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이 있게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벌도 아니고 운명적으로 지워진 것도 아니고 또는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괴로움의 근본적인 해결을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길 밖에 없다. 이렇게 설하시는 12연기설입니다.
이 네 가지 법문만 공부하면 아함의 교리는 끝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불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가 무엇이냐 하면 여섯 가지 법문이라고 봅니다. 그 여섯 가지 중에서 아함경에 설해지고 있는 것이 네 가지입니다. 아함경이 얼마나 중요한 가 아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2가지는 대승불교에 설해지고 있는데 하나가 반야경에 설해지고 있는 「반야바라밀다」입니다. 그 다음에 법화경에 설해지고 있는 「일불승설(一佛乘說)」입니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전이 있고 많은 법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문들은 전부가 이 여섯 가지 법문을 바탕으로 구전되고 발전되어 응용된 것입니다. 그 여섯 가지 법문만 우리들이 공부하면 불교는 정말 중요한 부분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1)인간 존재의 성립
생명의 유한성은 인간을 불안한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깊은 불안은 인간에게 역으로 생명과 죽음의 정체를 규명하게 만든다. 내적 불안과 함께 생·사(生死)의 정체를 추적하였던 역대의 사상가들은 먼저 마음과 몸을 세심히 관찰하므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모두들 현상의 관찰에만 그치고 배후에 숨은 원리를 파악 하는데 좀 미흡한 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몸을 이루는 물질 일반에 대한 각 사상가들의 견해가 너무 피상적임을 보아도 드러난다. 이 점에서 불교는 독특한 접근을 보여준다. 아함은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마음과 물질을 포함하는 일체 존재의 본래적인 모습을 밝히고 있다. 본래의 모습이란 존재의 질적인 변화를 고찰대상으로 삼아 철저하고 정연한 논리적 성찰을 행할 때 누구나 반드시 이르게 되는 한 구조를 말한다. 이러한 존재의 본래적인 구조를 아함은 일단 6계설(六界說)로 그려낸다. 앞서 살폈듯이 6계설의 내용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상·하(上下)로 두 종류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대표되는 기본존재들이 무수히 있다. 기본존재들은 먼저 말한 두 공간의 상·하에 하나씩 배열되어 중층(重層)구조를 이룬다. 중층구조를 이루는 존재들은 자유로이 상·하의 위치를 바꾸며 오르내린다.
그런데 존재의 본래모습이 이와 같다고 할 때 현실에서 보는 존재의 모습과는 매우 다름을 우리는 직감하게 된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현실은 두 개의 공간도 없을뿐더러 존재들도 단지 주어진 공간을 채우는 거대한 덩어리의 단일구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상의 차이는 마침내 존재란 본래는 중층구조를 이루는데 현실적으로 단일구조로 관찰되는 묘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본래의 중층적인 구조가 현실에서는 단일 구조를 갖게 되었는가를 물으면서 인간 및 자연에 대해 전혀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게 되며, 이 물음에 대해 아함이 내리는 답을 심사숙고함으로써 인간개체 형성에 대한 매우 새로운 관점을 경험하게 된다.
아함은 존재의 중층적인 구조와 현실의 단일구조 사이의 간격을 5온설(五蘊說)로 설하면서 반듯하게 연결한다. 앞서 약술한 6계는 상·하의 두 공간에 배열된 존재들이 자유로이 아래·위로 위치를 바꾸며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보통 오르내리던 기본 존재들이 어느 순간 차분히 정지할 때도 있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에 집착이 가해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즉 한 때 멈추게 된 존재들이 이루는 일시적인 ‘형체’를 ‘나(我)’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집(我執)은 현실에서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고집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아집이 가해진 ‘형체’는 실은 상·하의 공간에서 층을 만들며 오르내리던 두 존재가 일순간 멈추는데서 이뤄진 것으로, 성격상 다시 오르내리려 한다. 그러자 오르내리려는 경향은 곧 그 ‘형체’에게 불안한 ‘느낌’을 일으킬 것이다. 왜냐면 오르내림이 수행되면 집착된 ‘형체’는 여지없이 붕괴될 것이므로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붕괴될 것 같은 불안의 ‘느낌’을 지식하기 위해 불안의 원인인 오르내림이 불가능하도록 상 하의 두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붙여야 된다는 ‘생각’이 이어서 일어나게 된다. 붙이려는 생각이 있게 되면 자연히 ‘결합’이 일어난다. 즉 실지로 아래 공간의 존재를 위의 존재에게 ‘결합’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이 마무리되면 두 존재는 하나의 개체가 된다. 그런데 그 개체는 이전과는 모습이 다른 데가 있다. 두 존재가 떨어져 있는 경우와 하나의 개체로 결합된 형상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르다고 파악하는 ‘식별’이 있게 된다.
이리하여 최후로 ‘식별’된 개체는 이미 두 종류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으니, 단일한 공간에서 단일구조를 띠게 된 것이다. 그런데 단일해진 개체는 역시 주위의 숱한 존재들에 싸여있고 그들과의 작용·반작용의 관계에 있으므로 주위 존재의 자유로운 변동이 계속되는 한 끊임없는 붕괴의 위협을 받는다. 그래서 스스로 주위의 존재들을 자신에게 병합시킴으로써 가능한 한 붕괴의 위험을 감소해 간다. 그런 과정에서 개체는 횡적으로 부피가 증대해 가고 필요에 따라 감각기관 등의 생물학적 기관을 갖추게 되어 일반적으로 생물이 탄생하게 된다.
인간이란 그렇게 성립된 생물의 한 부류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형성에 무엇보다 근원적인 것은 일시적으로 집착된 물질적 ‘형체’와 그를 지속하기 위해 연이어 발생한 ‘느낌’ ‘생각’ ‘식별’등의 성립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불교의 5온설(五蘊說)은 바로 이러한 내면적 소식(消息)을 전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5온이 있나니라. 곧 형체<色:rūpa>·느낌<受:vedāna>·생각<想:sainjñā>·결합<行:sainskara>·식별<識:vijñāna>이 그것이니라”고 아함은 누차 설하고 있다. 더욱이 온(蘊)이란 술어가 ‘근원(根源)적인 부분’ 또는 ‘근간(根幹)적인 부분’이란 뜻을 지닌 범어 ‘skandha’의 번역임을 생각할 때 ’형체‘등의 다섯 가지가 인간존재의 ’근간‘을 이룬다고 살펴왔던 앞의 견해는 바로 5온설의 내용으로 적확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6계설(六界說)과 5온설(五蘊說)을 통하여 인간존재 성립에 대해 축약적인 이해를 시도해 보았다. 그런 개략적인 설명가운데서 죽음의 이해를 위해 우리가 특히 관심을 보여야 할 부분은 ‘결합’작용이다. ‘결합’에 주의하면서 죽음에 대한 구조적인 해명을 시도해 보자.
(2)죽음의 정체
신비롭기 그지없던 인간존재의 형성은 불행히도 일시적인 ‘형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한순간 성립된 어떤 ‘형체’위에 가해진 아집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등의 일련의 작용이 덩달아 일어남으로써 인간개체의 시원적인 부분이 형성되고 이와 같은 상하의 분리된 존재를 붙이는 종적인 결합에 이어서 좌・우 존재를 자기에게 병합하는 횡적인 결합이 또 일어난 끝에 현실과 같은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즉 인간존재란 상・하・좌・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존재들을 한데 결합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을 이루는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결합(行: sainskara)’ 작용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개체의 ‘결합력’이란 기본존재들이 보이는 분리의 성향을 언제까지나 막고 있을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들은 주위존재들과 민감한 작용・반응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주위존재들은 수적인 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의 합보다 월등히 많고 작용력의 면에서도 인간개체의 결합력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하다. 여기서 만약 주위 존재들의 작용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존재들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주어지면 별 문제이다. 하지만 주위의 작용은 언제나 인간에게 반하는 방향으로 가해져 인간개체를 유지하는 근간적인 결합력과 주위존재의 반대작용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조성된다.
여기에 주위존재들의 세력이 월등히 강하므로 인간의 결합력은 견딜 수 있는 데 까지 지탱하다 끝내 한계에 이르고 붕괴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결합작용의 종식과 동시에 인간을 구성하는 무수한 기본존재들도 상・하・좌・우의 본래적인 위치로 주위존재의 작용에 따라 오르내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지는 것이 죽음의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이로 끝나지 않는다. 흩어진 기본존재들은 다시 6계(六界)의 모습을 띠게 되고, 6계의 한 ‘형체’위에는 아집이 더해진다. 아울러 ‘형체’를 지속시키려는 ‘느낌’ ‘생각’‘결합’‘식별’의 작용이 연이어 일어나고 이들이 근간적인 부분이 되어 횡적인 결합이 진행되어 마침내 또 하나의 인간개체가 형성된다. 인간존재는 주위존재와의 대치를 견디지 못해 언젠가 또다시 붕괴되고 만다. 이렇게 계속하여 생・사(生死)는 바퀴가 구르듯 돌고 돈다. 이것을 일러 생사윤회(生死輪廻)라는 것이다.
(3)괴로움의 극복과 정(正)·성(聖)
인간을 비롯한 일체 생류의 삶과 죽음이 이처럼 도식화 될 때 우리의 가슴은 무겁기만하다. 이생에 닥칠 한번의 죽음도 그토록 두려웠는데 끝없이 받아야 할 나고 죽음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아가 5온(五蘊)이 주축이 되어 있는 인간은 나고 죽는 것 외에도 병과 늙음 및 대인관계 · 사회생활을 통하여 언제나 숱한 ‘괴로움(苦:duhkha)’을 받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할 때 인간의 ‘괴로움’은 자유로운 6계(六界)의 일시적, 부분적 ‘형체’를 나라고 집착한 뒤 아집의 존속을 위해 떨어진 상·하 두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합쳐올림, 集起 (集:samudaya)’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합쳐 올라 하나의 개체를 고수하면 괴로움을 야기하는 ‘형체’·‘느낌’·‘생각’·‘결합’·‘식별’등의 다섯 가지 근간<五蘊>을 어쨌든 ‘멸함(滅:nirodha)’으로써 괴로움의 근원적 극복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집기(集起)’한 다섯 가지 근간을 ‘멸함’이란 주위존재의 세력을 견디지 못한 붕괴와는 성격을 달리 해야 한다. 왜냐면 붕괴는 죽음에 해당하며 여전히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苦)를 초극하기 위한 근원적인 방법으로 취해질 다섯 근간의 ‘멸함’을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의 ‘길<道:marga>’이 필요해진다. 그 ‘길’은 우선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을 요구할 것이며, 그를 바탕으로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직업’ ‘바른 삶’ ‘바른 정진’ ‘바른 기억’ 등의 일련의 행위를 확실히 수습(修習)케 하고 끝으로 ‘바른 삼매’에 듦으로서 다섯 근간의 ‘멸함’을 체험하게 할 것이다.
미리 짐작했겠지만 이들이 다름 아닌 아함의 도처에 설해지고 있는 4성제(四聖諦)·8정도(8正道)설의 내용이다. 4제·8정도의 진의를 철저히 파악하고 그에 입각해 완벽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겁의 생사고를 뛰어 넘는다. 그래서 아함은 4제 8정도에 의해 수행하는 수행자가 얻는 과보<道果>를 넷으로 갈라 설하고 있다. 곧 예류(預流: 흐름에 이른자)·일래(一來 : 한번 옴이 있는 자) · 불환(不還 : 옴이 없는 자)·아라한(阿羅漢 :동등한자)으로 구성된 사문사과(沙門四果)가 그것이다. 결국 아함은 6계설(육계설)과 5온설(五蘊說)이란 이론<解>을 바탕으로 4제8정도 및 사문사과(沙門四果)의 실천원리<行·>를 제시함으로서 하나의 완벽한 교리조직을 제시한다. 그것은 마치 12처설을 이론적 근거로 하여 업설(業說·)이란 실천원리가 설해진 것과 같다.
그런데 업설이 선·악(善惡)을 취급하는데 대해 8정도는 정·사(正邪)를 문제삼는다. 선·악이 상대적이라면 정·사는 절대성을 띠고 있다. 그것은 선·악의 업설이 천국에 나는 것<生天>을 최고 목적으로 하여 괴로움의 상대적인 소멸을 꾀하는데 대해, 4제·8정도의 목적은 천국에도 남겨져 있는 생·사의 괴로움이란 절대적인 괴로움의 근본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4성제의 성(聖)이란 술어도 눈길을 끈다. 서양종교학자들은 흔히 종교를 ‘성(聖)스러운 것’과의 만남이라고 말한다. 성스러운 것은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지고의 존재이며 최고의 신앙대상인 성부·성자·성신의 3위(三位)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실체인 3위는 그 앞에서 원죄를 시인하며 기도하고 희생을 바치는 피조물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함으로서 참된 가치를 스스로 부여할 것이다. 그럴 때 4성제의 성(聖)은 자못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4가지 성스러운 사실<諦:satya>을 수행함으로서 죽음에서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음을 살폈다. 그러므로 아함은 4성제를 설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극복케 하는 성스러운 것과의 만남을 일찌감치 실현시키고 있다 할 것이다. 나아가 성스러운 사실들을 수행하며 과보를 얻은 4갈래의 사문인 예류·일래·불환·아라한은 불교에 처음으로 내세운 ‘성스러운 실체’라고 까지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바르고<正> 성스러운<聖> 교설인 5온·4제(五蘊四諦)설을 설하면서 부처님은 처음으로 중생들에게 법(法)의 바퀴를 굴리셨다고 한다.<初轉法輪> 이는 5온·4제설을 통하여 불교의 교리조직이 일단락되었음을 또 한번 방증 하는 것이다. 따라서 6계·5온설의 완벽한 이해와 4성제·8정도설의 진격한 실천을 경비함으로써 이제 우리에겐 괴로운 생사의 바퀴대신 숭고한 기쁨을 자아내는 법의 바퀴가 항상 돌아갈 것이다.
모든 것은 12가지에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특이한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교설(敎說)이 대단히 특이하다. 어떤 궁극적인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현실세계를 바르게 관찰하고 그러한 현상세계를 일으키는 보다 근원적인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각자 택하게끔 하였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스스로 걸어 가셨던 길이고 저희들에게도 그러한 길을 걸어가야만 인간의 모든 괴로움이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종교가 많이 난립해 있는 사회에서 어떤 종교적인 방황을 종식시킬 수 있고, 종교의 대립을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그 밖의 다른 종교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데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그 다음은 깨달음의 내용이 다른 종교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깨닫게끔 하는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의 내용이 말로 표시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진리는 깨달음 속에 묻혀 있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답답한 내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깨달음의 벽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나는 사람은, 부처님이 설하신 그대로 닦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불자들의 도리이다.
그러면 불자들이 가장 처음 공부해야 할 법문은 무엇인가?
아함경에 이르기를 일체(一切),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 즉 모든 것은 12가지에 다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것을 12처설이라 한다. 이 12가지는 인간을 구성하는 눈·귀·코·혀 ·몸·의지 등 6가지 감관과 이것을 통하여 인식하는 외계, 다시 말하면 색·소리·냄새·맛 ·촉감·법이라는 6가지 경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6가지 감관과 6가지 인식 대상 속에 포섭되는 것이요, 그 외에 우리들이 현실세계에서 다른 것이 있는가 찾아 보아라 하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또 그 12가지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부처님께서 인간을 의지하고 규정하였다. 자유로운 의지가 인간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왜 인간에게 의지가 있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것은 문제를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지가 왜 있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인간이 대하고 있는 6개의 인식대상에는 그러한 의지가 없고 그것을 법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그러한 문제 등은 파고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결국은 밝혀지는 문제인 것이다.
어쨌든 이 단계에서 처음으로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일단 모든 것은 12가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중에서 6근의 주체를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자로 규정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 대상은 어떤 작용을 받으면 그에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그러한 개념으로서의 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법이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자연스러운 것, 필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자연물 등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12가지는 덧없는 것
그 다음 부처님께서는 그 12가지가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왜 덧없는 것인가? 우리 인간을 중심으로 보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즉 생노병사하며, 사물을 중심으로 보면 낳고, 조금 머물다 없어지고, 즉 생주이멸(生住異滅)한다는 것이다. 더 크게 우주를 중심으로 보면 모든 천세현상이 하나의 우주 속으로 포섭되는데 그러한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는 것이다. 즉 이루어졌다가 머물고 다시 부서지기 시작하여 완전히 공한 상태로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우주가 생성하고 다시 멸하는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덧없다고 강조하신다. 그런데 왜 덧없는 것이냐는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일단 우리가 현상세계를 볼 때 덧없다는 것이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것을 여실히 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자명한 사실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주이멸하고 생노병사하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중생들의 이러한 면을 보시고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을 되풀이 강조하셨는데 이것이 아함경의 근간되는 것입니다.
다음에 부처님은 덧없는 것은 즐거움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괴로움이라고 하는데, 무엇이 괴로운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생한 것이 괴로움이고, 늙는 것이 괴로움이요, 죽는 것이 괴로움이더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괴롭고,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괴롭고, 아무리 얻으려 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 괴롭더라.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즉 인간 존재는 구조적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오음성고(五陰盛苦)라 표현합니다.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5가지 근간적인 요소는 바로 그 요소의 성격이 괴로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팔고(八苦)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즉 삶이 무상하고 괴롭다는 것을 일반대중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왜 부처님은 세상을 비관적이고, 부정적으로 보고 계실까?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가르치실까? 좀 더 적극적으로 인생을 긍정하는 인생관을 갖도록 제시하지 않는가?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것이 즐겁고, 그러한 모든 즐거움을 왜 괴로움으로 보시는가? 부처님께서는 젊은 건강과 청춘이 즐겁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또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러나 그 청춘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가던가. 인간의 건강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가는가. 인간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오래 가는가. 아무리 사랑이 즐겁다지만 그 영원한 사랑이 어디에 있던가. 결국은 인간이 즐거움이라고 집착하고 있는 것은 덧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으시고 덧없다고 전하시는 것 뿐이다.
다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그렇게 덧없고 덧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라는 것은 한결같은 것, 영원한 것이다. 또 나라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성질을 띠어야만 한다. 그래서 괴롭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이고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은 나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덧없으므로, 영원한 것이 아니고, 또 그것이 괴로운 것이고 , 그것이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세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다.’하여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합니다. 아함경의 가장 기초적인 법문으로 모든 것은 12가지에 들어가고 그것은 덧없는 것이요, 괴로운 것이다. 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며 세계를 인생과 우리 주변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봄(觀)’의 문제인 것이다. 인도에서는 철학을 ‘다르사나’ 즉 봄이라 한다. 세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서 기본적으로 불교적인 봄은 12처설과 삼법인설로 분류해야 하고, 그러한 12개의 낱낱은 다 세 가지 두드러진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아함경에서 자주 표현되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데, 중생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덧없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며 절대로 덧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괴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즐거운 것으로 보려고 한다.
따라서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악착같이 생각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아집이라고 한다. 나의 것이 아닌 것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소집(我所執)이라 한다. 결국은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의 깨우침과는 정반대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적 업인과보
그런데 ‘나’아님을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불교의 중요한 개념으로 인간의 가치문제인 것이다.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무상한 것이 될 수 없으며 나의 것으로 집착된 대상은 영원성을 띈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주변에 변화가 오게 되면 자기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은 변화하려고 하나 아집은 변하려 하는 것을 인정치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으니까 따라서 아집과 변화하려는 그 성질이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서도 환경의 변화에 대하여 함께 변하려 한다. 그러나 변화를 포용할 수 없는 것이 아집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적인 기능으로서 아집은 변화를 포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집착하면 할수록 변화하려는 힘도 커지므로 그 두 힘이 갈등을 빚게 된다. 그 갈등을 불교에서는 괴로움이라 하는 것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아집이 있으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덧없고 괴로우며, 주변의 변화에 대하여 변하려는 육체적인 구조와 그것을 인정치 않으려는 아집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괴로움을 수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집이 있는 존재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그런 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 이를 때 부서지는 것이 우리 인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은 덧없고, 덧없는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운 것은 나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다. 그런 집착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고, 괴로움을 감당할 수 없을 때 결국 덧없게 되는 것이다.’라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함의 교설이다.
우리는 여기서 ‘나’라는 문제가 자주 논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법인설을 역으로 볼 때 ‘나’가 아닌 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그 집착에서 괴로움이 생기고, 결국은 덧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조적으로 괴로운 존재인 우리는 어떻게 그 존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불교에서는 괴로움을 해소하려는 행동을 ‘업’이라 한다.
‘업’이란 말은 ‘일’이란 뜻이다. 행동이라는 뜻이다. 행동은 밖으로 자기에게 변화주려는 조건들을 제거하고, 자기에게 편안함을 주는 자기의 현상유지에 가장 좋은 조건을 주는 대상들을 자기 주변으로 모아 오는 것이다. 이러한 업을 일으키면 인간들은 자유로운 자기의지를 마음껏 활용하면서 자기 주변에 대해서 작용을 가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에게 필요한 안락을 주는 그런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업’을 일으키게 되면 자연히 주변조건, 즉 6근(六根)이 그러한 업을 일으키게 되면 작용하는 대상, 즉 6 경(六境)이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6경은 필연적으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6근은 의지이고 6경은 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업’이 발생하기만 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을 업인과보(業因果報)라 한다. 그래서 모든 업인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즉 자연과학적 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1) 3종외도설과 그 비판
남아시아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히말라야 산맥으로 중국과 접경하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커다란 반도의 인도는 우리나라 전체 면적의 20여배가 넘는 큰 지역을 차지한다. 기후적으로도 온대, 아열대 등 매우 다양한 분포의 이 나라는 지금부터 5천년 전에 이미 문명이 시작되었던 고대 4대분화발상지의 하나임도 주지의 사실이다.
방대한 지역과 다양한 기후대 그리고 유구한 전통을 지닌 인도사회는 부처님 당시에 이르러서 경제와 정치면에서 큰 변혁을 맞는 것으로 전해진다. 즉 농업경제에서 상업경제체제로 옮겨 가고, 왕권의 두드러진 부각에 의해 바라문지상주의(婆羅門至上主義)가 서서히 허물어져 가던 때였다. 이 변동과 아울러 인도의 사상계도 극도의 혼란기를 겪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곧 범(梵)이라는 유일의 원리를 내세운 바라문사상과 그에 정면으로 대립하여 발흥한 사문사상가들은 주로 요소설을 주장하며, 서로 근본을 달리한 채 복잡하게 난립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탄생하여 구도의 길에 드신 부처님은 선정과 고행법 등 먼저 당시의 모든 종교사상을 정통으로 수습하여 각 사상의 진의를 완전히 파악하셨다고 한다. <中阿含204 > 그래서 아함은 비판의 형식으로 외도(外道, 불교외의 종교사상을 아함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의 소설(所說)을 언급하는 확신에 찬 부처님을 여러 차례 그리고 있으며, 그런 대목은 고대 사문사상 연구의 권위 있는 자료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런 외도에 관한 언급을 살펴보면 숫한 외도사상이 여러 관점에서 나누어져 있음을 알게 되는데, 특히 우주의 궁극적 실체에 대한 여러 견해를 분류한 것이 있어 당시 인도사상계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곧 3종외도설로 불리는 것으로 간단하면서도 조직적인 구성은 우리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여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런 3종외도설의 첫째는 모든 것은 유일신인 존우의 뜻에 의해 창조된다고 하는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이다. 둘째 견해는 유일신이란 초월적 원리의 상정에 반대하여 모든 것은 숙명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숙작인설(宿作因說)을 주장한다. 이들에 대해 세째로 모든 것은 특별한 원인이 없이 물질적 요소들의 우발적인 결합에 의해 일어난다는 무인 무연설(無因無緣說)이 제시된다. < 中阿含 券3 > 요즘의 사상적 경향으로 말하자면 바라문의 사상인 첫째 견해는 유신론으로, 그리고 사문사상인 둘째 및 세째 견해는 결정론과 유물론으로 각각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를 제시한 각 사상가들은 자기주장과 다른 것은 허망하고 자신의 견해만 진리라고 내세우며, 각각의 입장에서 인생의 의미와 괴로움의 초극을 대중에게 설해 나갔다. 그러나 누구의 말이 진리인가를 구별할 확실한 기준이 없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자연히 심한 종교적 방황을 피할 수 없었다. 부처님도 출가 후 이런 방황을 겪었고 그래서 진리성 판단의 기준을 세운 뒤 세 가지 견해에 임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곧 우주의 근원에 대한 어떤 견해가 진리이려면 그것으로 인간을 포함한 우주 속의 모든 현상이 올바르게 설명되어야 할 것을 요청하셨다. 만일 어떤 현상은 잘 설명되지만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나온다면 그것을 진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입장에서 부처님이 행하신 세 견해에 대한 비판을 아함은 3종외도의 소개에 이어 전하고 있다.
먼저 첫째 견해부터 모순점을 일깨운다. 무릇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 그 죄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그것은 당연히 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 죄도 신의 뜻에 의해 지어졌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더욱 자가 당착으로 지적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이다. 모든 일이 신의 뜻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인간에게 이렇게도 하려하고 저렇게도 하려는 의욕이나 욕심은 애당초 발생조차 않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려 하겠지만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명한 사실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제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선택의 의지를 주었노라고 변론한다면 그야말로 자기주장에 얽매인 교묘한 희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와 세째 견해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설득력 있는 대답을 주지 못한다. 즉 모든 것이 숙명에 의해서 또는 우발적인 결합에 의해 일어난다면 우리의 죄도 그런 성질의 것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 인간의 잘못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우기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의 존재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사실 인간은 자연 환경과 사회적 변동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은 마치 신의 뜻이나 운명 또는 우발적인 발생에 근원을 두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도 우리는 무턱대고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분명히 의식하면서 따른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근원적으로 역전시키려는 상한 의지의 발현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앞의 세 가지 견해는 비록 우주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죄악과 자유의지라는 중요한 현상에는 결코 적용될 수 없으므로 진리라고는 할 수 없음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우주의 근원은 유일신도 숙명도, 우발적인 결합에 의한 것도 아니고 만다. 그렇다면 우주의 모든 현상에 속속들이 적용될 궁극적 실체에 대한 불교의 견해는 과연 무엇일까.
(2) 불교의 침묵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실체에 대한 해명은 종교의 가장 큰 본질 중의 하나이다. 불교도 종교인 이상 이 문제에 답변을 내려야 한다. 더구나 외도의 사상을 일일이 소개하고 그 맹점을 지적하여 진리로서의 부당성을 밝힌 불교인 만치, 그런 모순점을 모조리 극복하는 진리다운 답변을 불교에서 제시할 것은 자못 기대되기 까지 한다.
그런데 궁극적 근원에 대한 해답을 아함의 부처님은 결코 직설적으로 언표하는 일이 없다. 세계의 영원, 무상 또는 유한, 무한 및 영혼과 육체의 일이(一異)를 묻는 만동자 앞에서 「그런 문제는 수행 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란 이유를 들어 직접적인 답을 회피한 부처님의 침묵은 좋은 예일 것이다. 그 외에 제자들과 신도 및 외도들이 부처님께 또는 서로서로에게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묻는 예들을 아함은 숫하게 전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에도 타종교처럼 시원한 답이 즉각적으로 제시되는 대목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문제를 물리치고 연기(緣起)를 설하는 것으로 대부분 종식된다. 이는 우주의 근원을 포함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부처님께서 침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인생을 비롯한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궁극적 실체에 대한 답변이 마련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런 궁극적 근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을 단념한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궁극적 실체에 대한 답변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불교는 애초에 종교로서의 출발을 포기했어야 옳다. 가르침을 단념했다는 생각은 더욱 잘못됐다. 우리는 중생을 성불시키는 것이 부처님의 일이라는 뜻을ㅇ 나타낸, 증일아함의 부처님 오사(五事)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곧 부처님의 중생에 대한 애민은 오히려 우주의 근원 등에 대하여 티끌만한 모순도 없는 해명을 우리에게도 알리려 한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부처님께서 타 종교와 달리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신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성도(成道)와 전도(傳道)에 즈음하여 부처님께서 겪으시는 깊디깊은 고뇌와 번민 및 그 해결을 아함을 통해서 읽을 수 있으니, 그것에 의해 비로소 외도가 제시한 우주의 근원은 철저히 비판하면서도 스스로는 그에 대한 직설적 해명을 거분한 불교의 침묵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3) 부처님의 번민
힘든 수행 끝에 궁극적 실체에 대한 깨달음을 여신 부처님은 당연히 똑같은 사상적 문제에 시달리는 중생들에게 그 깨달음을 알려 줄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때 부처님은 한 가지 근심에 쌓인 것으로 보인다. 즉 인간의 나약과 오만을 잘 아셨기 때문에, 「신앙하고 두려워 할 대상이 없으면 불안과 무력에 빠지지 않겠는가. < 阿含 券44 >」라고 염려하며 전도에 있어서 무조건 믿을 것을 강조하는 권위주의적 방법을 고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직 정법이 있어 나로 하여금 깨달은 자가 되게 했으니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하리라.」하여 중생에게도 똑같이 깨달음을 얻게 할 마음을 굳히신다. 즉 깨달으신 궁극적 원리를 대뜸 설하고는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허망하다 하며 우리들에게 무조건 믿도록 윽박지르기 보다는 당신이 깨달은 바를 중생들에게도 역시 꼭 깨닫게 해보겠다는 부처님의 결의가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권위주의가 아닌 인간주의적 깨달음의 종교를 베풀려 한 부처님은 다시 깊은 고뇌에 휩싸이게 된다. 곧 대지혜로 크게 용맹정진한 끝에 얻은 심심 미묘한 깨달음을 중생에게 설해봤자 나태하고 두터운 <무지>에 뒤덮인 그들이 도저히 알아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예 전도를 포기하고플 정도로 번민은 심했다고 한다. <長阿含 券.1 大本經> 이는 정법을 설하려 한 부처님께 중생의 엄청난 무지가 무겁게 압박하여 왔고 그래서 또 한번 전도의 결의가 흔들림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생을 저버릴 수 없었던 부처님께서는 이번에는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방해하는 예의 무지를 제거할 교설 방법을 심각히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4) 번민의 해결 – 방편시설
일찍이 구도의 길을 거니실 때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취한 태도는 <합리적 사유>였다. 어떤 전통 및 종교적 권위에도 굴함이 없이 오직 이치에 합당할 것을 요구하였다. 권위주의를 배격하기로 한 결의는 중생들도 역시 그런 합리적인 사유를 하게 하여 두터운 무지를 제거 시키고 이어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데 있었다. 이런 입장을 굳게 지닐 때, 불교의 교설 방법은 합리적 사유에 상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자연과학을 합리적 사유의 소산이라고 한다. 그 자연과학은 다름 아닌 수학을 언어로 삼는 것도 알 것이다. 수학이야말로 티끌만한 불합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덧셈, 뺄셈으로 시작되는 대수의 기초공식으로부터 저 어려운 미, 적분(黴, 積分)의 공식에 이르기 까지 그 사이에는 수많은 수학의 공식들이 있지만 그 공식들의 한 단계 한 단계는 조금의 논리적 비약도 없이 치밀하게 전개되어 있다.
이런 단계들을 차근차근 처음부터 가르치는 수학의 교육 방식은 바로 합리적 사유에 가장 잘 상응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불교가 그렇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눈앞의 현실에 대한 철저한 관찰에 의해 가장 이해하기 쉬운 기초적인 가설부터 세우고 그 가설을 보다 넓은 범위의 세계 현상을 설명할 수 있도록 면밀하게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심화시키고 마침내 우주의 근원을 말하는 진리에까지 도달케 하였다.
마치 수학도의 합리적 사고의 대상으로 기초공식으로부터 차츰 높은 수준의 공식이 제시 되듯이, 중생의 합리적 사유를 위해 부처님은, 현실과 우주의 근원 사이에서 엄밀한 논리적 사다리의 한 칸 한 칸을 이루는 여러 가설들을 세워서 문제의 형식으로 차례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방편시설(方便示說)이란 불교의 교설방법이며, 이렇게 방편 시설된 문제들이 모여 바로 중층적이고 체계적인 아함의 교리조직을 이룬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까지의 의심들은 무난히 해결된다. 즉 교설방법이 초보적인 것부터 가르쳐 마지막에 가서야 궁극적 근원을 설하는 것이었기에 느닷없이 형이상학적 문제 및 우주의 근원을 묻는 만동자 등에게 부처님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아함의 교리조직은 쉬운 것부터 서서히 이해시켜 중생의 무지를 효과적으로 제거하여 마침내 최상의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방편시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기에, 중생의 무지 때문에 야기 되었던 부처님의 번민은 방편시설로 깨끗이 해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방편시설에 입각해 설해진 아함의 교리들은 합리적 사고로 진리를 파악하려는 이들에겐 가장 매력적인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 만능과 종교적 맹신으로 혼탁해 있는 요즘, 합리적 사유를 강조하고 그를 통해 궁극적 근원에 대한 깨달음을 스스로 얻을 것을 권하는 불교의 기본 입장은 한 여름 깊은 숲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싱그럽다 할 것이다.
아함은 아급마, 아가마 , 아함모 라고 음역하며 전, 교, 법귀 라고 번역되는데 즉 전승하여진 교설 혹은 그 교설을 집성한 성전을 의미한다. 유가사지론 제 85에 [ 사제전전 해서 지금에 전래하였다. 이 도리를 말미암아 아급마라 이름한다 ]라고 한 것이 바로 아함을 두고 한 말이다. 또한 승조의 장아함경서에 [ 아함 은 한역으로 법귀라고 한다. 법귀란 대개 이 만선의 염부 총지의 임원이라 ]고 한 것도 아함의 정의를 이야기한 것이다. 전승한 교설인 이 아함은 불타가 돌아가신 후 차례로 집성되어 4아함 혹은 5아함으로 분류하는데 이르렀다.
사아함이란 중.장. 증일 . 잡아함이요, 오아함은 파리불전중 오부경에 해당되는데 곧 장. 중. 상응. 증일. 및 잡류의 오경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장부경주서에는 제일 결집 후 장부경은 아란, 중부경은 사리불, 상응부는 대가섭, 증상부는 아나율의 계통에 의해서 자각 전승하였다고 한다.
이 아함경은 소승경의 총칭으로서 남전 북전이 있다. 북방불교에 전하는 것은 사아함의에 잡장이 있으나 따로 세우지 않았고 남방불교인 파리어대장경에는 장아함 중아함 상응아함 증일아함 잡류아함의 오아함으로 되어있다.사아함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장아함… 22권4품30경(법장부소속)…후진불타야사축불념공역 (AD412~413)…고려17 [2] 중아함…60권5송222경 (유부소속)…동진구담승가제바역…(AD397~398)…고려17~18 [3] 잡아함…50권약1500경(유부계소속 )…송구방발타나역 (AD435~ 443)…고려18 [4 ] 증일아함…51권약500경 ( 1법급지 11법)…대중부소속 ( AD397)…고려18
위에 명시한 바와 같이 이 사아함은 그 하나하나가 본래 별개의 부파에 속했던 것이라 한다. 즉 장아함은 법장부에 중아함과 잡아함은 유부에 증일아함은 대중부에 각각 속했던 경전인데 이들이 한역되어 사아함을 이루게 된것이다. 사아함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장아함은 말이 긴 장문경이요 중아함은 길이가 적은 중간되는 법문을 수집한 것이요 증일아함은 설법내용을 법수에 따라 일법으로부터 십일법에 이르기까지 일이삼사등 숫자로 된 법문을 수집한 것이요, 잡아함이란 것은 짤막짤막한 법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대승불교는 흔히 서기전 1세기경에 흥기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검토해 볼수록 그 사상과 이론이 아함경의 내용과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승의 이론적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함이라면 아함을 완성하고 있는 것은 대승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승불교가 이와 같이 아함의 사상과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것 이라면 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아함에서부터 이론적 기초를 닦아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아함은 불법의 보고라 할 만치 무한한 법보를 합장하고 있다. 그러기에 아함을 거치지 않고서는 대승의 진정한 뜻을 이해 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얼마 전 총무원 주최로 승가학원 강사 회의 시 교재개편이 토의 되었을 때 지금까지 강원교과목에서 제외되었던 아함경을 교재에 넣어야 된다는데 뜻을 모았던 일이 있다. 이 사실만은 교재개선이 성립되는 대로 빠른 시일 내에 시행되어 강원교육에 만전을 기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난존자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기억하여 구술한 것으로부터 전승된 이 아함경은 근본불교의 성전으로서 불타의 교법을 당초의 모습 그대로 전할 뿐만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나타낸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타의 인품과 사상 그리고 불타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다른 경전보다도 아함경을 읽어야할 것이다.
아함경이 불교의 근본성전으로서의 이유는 그 성립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불타가 열반하신 직후 멀리 떨어져있는 비구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자 비구들은 낙담하고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이 때에 한 늙은 비구는, [벗들이여! 결코 비탄할 일이 아니다. 우리들은 이제 그 대사문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지 않았는가.! 그 대사문은 참으로 귀찮은 존재였다. 그는 늘 [ 이것은 그대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또는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제 대사문은 가셨고 우리는 이제부터 바라는 바를 하고 바라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라고 외람된 폭언을 하였다. 그곳에 모였던 비구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그들의 가슴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타가 돌아가신 3개월 후 마갈타의 서울인 왕사성에 모여 스승이 설하신 경전과 계율을 결집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아함경의 원경인 것이다. 아함경은 상술한 바와 같이 장아함,중아함, 증일아함,잡장아함의 오부로 분류되어 있는데 보통 잡장을 제외하고 사아함이라 한다.
불타의 설법하는 방법이 근기에 따라 그가 갖는 문제에 적응하도록 자유롭게 설했다 하여 대기설법 또는 수의 설법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불타는 중생들의 개성에 충분한 배려를 하고 그에 알맞는 법문을 설하셨던 것이다. 중생들의 근기는 산에 무수한 크고 작은 나무와 풀이 자라듯이 가지가지 양상과 지적 수준이 다르므로 그에 알맞는 법문을 하다보니 일파자동 만파수로 8만4천 법문이 전개된 것이다. 아함의 무진한 법문이 결국 수기설법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함에 설해있는 그 많은 법문을 여기에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으므로 그 중에서 간단하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세존은 그들 석가족을 위하여 밤이 깊도록 설법하였다.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고 격려하여 기쁘게 하신 다음 아란존자에게 말씀하셨다.
[ 아난아, 나를 대신하여 가비라성의 석가족을 위하고, 현명한 구도자가 있으면 다시 설하여 주어라. 나는 몸이 아파서 쉬어야겠다.] 아란존자는 대답을 하고 곧 세존께서 누어 쉬실 수 있도록 자리를 펴드렸다 {중부경에서}우리는 여기에서 나이 많고 어질며 현명하고 인정이 넘치는 한 노인을 상상하게 된다. 인간의 모습 그대로 그는 조금도 과장하거나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행세를 나투지 않았다.
[ 나는 등이 아프다 ]하는 그 말은 불타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친밀감과 함께 인간의 고향을 느끼게 하며 우리를 감동시킨다. 아함경은 이와 같이 불타의 인간성을 나타내면서 인간의 현실 속에서 삶의 지혜와 자비를 얻고 행하게 한 것이다 . 다시 말하면 불타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스승으로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설하고 때와 장소와 문제에 따라 설하였다. 불법이 몸에 붙고 생활속에 불타의 가르침이 실현될 때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1. 원시경전의 내용과 설법상
아함경은 부처님이 45년 동안 설법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부처님의 설법하신 뜻대로 이해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불충분하게 또는 저속한 의미로 받아들이든지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것이 있을 지도 모른다. 또 부처님의 직제자들은 부처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했다 하더라도 그 후 수 백년 동안 구송전승(口誦傳承)되거나 다른 언어로 바뀌는 동안에 의식적 무의식적 변괴가 있을 런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아함경 설법 그대로가 불설이라고 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함경에는 부처님의 설법의 모습이 다분히 남아 있다. 또한 대승불교의 원천이 된 것도 포함하고 있다. 아함경을 소승설이라고 본 것은 잘못이다. 원래 부처님 설법 당시의 민중에게 이해되도록 전문용어를 쓰지 않고 평이하게 말씀한 것이고 높은 가르침도 민중이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물질의 요소로서 4원소를 말씀한 것도 그것이다. 또한 안근(眼根) 등 오근(五根)에 대하여도 일반이 이해될 수 있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감각기관을 말한 것이다. 또한 오온(五蘊)이라는 말의 개념은 우리의 심신의 구성요소를 색 수 상 행 식 (色受想行識)으로 본 것이다. 색은 육체(물질)이고, 수는 감수 작용, 상은 개념표상작용, 행은 수상식이 아닌 마음작용, 식은 인식 판단작용이다. 이렇듯 불교 독자의 오온도 상식적으로 분류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삼계(三界)나 악취(惡趣)를 객관적 존재로 설명하게 된 것은 삼세 인과업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된 부파불교 이후의 것으로서 아함경에는 보이지 않는다. 12연기(十二緣起) 등 연기설에서도 후세에 말하는 삼세양중(三世兩重)의 인과로서의 12연기설은 원시경전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그 싹<萌芽> 같은 것을 비유로 말했을 뿐이다.
또한 열반이라든가 무위(無爲)라는 말도 부파불교에서 말하는 불생 불멸의 객관적 존재가 아니고 불교의 이상에 도달한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를 의미했다.
2. 원시불교의 무아(無我)
오온 연기라는 말이 불교 독자의 용어이듯, 무아도 불교 독자의 용어다. 아함경에서 무아라는 말은 어떤 뜻으로 쓰였을까? 외교(外敎)에서는 대개 자아(自我)의 주체로서 상주불멸의 실체인 아(我: 아트만)를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아를 근본 입장으로 한다. 무아는 「아가 없다」「아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아라는 실체가 존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본체로서의 능력을 인식하거나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식하고 증명할 수 없는 실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부처님은 오온의 무아에 대하여 5비구에 대한 최초 설법으로 전법륜경(轉法輪經)을 설하신 다음에 무아상경(無我相經)을 설하셨다. 그런데 이 무아상경에 있는 아(我)나 무아의 의미가 부파에 따라 다르게 전해졌다. 제 1의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있는데 그 어느 것이 부처님의 진의인가는 오늘날 입증할 수 없다. 제1의적인 무아설은 용수(龍樹)의 중론(中論)에서 말한 대승의 무아<空>설과 일치한 것이고 통속설은 당시의 민중의 속설인 듯 하다.
먼저 제1의적 무아설은 한역 잡아함에만 보인다. 오온 무아의 경문을 다음에 소개한다.
『색(色)은 유아(有我)가 아니다. 만약 색이 유아라면 색에 병고가 나지 않는다. 또한 색에서 무엇을 어떻게 되게 하고 또는 되지 않게 하고자 하여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색은 무아이므로 색에 병이 있고 고가 생긴다. 또 색에 있어 어떻게 되게 하고 또는 어떻게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할 수 있다. 수상행식도 그와 같다.』
여기서는 색(육체)이 상주불변의 본체로서의 我라면 색에 병고가 날 리 없고 색을 이리저리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색이 무아이고 고정성이 없으므로 색에 병고도 생기고 이리저리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통속의 무아설에서는 무아상경<팔리문>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색은 무아다. 만약 색이 아라면 색에 병고가 있을 리 없다. 또한 색을 이렇게 되라 이렇게 되지 말라고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이 무아이므로 색에 병고가 생기기도 하고 색을 이리 되라 저리 되지 말라고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
여기에서 이를 세속적 최고신 · 만능의 자재자의 뜻으로 잡아서 만약 색이 자재자라면 색에 병고가 있을 리 없고 색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색이 무아이고 자재자가 아니므로 색에 병이 있고 색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이 통속적 입장에서는 아나 무아의 의미가 바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
현존하는 아함경이나 불전 등에는 대개 통속적인 무아설을 채용하고 있고 다만 한역 잡아함의 무아상경만이 본래 무아설을 취하고 있다. 여러 부파가 전하고 있는 무아상경이 대개 통속적 무아설을 채용하고 있는데 아마 처음부터 잘못 이해되고 있든지 불멸 후에 통속적 설명이 되었든지 그 어느 하나일 것이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의 반야경 공(空)설 <무아설> 이라든가 중론에 공설<무아>에서는 제1의적 무아설을 바르게 설하고 있다.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설이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같은 부처님 설법도 듣는 자의 지혜 근기 우열에 따라 깊게도 옅게도 이해된다. 예를 들면 난타가교계경(難陀伽敎誡經)을 보면 난타가 비구가 오백인의 비구니를 위하여 오온 12처(十二處)의 무아에 대하여 설명하였지만 비구니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은 난타가에게 명하여 그 다음날도 같은 설법을 반복시켰다. 그 결과 무아의 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최후의 비구니까지도 초보의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었다.
3. 아함경의 제1의설과 세속설
부처님의 설법은 상대의 근기에 따라 적당한 가르침을 설하고 최후에는 모든 사람을 최고 이상까지 인도하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그리고 지도 방법으로는 일승도(一乘道)로서 설한 것과 차제설법(次第說法)으로 설한 것이 있다. 일승도라 하는 것은 상대가 범부시절부터 성자까지 다시 최고의 깨달음에 이르도록 똑같은 수행방법을 실천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계정혜 삼학은 범부 때부터 수행시킨다. 처음에는 삼학 수행이 철저하지 못하지만 차차 수행이 깊어지면 삼학도 무루(無漏) 성자가 되고 최고의 깨달음에 따라 완전한 삼학이 된다. 또한 사제관(四諦觀)이나 오온관도 범부시대부터 최고 성위까지 수행한다. 처음에는 피상적인 것이지만 마침내는 최1의를 취득한다. 이처럼 일승도 수행에서는 같은 수행법을 닦지만 수행에 따라 그 내용이 심화해 가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차제설법의 교화수단으로 상대방의 근기나 이해력을 따라 다른 설법을 하셨다. 오늘날의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교육이 단계적으로 교과목이 다른 거와 같다.
여기에 특례를 하나 들어보자. 부처님이 난타를 교화하신 이야기다. 부처님이 성도 후 처음 고향을 방문하였을 때 첫날은 정반왕을 만났고 둘째 날은 난타가 석가국 세자가 되어 그 나라 첫째 미인인 손다리와 결혼하게 되어 있었다. 부처님은 그날 탁발차 난타의 집 앞에 섰다. 난타는 부처님의 발우를 받아 음식을 담아서 나와 보니 부처님이 안 계셨다. 난타는 부처님의 뒤를 쫓아 마침내 교외에 이르고 거기서 억지로 삭발 출가하게 된다. 억지로 출가한 난타는 그리운 손다리를 잊지 못해 수행은커녕 답답한 나날을 보낸다. 부처님은 신통력으로 난타와 외출하여 도중에 산불을 만나 불에 데인 암 원숭이를 보게 된다. 부처님은 다시 난타를 데리고 도리천궁으로 가서 5백인의 천녀들이 노는 것을 본다. 부처님은 난타에게 물었다. “이 천녀들과 손다리와는 어느 쪽이 미인인가?” “그것은 비교도 안 됩니다. 그것은 손다리와 좀 전에 본 원숭이와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이때부터 난타는 천녀에 마음이 끌려 손다리를 잊게 된다. 부처님은 출가수행에 힘쓰면 천국에 난다고 말하니 난타는 천녀를 얻을 욕심으로 열심히 수행한다. 그때의 비구들은 난타가 천녀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은 품팔이 일꾼이 품값 때문에 일하는 거와 같다고 하여 난타의 불순한 수행을 비난하고 멸시했다. 이를 들은 난타는 부끄러워하고 마침내 순수한 무소득의 불도 수행에 힘써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여기 난타에 대한 부처님의 교화방법은 먼저 재가의 욕락의 생활을 떠나게 하고 출가 후에는 욕심을 끊게 하고서 불탄 암 원숭이나 천녀를 보이고 또한 천상에 날 것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잘못을 알게 하여 최후에 진실한 불도수행으로 인도하여 깨달음을 얻게 한 것은 차제 설법적 교화법이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재가신자에게는 낮은 가르침을 설하고 출가자에게는 높은 가르침을 설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파사익 왕에게 하신 설법은 대개 세속적 저급의 법이다. 이에 반하여 빈바사라왕에게는 일회의 설법으로 성위에 들게 하였다.
또한 부처님은 상대방의 성격에 따라 지도하였다. 이론이 뛰어난 자에게는 사제나 연기의 도리를 말했고 이론보다도 정서가 풍부한 자에게는 신앙 실천을 지도하였다. 선정 수행의 경우에도 그랬다. 탐욕이 많은 자는 부정관(不淨觀)을, 진에가 많은 자는 자비관(慈悲觀)을, 우치자에게는 연기관(緣起觀)을, 망상이 많은 자는 수식관(數息觀)을, 아집이 센 자는 신체의 부분적 요소를 관찰시켜 아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감하여 깨닫게 하는 계차별관(界差別觀)을 닦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