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것을 얻는 방법
-법상스님-
이 세상은 원만하게 충족되 있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욕심을 부리고, 축적하려 하고, 빼앗으려 하고 그렇게 욕망을 가지고 있다보니 이 세상은 지금 많이 부족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부족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맑은 공기도 부족하고,시원하고 맑은 물도 부족하고, 먹을 식량도 부족하고,자원도 고갈될 위기에 처해 있고…
본래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던 이 세상이 언제부터인가 인간들의 욕심 때문에 한없이 부족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이런 말을 했데요.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 [그곳에선 나 혼자만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책에서 호주의 참사람부족이 말하는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 봅시다.
‘참사람 부족은 식량이 떨어지는 법이 결코 없었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말하는 것에 우주는 언제나 응답을 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더없이 풍요로운 장소라고 믿고 있었다…
먼저 그들은 대자연을 향해 먹을 걸 요청했고, 그것이 나타나리라는 기대를 조금도 버리지 않았으며, 그러면 언제나 그것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고 그것을 받았다.
그들의 감사 기도는 단 한 번도 형식적인 적이 없었다.’ 참사람 부족에게 있어 이 우주는 더없이 풍요로운 장소이고, 언제나 대자연을 향해 먹을 것을 요청하면 필요한 만큼의 먹을 것이 그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우주를 향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먹습니다.
이는 참사람 부족에게만 해당 되는 우주의 법칙이 아닙니다.
본래 우주는 한없이 풍요로운 곳이며 우리는 감사와 진심어린 마음만 일으키면 언제든지 우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필요한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법칙은 욕심과 욕망이 아닌 필요에 의한 맑은 삶이 전제되었을 때의 얘기입니다.
너도 나도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을 모두 충족시키며 살고자 하면 이 세상은 도무지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곳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먹을 것이 많이 있더라도 꼭 필요한 만큼만 먹으면 될 터인데 우리 인간들은 내 필요 이상의 것을 축적하려 한단 말입니다.
같은 책에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한 번은 바위 틈에서 물웅덩 이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원주민들은 내게 인간의 냄새로 그 지역을 오염시키지 않고 물웅덩이에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동물들을 놀래키지 않기 위해서 였다.
어쨌든 그 물은 동물들의 물이 기도 했다.
사람 못지 않게 동물들도 그 물을 마실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현재 갖고 있는 물의 양이 아무리 부족해도 발견한 물을 몽땅 떠가는 법이 없었다.
언제든지 조금은 남겨 두었다.’ 우리들 같았으면 물 한방울 나 지 않는 사막 오지에서 물웅덩이를 발견했다면 가만 두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실 만큼 물을 마셨으면 그 다음엔 저장하려고 하고 결국 그 물웅덩이를 바짝 마르게 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그 물웅 덩이를 다 퍼가지 않습니다.
그 물은 동물들의 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필요한 만큼 목을 축였으면 그 순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순간 또다시 물이 필요하다면 그들은 또다시 대자연 어머니인 대지를 향해 기도했을 것이고, 분명 필요한 만큼의 물을 얻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들은 그런 지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같은 책에서 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한 번은 음식이 필요했고 대자연은 참사람 부족인 들의 기도에 따라 낙타 네 마리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하였습니다.
참사람 부족은 걸음을 멈추었고, 여섯 명의 정찰대가 둘로 나뉘어 낙타에게 다가갔습니다.
사냥꾼들은 아무 말도 없이 다가가 동시에 늙은 암컷 한 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네 마리의 낙타는 수컷 한 마 리와 암컷 두 마리, 그리고 반쯤 자란 새끼 한 마리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다시말해 그 가족들 가운데 늙은 암 컷이 가장 약한 녀석이었음을 모든 사냥꾼이 동시에 알아 차릴 수 있었고 그 낙타가 오늘의 사냥꾼이었던 것입니다.
참사람 부족 사람들은 결코 다른 낙타들에 대해서는 잡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늘 필요한 음식은 한 마리면 충분했기 때문이고 바로 그 늙은 암컷이 대자연의 법칙에 따른 오늘의 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네 마리의 낙타가 있다고 필요치도 않은 낙타를 더 잡아서는 저장하고 축적하는 일 따위는 참사람 부족에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나머지 세 마리의 낙타는 암컷, 수컷, 그리고 새끼였기 때문에 아직은 그 식구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축적하고 저장하려는 인간의 욕망만 놓아버린다면 이 대자연 우주에서는 언제나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베풀어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이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한 진리인 것입니다.
본래 이 법계의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이지요.
마음에서 일으킨 맑은 한마음은 우주 법계에 그대로 전달 되게 마련이고 이 법계는 우리의 마음에 충분히 응해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고 이기적인 마음을 내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나가 필요하면 하나만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많이 있다고 하나가 필요한데 두 개 세 개에 욕심을 부린다면 그 하나 마저도 잃어 버리게 될 지 모릅니다.
음식도 그렇고, 입는 옷도, 돈도, 차도, 책도, 우리 주위에 있는 내 소유의 것들을 가만히 살펴봅니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꼭 필요하지도 않는 것들이 주섬 주섬 쌓여 있지는 않은지 하고 말입니다.
꼭 필요한 것들이 필요한 만큼 필요한 곳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한층 맑고 소박해 질 것입니다.
살뜰한 행복감도 많이 소유하는데서 오기 보다는 꼭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가지는 데서 오는 것일 겁니다.
법정스님의 책 ‘산에는 꽃이 피네’에 보면 산승의 청청하고 소박한 삶을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동경대학에 유학중인 스님이 문구점에 가서 내가 좋아한다고 촉이 가는 만년필을 하나 사준 적이 있다.
나는 아주 고맙게 여기고 그걸로 글을 많이 썼다.
그런데 파리에 갔더니 그곳에 똑같은 만년필이 잔뜩있었다.
그래서 촉이 가는 만년필을 하 나 더 사왔다.
그랬더니 그날부터 내가 처음 가졌던 그 필기구에 대한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졌다.
나는 결국 나중에 산 것을 아는 스님에게 줘 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처음의 그 소중 한 감정이 회복되는 것이었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그 하나만을 가져야 한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그 하나만을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