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 조선시대의 불교

한국불교 – 조선시대의 불교

조선시대의 불교 1. 조선 전기의 불교정책 종단의 통폐합과 승려 환속정책 조선 왕조는 개창 이래 불교에 대한 배척과 숭유를 명분으로 하였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주도하였던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을 통해 불교의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며 불교의 혁파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고려 말 이래의 배불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불교교리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불교계는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성리학에 입각하여 왕조를 개창한 상황에서 왕실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대한 규제는 태조대부터 시작되었지만 태조는 스스로 불교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일부의 불교계의 폐단을 제거하고 승려들에 대한 지나친 특권을 제한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성리학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였던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태종 5년(1405)에 처음으로 국가에서 정한 사원에만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고 나머지 사찰들을 혁파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 조치로 11개 종단, 242여 곳의 사찰만 남게 되었으며, 사찰당 20~200결(結)4)의 토지와 10~100여 명의 노비가 인정되었고, 그 이외에 불교계가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는 모두 몰수되고 말았다.

그 당시에 사원전(寺院田) 3~4만 결과 노비 8만 명 정도가 몰수되었다고 한다.

이에 앞서 폐사의 토지와 노비를 국가에 귀속하는 조치도 시행하였다.

불교계에 대한 정리는 이후 더욱 진행되어 태종 7년(1407)의 기록에는 11개 종단이 7개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아 있던 종단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總南宗), 시흥종(始興宗) 등이었다.

세종대 초기에는 억불책이 더욱 강화되었는데, 세종 6년(1424)에는 7개 종단을 다시 선ㆍ교의 양종(兩宗)으로 통합하였고 사찰의 수도 선ㆍ교 각각 18사찰씩 36곳만을 존속시켰다.

또한 기존에 국가에서 불교계를 관리하던 승록사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불교 자체의 기관으로서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였다.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는 각기 흥천사와 흥덕사에 설치되어 각 종단의 업무를 따로 관장하였다.

그리고 내불당을 폐지하고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제한하였다.

세조대에는 사원전을 확대하고 수조권을 보장하는 등 불교정책이 이전에 비해 완화되었으나 성종대에 들어 불교에 대한 억제정책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는 신진사림이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신진사림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자들은 당시 조선에 10,000여 곳의 사찰에서 100,000여 명의 승려들이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여 나라의 병폐가 된다고 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억압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성종 2년(1471)에 도성 안의 염불소를 없애고 세조가 불전의 간행을 위하여 설립한 간경도감을 폐지하였다.

또한 세조대에 편찬이 시작된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승려에 대하여 불리한 규정을 넣었는데, 이는 승려들의 신분과 역할을 법적으로 규정하여 불교를 공식화하고자 한 세조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성종 23년(1492)에는 도첩의 발급마저 중지시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환속시켜서 군역에 충당하였다.

도첩(度牒)이란 승려가 되는 것을 국가에서 허가하고 승려로서의 신분을 인정하는 일종의 승려 증명서로 이미 고려시대에도 시행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승려의 수를 줄여 국가에서 필요한 생산력 및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도첩의 발급에 여러 가지 조건을 붙였다.

태조대에는 도첩을 발급하는 대가로 막대한 액수의 포목을 도첩전으로 받았다.

그 결과 현실적으로 승려가 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도첩이 없는 비공식 승려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태종이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처벌하자 승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세종대부터는 도첩규제가 완화되어 국가의 토목공사에 승려들이 참여하는 대가로 도첩을 발급하는 한편 도첩이 없는 승려들에 대한 구제책을 시행하였다.

세조대에는 도첩을 발급받는 비용을 크게 줄여 주었다.

이로써 성종 초까지는 많은 도첩이 발급되어 승려의 수가 다시 급속히 늘어났고, 이에 대한 반발로서 다시 도첩제를 철폐한 것이다.

도첩제가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은 승려가 될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가 막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림의 집권과 폐불정책의 단행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승려들을 환속시켰으며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를 폐지시켰다.

이에 선교 양종은 광주 청계사로 옮겼지만 승과도 실시할 수 없었고 실질적으로는 해체된 것과 같았다.

연산군대의 폐불은 일정한 원칙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편의에 의한 즉흥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사림들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성리학에 입각한 완전한 폐불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연산군대의 승과 중지에 이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승과를 시행하지 않아 승과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중종 5년(1510)에는 다수의 사찰을 혁파하고 그 토지를 향교에 소속시켰다.

또한 중종 11년(1516)에는 『경국대전』에서 승려의 출가를 규정한 도승조(度僧條)를 삭제하였다.

이는 불교에 대한 공식적 폐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더 이상 승려로서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고,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는 완전히 몰수당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불교는 더 이상의 법적인 존재 근거를 잃고, 없어져야 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남아 있는 승려들에게는 도첩 대신 호패가 지급되었고 환속이 요구되었다.

결국에는 깊은 산중에 있는 작은 사찰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승려들이 근근히 수행하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2. 왕실의 후원과 불전의 간행 왕실의 불교 후원 태조는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고 불교정책에서도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개국 원년(1392)에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년)를 왕사로 삼았고, 3년에 천태종 승려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다.

무학대사는 나옹의 제자로서 조선 개국과 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태조는 법화경 3부를 금으로 사경하여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희생된 고려 왕씨의 명복을 빌었고, 성 안의 거리에서 승려가 경을 외우며 행차하는 경행(經行)을 허락했다.

또한 개경의 연복사를 중창하고 한양에 흥천사를 세우는 등 민심안정의 차원에서 불교를 잘 활용하였다.

그리고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기게 하는 등 대장경판 보존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내불당을 설치하고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을 존속시킨 것을 포함해서 재위 7년 동안 10여 회가 넘는 대장경의 간행과 수십 회에 이르는 대규모의 법회 개설 등은 불교에 대한 태조의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태종대에는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불사를 금지하였지만 수륙재 등의 왕실 관련 행사는 여전히 거행되었다.

태조의 사후 사십구재 및 법회를 행하고 재궁으로 개경사(開慶寺)를 세우거나 태조의 원찰인 흥덕사 창건을 돕는 등 특히 태조와 관련된 불사에는 태종 자신이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세종대에도 종단을 통합하고 승려의 수를 줄이는 불교 억제정책을 쓰고 있었지만, 왕실에서의 불교행사는 예전과 같이 거행하였다.

특히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세종은 불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흥천사의 사리각을 중수하는 등 각종 불사를 행하였고 혁파된 내불당을 다시 설치하였다.

세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호불(好佛)의 군주로서 몸소 경전을 필사하고 수많은 경전을 간행, 번역하게 하였고 원각사를 창건하는 불사도 벌였다.

이는 무력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의 개인적 고뇌나 취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양반 사대부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성리학과 달리 일반민중들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불교를 중시함으로써 양반 사대부들의 힘을 억제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세조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태조대부터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관행으로 정착된 왕실의 불교행사의 일부는 이후 억불정책이 심화된 성종대나 중종대에도 계속될 수 있었다.

세조의 불교정책은 수미(守眉)와 신미(信眉), 그리고 신미의 문하인 학조(學祖)와 학열(學悅) 등을 통해 추진되었다.

신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수온의 형으로 이미 세종대부터 왕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는 세조의 후원 아래 오대산 상원사 중창에 힘썼고 간경도감의 불전 간행과 불전 언해 사업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학조와 학열은 많은 왕실 관련 불사에 관여했는데, 이들이 관여한 왕실 원찰인 상원사와 낙산사는 산업경영과 재산증식으로 서민들에게 피해를 주어 비난받기도 했다.

이에 선종판사였던 신미는 승려들이 불사를 위해서 모금하는 것은 민간에 폐해를 끼치므로 금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불전 간행과 간경도감 억불정책의 추진으로 불교계가 크게 위축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왕실의 후원 아래 불교의 보급을 위해서 새로운 불서를 편찬하고 불전을 간행하는 노력도 있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직전인 세종 30년(1448)에 최초의 한글 불서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이 간행되었다.

이는 부처님의 일생을 담은 것인데, 이후 세조가 된 수양대군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종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출간되었고, 세조 5년(1459)에는 이 두 가지를 묶은 『월인석보(月印釋譜)』가 간행되었다.

세조 7년(1461)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다수의 불서를 간행하고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불경을 번역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일반에게 널리 읽히는 법화경, 금강경, 능엄경 등의 경전과 수심결, 몽산법어 등의 선서가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었고 승려들의 교육에 필요한 다수의 경전들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세조가 직접 구결언해를 하며 참여했고, 효령대군, 김수온, 신미 등의 왕실 종친과 승려 등이 함께 역경사업에 종사했다.

이는 한글 보급이라는 의의뿐만 아니라 불교의 대중화, 불교자료의 보존 및 계승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종대에 간경도감이 혁파된 이후에는 대비들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후원으로 금강경삼가해, 천수경, 오대진언, 육조단경 등이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었다.

조선 전기의 불교관련 저술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문헌들은 조선 전기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불교의례와 신앙 조선 전기에 행해졌던 불교의례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연등행사와 수륙재(水陸齋)이다.

고려 때 팔관회와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시행되었던 연등회는 고려 말 이후 음력 4월 8일의 석가탄신일 봉축행사의 일환으로 민간에서 널리 행해졌다.

수륙재는 음식을 뿌려 물과 땅에 퍼져 있는 혼령과 귀신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하는 법회로 왕실에서 주로 행해졌다.

죽은 국왕과 왕족의 명복을 빌거나 왕족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기 위해 베풀어졌으므로 약사법회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의례는 왕실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성행하였다.

사대부들이 적극적으로 권장한 유교의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사대부들 사이에서만 행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특히 상례와 장례 등은 여전히 불교적으로 거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전기에 불교는 여전히 민간에서 존중되고 있었는데, 왕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왕실의 일화 중에는 관음보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예컨대 세조가 상원사에 갔을 때 백의(白衣) 관세음보살이 현현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상황은 『관음현상기』에 전한다.

그 밖에 진언과 다라니집이 간행되는 등 밀교적인 신앙도 활발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왕실 중심으로 밀교의례가 거행되었지만 후기에는 민중신앙으로 확대되었다.

3. 불교의 부흥과 교단 정비 선교 양종의 재건과 의승군의 활동 폐불정책으로 인하여 산 속에 은둔했던 불교계는 명종대에 국왕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후원을 얻어 일시적으로 재건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명종 5년(1550)에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선종판사로 등용하면서 양종을 재건하게 하였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 우대정책은 성리학적인 사회의 건설을 추구했던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명종 20년(1565)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 동안 시행되었던 정책들이 대부분 다시 폐지되었고,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고문을 당하다 순교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승과를 통해 능력을 갖춘 승려들이 공식적으로 배출되었고 이들이 승직을 맡아 불교계를 직접 관장했던 것은 이후 불교가 부흥하는 기틀이 되었다.

조선 후기 불교계의 중심 인물이 된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4년)은 승과에 합격한 후 교종ㆍ선종판사를 겸직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고,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년)도 승과를 통해 중앙에 진출할 수 있었다.

문정왕후 사후에 위축되었던 불교계는 임진왜란의 시기에 의승군 활동을 벌이면서 새로운 존립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 갑사에 있던 영규(靈圭)는 800여 명의 의승군을 조직하여 조헌이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여 전쟁 발발 후 첫 승전을 거두었다.

이와 함께 의주에 몽진해 있던 선조는 묘향산에 있던 휴정을 불러 의승군을 조직할 것을 명하면서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미 73세이던 휴정은 이에 호응하여 전국적 규모의 의승군을 조직하였다.

의승군의 조직은 중앙의 도총섭을 중심으로 각 도별로 선런?양종의 총섭이 임명되어 각기 의승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들 의승군은 군량 운송 및 비축과 산성 축조 등 후방 지원 역할을 수행하였고 선조 호위 수행 및 평양성 탈환, 한양 수복 등의 전투에도 참여했다.

특히 유정은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하여 전후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처럼 임진왜란에서 승려들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나라에서도 인정하여 정조 12년(1788)에 대흥사 안에 표충사가 지정되었고 묘향산 수충사와 밀양 표충사에서도 휴정과 유정 등이 향사되었다.

정묘호란 때는 휴정과 유정의 법을 이은 명조(明照)가 팔도의승대장에 임명되었고 의승군이 안주에서 전공을 세웠다.

또한 부휴 선수(浮休善修)의 제자인 각성(覺性)은 팔도도총섭을 제수받아 남한산성 축조를 관장했다.

병자호란 때는 삼남지방의 3,000여 명의 승병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승군의 활동은 불교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러한 자신감은 문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문파의 성립과 법통설의 확립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이후 불교계에는 특정한 스승을 계승하는 문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룬 것은 서산 휴정을 계승하는 서산 문도들이었으며, 이들은 의승군 활동을 통해 불교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서산 문도 내부에는 다시 여러 문파가 있었는데 그 중 사명 유정을 계승하는 사명파와 편양 언기를 계승하는 편양파가 대표적이었다.

사명파는 17세기 전반 서산 문도를 대표하였는데 사회적 활동에 주력한 결과인지 문도 양성에 실패하여 18세기에는 약화되었다.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년)는 휴정의 말년 제자로, 그를 계승한 편양파는 묘향산을 중심으로 한 휴정의 지역 기반 및 선풍을 계승하여 점차 서산 문도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법통설을 제기하여 불교계에서 서산의 입지를 확고히 함으로써 이후 서산 문도가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서산 문도와 함께 이 시기의 주요한 문파는 휴정과 동문인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년)의 제자들로 구성된 부휴 문도였다.

부휴 문도는 선풍이나 활동 내용에서는 서산 문도와 커다란 차별성을 띠지는 않았고, 다만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년) – 취미 수초(翠微守初, 1590~1668년) –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년)으로 이어지며 호남과 호서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독자적인 문파를 형성하였다.

문파가 형성되고 서산 문도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법통설이 제기되었다.

휴정은 본래 자신이 지엄(智嚴)에서 영관(靈觀)으로 이어지는 법계를 이었으며, 지엄은 육조 혜능의 적손 대혜 종고와 임제의 적손인 고봉 원묘의 선풍을 계승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휴정 입적 후 문도들이 의뢰하여 허균이 지은 휴정의 행장에는 선종의 흐름으로 고려의 법안종이나 지눌을 강조하고 고려 말 나옹 혜근의 법을 휴정이 잇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인조대(1623~1649년) 초부터 서산 문도들의 협의에 의해 태고 보우를 내세우는 새로운 법통설이 새로 제기되었다.

태고 법통설은 고려 말의 태고 보우를 내세워 중국 임제종의 법맥이 보우를 통해 휴정에게 연결되었다는 내용으로 인조 8년(1630)에 이식이 찬술한 『휴정문집』의 서문을 시작으로 장유, 이정구 등 당대의 문사들이 지은 서산의 비문에 기록되면서 그 권위가 확립되었다.

부휴 문도에서도 서산 문도와 함께 보우의 위상을 인정하여 보우 법통설은 불교계의 정통설로서 확립되었다.

문파가 형성되고 법계가 중시된 것과 함께 불교의례서도 편찬되었다.

17세기 중반 부휴문도의 각성과 사명파의 명조는 각기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와 『승가예의문(僧伽禮儀文)』 등을 편찬하였다.

이 문헌들은 승려의 상례와 제례에 관한 의례문으로서 불교의 기존 청규(淸規)들을 토대로 하여 당시 일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성리학의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내용을 참작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당시 사회의 실정에 맞는 승가의 상례를 정리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사찰의 중수와 경제 기반 양란 이후 의승군 활동을 통해 불교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찰의 중창불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7세기 중반 이래 18세기까지 사찰의 중창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큰 사찰들은 이 때 그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중심 전각의 복원이 이루어졌고, 숙종대와 영ㆍ정조대를 거치면서 2차 중창 사업이 벌어졌다.

법당의 재건과 함께 불상 및 불화조성도 크게 증가하였고 야외 법회에 사용되는 대규모 괘불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불사에는 왕실 등 유력자의 후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왕실은 불교를 보호하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사찰에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취해졌고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왕실 여성들의 시주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를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세자의 탄생에 대한 감사로 석왕사에 비문을 내리고 토지를 기부하는 등 불교에 개인적 관심을 가졌다.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지방 관료이나 양반들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찰들은 왕실과 유력 가문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원찰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러한 연결을 금지시키기 위하여 사찰에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왕실이나 유력 가문의 후원을 얻지 못한 일반 사찰들은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이들은 부과된 공납을 마련하고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 종이나 미투리를 만들고 농업에도 종사했다.

특히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승려들의 계(契) 조직은 사찰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에 승려들은 개인 전답 등 사유 재산을 소유하였고, 보사청(補寺廳)을 설치하여 사찰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승려들은 공물생산과 채광, 각종 공예생산에 품팔이를 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수취체제가 문란해지면서 사찰에 대한 공납과 과세도 과도하게 요구되어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승려들은 군역과 산성 축조뿐 아니라 산릉이나 제언 축조에도 부역군으로 동원되었다.

이처럼 과도한 승역(僧役)은 사찰 몰락의 주요한 원인으로 대두되었고, 나라에서도 부역을 경감시켜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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