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역사와 고승들
1.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공식 기록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입니다.
이후 불교는 백제, 신라로 차례차례 전래되면서 한국인의 마음에 인간이 갖추어야 할 소중한 이상을 심어왔으며 그 이상에 버금가는 찬란한 정신과 문화를 꽃피워 왔습니다.
신라는 삼국 중에 가장 늦은 법흥왕 14년(537)에 이차돈 성사의 순교로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원광, 자장, 원효, 의상, 도의, 도선과같은 훌륭한 스님들이 배출되어 신라 땅을 불연 깊은 부처님의 대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원광 스님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화랑도들이 미륵의 후예로서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자장 스님은 “내 비록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백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수행자로의 단호한 의지를 천명한 청정 율사였습니다.
스님은 중국에서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져다 통도사를 비롯한 5대 적멸보궁에 모셨습니다.
사리란 수행의 결정체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사리를 모셨다는 것은 스님들에게 부처님의 수행 정신을 보여주어 수행자의 갈 길을 제시한다는데 있었습니다.
황룡사 9층탑을 세우신 분도 이 자장 스님입니다.
불법으로 신라의 위용을 내외에 크게 떨치기 위해 세운 이 탑은 그 규모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 합니다.
의상 스님은 중국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귀국하여 낙산사에서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견한 이후 부석사와범어사 등 유명한 대찰을 창건하여 이 땅을 갖가지 꽃으로 아름답게 장엄하게 되는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게 됩니다.
사찰에서 법회 때 독송하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화엄의 철학적 원리를 짧은 게송으로 요약한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의상 스님의 대표 저작입니다.
원효 스님은 신라의 여러 고을과 산하를 돌아다니면서 걸림없는 대 자유의 노래인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며 서민들에게 불법을 선양했습니다.
나아가 스님은 여러 가지 경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저술했는데, 그 저술들은 후대 한국불교를 발전시키는 굳건한 토양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서로간의 다툼을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가르침을 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와 일본불교와는 달리 종파적 경향이 덜하게 됩니다.
이를 회통불교(會通佛敎)라 하는데, 이것이 한국불교의 큰 특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훌륭한 스님들의 공헌뿐만 아니라 신라 역대 왕들은 모두 법명을 자기 이름으로 삼을 정도로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신라 통일 이후 신라의 문화는 더욱 번성하여 경덕왕 시절 세계적인 문화유산 중에 하나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창건되었으며, 성덕대왕 신종과 같은 수많은 불교 문화유산을 남기게 됩니다.
신라말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시조가 된 도의 국사가 출현한 이후 아홉 개의 산에 선문이 차례로 개창되어 우리나라에 선불교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구산 선문(九山禪門)이라 합니다.
2.고려시대의 불교 도선 국사의 풍수사상은 고려를 창시한 태조 왕건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왕건은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를 국시로 내걸고 고려를 다스려나갈 통치 이념을 세웠으며 그러한 정신은 고려의 모든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왔습니다.
고려 시대 내내 고승대덕들이 국가나 임금의 스승인 국사나 왕사로 모셔졌으며 국가적인 대규모의 법회도 많이 열어 부처님의 가피로 국가를 외침과 환난에서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고려의 유명한 스님들로서 균여, 의천, 보조, 일연, 보우, 무학스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균여 스님은 고려 화엄학의 대가로서 보현보살의 10대원을 향가로 노래한 ‘보현행원가(普賢行願歌)’를 지어 그것이 고려의 모든 국민들이 노래하는 국민가요이자 애창곡으로 자리잡도록 하여 자연스럽게 불교의 가르침을 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의천 스님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천태종을 창시하여 선교의 통합을 꾀하였으며 방대한 경전과 논서를 모아 고려속장경을 간행하였습니다.
고려 후기에 들어 무신의 난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선과 교의 대립으로 불교가 심한 침체에 빠졌을 때 나타나 고려불교에 새로운 힘을 부여한 유명한 스님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대한불교 조계종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보조국사 지눌입니다.
스님은 지금의 송광사인 수선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벌여 선과 교를 함께 닦아나가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또한 일연 스님은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가 된『삼국유사』를 저술하였습니다.
태고 보우 스님은 중국으로 건너가 석옥 청공 선사의 법을 입고 들어와 임제선풍을 크게 드날리니 보조 스님과 더불어 조계종의 중흥조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재로 현재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고려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인한 누란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팔만대장경 판각 불사를 통해 국민 정신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이 불사를 통해 고려인들은 일치 단결된 힘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으며 부처님의 가피력은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과 꿈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3.조선시대의 불교 조선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불교는 조선 500년 동안 혹심한 탄압 속에 신음하게 되며 스님들은 서울인 도성으로의 출입을 금지당했습니다.
비록 태조, 세종, 세조가 궁전 내의 법당인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신앙했고 세조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는 등 한글 경전을 간행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 것이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배불의 분위기는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불의 시기에도 조선불교의 명맥을 이어오고 발전시켜 온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함허, 보우, 휴정, 유정 스님 등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허응당 보우는 명종5년(1550)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의 등용문인 승과를 부활시켜 불교의 중흥을 꾀하였습니다.
이 승과를 통해 배출된 유명한 인물이 서산 스님과 사명 스님입니다.
두 스님은 의승군으로 활동하여 누란에 위기에 빠진 국가를 건져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특히 서산 스님은 꺼져가던 선맥을 살려내어 이를 계승시켜 한국 조계종풍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선을 최고의 수행으로 내세우면서도 염불 신앙과 경전 공부를 통한 성불의 가능성도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스님들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가해진 탄압은 매우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불교는 산 속으로 스며들고 스님들은 천민 대접을 받아 양반들의 시중을 드느라 동분서주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행 풍조 또한 점점 혼미를 거듭해 무질서해졌으며 참선하는 스님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혜성 같이 나타나 한국불교의 활발발한 선풍을 다시금 일으킨 거장이 경허(鏡虛) 스님입니다.
1879년 동학사에서 스님의 오도를 계기로 한국의 선풍은 다시금 힘찬 발돋음을 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전국적으로 선원이 여기저기서 생겨나 참선하는 스님들의 오도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졌으며 이러한 참선 가풍은 성철 스님을 비롯한 오늘날의 청정 수행스님들에게로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불교는 조선시대의 억불과 근현대의 불협화음 속에서 멍들었던 불심을 회복하고 미래 사회의 대안으로 힘차게 도약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