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다스리는 명상법
-법상스님-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인연따라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인연이 다하고 나면 화가 사라지기도 하며, 또 상황 따라 어떤 때는 불같은 욕심이 치솟기도 하고 질투심, 고민, 집착, 증오, 사랑 등 수많은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기야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이런 감정적 기복의 연장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마음은 혼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 저홀로 일어나는 법은 없다.
그럴만한 인연, 상황이 생겨야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평소 가깝던 친구가 별일 아닌 것으로 갑자기 욕을 한다면 그런 상황에 따라 마음에서는 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같이 욕도 하고, 때로는 주먹질까지 하게도 된다.
그렇게 같이 붙잡고 화를 내고 싸우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 때부터 그 친구와의 관계는 불편해지고, 괴롭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친구가 그 때는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사과를 요청하게 되면 또 다시 마음은 금새 풀어진다.
이처럼 인연따라 우리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화가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도저히 억누르기 어려울 만큼 큰 화가 생기기도 하고, 삶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계로 끝간데 없이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런 인연이 우리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경계가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 삶도 끊임없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경계에 휘둘려 마음이 괴로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명상이라는 것, 수행이라는 것도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친구가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욕을 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해 보자.
혹은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 하며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조금 예민하게 그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살펴보자.
친구가 욕을 하는 순간,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하며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순간, 그 마음을 조금 깊이 있게 지켜보자.
그 순간 욕을 얻어 먹는 순간은 어떤가.
그 순간에 내가 있는가? 그 순간에 욕을 얻어 먹는 내가 있는가? 조금 깊이 지켜보라.
욕을 얻어 먹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없다.
오직 그 순간에는 ‘화’만 존재한다.
아주 맹목적이고, 본능적으로 당장에 생각할 것도 없이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법이라는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인연이 생기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을 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성숙하고, 젊잖으며, 수행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대뜸 욕을 얻어먹고도 당장에 화가 올라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몽둥이로 한 대 얻어 맞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부분이 아픈 것하고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프다.
마찬가지로 욕을 얻어 먹으면 자연스럽게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때려서 아픈 것이나,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나는 것이나 그것은 이 세상의 이치, 인연법의 이치에 따른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걸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왜 이렇게 화를 잘 내지?’하고 괴로워 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접촉하는 순간에는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아니 ‘나’라는 관념이 생길 것도 없이 저절로 ‘화’라는 것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욕을 얻어 먹고도 화가 안 일어나거나, 때리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지,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그것은 자연의 변화라는 흐름에 따라 구름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연따라 수증기가 구름이 되었닥가 다시 비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숲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수확을 하며 열매를 맺었다가 단풍으로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가 남게 되는 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변화와 무엇이 다른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도 자연의 변화와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다음의 순간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욕을 얻어 먹는 순간 화가 났다면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것이 무엇인가.
전혀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에 시비를 건다.
즉, 그 순간에 아상을 개입시킨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화’만 있었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화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한다.
그저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화’를 자기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너 때문에 화가났다’ ‘너가 나를 화나게해?’ ‘너가 나에게 욕을 해’하고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그 ‘화’는 객관적이고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 ‘화’에 ‘내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감히 너가 나에게 욕을 해?’ ‘화 내는 것은 나쁜 것이니 화를 참아야 해’ ‘저 사람이 내게 화를 내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친구가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하고 있구나’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은 아주 미세하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이면에는 분명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제 그 ‘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화’는 ‘내 화’가 되어버렸다.
‘욕을 얻어 먹은 나’, ‘화를 내면 안 되는 나’, ‘무시당하는 나’ 그렇게 수많은 ‘나’가 생겨나게 된다.
이제 조금 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버렸다.
조금 전 상황, 즉 ‘나’가 개입되기 이전, 오직 ‘화’라는 것만이 있던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나’가 개입되면서 그것은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 화로 인해 괴롭고 답답하다.
만약 처음 ‘화’가 일어날 때 그 때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버려 두고 다만 바라보기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화는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스스로 타오를 만큼 타올랐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마치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구름이 일어났다가 저절로 구름이 짙어져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다.
우리 몸 또한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그저 내버려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듯이 스스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화’를 ‘내 것’으로 붙잡지 말라.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는 순간, 온갖 ‘내 생각’ ‘내 분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 것이다.
연이어 불같은 감정이 생겨나고, 불같은 말을 내뱉으며, 몸 또한 불같은 행동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욕을 얻어 먹으므로써 자연스럽게 화가 일어났다면 다만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 처럼, 그저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그냥 순수하게 지켜보기만 하라.
거기에 해석이나 판단, 분석, 생각, 아상을 개입시키지 말라.
상대방의 행동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갖다 붙이지 말고, 내 화에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이나, 분별, 구분을 가져오지 말라.
‘나’와 ‘화’를 구분하지 말라.
관찰자와 관찰되어지는 대상을 나누지 말라.
다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되라.
‘화’가 났다면 그저 ‘화’ 그것이 되는 것이다.
‘나’와 ‘화’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순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그 화는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 즉 ‘나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연따라 ‘화’가 났을 뿐이지 거기에 ‘나’는 없다.
그저 ‘화’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 화난 나는 없다.
내 스스로 ‘내가 화났다’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 없는 나를 실체적인 있는 나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나를 실체화하게 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커지고 만다.
화는 중립이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은 ‘화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 ‘화’는 없다.
괴로움도 중립이다.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것도 이름붙인 것에 불과하지 그것도 괴로운 상황일 뿐이다.
다만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 ‘괴로움’은 없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이지 ‘괴로운 나’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괴로운 나라는 것도, 화라는 것도, 화를 내는 나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실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해석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觀) 수행이라는 것이 무아(無我)에 이르는 근본불교의 수행이며, 아상(我相)을 타파하는 금강반야경의 수행이고, 연기 법칙을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다만 ‘화’가 일어난 그 연기적 인과성, 즉 연기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랬을 때 그 ‘화’에 ‘나’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나’와 ‘화’를 나누지 않으며, 자아라는 관념을 실체화하지 않고, ‘나’라는 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명상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